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8화
495화
용병이 전한 정보가 맞다면, 만찬에서 자신과 이야기를 주고받은 젊은 초인은 자신을 철저히 기만한 것이 된다. 어쩌면 벤을 잡아 온 것부터가 철저히 계획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노리고 이런 귀찮고 복잡한 일을 벌였을까?
하이탈 자작은 자신과 이야기하면서 속으로는 한참 비웃었을지도 모를 이드의 모습을 떠올리고 분노에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화만 내고 있을 수는 없다.
“어쩌면 지하 감옥 ‘그 방의 일이 알려질지도 모른다.’
그가 하이탈의 출입을 완전히 막아 놓고 파이온을 잡으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그 방에서의 일이 밝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이번 일에 관계된 자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파이온과 관계된 시점에서 이미 놈들은 자신이 처리해야 할 적이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적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놈들이다. 자작은 귀한 손님에게만 내주던 방에 쉬고 있을 이드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집사. 지금부터 누구도 성을 드나들 수 없다.”
“바로 골드로드 기사들과 병사들을 준비시키겠습니다, 주인님. 또한 수비대장에게 일러 안가를 포위하도록 하겠습니다.”
집사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그는 감히 주인의 성장을 방해하는 자들을 처단하기 위해서 자작이 신경 쓰지 못한 부분까지 짚고 나섰다.
감히 집사가 간섭할 선을 넘은 발언이었지만 자작은 노여워하지 않았다.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곁을 지킨 집사야말로 그의 최측근이었기 때문이었다.
“좋다. 그리고 길드에 말해서 용병들이 감히 나서지 못하게 단속시키도록!”
집사는 하이탈 자작의 말에 고개를 숙여 대답하고는 명령을 전하기 위해 빠르게 물러났다.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주인님!”
집사가 나가자 하이탈 자작도 감히 자신을 기만한 자를 처단하기 위해서 벗어 두었던 옷을 걸치고 일어났다. 그런 자작의 눈에 마침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뮤직 박스가 들어왔다.
“쯧, 더 이상 포식이 필요 없을 때 움직여야 했는데, 내가 너무 서둘렀어. 날 노리는 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 불찰이다.”
하이탈 자작은 뮤직 박스를 손에 들어 바라보다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발로 밟아 꾸욱 힘을 주었다.
콰지직!
나무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뮤직 박스는 힘없이 부서져 버렸다.
“그러고 보니 놈의 정보를 얻을 구멍이 있겠군.”
부서진 뮤직 박스를 바라보던 하이탈 자작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몸을 돌렸다. 처음 이드 일행에게 관심을 가졌던 이유. 그들을 찾아 달라고 요청했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자작은 비밀 방의 문을 열어 수정구 위에 손을 얹었다.
우우웅-
다음 순간 수정구가 밝게 빛을 발하며 울기 시작했다.
타탁!
‘역시 지상에는 없다.’
부서진 성벽의 돌 그림자 사이로 멈춰 선 이드가 삼층까지 흉하게 무너진 성벽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생존한 산적을 찾아볼 생각으로 방을 나선 이드는 빠르게 성을 돌았다. 삼층까지 휑하니 그 속을 내보이고 있는 사고 현장 덕분에 각 층을 다니기에는 편했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산적을 가두고, 초인을 흡수할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지하에 있으려나? 너무 뻔하기는 하지만 비밀스러운 장소는 지하에 두는 것이 정석이지.”
이드는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지키고 있던 병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일 층의 한구석 모퉁이 그림자 아래에 서 있었다.
일 층을 돌아볼 때 그들의 모습에 혹시나 싶긴 했는데, 그래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선은 다른 층을 먼저 살폈더랬다. 그런데 역시나 위층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목표는 지하라고 생각했다.
지하라는 장소가 너무 통속적인 느낌이 있기는 하지만, 오랜 세월 수많은 비밀 단체에게 사랑받아 온 장소였다. 그러니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봐야 했다.
“빨리 살펴보고 돌아가야겠다.”
