이드 2부 – 475화


911화

능글능글.

이드는 마치 악덕 사채업자처럼 웃었다. 보물로 사라. 스스로 해 놓고도 제법 괜찮다 싶다.

반대로 그 말을 마주한 탑주는 침묵했다.

무슨 헛소리냐며 화를 내지도, 모욕을 당했다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한 눈빛으로 이드를 바라본다.

“나와 마탑에 원하는 것이 있소?”

천천히,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탑주가 말했다.

처음엔 대가가 적다는 말인가 했다. 그러나 수십 년간 마탑을 이끌어 온 연륜이 그 속에 담긴 뜻을 잡아냈다. 보물로 보물을 바꿔 가라니.

마탑에 보물이 있는지 없는지는 둘째 치고, 그런 말은 원하는 것이 있지 않고서는 나오지 않을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이드의 미소가 한층 깊어졌다.

“있다면 줄 생각은 있소?”

반말로 일관하던 이드의 말투가 바뀌었다. 이제야 진짜 거래의 시작이라는 듯 말이다.

“그 대가가 정당한 것이라면 주지 못할 리 있겠소.”

탑주도 그 의미를 알고는 단서를 달았다. 바이트 타블렛을 돌려주는 대가로 초인 마법을 달라고 해서는 곤란하니까.

하지만 그야말로 쓸데없는 노파심이다.

라미아라면 몰라도 초인 마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욕심이 없는 이드다. 우연히 초인기를 가지게 된 만큼, 그 근본에 대한 탐구심을 있어도 그 이상은 없다.

당장 현재 가진 무공과 마법, 그리고 정령술만 해도 그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이오. 정직한 거래는 나야말로 원하는 바. 내가 요구할 것은 몇 가지 단순한 정보일 뿐이니 말이오.”

“과연 마탑에 그대가 원하는 정보가 있을지 모르겠소만. 그래, 어떤 정보를 원하시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의 탑주.

하지만 이드는 그가 이미 머릿속으로 자신이 질문할 것에 대한 리스트를 뽑아 올리고 있으리라 확신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 탑주가 머리에 떠올린 것이 맞을 거요. 검후, 바이트 타블렛에 대한 대가로 나는 우선 검후에 대한 정보를 원하오.”

“검후에 대한 것이라면.. 곁에 있는 은색 기사단장에게 물어보는 것이 빠르지 않겠소?”

조건 반사 수준의 부정이라고 할까? 아니면, 티끌만큼 남아 있는 협력자에 대한 의리?

무엇이 되었건 탑주의 말이 바뀌는 데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모른다면…… 우리 거래는 여기서 끝이오. 다시는 보지 말도록 합시다.”

이드가 정말 일어나려는 듯 팔걸이를 잡을 때였다.

“어떤!”

“음?”

“검후에 대한 어떤 정보를 원하시오?”

“당연히 ‘마탑만’ 가지고 있는 정보요. 세상이 다 아는 것은 필요 없고. 검후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사라지는 그 순간 마탑과 삼검왕은 무얼 하고 있었는지, 또 현재 검후는 어디에 있는지. 난 마탑에 이에 대한 정보가 있다고 확신하오. 없다면 이야기는 여기까지가 하리다.”

말끝마다 거래를 끊겠다고 위협하는 이드다.

상대 입장에서는 복장이 뒤집어지는 극단적인 대화의 기술.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는 절대 사용하지 말아야 할 방법이지만, 마탑과 좋은 관계를 이어 갈 이유가 하나도 없는 이드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을의 위치에 있는 탑주를 압박하기에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

그리고 어차피 여기에 대한 답은 어떤 정보를 원하느냐고 탑주가 묻는 순간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명예 후작이 원하는 정보는 그뿐이오? 그것이면 바이트 타블렛과 거래가 가능한 거요?”

돌다리를 두드리듯 확인하는 탑주에 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하하. 설마. 당연히 더 있소. 혹시 탑주는 바이트 타블렛의 가치가 고작 그 정도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오? 정말로? 아, 혹시 모르겠소. 현재 당신들이 검후를 보호하고 있다면 말이오.”

