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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12화


948화

이그렌의 목적을 스폴이 알게 된 것은 예상외다. 그래도 나쁜 일은 아니다. 그녀는 이드를 대신해 삼 조를 운용하는 실세니까.

이그렌과 목표인 사무엘 백작이 모두 삼조의 조원인 상태이기 때문에 그녀의 도움을 받는다면 좀 더 쉽게 목적을 이룰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허겁지겁 달려온 이그렌도 그 이야기를 듣고는 긴장했지만, 곧 안심하고 크게 기뻐했다.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시간이 다가올수록 떨려서 난감했는데, 스폴 경이 도와주신다니 힘이 납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이그렌의 얼굴이 오랜만에 파란 하늘처럼 펴졌다.

최근 수련장에서 살다시피 한다더니, 그게 검을 날카롭게 벼리는 시간이 아니라 떨리는 심장을 달래는 시간이었나 보다.

“내키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백작에 대한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있다.”

이그렌의 결심을 확인할 겸 이드가 슬쩍 던진 말에,

“할 겁니다. 하겠습니다. 그저 조금 무서울 뿐입니다.”

격렬히 고개를 흔드는 이그렌이다.

그 모습에서 알 수 있듯 사무엘 백작을 처리한다는 목적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을 정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결심은 단단해졌다.

처음 마음먹기는 힘들었다. 하도 당하고 산 것도 있고, 어릴 때부터 교육받은 것이 있어 고위 귀족인 백작에 검을 겨누기가 거북했던 것이 사실. 그러나 생각할수록 그런 거북함은 희미해졌다.

단순히 그와 아버지가 노예로 팔릴 뻔한 것이 다가 아니다. 백작은 시온 가문이 철저히 망하도록 만들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작은아버지가 저리된 것도. 심지어 어머니의 사망에까지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자신 개인의 원한이 아니라 가족의, 가문의 원한이다. 문득 정신을 차리면 어떻게 이런 원수를 옆에 두고 참았나 싶을 정도다.

그런데 그런 인간이 이드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과거의 일은 없던 것으로 하고 사이좋게 지내자며 손을 내밀고 허허 웃는다. 진솔한 사과의 말 하나 없는 가짜.

이러니 과거도 과거지만 미래를 위해서라도 사무엘 백작은 처리해야 한다. 다만 오랫동안 백작에 눌려 살던 기억 때문에 조금 두려울 뿐이다. 

“좋아. 그럼 다음 공략 때를 노려 기회는 많을 테니까. 대신 목표만 노리다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다음번 던전 공략은 상당히 위험할 거야.” “믿어 주십시오.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가슴을 탕탕 두드리는 이그렌을 보며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진짜 기회만 만들어 주고 신경 쓰지 않을 것은 아니다.

그레이를 봐서라도 그럴 수는 없으니, 적당히 몸을 보호할 아티팩트를 챙겨 줄 생각이다.

“그럼 가서 하던 일 봐.”

“……”

“왜, 할 말이 있어?”

“그것이・・・・・・ 최근 사무엘 백작을 지켜보는 중에 이상한 점이 있어서. 그런데 대단한 부분이 아니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잠시 망설였습니다.” 

“이상한 점?”

스폴에 이어 또 변수인가? 이드가 고개를 들어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병사 하나가 사무엘 백작 주변을 맴도는 것 같았습니다. 거기에 걸음걸이나 움직임이 기사급은 아니라도, 확실히 일반 병사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순간 그 말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은 스폴의 얼굴이 뇌리를 스치는 이드다. 아까의 믿음직하던 모습이 한 방에 산산조각이 났다.

백작 주변을 맴도는 특출난 실력의 병사라면 분명 그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끙. 그 병사라면 대충 알 것 같은데. 신경 쓸 것 없…… 는 게 아닌가? 어쩌면 이그렌 경의 경쟁자일지도 모르니까.”

“경쟁・・・・・・ 입니까?”

“맞아. 누가 먼저 사무엘 백작을 노리는지에 대한. 뭐, 그쪽 목적이 백작의 목은 아니겠지만, 비슷할걸?”

백작이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빅터 입장에서는 백작의 목에 칼이라도 들이밀어야 할지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그럼 제가 싸워야 할 상대입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면 그놈을 이용할 수도 있고.”

