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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04화


940화

날이 밝고, 공략이 다시 시작되었다.

“건투를 기원합니다.”

세 개의 문 앞.

발터가 짧은 말을 남기고 오 조와 함께 가장 끝에 있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 문은 이틀 전 오 조가 공략했던 곳이었다. 한번 싸웠던 익숙한 적을 버리고 다른 문에서 고생할 이유가 없기에, 전날 회의에서 오 조가 공략하기로 정해진 곳이었다.

그래서 이 조와 삼 조는 남은 두 개의 문을 두고 어느 곳을 공략할지를 정해야 했다.

“이 조도 공략을 시작하겠습니다. 황녀 전하와 명예 후작님께서 무사히 귀환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모이엔 단장님께서 이 조를 무탈하게 이끌어 주리라 믿고 있겠습니다.”

싱글싱글 웃는 낯을 불쑥 들이민 모이엔에 황녀가 기사의 예법에 따라 가슴을 두드렸다.

그녀의 짧은 격려는 긴장한 이 조 기사들에게 좋은 약이 되었다. 긴장 대신 기쁜 얼굴을 한 기사들이 가슴을 두드려 황녀의 말에 답하며 문 안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모두 문 안으로 사라지자 황녀가 돌아섰다.

“그럼 우리도 출발할까요?”

“우리 조 기사들에겐 격려의 말씀을 해 주지 않으십니까?”

“그럴 필요가 있나요? 우리 조는 이미 최고잖아요. 그렇죠?”

“황녀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최강 삼조!”

“후하!”

황녀의 말에 목이 터져라 소리치는 조원의 모습에 이드가 흐뭇하게 웃었다.

사실 냉정히 따지면 최강이란 말은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삼조의 공과 전리품의 대부분은 이드가 해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사들은 자부심을 가졌다. 이드가 자신들의 조장이기 때문이다. 대신 더욱 노력하려 힘썼다. 그리고 이드가 있음에 안정감을 얻었다. 이드를 믿었다. 덕분에 이 조와 달리 전투를 앞두고도 크게 긴장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드가 지켜 줄 거라는 바보 같은 생각이 아니라 자신들을 잘 이끌어 줄 거라고, 그래서 온 힘을 다해 마음껏 싸울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이드는 그런 기사들의 자세가 기뻤다. 저런 마음가짐이라면 강한 적을 만나도 쉽게 지지 않을 것이니까.

특히 혼전이 예상되는 이번 공략에는 그런 마음가짐이 특히 중요하다.

그에 힘 있고 가벼운 목소리로 외치며 성큼 앞으로 나섰다.

“최강 삼조 가즈아!”


문 안은 후덥지근했다. 축축하고 무거운 공기 중에는 비릿한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앞서 일 조와 적들이 흘렸던 피 냄새가 지워지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 이드는 일 조가 공략한 문을 선택한 것이다.

딱히 특별한 이유는 아니었다. 몬스터와 달리 바로바로 채우기 힘든 초인의 수를 줄이면, 다음 공략에서 일 조의 피해가 조금이라도 줄어들 것이라 계산한 것뿐이다.

“그런데 여기 구조가 특이하네요.”

라미아의 말대로다. 문 안은 좁았다. 구조도 복잡했다. 일 조는 이 통로에서부터 싸움을 시작했다고 했다.

하지만 일 조에 의해 공략된 곳이라서인가. 통로에서 기다리는 적은 없었다.

“이 앞 통로가 끝나고 나타나는 공터에서 기다리고 있겠지.”

일 조가 그곳에서 싸우다 복귀했다. 쉴라는 은색 기사단을 중심으로 단단하게 진형을 유지하고 거북이처럼 차근차근 싸웠다. 기기묘묘한 초인기를 상대로 선 방어 후 공격으로 피해를 최소화하며 싸운 것이다.

“좋은 건 우리도 가져다 써야지. 우리 조 준비는 끝났지?”

“각자 방어할 위치는 철저하게 숙지시켰습니다.”

스폴이 대답했다. 이드는 일 조의 작전을 그대로 가져다 쓸 생각이었다. 좋은 전과를 올린 작전이 있는데, 쓰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화아악!