이드는 기척을 살펴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몸을 날렸다. 대부분의 병사들과 기사들이 파이온을 찾아 나간 덕분인지 성안에는 기사도, 병사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덕분에 이드도 빠르게 성안을 살펴 볼 수 있었지만 말이다.
소리도 없이 복도를 달려 병사들의 앞에까지 다다른 이드는 그들과의 거리와 시야를 가늠하며 그림자 아래 몸을 숨겼다.
그리고 두 병사의 시선이 동시에 밖으로 향하는 순간.
‘지금이다!’
이드는 두 병사의 사각을 향해서 부운귀령보로 뛰어들었다. 두 병사는 분명 눈을 뜨고 있었지만 이드를 보지 못했다. 이드가 달리고 있는 공간이 바로 두 병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죽어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드의 부운귀령보가 기척과 함께 바람의 결을 밟아 작은 미풍도 일지 않게 만들었다. 때문에 이드가 두 병사의 옆을 지나치는 순간에도 그들의 머리카락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수고!”
이드는 그들의 노고를 잠시 칭찬하고는 순식간에 지하 계단의 그림자 안으로 몸을 숨겼다.
‘지하 감옥이었군.’
지하 계단의 끝에 내려선 이드는 복도의 양측으로 나란히 늘어선 철창의 모습에 이곳의 용도를 알 수 있었다. 감옥은 한 점의 빛도 들지 않아 캄캄했다.
겨우 지하 계단을 굴러 떨어진 몇 조각의 희미한 빛이 들 뿐이었다. 하지만 이드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보자. 방은 모두 비었다. 그럼 입구의 병사들은 뭘 지키고 있었을까나?”
이드는 천천히 양쪽의 방들을 둘러보다 복도 끝에 이르러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검은 문을 발견했다. 그 문을 보는 순간 이드는 이거다 싶었다.
‘심봤다! 드디어 찾았구나!’
이드는 소리 없는 환호를 올리고는 문 앞에 섰다. 문을 퉁퉁 두드린 이드는 그 문이 통짜 철이란 것도 알 수 있었다. 혹시나 싶어 당기고 밀어 봤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쩝. 역시 쉽게는 안 풀리려나.’
이드는 작게 입맛을 다시고는 문을 살피다가 일라이져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검신에 검기를 형성해 자물쇠가 있을 만한 부분으로 그어 내렸다. 문에는 특별한 장치가 되어 있지 않은 듯했다.
찰캉.
이드는 문을 잡고 있던 손을 통해서 결속되어 있던 무언가가 풀려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반사적으로 힘을 주자 빼꼼히 열리는 문틈 사이로 환한 빛을 뿜으며 문이 열렸다.
환한 빛으로 가득한 방 안에는 늘어진 쇠사슬과 빛이 흐르는 마법진,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앉은 한 남자가 있었다. 이드는 열린 문 사이로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작게 웃어 보였다.
“빙고!”
이드는 슬쩍 계단을 돌아보고는 방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성안에 있던 골드로드 기사들과 병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여성의 한 부분을 중심으로 원진을 짜며 모여들었다.
[아무래도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움직임이 묘하네요.]
원진의 중심에 있는 방에 있던 라미아가 밖의 동태를 확인하고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백작은 밝게 빛을 발하고 있는 수정구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수정구 너머의 인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이 어린 후배가 이 시간에 왜 연락을 했을까.
백작은 며칠 전 자신이 후계자의 수색을 부탁했던 일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인가, 후배. 혹시 내가 부탁했던 일에 진척이 있나?”
다음 순간 하이탈 자작의 음성이 수정구에서 흘러나왔다. 일전 백작의 목소리처럼 뭉개지고 흐트러진 목소리였다.
“늦은 시간에.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그와 관련해서. 백작님께. 문의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씨익.
‘찾았구나.’
백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첩보를 받고 연락을 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접촉할 가능성은 높게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후계자의 목적지가 하이탈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말했던 이들과 접촉은 해 봤나?”
:…..예.”
“그들의 이름도 들었나?”
“그들…………은 누굽니까?”
“나라고 보지 않고서 어떻게 알겠나. 우선 이름을 알아야 그들이 내가 찾던 이들인지 알 수 있지 않겠나?”
