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83화


919화

“하하하! 이 표정 좋네요. 당장 스폴 경에게 보여 주고 싶은 얼굴인데?”

이드가 화면에 떠오른 쉴라의 표정을 보며 시원하게 웃었다. 바보처럼 무너지는 찰나의 순간을 잡는 것은 여러모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드의 신체 능력과 휴의 미래 기술은 그 어려운 일을 쉽게 가능케 했다.

능력의 낭비란 바로 이 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혹시라도 그러신다면 아무리 명예 후작님이라 하셔도……………”

음산하다. 음험하게 가라앉은 눈에 귀기가 흐른다.

이드가 마인드 마스터라는 것을 안 뒤부터 신뢰와 예의를 보이던 쉴라의 모습은 간데없고, 반쯤 검을 뽑아 든 귀신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 같다. 

“물론! 개인 정보를 본인의 허락 없이 남에게 보여 줄 순 없죠. 라미아, 이거 넣어 놔!”

화들짝 놀란 이드가 라미아의 아공간에 휴를 던져 넣었다.

그제야 귀신에서 인간으로 돌아오는 쉴라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에 이드는 다시 한번, 어떤 인간에게든 건드려서는 안 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게 이런 장난은 치지 말라니까.”

“……그게 휴를 몰래 손에 쥐여 준 사람이 할 말이냐.”

쯧쯧 혀를 차는 라미아의 모습에 진한 배신감을 느끼는 이드다. 처음 시작은 분명 이드였지만, 아공간에 들어 있던 휴를 꺼내 주지 않았으면 가능한 장난인가 말이다.

하지만 라미아도, 쉴라도 이미 그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한창 존 워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중이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쉴라가 칼같이 단언했다.

“그렇다면 마탑의 아티팩트를 사용한 것이 확실할 겁니다.”

“너무 확신하는 거 아니에요?”

“어쩔 수 없습니다. 초인에 대한 존 워스의 거부감과 경멸은 그만큼 확고한 것이니까요. 제가 지금껏 보아 온 존 워스는 초인기를 각성해 초인이 된다면 스스로에 대한 혐오에 자살해 버릴 사람이에요.”

비유겠지만, 그만큼 쉴라의 믿음은 견고했다.

아무리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만 일이 년도 아니고, 검후를 배신할 계획도 아닌데 초인에 대한 생각을 그렇게 숨길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쉴라의 판단을 신뢰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 저희 예측보다 마탑과 삼검왕의 관계가 가깝다는 거네요. 황금 둥지보다 더 대단한 아티팩트를 넘길 만큼.”

아무래도 쓰임이 단순한 황금 둥지보다는 직접 신체를 변형시키고, 그 상태에서 이동까지 가능하게 만드는 아티팩트를 만드는 것이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좋고 나쁘고, 강력하고 말고를 떠난 난이도와 속성 계열의 차원이라고 하겠다.

“그런 거겠지. 아무렴 초인 혐오자가 알고 보니 초인이었다는 것보다, 초인을 하나라도 더 잡기 위해 초인기 아티팩트를 사용했다는 쪽이 더 납득하기 쉽잖아.”

무슨 막장 드라마의 줄거리도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정말 존 워스가 쉴라가 말한 그런 사람이라면 아마 껄껄 웃으며 초인기 아티팩트를 받아 갔으리라.

“그래도 아쉽네요. 존 워스를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얼굴 가득 아쉬운 표정을 한 쉴라가 말했다.

검후가 최우선인 그녀로서는 존 워스를 잡아 검후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했던 것.

“너무 아쉬워하지 말아요. 에단이 곧 좋은 정보를 가져올 테니까.”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드의 말에 쉴라가 힘없이 웃었다.

뭐라 더 말을 꺼내기 힘들어진 이드가 툭툭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공략 시간을 몇 분 남기고 오 조가 복귀했다.

그 소식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환호로 그들을 맞이하지는 못했다.

그러기엔 초인들의 표정이 너무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는 가장 뒤에 따라 나오는 시신들에 정점을 찍었다.

