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44화
1179화
그치지 않을 것 같던 공격이 멈췄다.
속임수일까?
해쉬는 방패를 쥔 팔에 단단히 힘을 주고 머리를 들었다.
“……”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여전히 자신을 향한 도비드의 눈이었다. 하지만 초점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시선은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을 보는 걸까?
‘혹시 지금인가?”
등을 보이진 않았지만, 그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지금의 도비드는 빈틈투성이였다. 혹시 지금이 감찰관이 말한 ‘그때’가 아닐까.
그렇게 해쉬가 순간의 갈등에 빠진 순간.
도비드가 갑자기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곳에 있는 누군가가 그를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곧이어 새로운 목표가 정해진 듯, 온전히 몸을 돌린 도비드의 숨소리가 다시 거칠어졌다.
“푸후, 푸후, 푸후~”
‘…….아직이야. 해쉬, 기다려.’
그 모습에 해쉬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더욱 몸을 낮췄다.
반대로 갑자기 도비드의 시선을 받게 된 구경꾼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놈이 왜 이쪽을 보는 것입니까?”
“이봐…….”
“자작,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오?”
본능적인 불안감에 사람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입이 아닌 발을 먼저 움직여야 했다.
그들의 목소리가 자극이 되기라도 했는지.
“끄아아아압!”
입에서 허연 김을 뿜어낸 도비드가 돌연 그들을 향해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솔론!!! 저거 당장 막아!”
그에 가장 먼저 반응한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톤 자작이었다. 갑자기 공격을 멈춘 순간부터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그는 도비드가 돌연 손님들을 향해 돌아보는 모습에 가슴이 철렁했다.
테이블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누구인가. 어렵게 모신 후작을 포함해, 그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고위 귀족들이 아닌가.
즉, 그들을 향해 도비드가 뛰어드는 순간 터진 톤 자작의 외침은 비명을 대신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충!”
솔론 단장은 주군의 명에 충실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하고 있던 그는 단숨에 도비드를 향해 달려 나가며 검을 뽑아 들었다. 비록 현재 도비드가 아티팩트로 인해 강화되어 있지만, 이성을 잃은 상대를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솔론은 그렇게 생각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당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야. 오늘의 영웅은 따로 있거든.’
이드는 뛰쳐나오는 솔론을 흘깃 보곤 해쉬를 살폈다.
그녀는 도비드가 돌아선 순간, 방어 태세를 풀고 일어나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랐거나, 무지막지한 공격의 충격 때문이라고 생각할 법한 모습.
하지만 사실 저건 독맥 속에 깃들었던 무극신기가 단숨에 풀려나는 과정 중의 프리징 현상이다.
앞으로 그녀는 수초 내로 다시 움직이리라.
“이놈! 당장 멈춰라!”
빠르게 거리를 줄인 솔론이 검을 내리쳤다. 한참 동안 이어진 대결을 보며 도비드의 상태에 대한 파악이 끝났기에 그의 공격에 거침이 없었다. 이드는 그 순간을 노렸다.
솔론의 공격에 도비드가 본능적으로 검을 마주하는 순간.
슉.
두 사람을 향한 이드의 검지에서 음유한 한 줄기 지력이 쏘아졌다. 지력은 정확히 두 사람이 검이 충돌하는 접점에 끼어들며 도비드의 검에 앞서 솔론의 검을 때렸고, 그 뒤를 도비드의 검이 따랐다.
따따땅!
의도하지 않은 끊어 치기.
도비드의 공격은 분명 솔론이 상정한 범위 안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선 이드의 지력이 솔론의 공격력을 파훼하고, 일차적인 충격까지 가해 놓은 상태.
거기에 0.1초 간격으로 가해진 도비드의 공격을 감당할 힘이 솔론에겐 없었다.
“뭐・・・・・・ 크윽!”
그가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을 땐 이미 공격할 때보다 더 빠르게 뒤로 튕겨 나가는 상태였다.
