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77화
913화
“끄~ 응. 지친다. 지쳐.”
막사로 돌아온 이드가 소파에 스며들 기세로 늘어졌다. 가족의 입장에서는 괜찮지만, 가족 외 숙녀들이 보기에는 추해 보일 수 있는 행동에 라미아가 투덜거렸다.
“숙녀분들도 계시는데, 예의 좀 지켜요.”
“이게 어때서? 내가 옷을 벗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모습이 불편하진 않으시지요?”
“전혀요. 괜찮아요.”
황녀의 대답에 이드가 이것 보라는 듯 씨익 웃는다.
라미아가 작게 한숨을 쉰다. 그렇게 물으면 괜찮다 하지, 그럼 대놓고 흉하다 할까.
이어 한마디 하려는 참에 황녀가 끼어들어 푸념하듯 말했다.
“정말 괜찮아요. 이만큼 친해졌다는 표시 같아서 오히려 기쁘답니다. 검후님 말고는 이렇게 절 편히 대하는 사람이 없거든요.”
“그거야 당연하지요. 검후님처럼 저도 황녀 전하께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이니까요.”
황녀의 마음이 어떻든 그녀를 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무려 제국의 황녀다. 그 앞에서 작은 실수라도 했다가는 목이 날아가고, 말 한마디 잘못하면 가문이 망한다. 조심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황녀 전하 앞인걸요.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게 당연합니다. 특히, 남자라면 그런 경향이 심하면 심했지 단장님처럼 저러진 않죠, 보통은. 단장님이 이상한 거예요.”
스폴이 황녀의 파츠 아머를 벗기며 말했다. 기사단 업무 때문에 라미아와 어울리는 시간이 늘어서 그런가. 부쩍 이드를 대하는 모습이 라미아를 닮아 가는 스폴이다.
그녀 말처럼 귀족들, 특히 그중 남성으로 분류되는 자들은 황녀 앞에서 어떻게든 잘 보이려 반듯하게 예의를 차렸다. 그녀의 눈길을 한 번이라도 받아 보기 위해서 말이다.
“이상할 것까진 없잖아?”
이드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했다. 앞서 말했듯 이드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황녀에게 잘 보여 얻을 것도, 추하게 보여 잃을 것도 없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황녀와의 관계라는 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권력이라는 사회의 테두리를 벗어난 진정한 자유인이랄까?
다만 주변의 이런 시선은 좀 억울하다. 이드가 만회를 위해 쉴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쉴라 경이 보기에도 이상한 것 같습니까?”
“아니요. 오히려 힘드실 만한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
쉴라에게 있어 이드는 백 살이 넘은 전대의 인물. 즉, 노인이었다. 외모는 젊어도 나이가 어디 가지 않는다는 의미의 말.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사정을 알고 있는 라미아와 일리나는 입을 가리며 키득거렸다.
그리고 당사자인 이드는 슬그머니 자세를 바로 했다. 편하게 앉아 보려다 순식간에 백 살 넘은 노인 취급당하게 생겼으니까.
다만 그 모습에 라미아와 일리나의 웃음이 기어코 빵 터졌다는 것이 문제.
“그런데 단장님도 지치시긴 하는군요.”
파츠 아머의 손질을 마친 스폴이 쉴라 옆에 앉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내가 강철 골렘도 아니고.”
사실은 강철 골렘보다 더하지만 말이다.
단순 강도를 따져도 강철 골렘 이상이고, 내구도도 강철 골렘보다 좋다. 여러 가지 면에서 골렘은 상대도 되지 않는 것이 이드의 몸이다.
드래곤처럼 생물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 허락하지 않으면 주사도 맞을 수 없는 몸이다. 얼마나 좋을까. 그 아픈 것에 찔리지 않을 수 있다니.
당장 정신의 관 정도의 던전은 열흘 밤낮 쉬지 않고 공략해도 지치지 않을 사람. 그게 이드였다.
“하지만 던전 공략 때는 전혀 힘들어하지 않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내 전문 분야니까 힘들어할 이유가 없지. 내가 지치는 건 쓸데없이 말싸움만 하는 회의 때만이니까.”
사람이 지치는 이유는 그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그 일이 하기 싫어서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투는 이드의 전문이고, 쓸데없는 심력 낭비에 감정 소비가 심한 회의는 비전문 분야를 넘어 혐오하는 분야였다.
