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78화
914화
“지금 토벌대 안에 돌고 있는 말을 진짜 모이엔 단장이 만들었다 여기십니까?”
한데 모였던 초인들이 힘껏 분노와 욕설을 터트리고 돌아간 후 조용한 막사. 무겁게 입을 닫은 발터가 조용히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에 부관인 칸은 비어 있는 발터의 옆자리에 앉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증거가 없어 아쉬울 뿐이지.”
반쯤 눈을 감고 있던 발터가 눈을 떴다.
그 역시 이번 소문의 중심에 모이엔이 있다는 사람들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다만 증거가 부족할 뿐. 증거만 있었다면 절대 지금처럼 조용히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제국의 청색 깃털 기사단장이라는 자리는 소드 팰러스의 청색 기사단장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힘없는 자리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이번 일은 서로 협의가 있었던 일이 아닙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배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른 것이 아니라 확실한 배신이다. 동맹을 위험에 몰았으니까.
“그렇게 되겠지.”
“그런 일을 모이엔 단장이 했을까요?”
초인파의 힘은 강하다. 증거가 충분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초인파에서는 이번 일을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을 것이다. 배신은 언제나 큰 분노와 파괴를 동반하는 만큼, 적지 않은 피가 흐르게 되리라.
“자넨 아니라고 생각하나 보지?”
“……아니기를 바라는 겁니다.”
칸은 모이엔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소드 팰러스가 부담스러웠다. 이번 일을 모이엔의 단독 행동이라 여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설령 모이엔의 단독 행동이라 해도 소드 팰러스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문제는 소드 팰러스가 그 책임을 순순히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소드 팰러스의 상징이랄 수 있는 오색 기사단의 단장 중 하나를 징계할 가능성도 거의 없고,
무엇보다 사유가 적절치 않았다. 토벌 중에 초인파를 비방하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고 대외적으로 발표하라고? 미치지 않은 이상 그럴 리가 없다. 칸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발터는 그 생각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턱을 괴었다.
“조심하는 태도는 좋아. 하지만 전장에선 미래보다 지금이 중요하다는 걸 명심해라. 이후의 일은 나중으로 미루고, 우린 적의 공격에 맞서 최선을 다해 싸우기만 하면 된다. 독단인지, 명령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내 말이 틀린가?”
모이엔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누군가 초인파를 적대시하는 것이 분명한 이상. 싸울 준비는 필수다. 적의 손바닥 위에서 놀다 죽어 줄 것이 아니라면!
발터의 말은 그런 의미였고, 똑똑한 부관은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했다.
“절대 아니지요.”
흔들리던 칸의 눈이 중심을 잡았다. 평소 걱정이 많은 성격이지만, 결정적일 때 무른 성격은 아니다. 아니, 그런 자였다면 애초에 발터가 부관으로 두지도 않았을 터.
“그럼 소문에 대한 확인 작업은 그만둘까요?”
“아니, 계속해. 일단 이 이상 헛소문이 퍼지는 일은 억제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다 증거나, 증인을 확보하면 아주 좋은 일이고,
까딱.
뒷말을 삼킨 발터가 손가락을 휘둘러 초인기를 사용했다. 초인력이 스며든 땅이 그의 손발이 되어 움직였다.
어지럽게 널려 있던 의자들이 자율 주행 기능이 달린 것처럼 한쪽으로 정리되고, 뒤로 밀어 뒀던 책상이 그 앞으로 이동되었다.
“지금은 던전 구조도부터 확인하지.”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이 바뀌어 큰 도움은 되지 않을 텐데요.”
칸이 기밀 서류들 사이에 있던 커다란 설계도를 책상에 펼치며 말했다.
이 설계도는 정신의 관에 대한 것으로, 랜달이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에선 큰 효용이 없었다.
베일록과 프리실라 두 사람이 이드에게 생포된 후 맛보기 층을 제외한 던전의 환경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 차이는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커지고 있다.
“상관없다. 어차피 환경이 바뀌어도 구조는 그대로니까. 최소한의 정보만 있으면 된다. 내 초인기 엑스카베이터라면 흙으로 막힌 10층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린 10층을 넘어 12층 입구까지 단숨에 밀고 들어간다.”
