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80화


916화

발터가 초인기에 붙인 이름. 엑스카베이터는 본래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거인의 이름이다. 마법과 신비의 맥이 한 번도 끊어진 적 없는 그레센에는 수많은 전설과 신화가 있다.

엑스카베이터도 그런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티탄이란 거인이다. 현재 드워프의 선조 중 하나라고 할까? 손재주가 뛰어나고, 힘이 장사인데, 엑스카베이터는 그런 티탄들 중에서도 흙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며, 노하면 지진을 일으켜 상대를 멸망시킨다는 거인이었다.

발터가 이런 거인의 이름을 초인기에 붙인 것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

흙 속에서 그는 말 그대로 거인. 티탄 엑스카베이터 그 자체이기 때문이었다.

“우선 한 마리.”

발터의 말과 함께 흙 속에 박아 넣은 팔뚝에 굵은 혈관이 솟아오른 다음 순간이었다.

쿠르르륵!

작은 진동과 함께 입구의 흙이 무너져 내린 다음.

콰앙!

끄에에엑!

발터가 선 좁은 입구 왼쪽 벽이 유리처럼 부서져 내리며 그 속에서 혐오스러운 형상의 거대한 샌드웜이 튕겨 나왔다. 그리고 무너진 벽 뒤로 나타난 흙더미 위, 거대한 거인의 손이 어른거렸다. 저 손이 샌드웜을 내던진 것이 분명하다. 어찌 보면 흉한 샌드웜보다 더 무서울 수 있는 광경.

하지만 그에 놀라는 초인들은 아무도 없다.


“역시 발터 단장의 초인기야. 저런 커다란 놈을 던져 버리다니. 대단해!”

“부럽다. 부러워. 나도 저런 초인기를 각성했으면 벌써 기사단장을 다는 건데.”

“이놈! 네가 내 자릴 노리고 있었구나!”

“시끄럽다. 헛소리 말고, 꿈틀대는 놈이나 빨리 잡아!”


모두 거인의 손이 발터의 초인기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긴장은커녕 농담까지 하던 초인들은 곧 흙을 찾아 꿈틀대는 샌드웜에 달려들었고,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초인기에 거대한 샌드웜은 비 오는 날 밟혀 죽은 지렁이처럼 곤죽이 되어 늘어졌다.

“크흐~ 냄새 한번 지독하다! 누가 이 냄새 좀 해결해 봐!”

“싸우기 전에 냄새에 쓰러지겠습니다. 샌드웜이 이렇게 냄새나는 놈인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 사냥 시작인데 치우긴 뭘 치워? 못 참겠으면 코라도 막아!”

지독한 악취에 코를 쥐는 초인들의 머리 위로 불꽃을 일으키던 시플론이 버럭 소리를 질러 면박을 주었다.

그에 불만을 털어놓던 초인들은 할 말이 없어 입을 삐죽거렸다. 시플론의 말이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또 한 마리의 샌드웜이 흙 속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엑스카베이터 부러운 초인기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이드는 감탄을 숨기지 않고, 부러움을 그대로 드러냈다.

흙 속을 마음대로 휘젓는 거인의 손이라니. 이제 겨우 주먹만 한 금속을 조몰락거리는 입장에서는 그저 한없이 부러울 뿐이다.

“이드도 열심히 하면 저런 거 할 수 있으니까. 노력하세요!”

턱 하고 날개를 펼쳐 머리를 쓰다듬는 라미아의 말이다.

“글쎄. 할 수 있다고 하기엔 속성이 너무 다르지. 그나저나 나도 딱 저렇게 해결하려고 했는데, 역시 능력 좋은 사람들은 통하는 게 있나 봐.”

마치 문제를 잘 풀어낸 학생을 기특하게 바라보는 선생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이드다.