“가만 보면 실제 던전을 공략하는 시간보다, 계획을 세우고 회의를 하는 시간이 더 길지 않나 싶어.”
“싶은 게 아니라 사실이에요. 전체 회의는 많지 않지만, 작은 회의는 끝없이 이어지니까요. 다른 조가 들어갔을 때도 지휘부는 계속 회의를 하던걸요? 아마, 우리가 던전에 들어가 있을 때도 그럴 것 같고.”
며칠 지휘부에 붙은 마법사들의 연구실에 출입하던 라미아의 증언이다.
이드는 그 말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왜 그러나 몰라. 그런다고 쓸 만한 계획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차라리 그럴 정력을 던전 공략에 쏟으면 훨씬 빠를 텐데 말이야.”
높은 자리에 오르면 쓸데없는 것으로 에너지 쓰는 건 중원이나, 지구나, 그레센이나 다 똑같다.
그렇게 시간을 투자해서 나오는 결론이 대부분 쓸모없다는 것까지.
하지만 정작 그 쓸 만한 계획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회의의 주요 참가자인 황녀가 듣기에는 귀가 아팠나 보다. 황녀가 변명처럼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번 토벌대의 던전 공략은 규모에 비해서 상당히 빠른 편이에요.”
“확실히. 벌써 10층에 도달했으니까. 거의 역대급일 것 같은데요.”
손을 꼽아 보던 스폴이 황녀의 말에 힘을 실었다.
“보통은 얼마나 걸리는데?”
“”마루 탐험기’라는 책에도 실렸던 유명한 던전의 경우 13층 끝까지 도착하는데 한 달이 걸렸어요. 빠른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느렸다는 말도 없었어요.”
“그래?”
그렇게 비교하면 현재 6일 차에 10층에 도달한 토벌대의 속도는 굉장하다고 자랑할 만했다. 1층에서 5층까지가 맛보기 층이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한 층 공략에 이틀에서 삼 일이라는 계산이 나오자 자연 궁금증이 생겼다.
“그럼 가장 오래 걸렸던 건 어디야?”
“그건 저도・・・ 가장 짧은 9시간짜리 기록은 알지만.”
스폴이 도움을 바라듯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지만 황녀나 쉴라, 심지어 라미아도 고개를 저었다. 그쪽으로는 잘 알지 못했던 것.
사실 던전 자체의 정보나, 던전에서 나온 보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져도 공략 시간까지는 잘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일리나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알아요. 최근 100년 안에 새로 공략된 던전이 없다면요.”
“일리나가요? 그런 쪽으로 관심이 있었어요?”
“어릴 때 옛날이야기로 들었어요. 지금은 멸망한 주린 왕국에 있던 바알의 암흑 성소. 정확히 45년 하고 9개월이 걸렸다고 해요. 던전의 끝을 보기까지.”
45년. 거의 한 인간의 일생과도 맞먹는 시간에 이드의 입이 딱 벌어졌다. 45년에 비하면 지금 토벌대의 던전 공략 속도는 거의 광속 우주선급이다. 그 어마어마한 시간에 지금껏 크게 흥미를 보이지 않던 쉴라가 관심을 보였다.
“도대체 얼마나 위험한 곳이기에 그렇게 오래 걸린 건가요? 혹시 규모도 아십니까?”
“암흑 성소는 총 56개 구역이었대요. 굉장히 위험한 함정과 몬스터가 가득한 덕분에 주린 왕국의 많은 기사와 마법사들이 희생되었지만 주린 왕국에서는 포기하지 못했다고 해요.”
그녀의 말에 일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위험한 만큼 대단한 보물이 숨겨져 있을 거라는 기대감. 던전이라면 모두 가진 그 위험한 도박성에 왕국이 홀린 것이다.
“그런데 멸망했다는 걸 보면. 개털・・・・・・ 아니, 대단한 게 없었나 보죠?”
“아뇨, 보물은 있었어요. 주신님의 신물을 발견했거든요. 대신 그 시점에 이미 주린 왕국은 모든 국력을 던전 발굴에 소모한 탓에, 때마침 침략한 적국에 대항도 하지 못하고 멸망해 버렸다고 해요.”