아무리 빨라도 솔론이 다시 공격해 오기 위해선 우선 바닥에 떨어지고 난 뒤일 것이다.
도비드는 그걸 기다려 줄 생각이 없다는 듯 다시 손님들을 향해 검을 들었다. 그리고 그때쯤 상황 파악이 끝난 귀족 중 검을 소지한 일부가 검을 들었다.
‘이대로 도망치는 것보다는 당장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후작께 눈도장을 찍는 편이 좋다.’
진정한 기사도와는 담을 쌓은 속셈 때문이었지만, 그들의 행동은 그런대로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해쉬가 움직이는 시간을 벌어 준다는 데서 말이다.
‘지금이구나!’
해쉬는 도비드가 몸을 돌린 순간 확신했다.
그녀는 방패를 내리고 검을 앞에 세웠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뽑아 올리려 했다.
쏴아아아!
하지만 허공을 나는 것은 그녀의 마음뿐.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에 그녀가 의문을 가지기도 전,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등 뒤에서부터 불어온 바람. 그 정체는 이드의 무극신기였다.
‘감찰관의 내공? 그 효과는 이미 보고 있는데. 설마 이중 발동?’
해쉬의 짐작은 정확했다.
바람이 전신에 가득 차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넓어졌다. 두 배 넓어진 시야는 섬세하기까지 해서, 허공에 부유 중인 작은 먼지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머리카락에서부터 발가락 끝까지 그 무언가가 가득 채워진 기분이었다.
아직 닿지 못한 그레이트 소드의 경지가 이런 느낌일까.
소드 마스터 중급과 상급의 중간에 있는 그녀로서는 알지 못하는 미지의 감각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
결코 자신에게 해가 될 건 아니다. 도리어 이 순간, 이 감각을 머리와 몸에 새겨야 한다. 그건 기사로서 단련된 본능의 속삭임이었다.
물론 그런 중에도 해쉬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는 않았다.
따따땅!
솔론이 손님들에게 뛰어들려는 도비드를 막으려다 오히려 공격을 받아 튕겨 나가는 순간, 몸의 마비가 풀렸다.
그러자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도비드의 등 뒤로 따라붙었다.
스스슥.
보법을 밟은 그녀의 뒤로 뿌연 그림자들이 아른거렸다.
“피터 씨는 영웅이 왜 영웅으로 불리는 줄 압니까?”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그게 문제냐?
피터는 그런 얼굴로 답했다. 그는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기다리고 있던 사건이 벌어졌지만, 전혀 반갑지 않았다.
‘왜 하필 그쪽이야!’
후작과 고위 귀족들의 얼굴을 확인한 피터는 내심 비명을 질렀다. 저들이 다치게 되면 톤 자작은 곤란함을 겪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뭐라 변명도 제대로 하기 전에 파멸이다.
솔론과 톤 자작의 뒤를 캐야 하는 바벨 입장에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였다. 그런 상황에 뜬금없는 영웅론을 늘어놓고 있으니 제대로 된 답이 나올 리가 있겠는가.
이드는 그런 피터에게 걱정할 것 없다는 듯 해쉬를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영웅이 영웅인 이유는, 그들이 딱 위험한 순간에 맞춰서 나타나기 때문이에요. 지금처럼.”
“대결 중에 등을 보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흥분해서 애꿎은 사람을 공격하다니. 기사로서, 또 인간으로서, 당신은 최악입니다. 도비드 경!” 도비드가 막 이름 모를 귀족을 두 쪽 내려 할 때였다.
해쉬가 순식간에 그 앞을 막아서며 도비드의 검을 가볍게 튕겨 냈다.
티잉.
‘가볍다.’
무지막지하게 무겁기만 하던 도비드의 검이, 지금의 자신에겐 너무나 가벼웠다. 몸에 힘이 들어차며 가벼워졌다고 느낀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끄압!”
반격해 오는 도비드의 검을 방패로 막았다. 마법을 발동시킬 필요도 없이 가볍게 흘린 다음, 열린 도비드의 옆구리를 차올렸다.
