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44화
1079화
담을 넘자 정원이 나왔다.
‘휘익. 잘도 숨었네.’
잘 꾸며진 정원에 절묘하게 숨어 있는 자들을 찾아낸 이드는 그 재주에 내심 박수를 보냈다.
몸을 투명하게 하고 있는 자부터 시작해서 흙과 나무, 꽃에 동화된 자, 작은 동물로 변신해 있는 자 등.
그 방식도 가지각색인 것이, 과연 초인 기사단의 단장의 저택이라고 할 만했다.
특히 물질과 완전히 동화되거나 몸을 변신하는 재주는 중원의 살수들이 알았다면 꿈에서라도 가지고 싶을 만한 재주들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런 능력도 본신의 실력이 높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 그들 중 담을 넘은 이드를 발견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뿐인가. 이드가 곳곳에 숨은 초인들의 재주를 구경하며 느긋하게 저택 정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정원에 숨은 수십 명의 초인이 부운귀령보 하나에 바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 때문일 것이다.
똑!
…..!!”
멍하니 저택 밖을 경계하던 초인들은 이드가 문을 두드리는 첫 번째 노크 소리를 듣고 천둥소리에 놀란 아이처럼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고. 똑!
두 번째 노크 소리에는 벌떡 몸을 일으켰으며,
똑!
세 번째 노크 소리가 끝나는 순간엔 낭패한 얼굴로 각자의 무기를 들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말 그대로 당겨진 화살이랄까.
화르르르-
조용하던 정원에 살기와 투기가 들불처럼 일어나 이드를 향해 덮쳐들었다.
그래 봐야 이드에겐 지나가는 산들바람보다 못한 것일 뿐이지만 말이다.
“계십니까.”
거기에 더해진 태연한 이드의 목소리는 방아쇠였다. 수신호를 마친 초인들은 당장에 달려들기 위해 몸을 날렸다.
달깍.
그 순간 문만 열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손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열린문 사이로 나타난 것은 수수하지만 차분한 인상의 메이드였다.
그러나 분명히 말해 절대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아무리 초인 기사단장인 발터의 저택이라고 하지만, 설마 초인을 일개 고용인으로만 쓰지는 않을 테니까.
해서 이드도 그녀를 단순한 메이드로 대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실례하게 되었습니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안내하겠습니다.”
“그럼.”
이드는 옆으로 비켜서는 메이드의 손짓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그와 함께 뒤에서 문이 닫히며 들리는 소리.
“여러분들은 계속 수고해 주세요. 그리고 특별히 오늘의 교대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교대 없는 경계 근무라니!
징계성이 명백한 명령에 소리 없는 아우성이 퍼졌다. 초인이라도 밤샘은 힘든 것.
외부에 알리지 않고 라울을 만나기 위해선 어쩔 수 없기는 했지만, 어쩐지 못 할 짓을 한 기분이 드는 이드다.
경계를 서던 초인들에게 냉정하게 통보를 마친 메이드는 곧 앞으로 나와 섰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부탁하죠. 그런데 사람이 많군요.”
이 말에는 ‘전에 왔을 때보다’라는 앞부분이 생략되어 있었다.
그 때에 비해 지금은 어떤가. 당장 이드가 보는 중에도 저택 안을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
특이한 점이라면 그들 모두가 지금 이드를 안내하고 있는 메이드와 같은 초인들이며, 여자라는 것일까.
“저를 포함해서 모두 주인님을 모시는 비서들입니다.”
“주인님이라면?”
발터? 라울? 일단 발터는 성격상 아닐 것 같은데.
“곧 손님이 만나실 라울 님이십니다.”
“하하. 처음 알았군요. 그를 돕는 아름다운 여성분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여기 계신 비서가 몇 분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지금 저택으로 출장을 나온 비서는 열아홉 명입니다.”
열아홉. 적지 않은 수다. 거기에 출장을 나온 이들이라고 한정 지었다.
그 말은 이곳에 오지 않은 비서들이 더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남은 숫자를 여기 온 자들과 엇비슷하다고 가정하고 계산해 보면 대략 사십 명.
이드는 사십여 명의 비서들의 보조를 받아 서류를 처리하는 라울의 모습을 상상했다.
“하렘 군단…… 아, 죄송하군요. 저도 모르게 말실수를 했네요.”
“호호호. 괜찮습니다. 사실 저희끼리도 하렘 비서 군단이라고 부르거든요.”
과연 사람의 생각이란 게 다 비슷비슷 한 모양이다.
이드는 부드러워진 분위기를 타서 정보를 얻기 위해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대도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알려 줘도 크게 상관이 없는 질문은 답하지만, 예민한 문제에 대해서는 능숙하게 말머리를 돌리며 확실하게 선을 지키는 모습이었다.
‘단순히 미녀를 모은 하렘이 아니라, 능력 출중한 대기업 비서들 같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두 사람은 어느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메이드는 똑똑 노크를 하고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안쪽에는 커다란 책상과 두껍게 쌓여 있는 서류의 탑, 그리고 그 너머로 라울의 머리가 보였다.
“안내는 여기까지입니다. 들어가시면 되겠습니다.”
“고마워요. 이름이 어떻게 되죠?”
“퍼블입니다. 이드 님을 안내하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처음엔 그저 ‘손님’이라고 칭해서 정체를 모르나 했더니 역시 알고 있었다.
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깔끔했다. 라울의 책상을 기준으로 양쪽에 서류가 가득 쌓인 책상이 두 개씩 있었고, 한편엔 편해 보이는 소파가 자리했다. 또, 방의 중앙엔 강력한 기운을 가진 무언가가 놓여 있었던 흔적도 남겨져 있었다.