다른 조에서 사상자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지금에 와서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무력해진 초인들이 조롱받던 상황을 정면 돌파하고자 나섰던 공략에서 나온 사상자라 그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기묘한 침묵 속에서 록마틴 후작이 나섰다.

그는 조용히 오 조의 복귀를 환영했다. 동시에 오 조가 11층 공략을 마치고 12층 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크게 공표했다.

사상자로 가라앉은 분위기를 전공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다.

토벌대는 일부 병사들을 제외하고 모두 기사급이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후작의 의도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짝짝짝!

“단번에 두 개 층을 공략한 오 조가 토벌대 서열 2위다!”

“오조 만세! 토벌대 만세!”

한발 늦지만, 늦은 만큼 더 크게, 더 요란스럽게 환호와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분위기를 수습한 록마틴 후작은 오 조를 해산하고 따로 보고의 시간을 가졌다. 그 후 바로 전체 회의를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발터는 한 번 더 던전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 전체 보고를 해야 했다.

보고가 끝난 후, 좌중은 굳은 표정으로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수백 명의 초인으로 이루어진 오 조를 제 맘대로 휘저은 의문의 존재가 던진 충격은 그만큼 큰 것이었다.

특히 검강을 뿜어 십여 명의 목을 단숨에 잘라 버린 적의 능력은 평소 초인을 못마땅히 여기던 사람들의 입까지 막아 버렸다. 그들 대부분이 검을 갈고닦은 기사들이었으므로 적 암살자의 검술 실력이 실로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초인들이 아니라 자신들이 그 자리에 있었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으리라.

마법이나, 초인기 같으면 계열이 다르니 억지로 깎아 내려 보겠지만, 검으로 그와 같은 위력을 보였으니.

아는 만큼 보인다고, 검에 애정을 가진 자일수록 더욱 입을 열기 힘들었던 것이다.

“암살 기사라니. 마탑이 터무니없는 비장의 수를 가지고 있었군요.”

“암살 기사라니요?”

“보고대로라면 거의 그레이트급의 실력을 가진 자인데. 이런 자를 암살자라고 하기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허~ 아무리 그래도 암살자 따위에 기사라니요? 그레이트급이라니요? 너무 성급합니다!”

“자, 그만들 하시오. 그리고 적은 아무리 전력을 다해 싸워도 모자라지 않으니. 암살자라 낮게 불러 방심하는 것보다는 좋지 않겠소.” 

조용하다 싶더니 쓸데없는 문제가 논란이 되자 록마틴 후작이 나섰다.

이드는 내심 후작의 말에 동의하며 은밀히 모이엔을 살폈다.

지금 언급되는 암살 기사의 정체가 존 워스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 반응이 궁금해서다.

하지만 그렇게 살펴본 모이엔은 무표정했다.

심각한 다른 사람들과는 반응이 다르지만, 오색 기사단으로서의 자신감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눈빛까지 어쩌진 못하는 걸 보면, 연기는 못하겠네.’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모이엔의 눈은 미지에 대한 두려움도 승부욕도 아닌, 재미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발터가 오 조의 유지와 함께 전력 보충을 주장하고 나서자.

히죽.

금방 사라지긴 했지만, 희희낙락하는 모이엔의 미소를 이드는 분명히 보았다.

‘생각대로 흘러간다 이거지?’

이드는 내심 혀를 차며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민하는 록마틴 후작이 있었다. 그는 고집 가득한 발터의 얼굴을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발터 단장의 주장은 알겠소만, 지금 전력 보충이 의미가 있겠소? 지금 토벌 속도를 보면 보충 전력이 안티로스에서 이곳까지 오는 사이 탑의 공략이 끝날 가능성이 높은데 말이오.”

12층을 열었으니, 남은 층은 여섯 개.

아래로 내려갈수록 어려워진다고 하지만, 현재 토벌대의 기세로만 보면 길게 잡아 육 일이면 던전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 이야기에 이드가 힐끔 쉴라를 돌아보았다.

“지금 후작님의 말, 쉴라 단장이 했던 말하고 꼭 같네요.”

