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41화
1076화
끌려 내려온 지하실에서 케마란과 네리베르를 본 이드는 놀랐다.
황녀의 방문으로 검후의 수련도 일찍 끝났을 텐데, 아직 지하실에 머무르고 있다니. 대견하지 않은가.
“남아서 수련 중이었던 거야? 피곤하지 않아?”
“피곤해 죽을 거 같아요. 지금도 눈이 감겨요.”
“・・・・・・ 경계를 서고 있던 선배님이 알려 주셨어요. 검후님께서 지하실에 가신다고.”
가만히 보면 두 사람 얼굴에 다 떨치지 못한 잠기운이 한가득한 데다 자다 일어난 머리는 부스스한 것이, 딱 자다 끌려 나온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면 저택에 두 사람이 검후의 밤 수련에 참관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에 검후가 지하실로 간다는 말에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깨워 지하실로 밀어 넣은 것으로 보였다.
황녀의 부탁으로 인한, 예정에 없던 지하실 행인데 말이다.
“에구. 불쌍한 녀석들. 검후만 관련되면 은색 기사단도 융통성이 없단 말이지.”
“히잉~ 마스터!”
“졸리면 너희들은 돌아가서 자게끔 말해 줄까?”
구미가 당기는 발언에 두 어린양의 귀가 팔랑거렸다. 이드의 정체를 알기에 그의 말이라면 어렵지 않게 통하리라는 것도 잘 알았다.
하지만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검후님이 신경 써서 내려 주시는 가르침인데 피곤하다고 포기할 수는 없죠.”
잠에 대한 유혹은 컸지만, 그로 인해 검후를 실망시키는 게 더 싫은 모양이다.
그렇게 두 어린양이 악마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사이, 검후와 함께 지하실을 둘러 본 황녀가 돌아왔다.
사실 넓기만 한 지하실에 볼 게 무어 있겠냐만, 그 핑계로 조손 간에 소소한 대화를 나눈 것이리라.
“은색 기사단의 케마란 몰이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같은 은색 기사단의 네리베르 폴 다임이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우리 오랜만이죠?”
두 어린양을 본 황녀가 반가워했다.
그에 검후가 옆에서 깜빡했다는 표정을 했다.
“너희를 깨울 필요는 없었는데. 말해 두는 걸 깜빡했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는 두 분과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라면 무조건 행복합니다.”
좀 전까지 졸리다고 투정을 부리던 입에서 나온 소리가 저거라니. 헛웃음이 나는 이드였다.
아무래도 기사단 생활을 통해 사회생활의 필수인 아부를 자연스럽게 습득한 모양인데. 어쩐지 씁쓸한 건 기분 탓이겠지?
“그런데, 서로 아는 모양이구나.”
“네. 토벌을 함께한 전우들이에요.”
비슷한 나이와 비슷한 관심사, 그리고 각각 황녀와 기사단의 막내라는 이유로 알게 모르게 보호받던 처지까지.
여러 이유로 제법 친분을 쌓은 세 사람이다.
“두 사람이 할마마마의 수련에 함께하고 있는 건 처음 알았어요.”
황녀는 기분이 좀 복잡했다.
이때까지 검후에게 난화십이식을 배우는 건 자신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쉴라도 익히고 있긴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일부였을 뿐이었다.
한데 이번 사건을 통해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검후는 쉴라와 스폴은 물론이고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실력을 가진 두 어린 기사에게도 난화십이식을 가르치고 있었다.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녀들에게 난화십이식을 가르치지 말라고 할 권리도 없었다.
그건 오로지 검후가 결정할 일이지, 자신이 간섭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특히 두 사람이 난화십이식을 접한 계기는 이드에 있다고 했다. 설사 검후가 그녀의 부탁을 들어준다 해도, 이드의 가르침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순간의 기분에 흔들린 행동으로 지금까지 쌓은 인상이 나빠지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게다가 다른 무엇보다, 자신 스스로 그런 옹졸한 소인배가 되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많이 부럽네요. 매일 할마마마와 함께 수련하신다니. 저는 오늘 돌아가면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모르는데.”