“쯧쯧,”
이드가 혀를 찼다. 나라의 부흥을 위한 던전 발굴에 온 국력을 쏟아부어 그 탓에 멸망이라니. 본말전도도 이 정도면 끝판왕급이다.
어떻게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모를 수가 있는지.
“황녀 전하께서 귀담아들으셔야 할 이야기네요.”
“으~ 끔찍한 말씀 마세요. 절대 제국은 저런 실수는 없을 거예요.”
상상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한지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질색하는 황녀다. 거기에 사실 걱정할 필요도 없다. 저 고대의 왕국과 달리 현재 토벌대의 공략은 굉장히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니까.
가벼운 이야기가 흘러가고.
쉴라의 주도로 10층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특히 그녀는 탑주의 초대와 대검이 있던 제단에 적힌 탑주의 말에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탑주가 초인을 불완전한 존재라고 여기고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초인기를 제약하는 마법을 쓴 층의 제단에 ‘시련이 흔들리지 않는 정신과 마나’라 적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곧 제약에 흔들리는 초인기를 비꼬는 말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
“하지만 초인 마법을 만들어 낸 사람인데 과연 그럴까요?”
“탑주가 만든 건 초인 마법이지. 초인이 아니니까요.”
“과연, 그럴듯하네요.”
동시에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이미 초인 마법을 위해 수많은 초인의 배를 가른 작자가 지금에 와서 초인을 좋아하건 싫어하건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초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오늘 회의 때 했던 모이엔의 말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드가 그에 관해 묻자 쉴라가 오뚝한 콧날에 주름을 만들며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모이엔 단장의 잔꾀는 이전부터 유명했죠. 그만큼 확실했으니까요. 초인들 입장에서도 뻔한 도발인 걸 알면서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들도 기사라면 말이죠.”
위험을 알면서도 나서야 할 때,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란 말이다.
분위기가 그랬다. 이드가 막사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쯤이면 초인 기사단을 중심으로 모여서 모이엔을 욕하느라 시끄럽겠네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을 테니까요. 훗.”
이드의 예측은 정확했다.
제국의 초인들을 대표하는 청색 깃털 초인 기사단장 발터의 막사.
그 안은 뜨거운 열기로 후끈했다.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사우나가 부럽지 않은 열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열기는 한 남자에게서 뿜어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붉게 타오르는 머리카락. 그의 머리카락은 불 그 자체였다.
“모이엔 그자가 미친 것이 분명하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를 앞에 두고 그런 소리를 할 수는 없소.”
“어허. 몇 번을 이야기합니까. 지금 문제는 모이엔이 아니란 말입니다. 핵심은 10층 공략이에요. 그걸 해결한 후에 모이엔인지, 모이온인지를 죽이건 살리건 할 일입니다!”
“그 문제야말로 끝난 겁니다. 당연히 10층을 공략해야지요. 오로지 우리 초인들의 힘만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치명적인 위험이 있음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분명한 현실이에요.”
“그게 뭐 대단하다고! 지금 우리 초인들의 위치가 의심받고 있단 말입니다!”
중구난방.
사방에서 온갖 의견들이 터져 나왔다. 그중 절반 이상이 모이엔에 대한 욕설과 저주다.
“일단 적당히 열이 식은 듯하니, 냉정히 이야기해 보지.”
그렇게 끝까지 오른 열기가 조금 가라앉을 때가 되자 발터가 나섰다.
묵직한 목소리가 막사 안을 울리자 그때까지 시끄럽게 떠들던 입들이 일제히 닫혔다.
“우선 초인 기사단이 주축이 되어 10층 공략에 나서는 것에는 모두 동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은가?”
끄덕.
“하지 말라고 해도 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 밖에 어떤 이야기가 돌고 있는지. 백작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분명 모이엔 놈이 한 짓일 겁니다.”
“확인되지 않은 일에 대한 단정은 위험하다. 아직 확실한 건 없다.”
“하지만!”
화르륵!
냉정한 발터의 말에 화가 치민 듯 머리 위로 불길이 치솟는 남자다. 분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발작은 없다.
묵직한 발터의 시선이 그의 어깨를 내리누른 것.
“흥분은 잠시 묻어 두어라. 곧 풀 기회가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