점점 높아지는 투지와 열기 속에서 갑자기 공간이 넓어지며 공터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수백 초인들이 공터의 절반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그중 선두에 선 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팔을 내밀었다.

우르르르릉!

땅이 불쑥불쑥 솟아오르며 흔들렸다. 그 힘은 파도처럼 갈라지며 조원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일 조처럼 진형을 짜기 전에 갈라 두려는 것이다.

“미리 준비하고 있었네. 하지만 그 정도는 예상했다고.”

아군에게 좋으면 적군에게는 나쁠 수밖에 없다. 방해할 거라는 것쯤은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초인기가 워낙 다양한 만큼 어떤 방법을 써 올지 짐작할 수 없었는데, 설마 땅을 조종할 줄이야.

“나야 고맙지만. 정보 공유가 너무 느린 거 아냐? 초인기로는 인기 스타인 우리 범고래를 이기기 힘들다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범고래가 뿅 하고 나타났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녀석은 나타나자마자 제 할 일을 아는 듯 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에비~ 에비~’

마치 지저분한 것을 본 듯했다.

투두두두둑!

파도처럼 울렁이던 힘이 방파제에 부딪힌 파도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우르릉 울던 땅이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움츠러들었다. 

“공격이 막혔다!”

“이쪽은 여, 역류하려 한다. 끄어억~”

삼 조를 나누려 힘을 쓰던 초인들 중 일부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범고래가 땅을 쪼갠 힘을 지맥에 실어 역류시킨 것이다.

“누가 얌전히 당해 줄 줄 알았냐? 잘했다.”

이드가 범고래의 머리를 쓰담쓰담 하는 사이 조원들은 미리 정해 둔 위치에 서서 삼엄한 기세를 뿜기 시작했다. 그사이 적들은 두 번 더 진형을 짜지 못하도록 공격해 들어왔지만, 범고래 앞에서 완전히 막히고 말았다.

“2번 밀집 진형을 완성했습니다. 공격 명령만 내려 주시면 됩니다.”

뒤에서 들리는 스폴의 보고에 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라이져를 뽑아 들었다. 본격적인 전투 전에 선제공격에 대한 보답은 해야 할 것 같아서다.

“선공은 내가 끊도록 하지. 스폴 경은 신호를 기다리고, 라미아는 계속 주변 경계를 부탁해.”

말과 함께 이드가 훌쩍 몸을 날렸다. 부운귀령보에 분뢰보를 더하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분신술이 따로 없다. 이형환위는 아니지만, 그 빠르기와 환영은 초인들을 압박하고 당혹시키기 충분했다.

그리고 초인들이 뭔가 제대로 반응하기 전, 어어 하는 사이 그들 앞에 도착한 이드가 하얀 이빨을 반짝이며 호쾌한 첫인사를 건넸다.

“반가웠다. 잘 가라!”

일라이져 위로 수 미터 치솟아 오른 은빛 검강이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무형검강결의 무형대천강이다. 오로지 힘! 이라고 외치는 것 같은 초식이 모여 있는 초인들의 한중간을 갈랐다.

한순간에 수십의 초인들이 피떡이 되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변초 따위 잡술이다. 라고 외치는 것 같은 강맹한 초식이지만 단순히

내려치기 일검으로 끝나서야 무형검강결이 운다.

“공겨…… 컥!”

패닉에 빠졌던 초인들이 반응하기 무섭게 땅에 박혀 뻔쩍이던 무형검강이 검신에서 떨어져 상어처럼 땅을 헤엄쳐 내달리며, 땅과 함께 그 위에 선 적들을 갈라 버렸다.

초인들은 실패했지만, 이드는 단 일검으로 적 진형을 둘로 나누어 버렸다.

콰르릉!

진형을 가로지른, 고도로 압축된 검강이 벽에 박혀 폭발하는 순간 이드가 외쳤다.

“삼조 공격!”

“공격하라!”

스폴이 재빨리 명령을 받아 복창했다. 그에 어마어마한 일격을 보며 감탄에 감탄을 더하고 있던 기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적을 처참히 유린하는 조장의 모습에 은근히 남아 있던 긴장이 싹 사라진 것이다.

우오오오오!