·그렇군요. 그들은 용병이 에단…………… 엘프가 일리나, 청년 검사가……………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을………… 따서, 이드라고 하더군요.”
백작은 불끈 주먹을 쥐며 드물게 활짝 웃었다.
‘흐흐흐. 찾았구나.’
혹시나 하며 확인해 본 첩보가 정확했던 것이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럴 확률은 높았다. 공간 계열 마법의 사용이 불가능한 지금, 도보를 이용해서 아나크렌으로 넘어간다면 당연히 거쳐야 할 곳 중의 하나가 하이탈이었으니 말이다.
이제 후계자에게 따라붙어서 접촉하고 마스로 데려오기만 하면 된다.
백작이 이드의 처리에 대해서 생각할 때 자작이 그를 불렀다.
“백작님………… 그들은 누굽니· ・까. 아무래도 금번· 제 영지에 일어난………… 일에 그들도 관련이 있는 듯, 합니다.”
“흐음……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백작은 대답하면서 자작에게 이드에 대한 정보를 가르쳐 줄지 말지를 고민했다. 그때 다시 자작의 통신이 들어왔다.
“둘 다 상당한 실력…………의 초인이었습니다. 더구나 이번에 사고를 냈던 떠돌이와 타국의………… 정보원과도 연결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제 정보가……………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백작은 한쪽 눈을 크게 떴다.
“두 명의………… 초인이라.”
백작은 자작이 언급했던 한 단어를 말하며 얼굴 가득 흥미로운 표정을 띄워 보였다.
‘초인이란 말이지. 이놈, 후계자를 초인으로 착각하고 있구나. 이거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는데. 어쩌면 이번 기회에 후계자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겠어.”
백작은 이드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기로 했다. 대신 은근히 자작이 직접 나서도록 부추기는 말을 건넸다.
“자네 말이 맞아. 그들은 외지에 떨어져 있던 초인들이네. 우연히 그 실력이 내 귀에까지 들어왔고, 그들을 내 밑에 둘 생각이었지. 그런데 이미 다른 곳과 연이 이어졌다면 어쩔 수 없겠군. 아쉬워. 굉장한 실력자들이라는데 말이야. 혹 자네가 그들과 부딪치게 된다면 필히 조심해야 할 거야. 특히 청년 검사는 공방일체의 특별한 초인기를 가진 아주 뛰어난 검사이니 각별히 신경 쓰시게.”
백작은 이후 몇 가지 당부를 더하고 통신을 마쳤다. 그리고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서 소리쳤다.
“밖에 있느냐!”
다급해 보이는 백작의 말에 수정구를 들고 왔던 마법사가 급히 대답했다.
“옛.”
“당장 가서 자리토를 불러와라. 하이탈로 가야겠다!”
“예? ..옛!”
순간 밖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려온 후 급하게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백작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기분 좋은 기대감을 드러냈다.
“이런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수야 없지. 크하하하하. 과연 강화된 초인과 후계자, 누구 실력이 더 좋을까. 재밌겠구나. 재밌겠어!”
“뿌득! 이놈!”
하이탈 자작은 수정구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분명 백작이 자신에게 말해 주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백작이 자신을 속였다.
자작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캐치할 수 있었다. 어차피 자신도 그를 완전히 믿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드 일행에 대해서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자신이 취할 것은 취하고 건네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분명 자신이 다급한 상황이라고 말을 했는데도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같은 네트워크 안에 있는 동료를 대하는 예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어디 네놈이 뭘 숨기고 있는지, 이드라는 놈을 잡고 이야기를 해 보자.”
자작은 크게 걸음을 걸으며 한쪽 벽에 걸려 있던 검은 채찍을 손에 들었다. 그러자 길게 늘어져 있던 채찍이 마치 살아 있는 듯 고개를 치켜들더니 자작의 허리에 감겨들었다.
자작은 살아 있는 동물을 대하듯 채찍을 한 번 쓰다듬고는 방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골드로드의 기사가 고개를 숙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
자작은 기사를 재촉하며 앞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