10층의 환경이 변하고, 그 안에서 샌드웜의 존재를 발견했을 때, 이드는 지금 발터가 하고 있는 것처럼, 정령을 시켜 샌드웜을 끌어내 처리하려고 했었다.

다만 시간이 없어서 나서지 못했을 뿐.

한데 우연인지 발터가 같은 방법으로 샌드웜을 잡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었다.

“발터 단장의 초인기가 최소 상급 정령급이란 말이네요.”

“단순 물리력으로 계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일단은 그렇게 봐야지.”

물론 완전히 상급 정령에 맞먹는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범고래는 10층에 자신을 막는 마법이 있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도 샌드웜을 내던질 수 있었다. 마법이 없다면 더 큰 힘을 낼 수도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발터 역시 마찬가지.

그에게 확인하지 않은 이상 저 손이 그의 전력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6층에 나타났던, ‘만들어진’ 초인들, 발터와 그들 모두 흙 속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초인기를 가졌지만, 그 힘의 규모에서 감히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질이 다르다는 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13마리의 샌드웜이 곤죽으로 변했다.

일대는 이미 샌드웜의 피와 살로 질퍽했고, 악취는 9층을 너머 8층, 7층을 가득 채우며 머리를 띵하게 만들고 있었다.

슬쩍 살펴본 바로는 기사들은 물론,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존 워스조차 코를 잡고 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어떤가. 악취는커녕 주변에 맑은 공기만 가득하다. 라미아가 악취 제거와 공기 정화 마법을 걸어 준 덕분이다.

“라미아.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이럴 때만 그런 말 해 봤자 별로 감동도 없거든요?”

“하하하. 아, 저쪽도 사냥이 끝난 것 같은데?”

어색하게 웃던 이드가 발터를 가리켰다.


정말 통조림 공장처럼 일정한 작업을 계속하던 움직임이 멈췄다. 발터도 흙 속에서 팔을 빼고 있었다.

곧 그가 뭐라고 명령하자, 일부 초인들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어 공기를 가두고, 샌드웜의 사체를 불에 태웠다. 이미 배어든 악취가 쉽게 가시진 않았지만, 그 정도만 해도 양반이다.

“나머지는 전진하면서 잡는다.”

발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머지 샌드웜을 잡기 위해서는 10층 안으로 진입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흙 속을 자유자재로 헤집는 그의 손도 수 킬로미터 너머까지 닿지는 않는 모양이다.

샌드웜의 사체 정리가 끝나자 오 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가장 앞에 선 것은 발터다.

꾸르르륵~

가장 앞에 선 그가 초인기를 사용하자, 벽이 무너지며 넓어진 입구를 중심으로 마치 욕조에서 물이 빠지는 것처럼 흙이 회오리치며 안으로 말려들어 동굴과 같은 공간을 만들어 냈다.

“좋아. 나머지는 이대로 경화시킨다.”

“빨리빨리 움직여!”

공간이 만들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준비하고 있던 초인들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각자 적당한 간격을 두고서 동굴의 흙을 단단하게 굳히거나, 돌로 만들었다.

흙으로 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공간이 튼튼한 동굴이 된 것.

오 조는 그대로 동굴 안으로 전진해 들어갔다.

그 입구에 청색 기사단을 남기고서.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없던 동굴을 만드는 입장에서 그 입구에 만약을 대비해 경비를 두는 것은 극히 당연한 행동이었으니까.


다만, 그 경비들을 본 이드의 눈은 비상하게 빛났다.

“과연, 아예 처음부터 저런 식으로 떨어질 작정을 한 거였구나.”

저렇게 분리된 상태라면 청색 기사 중 일부가 단독 행동을 한다고 해서 쉽게 알 수 없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이십 분 정도가 지나자 일반 기사들처럼 경비를 서고 있던 존 워스가 움직였다.

