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67화
1202화
사실 혼돈의 파편 때문에 본인이 가장 큰 고생을 했다는 이드의 말은 일부만 사실이었다.
그레센 땅에 발을 디딘 후 이드는 크고 작은 사건을 통해 혼돈의 파편과 충돌했고, 직접 검을 마주 대기까지 했다.
그 과정에서 다치기도 하고, 지구로 튕겨 나가 많은 시간을 소모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걸 고생이라고 한다면 매우 큰 고생이었다.
하지만 과연 이드가 ‘가장 큰 고생’을 했냐고 하면 고개가 갸웃한다. 그 말고도 혼돈의 파편으로 인해 고생한 사람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카논과 아나크렌, 그리고 마스 등.
혼돈의 파편과 관련되어 골머리를 앓고 있는 국가가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 드래곤은 또 어떤가.
그들이 정확히 언제 세상 밖으로 튕겨 나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드가 사라진 후 그들은 긴 시간 동안 혼돈의 파편을 견제해 왔고, 그러다 지금은 함정에 빠져 그레센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차원과 차원의 사이에 갇혀 있는 상태다.
아마 혼돈의 파편으로 생긴 피해자들을 모아 놓고 그 노고에 관해 물어보면 드래곤들의 목소리가 가장 클 것이다.
당연히 그들에겐 그만한 목소리를 낼 자격이 있기도 했고.
드래곤들의 고생이 없었다면 과연 이드가 돌아올 그레센의 땅덩어리가 남아 있기나 했을까.
이렇게 ‘가장 큰 고생’을 했다는 점에서는 반론할 것이 많지만, 차원의 인을 통해 혼돈의 파편과 가장 깊게 연관된 사람은 이드가 맞았다.
또 드래곤들보단 못해도 고생한 것은 사실이고, 그들과 차원의 인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진실의 울림에 게르만이 벌벌 떨었다.
“어떻게…… 어떻게 혼돈의 파편을………… 나를………”
“당신과 혼돈의 파편 사이의 일을 어떻게 아느냐고? 간단해. 놈들의 입을 통해 직접 들었지. 나도 놀라는 중이다. 설마 당신이 아직 살아 있을 줄은 몰랐거든.”
“아니야…… 난 그가 아니야………….”
“고고한 마법사께서 자기 부정이신가?”
이드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는 게르만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자기만 아니라고 하면 끝나는 일인가? 이제 와 자신이 게르만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게 된다고 믿는 것일까.
절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머리로는 마법사는 고사하고, 사회 생활도 하지 못한다.
현재 게르만은 패닉에 빠져 생각하길 포기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당신, 카논에서 굉장히 유명하더군. 해방의 마법사라던가. 웃긴 일이야. 당신이 어떤 놈들을 풀어 줬는지는 알고 지껄이는 걸까?”
“안 된다! 그것이 밝혀져선……!”
그렇지 않아도 질려 있던 게르만의 얼굴이 더 하얗게 변했다.
말라비틀어진 피부와 근육에도 피가 흐르기는 하는 걸까. 만약 진짜 그렇다면 혹시 저러다 심장 마비라도 오는 게 아닐까?
터진 머리도 재생하는 불사신이 심장 마비라니.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웃길 것 같긴 하다.
이드는 머리를 채우는 잡념을 털어 냈다.
그사이 게르만은 목이 떨어질 듯 고개를 저어 대고 있었다.
“절대 알려져선 안 될 일이다. 결코 밝혀선 안 돼!”
“흥, 반응을 보니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아는 모양이군. 그렇지?”
“으드득.”
게르만이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이 찢어지며 진득한 피가 흘렀다.
이드는 말이 없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고목과 융합된 부분을 살폈다. 통로를 막은 탓인지 융합되어 있던 일부가 검게 죽어 있었다. 하지만 죽은 부위는 아직 절반 정도였다.
‘여기서부터는 무식하게 힘으로 밀어붙일 수 없을 것 같은데.’
