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59화
1194화
과연 제국에 카논무파가 손을 뻗지 않은 곳이 있기는 한 것일까.
우선 밖으로는 톤 자작과 솔론 단장, 그 외에도 수많은 카논무파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또 안으로는 황궁의 살림을 관장하는 콘펌 남작이 있다.
하나 그것도 이드가 만난 사람들에 한정되었을 뿐, 실질적으로 얼마나 더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아무렴 밖만 해도 그렇게 많은데, 안이라고 그 하나뿐일까?
거기에 황제 옆에는 팔콘 기사단의 베론 부단장이 있다.
무려 기사단의 이인자다.
기사단에 그를 따르는 기사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들 중 카논무파가 단 한 명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그야말로 바보짓이다.
오히려 그들끼리라면 같은 카논무파로 만드는 게 더욱 쉬울지도 모른다. 누가 뭐래도 베론 아래 있는 자들은 기사.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무공이라면, 그것도 기사단의 부단장이 추천하는 무공이라면 의심 없이 손을 뻗을 테니까.
‘정말 골고루도 심어 놨다. 이 정도면 이미 이 제국 자체를 카논무파가 먹었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닐까?”
이드와 라울의 뜻이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귀족을 시작으로 기사와 마법사, 초인을 비롯한 제국의 관리들. 즉 카논의 지배 계층을 포함해 최소 20% 정도가 카논무파나 그와 관련된 조직에 속해 있을 거라는 의견이었다.
더욱이 이베인처럼 한때 주류에 속해 있었지만, 지금은 주류에서 밀려나 용병이나 떠돌이 같은 형태로 존재하는 자들까지 합한다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날 터였다.
이런 이들이 동시에 들고일어난다면, 과연 카논이 막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점은, 이 카논무파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자고로 보이는 칼보다 숨겨진 칼이 더 위협적인 법. 그나마 제국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카논무파의 지향점은 소드 팰러스였다. 또, 소속된 인원도 대부분 기사도를 숭상하고 있다.
이건 이베인을 통해 확인한 사실이었다.
애초 그들이 카논무파를 익힌 것도 카논 고유의 무공이라는 소개말에 마음이 이끌린 점이 가장 컸던 모양이다. 그 문구가 사실이건 아니건, 애국심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제국을 사랑하는 기사라면 말이다.
그런 이들이 과연 나라를 뒤집는 일에 선뜻 나서려고 할까?
아니. 조직을 움직이는 자들의 생각이 어떠하던 쉽지 않을 일이다.
그게 그렇게 쉬웠다면 애초에 소드 팰러스의 삼검왕이 제국의 그림자에서 나와 독립하려 저리 복잡하게 애쓸 필요도 없었겠지.
그만큼 조직을 구성할 때 기초가 된 기본 이념을 갑자기 뒤집는 일은 어려웠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또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건데. 혼돈의 파편. 카논무파의 주인이 어지간한 놈들이라야 말이지.’
무려 혼돈의 파편이다.
단순 전력만 비교하면 개중 하나만으로도 카논무파의 전력을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을 거다.
그런 혼돈의 파편이 직접 손을 댄다면? 단체의 이념 하나 바꾸는 건 일도 아니다.
단순히 단체의 대표가 바뀌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나라의 주인이 바뀌는 정도의 충격이 가해질 테니 말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만약의 사태를 가정했을 때의 일이다.
이드는 개인적으로 혼돈의 파편이 카논무파를 이용해서 제국을 뒤집을 일은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최소 당분간은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혼돈의 파편에겐 굳이 제국을 뒤집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내 땅인데, 굳이 혼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는 거지.’
이드가 카논에 발을 들이고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이 땅은 최소 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혼돈의 파편이 그 주인이었다는 것이다. 증거는 많다.
뱅커올슨의 던전을 시작으로, 황혼의 기사 이베인, 카논무파, 톤 자작, 콘펌 남작에 베론 부단장,
마지막으로 아직 확인하지 못한, 황궁 심처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지’까지.
