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76화
912화
“오신다!”
“명예 후작께서 돌아오신다!”
“방심하지 말고 계속 경계해!”
이드와 라미아가 입구를 향해 다가가자 방어진을 짠 상태에서도 뚫어져라 안쪽을 살피던 기사들이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너도나도 소리쳤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두 사람이 숲 너머로 사라지고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아 애를 태우던 황녀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정작 가족인 일리나는 큰 걱정하지 않은 모습인데 말이다.
“초대를 받고 갔는데, 무슨 일이 있었겠습니까.”
흔들흔들 손을 흔드는 이드다. 조목조목 따지는 라미아에 시달려 도망치듯 떠나던 탑주의 모습을 봤다면 저런 말은 하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두 사람이 10층 입구 바깥쪽으로 발을 들인 다음 순간.
콰르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땅이 일어났다. 눈앞을 가득 메우는 흙의 압도적인 무게감은 해일보다 무서웠다.
거대한 땅의 움직임은 마치 지진 같았다. 삼 조가 서 있는 9층 던전 사방 벽이 흔들렸다. 아니, 던전을 중심으로 주변 수 킬로에 지진이 일어난 듯하다.
그런 혼란 속. 어쩌면 그대로 땅속에 생매장될지 모르는 순간에도 기사들은 허둥대지 않았다.
“입구를 향해 방진을 짜라! 전력을 집중하라!”
오히려 명령에 더욱 철저하게 따랐다. 평소 뼈에 새겨 둔 훈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한편 마법사들은 황녀에게 몰려들었다. 최우선 보호 대상을 위한 매뉴얼에 따라 그녀를 탈출시키려는 것이다.
“멈춰요.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말씀하셔도 안 됩니다. 저희에겐 황녀 전하의 안전이 최우선 사항입니다.”
“하지만 명예 후작을 보세요. 저 모습 어디에서 위험이 느껴지죠? 분명 안전할 걸 아시는 거예요.”
“그렇지만…….”
과연 황녀의 말대로다. 이드는 원래 자리에서 한 발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흙으로 막힌 입구를 황당한 웃음과 함께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얼굴 어디에서도 급박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이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서는 저럴 수는 없다. 마법사들이 망설이는 순간 황녀는 일리나를 방패 삼아 움직였다.
“명예 후작님. 지금 위험한 상황인가요? 아는 것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시는 게 어떨까요? 불안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드는 그제야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애송이처럼 허둥대는 사람은 없지만, 모두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다. 수십 미터 땅속에서 지진을 만났으니. 입이 바짝 마르는 것이 당연. 조장으로서 조원들을 세심히 챙기지 못했음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황녀 전하. 던전이 붕괴하는 일은 없다. 모두 안심해도 좋다. 스폴 경과 삼 조는 방진을 풀고 대기하라!”
“충!”
대답만 힘차다. 긴장을 풀란다고 풀릴 상황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드도 그 이상 더 해 줄 것은 없었다. 어차피 지상으로 올라가면 자연히 해결될 일이니까.
“그보다는 이게 문제지.”
이드는 다시 10층 입구를 틀어막은 흙더미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탑주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고생하시오.
꽤나 의미심장한 표정이었는데, 설마 이걸 뜻한 것일 줄이야. 10층은 쉬어 가는 층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네가 너무 괴롭혀서 심술부린 것 같지 않아?”
“그럼 이드가 원인인 거네요? 모자란 값을 채우자고 한 건 이드니까.”
“……뭐, 처음부터 계획된 것일 가능성이 크지. 준비도 없이 이 거대한 땅을 어떻게 움직이겠어?”
슬쩍 꺼낸 농담의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황급히 말을 바꾸는 이드다.
그때 일리나가 막혀 버린 입구로 다가갔다. 그녀는 밖으로 밀려 나온 흙더미를 살피고 있었다.
“뭐 해요?”
“씨앗이에요. 숲이 뒤집혀 무너지면서 남긴 자손이죠. 진짜 햇빛과 바람이 부는 조용한 곳에 심어 줄 거예요.”
그녀의 손에 잡힌 흙 속에는 몇 종류의 씨앗이 뒹굴고 있다.