그래서 내달렸다. 삼조의 밀집 진형이 전차처럼 둘로 나뉜 적의 진형을 밀어붙였다.

“죽여!”

“진형 유지가 최우선이다. 진형을 유지해!”

“바닥을 노려! 기사 새끼들을 쓰러트려!”

“노바 아이스!”

“방패!”

비명과 고함이 공터를 가득 채웠다. 번쩍이는 초인기와 살벌한 검광이 쉼 없이 부딪혔다. 이드의 일검에 마음에 든든해진 조원들 중에 움츠러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미친 듯이 적을 공격했다. 눈이 뒤집힌 것 같았다. 미친놈 같았다.

그러면서 잘도 진형은 유지했다.

피땀 흘린 연습과 수련의 결과일 것이다. 물론 중앙에서 바락바락 소리치며 조율하고 있는 스폴의 공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오히려 의외인 것은 적 초인들이었다.

“끄아아악!”

“태워 버려! 같이 태워 버려!”

가슴에 찔린 초인이 비명을 지르자 뒤에 있던 초인들이 불을 뿜어 동료와 기사를 함께 공격했다.

기사들 이상으로 초인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모습은 용병의 그것이 아니었다. 뒤가 없는 것처럼 싸우는 그 모습은 마치 기사나 노예병 같았다. 

“첫 번째 문의 몬스터가 저렇다고 하더니. 초인들도 다를 바가 없네.”

중간중간 진형이 무너질 것 같은 곳을 뛰어다니던 이드가 그 모습을 보았다. 전체적인 모습을 보아 노예병도 아닌 것 같은데.

어째서 저렇게 죽자고 싸우는 것일까.

“혹시 계약으로 묶여 있는 건가?”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엇을 위해 제국의 기사들과 목숨을 버려 가며 싸우겠는가. 동시에 궁금하기도 했다. 무엇을 대가로 계약했을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적들 사이로 자주 보인다. 두 가지 이상의 초인기를 사용하는 자들 말이다. 그 대부분이 따로따로 봤을 때는 큰 힘을 발휘하기 힘든 초인기를 가졌다. 두 개가 함께 해야 비로소 강력한 힘을 보이는 초인들이었다.

그러나 정상적인 상태에서 두 가지 이상의 초인기를 각성한 초인은 극히 드물다.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그런데 그런 희귀종자들이 여기 다 모였다고?

말 그대로 설마다. 그보다는 쓸모없는 초인기로 허탈해하는 자들을 모아 마탑에서 재각성을 시켰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쩌면 각국에선 다른 초인 마법보다 이 마법을 가장 가지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 말대로다.

비교적 안전한 진형 중앙에서 최대한 상황을 눈에 담아 두려 노력하던 각국 외교관들의 시선이 어느 순간부터 중복 초인기를 가진 적들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하나가 죽으면 곧 다른 자를, 그자가 죽으면 또 다른 자를 찾아 눈을 돌렸다.

아마 그들은 머릿속으로 자국에 등록된 초인들 중, 저들처럼 단독으로는 전력으로 사용하기 애매한 초인들의 숫자를 세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모두 마탑의 초인 마법을 통해 쓸 만한 전력으로 재탄생한다면 말 그대로 공짜 전력이 생기는 것일 테니까.

‘돌아가는 즉시 통신을 해야겠어. 특급 보고 사항이다!’

‘재각성하면 이천의 초인 기사가 새로 생긴다는 말인데.’

‘마탑 유치에 대해서 다시 고민해 봐야 할 것 같군.’

외교관들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간다.

치열하게 피 흘리는 사람들과는 완전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은 그들이다.

하지만 그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그들은 전력 외다. 그들을 호위하는 기사들이 싸우는 것이지 외교관들이 싸우는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외교관들의 정신이 어딜 가 있든 전황은 이미 삼 조에 완전히 기울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화르르륵!

그 흐름이 행여나 바뀌지 않도록 난화십이식을 뿌리며 작은 구멍을 보수하던 이드는 어느 순간 멀리 시선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올 줄 알았지.”

적 진형의 뒤쪽, 검은 통로 안에서 이드를 향해 전달된 마나.

그것이 목소리를 전달해 왔다.

“오랜만이군.”

탑주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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