“황공하옵니다.”
복잡한 기분을 털어 버리려는 황녀의 말에 두 어린양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대신 검후가 황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황녀가 보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오늘처럼 말이지요.”
그 말이 끝난 직후, 이드와 검후 사이에 복잡한 눈빛이 오가기 시작했다.
‘설마 그거, 이후에도 오늘처럼 내가 마중을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겠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이드 님껜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꼭 필요한 일도 아니지! 난 안 해!’
먼저 눈을 돌린 것은 검후였다.
아무래도 부탁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좋은 기회이니, 대련을 해 보지요. 경쟁심은 황녀의 말랑말랑한 정신력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겁니다.”
슬쩍 말을 돌린 검후에 황녀를 포함한 세 어린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쪽은 일 년 만에 만나는 할마마마를 보기 위해 찾아왔다가, 또 한쪽은 갑자기 자다 일어나 대련이라니.
“할마마마. 이렇게 갑자기요?”
“갑자기는 아니지요. 당분간은 밤에 볼 테니까요. 혹시 이전에 대련해 본 적이 있나요?”
“아니요, 아직 없습니다.”
칼 들고 나선 길에 쌓은 친분이다. 어지간하면 한번 어울릴 만도 하지만, 황녀와 신입 기사라는 입장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토벌이라는 큰 전투를 앞둔 상황에서 개인적인 수련은 몰라도, 다칠 수도 있는 대련은 어지간해서는 피하는 편이 낫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다면 하세요. 특히 황녀에게 좋은 자극이 될 겁니다.”
“대련 확정입니까?”
이드가 심히 불손한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비겁하게 이야기도 끝내지 않고 도망치다니.
“아니면 이드 님이 대신해 주시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전 구경하도록 하죠.”
달밤에 외출도 모자라 싸움까지 하고 왔는데, 거기에 더해 운동이 웬 말인가!
이드는 얌전히 한발 물러섰다.
그렇게 갑자기 시작된 대련에 먼저 검을 든 것은 황녀와 네리베르였다.
“물론 이 다음은 케마란, 네 차례란다.”
황녀의 말에 소심하게 단짝을 응원하던 케마란은 급히 링스피어의 상태를 점검하고, 몸을 풀었다.
“내가 멈추라고 하기 전까지 계속하는 것으로 시작!”
“기사도에 따라 정정당당하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사도에 따라 정정당당하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검후의 신호에 황녀와 네리베르의 검이 서로를 향했다.
두 사람의 자세는 달랐다.
네리베르 역시 최근에 난화십이식을 배우고는 있지만, 말 그대로 갓 시작한 단계라 실전에 사용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현재 그녀의 기수식은 다임 백작가의 검법에 따른 것이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무공을 익힌 이래로 지금껏 수련해 왔으니.
다만 온전한 다임 백작가의 검법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난화십이식이라는, 항상 꿈에 그리던 무공을 접한 후 그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탓이었다.
따따땅!
까라랑!
한쪽이 공격하면 방어하고, 다시 입장이 바뀌어 공격하고 방어하고.
분명 날카로운 검을 든 대련임에도 차분하고 안정적인 흐름을 보였다.
“마스터는 누가 이길 것 같으세요?”
“넌 누가 이길 것 같은데?”
심각한 표정을 한 케마란의 모습에 이드가 귀엽다는 듯 되물었다.
“저야 모르죠. 하지만 네리베르가 이겼으면 좋겠어요.’
“어쭈~ 우정을 선택한 거냐?”
“아뇨. 아무래도 저 대련에서 이긴 사람하고 제가 이어서 대련을 할 것 같잖아요. 그러니 어려운 황녀님보다는 네리베르가 낫죠.”
아. 허무한 우정이여.
이드는 내심 혀를 찼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케마란의 말처럼 황녀에게 검을 들기가 어디 쉬운가.