그 모든 것이 혼돈의 파편과 관련되었다.
아마 제국을 샅샅이 뒤지면 이보다 더 많은 정보가 나올 게 분명하다. 이 정도면 똥개의 영역표시보다 더욱 확실하고, 지저분한 수준.
더욱이 혼돈의 파편에 걸려 있는 게르만의 계약이 이런 관계성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핵심이었다.
혼돈의 파편이 자신들의 존재 이유인 ‘파멸’을 이루기 위해서는, 게르만과 약속한 계약을 먼저 완성할 필요가 있으니까.
앞서 말한 증거들이 또한 이 계약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언뜻 위험해 보이는 던전이나 카논무파의 존재. 그러나 이 중에 실제적으로 제국에 해가 된 것은 없다.
미완의 마탑과는 달랐다. 조금만 시각을 달리하면, 충분히 카논제국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요소들.
이드는 이것이 바로 혼돈의 파편이 게르만과의 계약을 잊지 않은 증거라고 여겼다.
“혹시 팔콘 기사단을 직접 볼 수 있겠습니까?”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이드는, 황궁에 소속된 기사들 중에는 얼마나 많은 이가 카논무파에 속해 있을지 확인해 보고자 말을 꺼냈다.
“황제 폐하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팔콘 기사단이 수련하는 모습을 볼 수 없소. 양해 바라오.”
하나 같은 카논무파에 속한 식구인 톤 자작과 콘펌 남작을 대동한 요청인데도, 그야말로 단칼에 거절당했다.
정말 황제의 허락이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콘펌 남작이 직접 부탁하지 않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이미 결과는 나온 상황.
“아쉽긴 하지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이드는 두 번 부탁하지 않고 미련 없이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중원에서는 수련을 공개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고, 오히려 어떻게 수련하는지 보여 달라고 하는 게 무례였다.
즉, 당장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을 요청을 거절당한 것이기에 이드는 딱히 아쉽지도 않았다.
하지만 콘펌 남작은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어쩌면 문화의 차이 때문일지도 몰랐다.
“베론 부단장이 좀 융통성이 없지요.”
곧 죽을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일까. 이후의 안내가 좀 더 부드럽고 친절해졌다.
이드는 그 덕에 황궁을 마음껏 누볐다. 정작 핵심적인 곳은 피하는 듯했지만, 그래도 초대 황제의 작품들은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색유리 작품이 가장 많았지만, 그 외에도 조각에 그림 등 초대 황제가 손길이 묻은 건 실로 다양했다.
그리고 그렇게 다양한 예술품을 거치고 거친 이드는 지금, 주변 궁전들과 살짝 거리가 있는 웬 하얀 궁전 앞에 서 있었다.
콘펌 남작의 설명에 따르면, 이 궁전도 초대 황제의 작품이란다. 직접 설계하고 건축도 지도했다던가.
하다하다 건축까지 손을 대다니. 이 정도면 정녕 재능충’이라는 단어가 아깝지 않았다.
“보시다시피 작지만, 보안에 철저히 신경 써 지어진 것이 바로 이 백악궁입니다. 건축 당시에는 황세손의 궁으로 사용되었고, 그 후 황궁에 다른 궁전들이 지어지며 황실의 보물고로 쓰였었지요.”
“쓰였었다는 말씀은, 현재는 그렇지 않다는 겁니까?”
“아무래도 외부로 드러나 있어서 말입니다. 보물고는 은밀한 곳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사정이 겹치는 바람에 현재는 아무런 용도로도 쓰이지 않고 있지요. 실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 아름답고 의미 깊은 백악궁에 주인이 없다니.”
컨펌 남작은 대놓고 혀를 찼다.
그의 표정에선 한 치의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렴, 살림을 책임진 입장에선 용도 없는 건축물이 얼마나 아쉬울까. 사용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써먹고 싶을 것이다.