하려면 못할 것은 없지만, 아무래도 멈추라는 게르만의 경고가 걸렸다. 그게 아니라도 미라 영감이 게르만임이 밝혀진 이상, 그를 이대로 버리는 건 아까운 일이다.
혹시라도 섣불리 손을 댔다가 게르만이라도 죽기라도 하면.
‘아무래도 라미아를 부르는 게 최선이겠지?’
라미아의 소환은 이 공간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고민하던 일이었다. 다만 그녀와 일리나의 당부를 무시하고 이런 곳에 발을 들인 사실이 알려지면, 그 뒤에 밀려올 잔소리가 두려웠을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게르만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혼돈의 파편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단서를 얻을 수 있는 게르만을 손에 넣었는데, 설마 화를 내지는 않을 거다.
게르만도 어디 그냥 게르만인가. 살아 있는 게르만이 아니던가.
– 라미아 들리니?
-이상한 걸 묻네요. 당연히 들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달달하네?
기존 공간에 덧씌워졌다고 했던가? 좌우간 특이한 곳이었기에 혹시 연결이 되지 않을까 걱정을 했는데.
역시 두 사람 사이의 연결은 이 공간보다 단단한 모양이다.
그나저나 한마디 했다고 단번에 이상을 알아차리다니. 역시 무섭다. 이드는 다시 한번 자신과 라미아의 상하 관계를 인식하며 억지로 웃었다. 하하하. 달달하기는, 평소랑 같은 목소린데. 그나저나 뭐 하고 있었어?
—일리나하고 같이 있었어요. 밀린 드라마가 많아서, 그런데, 이게 중요한 게 아니죠. 뭐예요? 황궁에 가서 또 무슨 사고를 치고 연락한 건데요?
– 내가 사고를 내고 싶어서 내는 건 아닌데.
-내고 싶어서 내면 사고가 아니죠. 어쨌든 일이 나긴 했다는 거네요. 절 불렀다는 건, 제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고요.
-하하하. 부탁 좀 할게. 내가 처리해 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내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말이야.
-봐요, 역시 이드는 저 없으면 안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같이 갔으면 얼마나 좋아요? 지금 바로 가요?
—그래 주면 고맙지.
—알았어요. 그럼 이동할게요.
-어, 오는 건 좋은데, 그 전에…
“그 전에, 뭐요?”
조금 전까지 머리에서 들리던 목소리가 갑자기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동시에 달콤한 향수 냄새까지.
이드는 라미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일리나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고 오라고 말하려고 했지.”
“그건 괜찮아요. 잘 말했으니까.”
“그 짧은 시간에? 제대로 설명한 거 맞아?”
물론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따로 말을 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분명 그런 기색은 없었는데 말이다.
이런 이드의 말에 라미아가 허리에 손을 얹었다. 지금 내 말을 의심하냐는 몸짓이다.
“그럼요. 이드가 불러서 다녀오겠다고. 큰일은 아니니까, 오래 걸리진 않을 거라고 분명히 말하고 왔다고요.”
“그렇다면 뭐…… 괜찮겠지.”
이드는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라미아라면 몰라도, 언제나 침착한 일리나가 아닌가. 그 정도 설명이면 충분하리라. 이드는 무슨 일이 있다면 당장 달려오겠다던 일리나의 말을 애써 털어 냈다.
그사이, 순식간에 주변에 대한 탐색을 마친 라미아가 이드의 손에 잡힌 게르만과 고목을 보고는 말했다.
“척 봐도 보통 일은 아닌데, 이래도 사고가 아니라고요?”
“사고는 아니야. 톤 자작의 함정이지.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서 들어와 봤는데, 뜻밖에 대어를 낚았어.”
“설마 그 미라 말하는 거예요?”
역시 라미아.
이드가 말하는 바를 단숨에 알아차렸다. 하나 게르만을 바라보는 눈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이드는 그런 라미아를 보며 게르만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미라의 이름이 게르만이라면 어때?”
“게르만?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게르만?”
“내가 모르는 게르만이 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네가 생각하는 그 게르만 맞을 거야.”