“쿠에엑!”
“……정신은 아닌 것 같은데. 그 경박한 비명은 여전하네요.”
바닥을 구르는 도비드의 모습을 기막히다는 듯 바라본 해쉬는 그 뒤를 따라붙었다.
강력한 힘을 얻었고, 이 느낌을 오랫동안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결코 힘에 취해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눈앞에 있는 도비드의 모습이 너무 흉했으니까.
무엇보다 지금은 자신의 힘과 속도가 도비드를 뛰어넘고 있지만, 이것이 계속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주입된 이드의 내공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지 못하는 까닭에 더해, 그 끝을 모를 정도로 계속해서 강해지는 도비드의 힘과 속도 또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제가 당했던 분을 풀 시간은 있겠죠?”
해쉬는 반쯤 몸을 일으킨 도비드의 얼굴을 차 올렸다.
“시간이 없어요. 빨리빨리 움직이세요!”
강제로 일으켜 세워진 도비드의 입에서 누런 치아 몇 개가 튀어 나왔다. 그뿐 아니라 수염은 코피로 범벅이 되었다.
“푸-푸후 푸우우우!”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그걸 느끼지 못하는 듯, 숨만 거칠어진 상태로 다시 검을 들었다. 그 위에 해쉬의 검이 얽히는 순간.
“해쉬 경!”
힘없이 튕겨 나갔던 솔론이 검을 들고 뛰어들어 왔다.
해쉬는 얽힌 검을 끌어 올려 도비드의 방어를 무너트린 후, 그의 가랑이 사이로 다리를 차올렸다.
빠악!
“읍!”
남자로서는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급소. 하지만 정상이 아닌 도비드는 그저 잠시 멈칫할 뿐이었다.
오히려 달려오던 솔론이 움찔하며 멈춰 섰다. 구경하던 남성들 역시 한마음 한뜻으로 가랑이를 가렸다.
“아직 대결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끝까지 상대할 테니, 솔론 단장님께선 물러나 주세요.”
“그….러지, 아니, 그러겠소. 해쉬 경.”
톤 자작의 명령도 있고, 스스로 못난 꼴을 보여 만회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하나 그도 남자였다.
콧수염과 마찬가지로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도비드의 가랑이를 본 순간, 해쉬에게 거역하고 싶은 마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솔론의 개입을 막아 버린 해쉬는 본격적으로 분을 풀기 시작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링이 있는 머리를 제외한 도비드의 전신이 말랑말랑해질 정도로 두드려 팬 것이다.
그 일방적인 폭력과 박력 앞에 그녀가 갑자기 강해진 이유 따위를 떠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꾸어어어…….”
얼마를 그러고 있었을까.
무려 제정신이 아닌 도비드의 눈에 눈물이 흐를 정도가 되었을 때, 해쉬는 긴 한숨과 함께 피가 뚝뚝 떨어지는 방패를 내려트렸다.
아무래도 사람을 때리는 데 있어선 검보다 방패가 편하기에 마음껏 휘두른 흔적이었다.
그런 해쉬 앞에 쓰러진 도비드의 모습은 차마 말로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오죽하면 걸레짝이 생각날 정도. 그럼에도 몸을 꿈틀거리며 일어나려고 하는 모습은 해쉬와는 또 다른 쪽으로 지독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오늘이라니. 오늘이라니!’
해쉬는 자신의 말에 몸을 부르르 떠는 사람들이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의 옆면으로 링을 쳤다.
“안 돼!”
그제야 해쉬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톤 자작이 급히 나서려 했지만, 그의 발이 해쉬의 검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끼기기기기-
쩡그렁!
해쉬의 검에 충격을 받은 링은 마치 살아 있는 양 철판을 긁는 듯한 단말마를 지르고는 산산이 조각 나며 도비드의 머리에서 떨어져 내렸다.
“…살려….”
하나 그와 함께 제정신이 돌아온 도비드의 말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