그는 갑옷을 벗고, 검은 옷을 입은 후 검을 바꿔 들었다. 옆에 있던 청색 기사들이 당연한 얼굴로 그의 갑옷을 받아 들며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준비를 마친 존 워스가 동굴로 사라지는 순간, 이드도 오랫동안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도대체 무슨 목적인지 확인해 보실까. 라미아도 지금부터 좀 더 신경 써 줘.”

“이쪽은 걱정 말아요.”

이드는 라미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부운귀령보의 내력을 운용했다. 투명 마법과 부운귀령보의 궁합은 환상적이었다.

시야와 기감에서 온전히 사라진 이드는 말 그대로 유령이었다. 진짜 유령도 이드를 찾아내긴 힘들 것 같다. 그러니 입구에서 사방으로 눈을 번뜩이는 청색 기사들이 이드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동굴에 들어선 이드는 우선 그 규모에 고개를 끄덕였다.

급하게 만든 동굴이라 작을 줄 알았는데, 상당히 컸다. 앞서 지나온 던전 통로 정도의 넓이는 확보되어 있었다. 탁탁.

거기에 단단하기까지.

이런 능력이면 지하 도시도 만들 수 있겠는데.』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어도 만들 이유가 없죠. 땅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긴 하지. 그래도 그레센에 철도 시스템이 없는 것이 아깝게 느껴질 정도의 능력이야. 터널을 만드는 덴 진짜 최고야.』 

『엉뚱한 소리는 그만하고, 빨리 들어가요. 이러다 놓치겠어요.』

놓치긴. 길도 하나뿐인데..

하지만 그런 말과 달리 빠르게 앞으로 달려나가는 이드였다.

그렇게 오 분쯤 달렸을까. 직선이던 동굴은 의외로 굽이치는 계곡물처럼 이리저리 꺾인 모습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샌드웜을 잡기 위해 움직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어차피 샌드웜이 남아 있으면 무너질 동굴이다. 동굴을 잘 만드는 것보다 샌드웜을 잡는 것을 우선하는 게 당연했다.

끄에에엑!

콰르릉!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동굴 저 앞쪽에서 폭음과 함께 샌드웜의 비명이 들려왔다.

발터가 있는 선두와의 거리는 대략 2킬로미터. 거의 10층 중앙부에 가까운 지점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아직 존 워스의 모습은커녕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드는 서둘러 그를 찾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기감을 넓힌 채 기다렸다.

아직 존 워스의 목적을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무엇을 하건 이제 슬슬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드가 기다리던 반응이 나타났다.

푸화악!

섬뜩한 야수의 기운이랄까. 순간 나타났다 사라진 기운이지만 한창 사냥에 나서 예민한 샌드웜을 동요시키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키에에엑!

끄엑! 끄에에엑!

지금까지 발터에 의해 순차적으로 잡혀 오던 놈들이 단숨에 동굴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콰르르릉!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한 동굴이 무너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흙 속성을 가진 초인들이 급히 동굴을 보강하고, 일부 초인들은 그들을 보호했다. 발터는 가장 앞서서 샌드웜을 처리하고, 몸을 피할 동굴을 만들었다.

한마디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하지만 그 순간이 바로 존 워스가 원한 순간이었다.

스스슷. 철벽의 검왕 존 워스.

그 별명을 들으면 그의 전투 스타일은 무겁고, 단단한 성벽과 같을 것이라 상상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혼란한 전장 속을 은밀히 미끄러지는 모습은 철벽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검을 쓰는 것 또한 그랬다.

“젠장, 이놈들이 갑자기……?”

혼란에 빠진 초인의 등 뒤에서 그의 목을 잘라 낸 공격은 완벽한 암살검이었다.

기습당한 자신의 목이 잘린 것도 알지 못했다. 갑자기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고 느낀 것이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존 워스는 철벽의 검왕이 아니라 암살왕처럼 동굴에 있는 초인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그는 무턱대고 많은 초인들을 노리지는 않았다.

하나하나, 평소 뛰어난 실력으로 인정받던 자들만을 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