“씨앗들이 좋아하겠네요.”
엘프의 축복이 받아 큰다면 아무런 병충해 없이 쑥쑥 클 것이다. 엘프들이 사는 숲이 유독 푸르고 울창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올라가야죠. 아무래도 여긴 기사들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요.”
무려 직선거리만 8킬로에 이르는 공간이 흙으로 막혔다. 기사들이 아무리 힘이 좋아도 그들만으로 뚫어 내긴 힘들다. 지금 필요한 건 싸움 전문가가 아니라 굴착 전문가였다.
“그런데 이 안에 흙 말고 다른 것도 있는 것 같아요.”
“다른 거요? 초인? 몬스터?”
“숲의 나무들이 마지막에 전달해 준 느낌인데, 굉장히 거칠고 난폭했어요.”
그렇다면 몬스터나 마수일 가능성이 크다. 탑주가 심술을 제대로 부려 놓은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원래 토벌대를 상대하기 위해 풀어놓으려던 놈일지도 모른다.
이드는 즉시 범고래를 불러 안쪽을 살피게 했다.
‘여기 잘 안 보여.’
그랬더니 흙 속으로 사라졌다 나온 범고개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투덜댔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은 아닌지 이드에게 땅속을 헤매고 다니고 있는 수십 마리의 샌드 웜 이미지를 전해 왔다.
특이한 건 놈들이 지난 뒤에 통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검은 물이 흙을 적시며 지나가는 모습이다. 기본적으로 수십 년 된 통나무처럼 굵은 몸통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이드는 짧은 순간 더 알아볼까 하다가 곧 그런 마음을 접었다.
이 정도 정보면 충분했다.
“올라갈까요?”
이드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싸움을 좋아하는 기사들도 한정 없는 흙더미와 싸우고 싶지는 않았던 것.
지상으로 복귀하던 중, 7층에서 일 조를 만났다.
삼조의 복귀가 늦어지자 록마틴 후작이 투입한 것이다. 두 조는 함께 지상으로 향했다.
원래는 일 조가 공략을 이어받아야겠지만, 10층의 흙더미는 감당 불가라고 결론을 내린 쉴라다.
참으로 현명한 결정이라 하겠다.
이드는 복귀와 함께 록마틴 후작을 찾았다.
“휴~ 무사히 복귀해서 정말 다행이오.”
록마틴 후작은 긴 한숨으로 이드를 반겼다. 황녀의 복귀가 늦어 안절부절못하다 겨우 가슴을 쓸어내린 모양이다. 토벌에 참가하는 황녀의 용기를 응원하던 그도, 황녀가 잘못될 경우 그 책임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이드는 불안에 떨었을 그에게 인사 대신의 보고를 했고, 록마틴 후작은 즉시 회의를 열었다.
같은 시각, 이드가 록마틴 후작의 막사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모이엔이 은밀히 기사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은 세 가지 사실에 놀랐다. 우선 삼 조가 또 두 층을 연이어 공략하고, 10층에 닿았다는 것. 또 초인기를 막는 제약에 대한 해법을 찾은 것과 그 제약이 9층에는 없었던 것. 마지막으로 10층을 가득 채운 흙더미였다.
그리고 하나 더.
이드가 꺼내 놓는 대검에 좌중은 놀람과 함께 기쁨의 탄성을 터트렸다. 상품이 있다는 탑주의 말이 사실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중 특히나 기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마도 대검을 발견한 기사가 속한 기사단의 주인이리라.
모르긴 몰라도 이어질 던전 공략은 좀 더 적극적인 분위기로 바뀔 것이다.
아, 물론 10층은 제외하고 말이다.
“이거 난데없이 토목 공사를 하게 생겼습니다. 하하하.”
“이런 일은 병사들이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자신의 기사단에 삽질 같은 걸 시키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입을 모았다.
정말 단순히 흙을 치우는 문제에만 집중하는 모습에 이드가 나섰다.
“흙을 치우는 것이 가장 큰 일이긴 하지만. 그 안에 마수가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곤란합니다.”