“어떻게 이용하란 말씀이십니까?”

“그건 혼자 고민해 봐. 혼자서 어려울 것 같으면 스폴 경을 잡고 괴롭혀도 좋고.”

경쟁자의 등장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니 그 정도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는가.

대신 이그렌은 갑자기 변한 상황에 머리가 복잡한 듯 입술을 씹었다. 그나마 이용해서 득을 볼 수 있다는 이드의 힌트에 부정적인 생각만 드는 것은 아니란 점이 다행일까.

하지만 쉽게 상황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

“고민은 나가서 해.”

“네? 네.”

가 보라는 이드의 말에 화들짝 놀란 이그렌, 황급히 이드의 막사를 나선 그는 잠시 망설이다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스폴이 있는 막사를 향해서.

스폴을 괴롭혀도 좋다는 이드의 말을 착실하게 따르는 이그렌이었다.


던전 융합이 있고 삼 일이 지났다.

던전 융합은 이틀 전에 온전히 끝이 났다. 13층에 가득하던 어둠은 융합 던전 안으로 모조리 빨려들어 간 후다.

그 지독한 어둠이 융합 던전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에 토벌대의 근심도 컸다. 그러나 어디 조심해야 할 게 어둠뿐일까.

당장 토리빈이 경고한 대로 그 넓은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한가득이다. 혹시나 혹시나 했지만, 던전 융합이 마무리되고 입구만 조심스럽게 살핀 던전 안은 그야말로 거대했던 것.

토벌대는 당장 아공간 가방을 마련하기 위해 움직였다. 식량과 보급품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에 하루가 더 걸렸다.

그리고 던전 융합 후 나흘째 되던 날.

일 조에서부터 오 조까지.

본진을 지킬 이백의 전력을 제외한 모든 전력이 13층으로 내려갔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어둠이 사라진 13층은 그저 거대한 공터에 지나지 않았다. 13층을 지날 때 바짝 긴장하며 주변을 살폈던 기사들로서는 허탈할 정도로 휑한 모습이었다.

덕분에 토벌대는 거침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그런 토벌대가 다시 멈춰 선 것은 검은 어둠이 커튼처럼 일렁이는 커다란 구멍 앞이었다.

세 개 문이 합쳐지고, 공터 하나를 잡아먹고 나타난 구멍. 사실 바닥에서 천장까지, 한쪽 벽에서부터 반대편 벽까지 이어진 구멍은 검은 기운만 아니면 구멍이라고 하기도 어색할 정도다.

“쯧. 역시 사라지지 않는군.”

그 앞에서 록마틴 후작이 혀를 찼다.

지금까지 본진을 지키던 후작이었지만, 토벌대 전체가 동원되는 공략에 직접 나서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고 새롭게 인원을 나눠 조를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프랑 기사단과 함께 사 조에 합류했다.

다른 조에 비해서 사조의 전력이 비교적 약하다는 평가에 힘을 실어 주는 판단이었다. 덕분에 그때까지 사조를 이끌고 있던 조장이 갑자기 뒤로 밀려나게 되었지만, 다른 조원들이 기쁘게 반기고 나선 때문에 그의 심정은 뒷전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한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 록마틴 후작의 옆으로 이드가 다가갔다.

“역시 명예 후작이 나서 주셔야 할 듯하오.”

하루 전 살폈을 때는 별다를 게 없었지만, 지금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이대로 진입했다가 기습이라도 받으면 기세도 꺾이고, 피해도 커진다.

그래서 전날 이드가 확인을 겸해 먼저 진입하기로 작전이 짜여 있었다.

“만약 위험하다 생각되면 즉시 도움을 요청하고, 탈출하셔야 하오.”

“절대 무리하는 성격은 아니니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어떤 상황이라도 저 한 몸은 뺄 수 있으니 제가 자원한 것 아니겠습니까.”

자신만만한 이드의 말에 록마틴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명예 후작을 믿소,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이고, 블러디 혼의 뿔을 꺾은 분의 실력을 믿지 않으면 무얼 믿겠소. 하지만 항상 만약의 사태는 있기 마련이니 말이오.”