이드가 방 안의 모습을 머리에 담고 있을 때 라울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방문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미리 알려 주셨다면 화려하게 맞이해 드렸을 텐데 말입니다.”
“그럴까도 했지만, 어차피 그 연락도 은밀히 해야 하니 똑같지 않나 싶어서 말입니다.”
“그렇기도 하겠군요. 어쨌든 환영합니다. 비록 제 저택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아, 혹 발터를 찾아오신 건 아니시죠?”
“아닙니다. 발터 단장을 만나려 했다면 밤에 왔겠죠.
“하하하. 역시 아시는군요. 존 워스의 문제로 최근 발터가 돌아오는 시간이 많이 늦습니다. 서서 이럴 게 아니라, 우선 앉으시죠.”
이드는 라울이 권하는 대로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소파 중앙에 놓인 테이블에는 과자와 과일이 가득했다. 이미 제법 빈 것이, 아무래도 이 방을 쓰는 사람 중 군것질을 좋아하는 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백이면 백 라울일 것이고 말이다.
‘상사를 앞에 두고 군것질을 하며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려고’
맛을 느끼기 이전에 체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무엇보다 과자로 체하면 고기보다 힘드니, 조심하는 것이 최고다.
“그런데 이드 님이 절 먼저 찾아오실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거, 용건이 매우 궁금한데요? 하하하.”
라울은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며 주전자를 따랐다. 그러자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지 따뜻한 차가 흘러나왔다.
“우선 이걸 확인해 주겠습니까?”
이드는 침입자들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탁자에 꺼내고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향이 진하지 않은데. 맛이 좋군요.”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이자들은 누굽니까? 하나같이 개성적인 생김새들인데. 한 번 보면 잊어버리기 힘들겠어요.”
“아는 얼굴은 없습니까?”
“글쎄요. 하하. 이 정도로 엉망이 되면 친인이라도 알아보기 힘들지 않을까요?”
그 개성적인 얼굴을 만들어 낸 장본인인 이드는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방식을 쓸 걸 그랬다.
“아무래도 오늘 방문은 이자들 때문인 것 같군요?”
“맞습니다. 그들을 만난 건 이틀 전으로, 당시 황궁…….”
이드는 그들을 발견한 상황과 장소, 그들이 하고 있던 일과 전력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했다.
다만 황녀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라울이 사건 전후의 상황을 궁금해했지만, 굳이 침입자들과 관련도 없는 황녀에 관한 정보를 넘길 이유는 없었다.
“일단 저희 쪽에서는 몇 가지 가정을 세워 봤는데, 그중 하나가 존 워스에 관련한 것이었습니다.”
“존 워스에 대한 논란을 덮는 용도로는 너무 과격한 듯도 하지만, 동감합니다. 충분히 가능성은 있어요.”
이드는 쉽게 납득하는 라울을 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문제를 제외하면 무려 황궁 벽을 뚫어 침입하려는 간 큰 짓을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보를 다루는 라울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저희 쪽에서도 현재 알아보는 중이지만, 쉽게 나오지 않더군요. 그러다 바벨의 정보력이 굉장하다는 말이 나왔죠. 거기다 사건 자체가 저희 쪽만의 문제도 아닌 듯하니 겸사겸사 함께 처리하면 좋을 것 같고요.”
막힘없이 술술 이어지는 이드의 말에 눈을 끔뻑거리며 듣고 있던 라울이 갑자기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와하하하. 이거 이제 보니 무공 솜씨만큼이나 말솜씨도 좋으십니다. 저희 바벨의 실력을 그렇게 높게 평가해 주시는데. 뺄 수 없지요.”
딸랑.
앉은 자리에서 협력을 약속한 라울이 문을 돌아보며 사람을 불렀다. 그러자 아까의 메이드들와는 다른, 깔끔한 옷차림의 여성이 들어와 이드가 꺼내 놓은 그림을 들고 나갔다.
“저희가 가진 인물 정보와 대조를 할 겁니다. 결과는 길어도 이틀 내로 나올 거고요.”
“빠르군요.”
검은 돌은 수도의 정보만 처리하는 데도 이틀이 걸렸는데 말이다. 그것도 정보 처리와 분석에 재주를 가진 에린이 직접 나서서 그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대륙 전역의 정보를 모으고 있는 바벨의 정보량은 비교 불가. 그런데도 처리 속도는 더 빠르다니.
혹시 바벨에는 슈퍼컴퓨터가 되는 초인기를 가진 초인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이드였다.
“이드 님의 기대를 채우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요. 사실 얼굴만 망가지지 않았어도 결과가 더 빨리 나왔을 겁니다.”
“크흠흠. 혹시 이에 독을 가진 게 아닐까 싶어서 말입니다.”
“이해합니다. 이해하고 말고요. 하하하.”
이드는 내심 혀를 찼다. 호탕하게 협력을 약속하기에 조금 좋게 보이던 라울이 다시 멀어지는 느낌이다.
아니, 이해한다면서 웃을 건 뭔가? 기분 나쁘게 말이다.
‘그냥 확 이대로 일어나 버려?’
문득 그런 충동이 일어나는 이드였다.
사실 이번 방문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당연히 침입자에 대한 정보 협력이다. 조사 결과 침입자들의 목적이 존 워스에 있다고 추측된다면 그 이후의 일까지 협력이 가능할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 목적이 바로 초인과 혼돈의 파편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당연히 세레니아에게 들었던 내용을 그대로 전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초인과 혼돈의 파편의 관계를 바벨이 알게 된다면 혼돈의 파편에 대한 바벨의 움직임을 좀 더 적극적으로 끌어가리라 기대할 수 있었다.
‘곧 혼돈의 파편의 전력도 증가될 테니, 이쪽도 전력을 확보해 둬서 나쁠 건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