“어머나~ 이 대륙 역사에 남을 대악마가 어떻게 이런 꼴로 여기 숨어 있었대요?”
라미아는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하고서 몸을 숙여 게르만과 눈을 마주했다.
“그대는 어떻게 이곳에 들어온 것인가?”
“꼴에 마법사라 이거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닐 텐데?”
라미아가 진한 비웃음을 날렸다.
이 꼴을 하고서도 자신이 이 공간에 들어온 방법 같은 걸 궁금해하다니. 마법사의 기본인 호기심이 살아 있는 것은 좋지만, 그걸 자중해야 할 때와 그러지 않을 때도 구분하지 못하는 건 확실히 어리석었다.
하긴, 저런 인간이기 때문에 혼돈의 파편을 봉인에서 풀었으리라.
라미아가 무언가 더 말하려는 게르만을 무시하고 몸을 일으켰다.
“대충 짐작은 가는데, 제가 할 일은요?”
“네가 생각하는 그대로, 게르만을 여기서 떼어 내는 것. 아무래도 강제로 분리했다가는 진짜 죽어 버릴 것 같거든.”
“그렇기는 해요. 이 정도로 깔끔히 분리된 것도 무극신기니까 가능했던 거죠. 다른 사람이 무식하게 내공으로 통로를 막았다면 벌써 사달이 났을걸요.’
무극신기가 그만큼 대단하다는 말인지, 조심성 없이 무모한 짓을 했다고 나무라는 것인지. 애매한 소리에 이드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 고목의 기운이 오가는 통로를 확인한 라미아가 이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막 입을 열려던 순간.
무슨 생각이라도 난 것인지, 게르만을 힐끗한 라미아가 마음속으로 말을 전해 왔다.
상당히 복잡하네요.
힘들어?
-그건 아니에요. 조금 복잡하긴 해도, 풀어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니까. 문제는 게르만이 고목에서 완전히 분리되었을 경우예요. 아마 오래 살아 있지는 못할 거예요.
-그건 예상했어. 어차피 지금도 살아 있는 몰골은 아니고. 그래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이드는 매우 건조한 태도로 말했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같이 소중하다고 하는데, 이드가 봤을 때는 개소리도 그런 개소리가 없다. 생명의 무게는 모두 다르다.
내 부모와 타인의 목숨이 같을 수 없고, 부자와 걸인의 목숨 값이 같을 수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드가 생각하기에 게르만의 목숨 값은 정말 싸다. 그야말로 세상을 멸망으로 몰아갈 짓을 저질렀으니까. 그가 한 짓을 아는 사람이라면 백이면 백 게르만을 죽이려 할 것이다. 서로 죽이겠다고 나서면 목숨 값이 좀 비싸지려나. 그런 게르만이 오래 살지 못한다고 슬퍼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 본인조차………….
대략 다섯 시간 정도?
-・・・・・・ 생각보다 너무 짧은데?
현재 게르만의 몸에 불사성을 부여해 생을 이어 주고 있는 것은 고목이다. 그 힘을 차단하면 죽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다섯 시간은
너무 짧다.
-그렇죠? 그런데 그 다섯 시간도 확실하지 않아요. 게르만은 현재 법칙을 거스르고 살아 있는 상태라서, 세상으로 나가면 수정력에 의해 변수가 생길 수도 있거든요.
– 다섯 시간보다 더 일찍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네.
끄덕끄덕.
크게 고개를 끄덕인 라미아가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 상태로 그의 말을 들어 보는 건 어때요? 어차피 이 인간에게 관심을 가질 사람이 우리 말고 누가 더 있겠어요? 하긴, 굳이 게르만을 보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이드와 라미아로서도 그에게 궁금한 것은 오로지 혼돈의 파편에 관련된 일뿐이다. 그 외의 가치는 없다.
굳이 찾자면 정치적인 부분에서나 쓰일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도 혼돈의 파편에 대해 밝혀야 하니,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 이야기 좀 하지.”
결국 라미아의 말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이드가 게르만을 잡고 있던 손을 떼고는, 그의 정면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