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65화
1200화
바뀐 것은 말뿐이다.
하얀 뼈와 그에 달라붙은 뻘건 근육이 흉측하게 드러난 얼굴.
그 가운데 번들거리는 노란 눈알, 유리알을 박아 놓은 듯 무생물 같던 그 눈에 뿌연 상념과 같은 것들이 떠올라 있다.
몬스터라면 혼란스러워할 이유가 없지 않나?
이드는 어떤 가능성에 대한 의심이 떠올랐다.
“이봐, 영감. 당신 누구야? 나는 무엇이냐면서!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나아는…… 무엇이냐!”
“그러니까, 당신 누구냐고!”
“나아는…… 무엇이냐…….”
“젠장. 또 이러네.”
말이 바뀌긴 했지만, 또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미라 영감에 이드는 머리가 아파 왔다.
이래서야 입이 없는 고목과 다를 것이 없다.
“역시 깔끔하게 다 날려 버릴까. 그러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짜증이 차올라 나온 혼잣말이다.
착각일까. 그 말을 들은 미라 영감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이드가 결심을 굳히기 직전, 미라 영감의 말이 또 한 번 변했다.
“나아는…… 너, 너어, 너어는 무엇이냐!”
“……이것 봐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미라 영감이 하는 말이 다시 변했다. 정확히는 원래대로 돌아간 거지만.
스러지던 의심이 다시 일어났다.
이드는 즉시 미라 영감의 기혈을 살폈다.
미라 영감의 기혈은 시체처럼 바짝 말라 있었다. 그렇다고 고갈된 것은 또 아니었다. 바짝 마른 그 아래, 마치 지하수처럼 흐릿한 기운이 흐르는
중이다.
이드는 그 흐름을 거슬러 올라 기운의 근원을 찾기 시작했고, 곧 시작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역시 괜히 붙어 있는 것이 아니었구나.”
미라 영감의 몸에 흐르는 기운의 근원.
그 끝에 있는 것은 고목이었다. 미라 영감은 말 그대로 진짜 시체. 그 시체가 죽지도 못하고 움직이는 까닭은 고목이 불어넣고 있는 힘 때문이었다. 미라 영감의 말이 바뀐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이드에 의해 고목의 내부가 파괴된 순간, 지배력이 약해진 틈을 뚫고 그 아래 종속되어 있던 미라 영감의 자아가 스스로를 살짝 내비친 것이다. 그리고 이드의 관심이 미라 영감에 향한 사이, 고목이 그 불사신 같은 재생력으로 부서진 내부를 일부나마 재생시켜 미라 영감의 자아가 다시 깊게 가라앉은 것이고 말이다.
끼워 맞춘 부분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말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목이 박힌 검이 탐침과 같은 역할을 하며 고목의 상태를 알려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 별꼴을 다 보네. 인간이 나무의 종이 되어 있다니.”
생전엔 제법 대단했던 마법사 같은데, 도대체 어쩌다 땔감의 노예가 되었을까. 기괴한 사건이 많은 마법의 세계라지만, 이와 같은 사건은 손꼽히지 않을까.
신기하다.
하지만 미라 영감이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성급히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
“그건 본인 입으로 사정을 직접 들어 본 후에 생각하면 되니까.”
이드는 슥슥 손을 비비며 웃었다.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는가 싶었는데, 이렇게 단서가 나와 주었으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방법도 간단하다.
고목의 힘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미라 영감의 말이 많아진다.
하기에 따라서는 고목의 영향에서 온전히 벗어날 경우 미라 영감이 제정신을 찾을지도 모른다.
뭐, 제정신을 찾는 것보다 빠르게 시체가 될 가능성도 있지만.
아무튼!
방법이 생겼으니, 시도는 해 봐야 할 일이다.
이드는 미라 영감과 고목을 분리할 생각에 양손을 쥐었다 폈다.
고목이 미라 영감을 지배하고 있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고목을 죽여 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둘의 관계가 어찌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만큼, 그런 단순 무식한 방법은 잠시 뒤로 밀어 둘 참이다.
“이런 섬세한 작업은 오랜만인데.”
잘 될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부담은 없다.
잘 되면 좋지만 실패한들 당장 손해 보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정 힘들다 싶으면 도움을 청할 이도 있고.
손해에 대한 부담이 없고, 숨겨 둔 카드까지 있는 사람은 대담해지는 법.
떠엉!
이드가 고목을 향해 손을 펼치자, 종소리와 비슷한 굉음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빠르게 재생되던 고목이 다시 부서졌다.
미라 영감도 그렇지만, 고목의 재생 속도는 실로 놀라웠다.
하지만 그뿐이다. 재생이 빠르다면 빨라진 만큼, 파괴하는 속도를 더하면 되니까.
그렇게 고목을 침묵시킨 이드는 다른 손으로 미라 영감의 팔다리를 잘라 내고, 척추를 무너트렸다.
점혈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앞서 살피던 시점에서 말라비틀어진 기혈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작동도 하지 않는 걸 제압해 봐야 의미가 없다. 대신 미라 영감의 사지와 척추를 비롯한 주요 골격을 부숨으로써 움직임을 봉한 것이다.
직후 이드는 미라 영감의 등과 고목이 닿아 있는 부분에 손바람을 일으켰다.
파스스스.
대단치 않은 손짓에 실린 경력에 미라 영감의 로브가 재가 되어 날리며 그의 등이 드러났다.
“흐음.”
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인간의 조직과 나무의 조직이 녹아 엉겨 있는 징그러운 형상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그 형상 속으로,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처럼 복잡하게 오가는 검은 기운들이 있었다.
그냥 봐서는 무엇이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그냥 이걸 몽땅 다 잘라 버리면・・・・・・ 영감이 죽으려나?”