바스락거리며 설계도를 살피던 발터가 12층 입구로 표시된 부분을 찍어 누르자 책상에 선명하게 파인 흔적이 생겼다. 일반 서민이 10년간 아끼고 아껴야 살 수 있는 고급 책상이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삼 조처럼 말이군요.”
“그래. 현재 유일하게 2개 층 이상을 공략한 그들이 우리 목표다. 그리고 지금 토벌대 안에서 헛소리를 하는 놈들에게 보여 줘야지. 초인의 힘은 너희들이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초인의 위대함을 다시 깨달으라고 말이야.”
담담히 그러나 무거운 목소리로 다짐하는 발터였다.
칸은 그 모습에 이후 회의에서 그가 큰 사고를 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수 시간 후.
그의 예감은 들어맞았다.
“미안하지만 다시 한번 말해 주겠나?”
이드는 당황해 입만 벙긋거리던 록마틴 후작이 어렵게 다시 말을 꺼내는 모습에 고개를 돌려 발터를 바라보았다.
당당히 선 그는 첫 만남 이후 가장 커 보였다. 자신감이 가득한 모습이다.
“이번 10층 공략을 위해 조를 새로 짜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요청드렸습니다.”
“내겐 그 말이 초인으로만 조를 짜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맞는가?”
록마틴 후작이 아니라고 말해! 하는 강렬한 눈빛을 쏘아냈지만, 통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위험하네. 8층 마법을 생각하게. 혹 모이엔 단장의 말을 신경 쓰는 것이라면….”
“죄송하지만, 이번 일은 토벌에 참가한 모든 초인의 명예가 달린 문제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모이엔 단장의 말 따위는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토벌대 안에서는 초인을 겁쟁이로 몰아가는 분위기가 팽배하고 있습니다.”
“끄으음!”
절대 물리지 않겠다는 듯, 우직한 목소리로 치고 나오는 발터의 모습에 록마틴 후작이 침음했다.
토벌대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도는지는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발터의 말에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당장 그만 해도 기사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돈다면 결코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가 만류하는 것은 초인들이 제국의 귀중한 전력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함께 손발을 맞춰도 모자랄 시점에 왜 이런 문제를 만들었단 말인가. 소드 팰러스는!’
록마틴 후작은 한쪽에 편안히 앉은 모이엔을 원망스러운 듯 노려보았다.
이드 역시 모이엔을 살피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저 인간 결국 초인들을 한데 몰아넣었네.’
과연 초인파를 노리는 저들이 사 조에 고루 흩어진 초인을 어떻게 모을까 싶었는데. 거친 방법이긴 하지만 결국 해냈다.
그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모이엔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과연, 위험에 굽히지 않는 초인들의 용기가 돋보이는 결정입니다. 한 사람의 기사로서 발터 단장님과 초인들의 결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말과 함께 모이엔이 기립 박수를 쳤다.
지금의 사태를 만들어 낸 인간의 이런 태연한 모습에 몇몇은 기가 차다는 표정이다. 특히 지휘권이 흔들린 록마틴 후작의 표정이 볼 만했다. 당장이라도 쫓아내고 싶은 것 같다. 그러나 모이엔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용기 있는 결정에 저와 기사들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절대 초인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마법사와 기사는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기사들은 소수 정예로 청색 기사단과 적색 기사단에서 추려 더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물론 그들은 온전히 발터 단장님의 명령만을 따를 것입니다.”
병 주고 약준다는 말이 이런 것이 아닐까?
‘말은 바른 말인데, 적색 기사단은 갑자기 왜 끼는 거야?’
사전에 이야기가 되어 있던 일인가? 그렇다면 라발이 말해 주지 않았을 이유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라발이 불쾌한 표정으로 모이엔을 쏘아보며 벌떡 일어났다.
“모이엔 단장. 당신이 무슨 권리로 본 기사단의 기사를 마음대로 움직이는가!”
같은 오색 기사단으로 묶여 있지만 오색 기사단 내의 구분은 명확했다. 서로의 요청에 도움을 주고받고, 평소 깊은 교류는 있어도, 명령권은 확실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전에 아무런 논의 없이 타 기사단을 마음대로 작전에 끼워 넣는다?
이는 월권일 뿐 아니라, 라발에 대한 명백한 무시이기도 했다.
“아, 미안하오. 라발 단장. 발터 단장의 용기에 내 마음이 급해 결례를 범했소. 하지만 같은 제국의 기사로서 그들의 용기 있는 결단을 응원해야지 않겠소?”