용도만 정해지면 그게 곧 돈인데 말이다.
그러면, 황궁을 관리하는 관리들이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금지. 톤 자작이 말하던 금지가 여기겠구나.’
그런 이유라면 콘펌 남작이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는 것과, 유독 이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 모두 설명이 된다.
아무렴 초대 황제가 직접 쌓아 올린 궁을 이렇게 버려 두는 게 말이나 되나.
“그 사정이 무언지 궁금하네요.”
“밖으로는 말하지 못하는 황가의 문제이지요. 무슨 의미인지 아실 겁니다.”
“듣지도 말하지도 말아야 할 일이라는 거군요.”
이드는 이해한다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황가의 문제는 개뿔,
“그래도 감찰관에겐 좋은 일입니다. 황세손이 쓰실 때도 그랬지만, 보물고로 쓰일 때는 백악궁을 향해서는 함부로 눈길도 줄 수 없었습니다. 자칫 백악궁을 지키는 기사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바로 끌려갔었지요.”
“무시무시하군요.”
“그러나 지금은 다르지요. 지금이 아니면 언제 제국의 보물고를 직접 볼 수 있겠습니까? 들어갑시다.”
끼이익.
콘펌 남작이 백악궁의 문을 열었다. 커다란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묘하게 음산한 소리를 냈다.
“하하하. 영광입니다.”
이드는 거절하지 않고 선뜻 열린 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인지, 방치된 건물 특유의 냄새가 났다. 그렇다고 완전 폐가가 된 것은 또 아니었다. 하긴, 아무리 이유가 있어도 초대 황제가 손수 지은 궁전이다. 그걸 그냥 흉가가 되도록 둘 수는 없었으리라.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이 웅장하고 화려한 황궁 중간에 폐가라니.
만약 외국의 사절이라도 와서 본다면 그 망신을 어쩔 것인가.
어쨌든, 백악궁은 이름처럼 사방이 하얀색으로 가득했다. 커튼을 비롯해서 벽과 문, 창틀까지. 모든 것이 하얀색이었다.
‘황세손, 그 어린아이를 이런 궁에 살게 했다고? 제정신인가?’
이런 하얀색 일색인 공간이라니. 멀쩡한 사람도 불안감이 들 것 같았다. 황세손이 살던 궁전이 보물고로 바뀐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을 것 같다.
“과연 아름다운 공간이네요. 그런데, 보물고로 쓰기는 힘들 것 같은데, 혹시 다른 공간이 또 있는 것입니까?”
간단히 백악궁의 일 층과 이 층을 둘러본 이드가 묻자 콘펌 남작이 일 층 복도 끝을 가리켰다.
“보통 보물고라면 아래에 있는 법이지요. 이곳도 마찬가집니다.”
콘펌 남작은 일 층에 복잡하게 꺾인 복도 끝에 멈춰서는 사방의 벽면 이것저것을 두드렸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촛대를 꺾자.
쿠르르릉.
벽 안쪽으로 기계 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더니, 벽으로 막힌 복도가 아래쪽으로 내려가고 그 뒤로 계단이 나타났다.
“호오. 마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
“고대에 던전에서 사용하던 장치입니다. 본래 이곳은 비상시를 대비한 대피소가 있었습니다. 그걸 확장하고 고쳐서 보물고로 사용한 것이지요. 그리고, 마법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마법은 너무 뻔하거든요.”
“하하하. 마법사들이 들으면 화낼 말입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곳에 침입한 자들이 과연 보통 인물들이겠습니까. 그 속에 실력 좋은 마법사 한둘은 끼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마법으로 탐색해도 이 장치에서 마법의 흔적은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그야말로 허를 찌른 것이지요.”
말을 마친 컨펌 남작이 검은 계단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턱짓을 한다. 어서 따라오라고. 돌아가는 건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 말이다.
‘어차피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고. 그 웃음이 언제까지 이어지나 보자. 이 인간아.’
이드가 그렇게 계단으로 발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