“나아는. 무엇이냐!”
“그래, 영감, 나도 당신이 누군지 궁금하거든. 같이 알아보자고.”
이드는 어느새 또 말이 바뀐 미라 영감의 목을 틀어쥐고, 다른 손은 속살이 드러난 고목의 줄기에 가져다 댔다.
파핏.
직후 이드의 손끝을 타고 흐르는 무극신기에 불꽃이 번뜩였다.
미라 영감과 고목의 내부를 파고들고자 하는 무극신기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러나 무의미한 일이었다. 멀쩡한 상태였어도 막지 못했을 텐데,
하물며 지금은 둘 다 이드에게 철저하게 제압된 상황이었으니.
결국 침입을 막으려던 저항은 금방 무너지고, 무극신기는 거침없이 미라 영감과 고목의 내부를 내달렸다.
무극신기가 지난 곳은 까맣게 타들어 가며 죽어 버렸다.
만약 인간이었다면 칠공으로 피를 토하며 절명했을 테지만, 미라 영감이나 고목은 불사에 가까운 재생력을 가졌다.
둘이 동시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좋아, 어지간해선 죽지는 않겠네.”
싸울 때는 귀찮던 불사성이었거늘, 지금은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정도라면 좀 더 속도를 내도 좋을 것 같다.
“나아는. 무엇이냐.”
묘하게 기운이 떨어진 느낌이 드는 미라 영감을 무시한 채 전진한 무극신기는 곧 미라 영감과 고목을 이어 주는 연결 지점까지 도착했다.
수많은 통로를 통해 유입된 기운이 하나로 합쳐지는 곳.
그건 마치 폭포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일단 작은 것부터 시작할까.’
죽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미라 영감을 움직인다. 그런 힘이 결코 미약할 리는 없다.
그런 판단에 따라 이드는 작은 통로부터 막아 내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기준을 삼은 것은 의념이었다.
자아가 없는 미라 영감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대신 명령을 내릴 주체가 필요하다. 그 주체는 당연히 고목일 것이고, 명령의 형태는 외부 입력이 될 수밖에 없다.
마치 검기에 실리는 검사의 의지처럼, 이 많은 기운 중 의념이 담긴 게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걸 막아야 한다.
이런 이드의 판단에 대해, 혹자는 굳이 의념을 실을 기운을 나눌 필요가 있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다.
미라 영감의 용도가 무엇인가. 아직 찾지 못한 쓰임새를 제외했을 때, 그는 마법의 발동체에 지나지 않았다.
명령에 따라 마법을 사용하는 용도이니, 그야말로 아티팩트나 마법사의 지팡이 이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보통 이런 물건에는 의지가 없는 법이다.
마법의 핵심 구성 요소인 마나 역시 마찬가지다. 불순물과 같은 의념이라는 잡음이 섞이면 마법의 완성도가 떨어진다. 이 검은 공간 전체가 고목와 이어져 하나처럼 움직이지만, 그럼에도 기본 법칙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니 말이다. 만약 이 공간이 온전히 고목이라는 알 수 없는 적의 소유였다면 이드도 위험했으리라.
법칙을 주무른다는 건 공기를 없앨 수도 있고, 검기를 존재하지 않게끔 할 정도의 권능을 가진다는 말이니까. 마치 신처럼 말이다. 이런 생각에 따라 수백의 연결 통로 중 절반 정도를 폐쇄했다.
짧은 시간에 처리했다고 하기엔 실로 놀라운 속도. 그러나 덕분에 정교하진 못했다. 거칠고 험악한 힘 밀기로 통로들을 막아 댔다. 그 충격은 미라 영감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머리가 박살이 나도 재생하던 미라 영감이, 조금 전부터 말도 멈춘 채 턱만 덜덜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혹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순서를 정하지 못한 건지 알 수 없는 모습. ‘역시 이 방법이 옳았어.’
이에 이드는 좀 더 확신을 가지고 통로들을 막아 갔다.
본래 물길이라는 것이, 하나가 막히면 그 흐름이 다른 쪽으로 합쳐진다. 기운의 흐름도 물과 같다. 이리저리 주요 통로가 막히자 남은 통로로 흘러드는 의념이 강해졌고, 덕분에 길 찾기는 쉬워졌다. 그렇게 열 개, 스무 개, 오십 개까지 막았을 무렵.
“머…머어….”
감정의 둑이 무너진 듯, 뿌옇게 변한 눈으로 미라 영감이 말을 더듬었다. 말라비틀어진 얼굴 가죽에서는 표정을 읽기 힘들었지만, 무언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영감. 당신이 누구인지 알겠소?”
이드는 통로를 막는 속도를 슬슬 조절했다. 말투도 조금 바뀌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까.
“멈, 멈추어라. 젊은 기사여.”
지금까지 미라 영감의 입에서 나온 그 어떤 말보다 또렷한 발음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심지어 여태까지와 내용도 달랐다.
“이제 정신이 드시오!”
“그대, 젊은 기사여. 지금 그대가 하는 일을 멈추고 물러나라.”
“확실히 정신이 든 모양인데. 왜 멈추라는 것이오? 연결이 끊어질수록 당신의 정신이 맑아지는 것 아니오?”
“그대의 말은 옳다. 그러나 그 뒤에 일어날 사태는 그대가 감당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그러니 멈춰라. 카논의 미래여.”
“카논의 미래? 날 보고 하는 말이오?”
“그렇다. 어째서 기사가 이곳에 발을 들였는지 알 수 없으나, 그대는 카논의 미래다.”
“어…. 일단 그렇다고 합시다.”
잠시 눈을 옆으로 돌리던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오해하도록 두는 쪽이 이야기를 듣기에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