“…..뿌득.”
교묘한 화술. 여기서 아니라고 하면 초인의 용기 있는 결단도 몰라주는 옹졸한 자가 된다. 거기다 진심이든 아니든 고개를 숙여 사과까지 하지 않았는가.
라발이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거절하겠소. 이번 공략에는 초인으로만 진행하겠소.”
그때 라발이 하지 못한 말을 발터가 해 주었다.
“하하하. 역시 고고하시군요. 그럼 후작님의 생각은 어떠신지 한번 들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후~ 모이엔 단장. 더 떠들 생각이라면 막사에서 나가는 게 어떤가?”
능글능글 혼자 신난 모이엔에 결국 참지 못한 록마틴 후작이 대놓고 핀잔을 줬지만, 쉽게 꺼지지 않는 미소에 결국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발터 단장. 모이엔 단장의 말하는 방식은 틀려먹었지만, 그 말의 내용은 나도 동감하는 바이네.”
“그것은…….”
“내 말 아직 끝나지 않았네. 자네의 뜻은 알지만. 내 입장도 생각해 주게. 무엇보다 초인과 마법사, 기사의 쓰임이 다름을 알 것이네. 마법사와
기사는 나서야 할 때가 아니면 나서지 않을 것이야. 절대 공략에 있어 초인의 공이 바래는 일은 없을 것이네.”
무려 록마틴 후작이 이만큼 차근차근 설명하는 성의를 보이는데, 발터도 어쩔 수 없다. 후작도 충분히 양보한 것이니까.
그저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다는 것이니까.
“록마틴 후작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좋군. 그럼 바로 인원 구성을 하도록 하세.”
서로 조금씩 양보하자 이야기는 빨라졌다.
조원 구성은 거침이 없었다. 일반 기사단에 소속된 초인들을 제외하고, 초인이 주를 이룬 모든 기사단이 발터의 조에 속하려 했기 때문이다. 청색과 적색 기사단에서 기사를 차출하는 일도 그대로 진행되었다.
사이가 좋지 않아도, 실력 하나는 확실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조가 아니라, 오조라. 센스가 있으시네.”
이드는 던전 진입을 준비하는 새로운 조를 바라보았다.
기존 사조에 속하지 않은 오조.
록마틴 후작은 이번 조를 기존의 조에 두지 않고 따로 빼서 오조라고 명명했다. 임시적이라는 의미와 함께 공략이 끝난 후 다시 기존의 네 개조로 돌리겠다는 뜻인데,
“과연 그대로 될지는 모르겠네.”
“그렇죠, 모이엔, 발터 양측 모두 원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지요. 그런데 어떻게 됐습니까?”
이드의 물음에 쉴라가 고개를 저었다.
모이엔의 노림수는 무엇인가. 그걸 알기 위해 이드는 청색과 적색 기사들 사이에 은색 기사들을 끼워 넣으려 했고, 그에 쉴라가 후작에게 다녀온 것이다.
하지만 잘되지 않은 것 같다.
“후작님과 발터 단장. 결정권자 두 사람이 모두 반대했어요. 지원대도 라발 단장님은 찬성했지만, 모이엔 단장이 반대했고요. 지원은 충분하다는군요.”
한배를 탄 라발의 찬성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셋 모두 반대한 것은 예상외였는지, 쉴라는 조금 충격받은 표정이다.
은색 기사단 이름으로 나선 이래 이처럼 강하게 거부된 적이 없었으니까.
“대충 무슨 생각들인지는 짐작이 가네요. 역시, 조용히 안전장치 역할만 할 생각은 없는 거로군요.”
록마틴 후작의 경우 이드의 삼 조를 빼고 가장 실적이 좋은 은색 기사단의 전력 누수를 꺼린 것이고, 발터의 경우 처음부터 외부 조력을 거부했으며, 모이엔의 경우는……
“발터 단장 쪽은 몰라도 모이엔 단장은 분명 그렇겠지요.”
쉴라의 생각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이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조 후미에 있는 청색 기사들을 살폈다.
그러던 한순간이다.
“휘익~ 이거 일을 쳐도 진짜 크게 칠 모양인데요?”
기사들 중 하나. 크게 튀지 않는 모습으로 소수의 청색 기사들 사이에 섞인 한 기사.
이드의 눈이 그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