그랬다.

존 워스의 암살행 목적에 대한 이드의 추리를 들은 후 쉴라가 지금 후작과 똑같이 물었었다.

“답이 궁금하네요. 설마 저 발터 경이 명예 후작님처럼 잘~ 이라고 하지는 않겠죠?”

“아하하하.”

가늘어진 눈으로 노려보는 쉴라의 모습에 어색한 웃음으로 넘기는 이드다.

사실 이드도 존 워스의 목적을 추측했을 뿐, 발터가 어떤 식으로 대응할지는 몰랐다. 이드라고 초인파가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지고 있는지 모두 아는 것이 아니니까.

특히 마법의 종류 이상으로 다양한 초인기와 그 사용자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발터는 쉴라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허락만 하신다면 하루 안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루. 천리마를 달려도 어림도 없는 시간이다. 용기사라면 모든 짐을 버리고 쉼 없이 날았을 때 가능할까?

“현재 이동 마법은 사용이 어렵다는 것은 알고 하는 말이오? 물론 용기사를 내어 주는 일도 힘드오.”

“알고 있습니다. 또 아무리 급해도 후작님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용기사를 이용하겠다는 무례를 범할 생각도 없습니다. 순수하게 시간과 공간을 줄여 줄 초인기를 가진 초인의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순간 좌중에서 불신 어린 말이 터져 나왔다.

“무슨 그런! 안티로스에서 이곳까지 거리가 얼만데.”

“불가능합니다.”

“공간 이동 초인기로 옮길 수 있는 전력도 절대 많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이런 반응도 무리는 아니었다.

본래 공간을 다루는 초인은 많은 초인들 중에서도 귀하기로 첫 번째를 다툴 정도로 드물다. 또 마법처럼 다양한 변형이 가능하지 않아 한계도 분명했다. 초인기를 사용해 가장 멀리 이동한 거리가 30킬로.

영지 하나를 건넌 것이 최장 기록이다.

안티로스에서 이곳까지 도대체 몇 번의 이동을 반복해야 할까? 거기에 짐이나, 사람이 더해지면 거리는 더욱 짧아진다.

“좌중의 의견은 이런데. 어떻소?”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초인과 초인기에 대해 모든 것이 알려진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제국의 전력에 관계된 일이기 때문에 방법을 정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이동은 가능합니다.”


그 말과 함께 이드가 불끈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콧김을 뿜으며 쉴라와 눈을 마주쳤다. ‘잘~’ 이라고 말했을 때 그 불신에 가득한 눈빛을 받았던 마음의 상처가 씻겨 나가는 것 같다. 

‘역시 방법이 있구나.’

아마도 존 워스도 그에 대한 정보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단장만을 노린 암살을 나설 이유가 없다.


“음, 좋소. 그런 방법이 있다면 제국의 복이지. 그럼 보충 전력은 어떻게 되오? 방법이 있다지만 초인기를 이용한다니 인원이 많지는 듯한데?”

쉽게 납득할 수는 없지만, 어차피 하루가 지나면 밝혀질 거짓을 말하지는 않을 터. 고개를 끄덕인 록마틴 후작이 물었다.

“역시 후작님의 혜안이 대단하십니다. 이 방법으로 이동할 수 있는 인원은 총 30명. 오 조의 가장 큰 피해는 단장급 초인 기사들의 죽음이니. 이들을 보충하고 단장을 잃은 기사단을 지휘하도록 하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현재 오조의 사상자는 총 92명,

그중 단장급만 40명으로 대부분이 존 워스의 행적이 발각되기 전에 암살당한 초인들이었다.

“과연, 하면 그런 기사단을 보유한 가문에 허락을 구해야겠구려.”

“미리 허가를 받지 않은 것은 알지만 회의 전 잠시 짬을 내어 연락을 했고, 모두 허락을 받았습니다.”

“아니요. 토벌대의 전력이 줄어드는 것보다는 낫지. 좋소. 이미 허락도 구했다 하니, 발터 단장의 요청은 받아들여 오 조는 이대로 유지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