즉, 검후와 바이트 타블렛을 교환해 주겠다는 말이다.

당연히 검후를 데리고 있지 않은 마탑에서는 의미 없는 말일 뿐이다. 데리고 있었다면 교환을 시도해도 벌써 수백 번을 시도했을 것이다.

바이트 타블렛의 가치도 그렇다.

초인 마법과 바이트 타블렛은 탑주의 자존심이요, 긍지였다. 그 가치를 깎고, 격하시킨다는 것은 탑주의 자존심을 진창에 처박는 것과 같았다. 모든 인생을 초인 마법에 비친 탑주로서는 농담으로라도 인정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끙, 다른 요구 사항도 들어 봅시다.”

이드는 항복 선언과도 같은 말에 양손으로 턱을 받쳤다. 검후도 물론 중요하지만, 진짜는 지금부터니까.

“내가 쉴라 단장과 함께 생명의 관에 침입했을 때였소.”

“음?”

당연히 질문이 나올 줄 알았던 탑주는 갑자기 나온 과거 이야기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드는 그에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탑주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생명의 관에 침입한 것은 앞서 실종되어 연락이 끊어진 은색 기사단의 기사를 찾기 위해서였소. 그 과정에서 큰 싸움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싸움의 끝에서 실종된 기사를 찾을 수 있었소. 다행이었지. 부상은 입었지만 살아 있었으니 말이오.”

“대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오?”

모두 아는 내용인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 세운 생명의 관이 무너진 일에 대한 말이 나오자 참지 못한 탑주가 물었다.

“지금 말하려던 참이오. 우리는 기사를 구하고, 그녀를 해한 자를 궁금해 했소. 당연히 마탑에서 그리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이오. 그래서 흔적을 찾고, 기사의 말을 들어 보니 웬걸? 생각도 못 했던 이상한 존재가 나오는 것이 아니겠소?”

“여기, 이자예요.”

이드의 말이 끝나는 순간 라미아가 탁자 위에 메르시오의 영상을 만들어 냈다.

터럭 한 가닥, 한 가닥이 살아 있는 생생한 모습이 당장이라도 오만하게 앞으로 걸어 나올 것만 같았다.

푸욱.

탑주가 그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순간. 이드의 손가락이 메르시오의 가슴을 뚫고 나왔다.

“어떻소, 누구인지 알아보겠소?”

“이자는 왜 찾는 것이오? 그리고 어째서 나에게 묻소?”

“은색 기사단의 기사를 해하였으니. 당연히 복수를 해야지 않겠소? 그리고 생명의 관에서 일어난 일을 탑주에게 묻지, 누구에게 물으란 말이오?”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며 이드가 말했다.

술이 궁금하면 술집 주인에게 묻고, 그릇이 궁금하면 그릇 상인에게 물어야지 누구에게 묻는단 말인가.

당연해도 너무 당연한 말에 탑주는 순간 자신이 바보가 된 것 같아 자괴감이 들었다. 이렇게 정신이 없는 건 아마도 두 사람과의 만남을 위해 준비했던 일들이 계속 빗나가서일 것이다.

“혹시라도 모른다 말하지 않길 바라오. 바이트 타블렛의 거래에 검후와 이자에 대한 정보는 필수니까. 대체 불가란 말이오.”

정보가 없으면, 바이트 타블렛도 없다. 이드는 못을 박았다.

“으음…….”

그에 모른다 말하려던 탑주가 낮은 침음을 흘렸다. 동시에 영상 속 메르시오와 이드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단순히 기사에 대한 원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바보처럼 대놓고 물어보지 않았다. 어차피 들을 수 없는 대답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명예 후작의 요구 사항은 잘 들었소. 검후에 대한 정보는 제공할 의향이 있소. 그러나 영상 속 웨어울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소.”

“너무 단정하는 것 아니오? 당장 정신의 관 주변에 널린 게 웨어울프 형태의 마수였는데 말이오.”

“보면 알겠지만, 이 웨어울프와 마수는 전혀 다른 존재요. 변형 초인기로도 웨어울프라는 종으로 완전히 변하지는 못하오.”