일반 병사를 써서는 사망자의 숫자만 늘릴 뿐 대응이 불가능하다는 말.
“맞습니다. 이게 어디 병사들로 해결될 규모입니까. 이번에야말로 마법사와 초인들이 적극 나서야 할 때라고 봅니다.”
그러자 이드의 말에 동의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물론 생각의 기준은 좀 달랐다. 그들은 병사의 희생을 말하지 않고, 효율과 시간을 말했으니까. 병사들을 그저 숫자로 보는 이들에겐 그편이 이해하기 쉬웠을 수도 있다.
마법사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단순하게 보면 흙을 치우는 삽질이지만, 삽질도 규모가 크면 국책 사업이 되는 법.
거기에 마수까지 있다고 하지 않는가.
다만 초인들에 대해서는 우려의 말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그런데 작업 중에 초인기가 막히면 큰일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조심할 필요가 있어요.”
하지만 걱정과 보호도 지나치면 기분이 나쁜 법이다. 특히나 지금껏 강자로서만 살아온 초인들에게는 갑자기 힘 잃은 약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여러분의 걱정은 알지만, 위험이 없는 전투가 어디 있겠습니까.”
“옳은 말씀입니다. 위험에 얼마나 잘 대처하느냐. 그게 핵심입니다.”
모이엔의 말이 나온 것은 그러던 중이었다.
“제국의 귀중한 전력을 어이없게 잃을 순 없으니. 이러는 것은 어떻습니까? 기사들이 안전을 확보한 후 초인들이 들어가거나 아니면, 위험한 상황을 대비해서 기사단이 호위를 하는 것 말입니다.”
쉽게 던진 말이지만 그 파장은 대단했다.
말이 좋아 안정 확보에 만약을 대비한 것이지. 이건 완전 전력 외의 도련님 취급이다.
싸우다 힘이 부치면 힘센 형을 불러오는 동네 꼬마와 다를 것이 뭐란 말인가!
“모이엔 단장.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요!”
“이는 초인에 대한 모욕입니다. 모욕!”
당장 분기를 참지 못한 초인들이 벌떡 일어났다. 오색 기사단의 이름이 높으나 개인적으로 청색 기사단장에는 꿀리지 않는다 생각하는 초인들이다.
“모욕이라고 느낀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전 현실에 맞는 의견을 냈을 뿐입니다. 초인기가 막혀 쓰지 못하고 죽으면 개인적으로도, 제국의 입장에서도, 개죽음이 아니겠습니까.”
“양측 다 진정하시오. 모이엔 단장은 특히 말을 조심해야 할 거요.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또한 기사도의 한 부분임을 유념하란 말이오.”
활활 타는 불길에 모이엔이 기름을 들이붓자 결국 록마틴 후작이 나서 질책을 했다.
자신은 물론이고, 황녀가 보는 앞에서 분란을 만든 것이 매우 불쾌했던 것이다. 이미 이야기를 진행하기에는 너무 분위기가 너무 거칠어졌다 판단한 록마틴 후작은 차후에 다시 회의를 소집하겠다 말하고는 회의를 파했다.
“제 말이 과했습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슬쩍 고개를 숙이는 모이엔.
그는 곧 우르르 몰려 나가는 사람들에 섞여 막사 박으로 사라졌다.
그런 모습을 이드가 서늘하게 바라보았다.
“저 인간 노린 거지?”
“당연하죠. 작정하지 않고서야 저런 말을 할 리가 없죠.”
“그렇지만 진심이기도 했어요.”
“뭐・・・・・・ 진심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 주는 좋은 예죠.”
이래서 적당한 거짓말은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한다는 말이 있는 것인가 보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마무리되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가 커졌다.
안에서 회의를 하는 사이 토벌대에는 초인기를 잃은 초인의 무용성에 대한 논란이 슬금슬금 일어나고 있었던 것.
모이엔의 주장을 그대로 밖으로 옮겨 놓은 듯한 양상이다.
“도대체 어떤 놈이 이런 소리를 하는 거야!”
뒤늦게 사실을 안 초인들이 분통을 터트렸지만, 대부분의 소문이 그렇듯 뿌리를 찾기는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