특히 중병에 속하는 링스피어를 다루는 케마란의 입장에서는 혹시 힘 조절에 실패해서 황녀를 다치게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아주 태산일 거다.
“그러니까 대답해 주세요. 네리베르가 이길 수 있을까요?”
“아쉽지만 황녀가 이길 거다. 조금 고생은 하겠지만…..”
마치 미래를 내다보는 듯한 이드의 말에 케마란의 어깨가 툭 떨어졌다.
누구 말인데 감히 의심을 할까.
“아아…… 네리베르 바보.”
조용히 친구에게 원망을 돌린 케마란은 곧이어 이드의 뒤에 숨어 링스피어의 날을 바닥에 비비기 시작했다.
혹시 잘못 스치더라도 베이지 않도록.
“크크큭.’
“마스터도 미워요.”
“미워도 좋다. 크크큭.”
대련은 이드의 말대로 흘러갔다.
안정적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확실히 네리베르가 지는 방향으로 가기 시작한 것.
줄곧 케마란과 붙어 다닌 영향인지 중간에 변칙적인 공격으로 공세에 나서며 네리베르가 잠시 황녀를 밀어붙이기도 했지만, 두 사람이 익힌 무공의 근본적인 한계를 뒤집을 정도는 되지 못했다.
그걸 넘어설 정도로 네리베르가 강한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나면 이번엔 케마란과의 대련입니다.”
“쉴 시간을 주지 않으시고요?”
“지금 반응이 황녀의 정신이 말랑말랑하다는 증거예요.”
“……”
단번에 황녀의 입을 닫아 버린 검후는 이드를 향해 다가왔다. 정확하게는 그 뒤에 숨은 케마란이 목적이었다.
“긴장되지?”
“아니…… 네. 황녀님과 대련이라니. 솔직히 떨려요.”
반사적으로 고개를 흔드는 케마란이지만 이드가 툭 치자 바로 말이 바뀌어 나왔다.
검후는 그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보더니, 강조하듯 힘을 주어 말했다.
“긴장할 수 있겠지. 하지만 최선을 다하렴. 대련은 정정당당해야 한단다. 절대 봐주지 말고, 망설이지도 마라. 황녀의 팔다리 어디 한 곳이 베이고 부러져도 괜찮으니까.”
“거, 검후님?”
케마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그렇지 않을까. 네리베르는 그래도 백작가 출신이지만, 자신은 평민 출신이다.
운이 좋아 이드를 만나 무공을 익히고, 그 인연을 통해 지금에 이르렀지만 사실 실감이 나지 않는 매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황녀의 몸에 피를 내도 좋다고? 아니, 피를 보라고 하신다. 다름 아닌 검후께서.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검후의 표정은 전혀 흔들림이 없다.
이드는 케마란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는 걸 보며 말했다.
“너무 세게 나가는 거 아니야?”
“아니요. 황녀에겐 이런 자극이 필요해요. 토벌을 통해 실전을 겪었지만, 그때와 지금은 또 다르니까요. 이드 님도 아시잖아요.
“뭐, 한번 깨질 필요는 있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 이드는 곧 케마란의 머리를 꾹 눌렀다.
“마스터?”
“그렇다고 한다. 그러니까 가서 제대로 실력 발휘해 버려. 혹시라도 황녀가 다쳤다고 쟤가 말을 바꿔도 걱정하지 말고. 네 뒤에는 내가 있으니까.” 한순간 검후에서 ‘재’가 돼 버린 당사자가 기막혀했다.
“나 참. 제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세요?”
“응. 오늘부터 그래 보여. 그러니까 겁먹지 마. 케마란, 네가 누구에게 무공을 배웠는지 기억해.”
누구긴 누군가. 이드와 일리나를 거쳐, 현재는 쉴라와 검후에게 수련받고 있다. 이만큼 호화로운 스승진은 황녀도 가져 보지 못했을 것이다.
“……네!”
빠르게 자신감을 회복한 케마란이 힘 있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