강력한 초인기가 많지만, 완전히 다른 종으로 변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아무리 대단한 초인기라도 드래곤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면 그 존재가 생명의 관에 있었던 것은 어떻게 설명하겠소? 설마 생명의 관이 그렇게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소?”

뿌득,

‘치욕스럽구나, 랜달 이놈은 도대체 생명의 관을 어떻게 운영한 것이기에!’

도발 아닌 도발에 탑주가 이를 악물었다.

이드의 말이 틀린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 말처럼 생명의 관이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던가? 이드의 공격에 무너지기는 했지만, 그 전에 이미 생명의 관의 존재를 알고 침입한 자가 있었고, 생명의 관에서는 그걸 알기는커녕 침입한 기사가 그에게 공격당하는데도 몰랐다?

그건 그것대로 망신이다.

그가 생명의 관을 직접 운영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이 문제는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었다.

탑주는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자신에게 이런 치욕스러운 순간을 안겨 준 랜달을 찾아서 당장 그 머리통을 부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상상으로 그치고, 참아야 할 일이다. 우선 랜달에게 저 웨어울프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먼저다.

‘명예 후작도 문제지만, 저 웨어울프도 문제다.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이고, 생명의 관에서는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또 명예 후작과는 무슨 관계고?’

질문이 아니라, 골치 아픈 과제를 받은 느낌의 탑주다. 하지만 지금은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물론 그렇지 않소. 하나, 본인이 알지 못하는 사항도 있을 수 있으니, 이 문제는 따로 알아본 후 답해야겠소.”

따로 알아본다니. 아마도 탑주인 그를 대신해서 생명의 관을 운영하고 있던 랜달을 닦달할 모양이다. 탑주가 적극 나서 준다면 이쪽으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드다.

메르시오에 대한 정보만 가져온다면,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었다.

“좋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면야. 얼마든지 기다리지. 그런 의미에서 검후에 대한 정보를 먼저 제공해 주겠소?”

“두 정보는 한꺼번에 넘기겠소.”

탑주의 거부에 이드는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역시 쉽게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에단도 있고, 괜히 무리해서 닦달하지 않았다. 다만 경고를 더했다.

“혹여 거래로 쓸 정보가 오염되지 않기를 바라오.”

혹시라도 검후에 대한 정보를 원했다는 것과 정보를 제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대응하거나, 검후를 옮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이다. 바이트 타블렛을 애지중지하는 것을 보면 그러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물론이오. 그럼 남은 이야기는 정보에 대해 확인한 후 계속하도록 합시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 랜달을 추궁할 마음에 급히 일어나려는 탑주.

하지만 이드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어허. 뭐가 그리 급해서 서두르시오. 아직 남은 이야기가 있는데.”

“원하는 정보가 더 있소?”

“그렇지는 않지만, 계산은 확실히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오. 바이트 타블렛을 돌려주는 대가로 정보 두 가지는 너무 싼 것 같은데, 처음 탑주가 말했던 미스릴과 오리하르콘으로 모자란 부분을 채워 봅시다.”

순간 탑주의 얼굴에 짙은 피로감이 나타났다. 눈 밑에 없던 다크서클이 생겼을 정도.

탑주는 자신이 마탑을 세운 후 오늘처럼 철저히 을의 입장에 섰던 적이 있던가 싶어 서글퍼졌다. 계획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이드를 공격하고 싶은 충동이 샘솟는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충동적으로 행동하기엔 그가 확인한 두 사람의 실력이 절대 만만치 않았으며, 자칫 순간의 실수로 바이트 타블렛을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연 목소리에 짜증이 배어났다.

“후~ 그래서 어쩌자는 말이오?”

“하하. 내 일은 여기까지고, 나머지는 전문가와 상담하시오.”

이드가 물러난 자리로 라미아가 나섰다. 전문가의 등장이다.

“자, 그럼 바이트 타블렛과 요구한 정보의 가치에 대해 논해 보도록 할까요?”

“…….”

언제 준비했을까. 라미아가 알이 가는 안경을 꺼내 썼다.

탑주는 그 모습을 보고 진짜 고생은 지금부터 시작일 것 같은 두려운 예감에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