세상 계획대로 되면 얼마나 편할까.

당장 이 던전도 계획대로 되었다면 던전 융합 같은 것 없이 쉽게 공략이 끝났어야 했다.


잠시 후 이드는 토벌대를 뒤로하고 검은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푸스스스스-

눈앞에서 검은 안개가 흩어졌다.

“역시 이건 13층에 있던 어둠이군. 밖에서 안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어.”

다른 13층과 다른 것은 어둠의 깊이가 깊지 않다는 것이다.

잠시 후 앞을 가리던 어둠이 사라지고 빛과 함께 시야가 회복되었다.

기감을 통해 주변에 아무도 없음은 이미 확인을 마친 상태이기 때문에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등 뒤에는 방금 지나온 검은 기운이. 양옆으로는 부채꼴로 넓어지는 돌로 된 벽이.

그리고 정면으로는 검은색 숲이 차례대로 이드의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평범한 숲은 아닌 것 같고.”

무슨 말이 필요한가. 세상 어디에 검은 숲이 있다고.

그리고 숲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바로 검은 숲의 중앙 경계에 우뚝 솟아 있는 성이었다.

성의 형태는 기이했다. 보통 원형이나 사각형으로 만들어진 성과 달리, 이드가 있는 방향으로 마름모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이 숲과 어우러져 검은 파도를 가르는 전함 같이 보였다.

특히 그중 이드의 눈길을 끄는 것은 성벽 위로 삐죽이 솟아 있는 원통의 물체였다.

어른 몸통만 한 그것은 기분 나쁘게 이드가 있는 곳으로 그 끝을 향하고 있었다.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묘하게 기분 나쁜 그것.

“아무리 좋게 봐 줘도 포신으로밖에는 안 보이는데.”

거기에 그 뒤로 아른거리는 사람의 그림자까지 딱이다.

아무래도 기습을 걱정한 록마틴 후작의 염려는 옳았던 것 같다.

그레센 대륙에는 화약을 이용한 대포는 없다. 마법이 있는데 위험하고, 보관도 어렵고, 위력도 약한 화약을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신 대포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아티팩트를 사용했다. 아티팩트가 없어도 마법사가 직접 나서면 되고.

아마 성 위에 있는 저 원통이 그런 종류의 물건이리라.

“그런데 왜 안 쏘는 건데? 설마, 한명한테 쏘기엔 낭비라서 그러나?”

사실 농담처럼 이드가 꺼낸 말은 사실이었다.

“아무렴 상관없으려나. 기습이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온 김에 처리할까?”

원래 계획은 내부의 상황을 확인한 후 토벌대에 알리는 것이지만, 굳이 혼자 처리가 가능한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

슬쩍 검은 어둠을 돌아본 이드가 가볍게 목을 비틀며 앞으로 나갔다.

“보고가 좀 늦겠지만. 기다리겠지. 뭐.”

그리고 그렇게 움직이는 이드에 성 위에서 토벌대가 들어서길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 당혹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저 미친 새끼가 이쪽으로 오는데. 쏠까요?”

“쏘긴 뭘 쏴! 그거 한 발에 얼만데. 그런데 저 미친놈은 무슨 용기로 저 혼자 오는 거야? 저 새끼 뭐야?”

“뭐든 무슨 상관입니까? 쏴 죽이면 되는 거지.”

“야! 그거 비싼 거라니까. 쏘지 말라고.”

“자요! 여기 한 발 값. 아까부터 쏘지도 못하고 잡고 있느라고 근질근질한데. 내 돈 내고라도 한번 시원하게 쏴 봐야겠슴다.” 

그 말과 함께 주머니를 던진 남자가 원통의 끝을 이드에게 향하고는 손에 쥐고 있던 장치를 당겼다.

쿠~웅!

묵직한 소리다. 공기가 뒤로 밀리고 원통에서 검은 무언가가 이드를 향해 튀어 나갔다.

“휘익~ 대단한데.”

순간 그 속도와 힘에 휘파람을 불던 남자.

그러나 다음 순간 휘파람이 뚝 끊어지고 말았다.

서거거걱!

은빛 아른거림과 함께 쏘아 낸 검은 그림자가 둘로 갈라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꿀꺽,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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