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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74화


1209화

무형극이 괴수 발밑에 떨어졌다.

괴수에게 타격을 주는 것이 아니라 놈의 방향을 바꾸는 것에 목적을 둔 수법.

텅!

그 목적에 충실하도록 나선으로 꼬였던 무형극의 힘이 풀리며 괴수를 발밑에서부터 밀어 올렸다.

그에 길쭉한 스피어를 박아 놓은 술통 모양을 한 괴수가 한쪽으로 기우뚱 기울어지더니, 굴러가던 방향이 확 바뀌었다.

어쩌면 이드를 보고 도망간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목적을 이룬 이드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슬아슬했죠?”

“전혀 아닌데? 괴수 놈 스키드마크가 저만큼 멀리 있는데, 아슬아슬은 무슨.”

애써 여유로운 척 해 보지만, 이쪽을 향한 라미아의 가자미눈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저기 굴러다니는 괴수 놈을 두고 평소처럼 투닥거릴 수는 없는 일.

“두고 볼 거예요. 마무리 작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요.”

“당연하지. 맡겨 달라고.’

척 하고 엄지를 들어 보인 이드는 그대로 땅을 박찼다.

오리하르콘을 박아 넣은 괴수 놈이 자멸하는 것을 편하게 앉아 구경하나 했더니, 결국은 사람을 움직이게 만든다.

“마님께서 저리 가서 놀라신다. 이놈아!”

당연히 괴수를 향한 이드의 몸짓에 이전에 없던 감정이 실렸다. 그 증거로 이어진 무형극의 삼 연타가 집요할 정도로 괴수의 발밑만을 때려 댔다. 그에 이리저리 기우뚱거리며 휘청거리던 괴수가 갑자기 구르기를 멈추고서 커다란 입을 쩍 벌렸다.

저게 갑자기 멀미라도 하나?

그 모습을 본 이드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떠올릴 때였다.

철퍼덕!

온몸을 바르르 떨던 괴수의 입이 아래를 향한 순간, 그 안에서 검은 살덩이가 튀어나왔다.

지독한 악취와 함께 무언가 타들어 가는 듯한 소리가 나는 살덩이.

그리고 검은 살덩이 사이사이로 보이는 은색의 금속 조각들은.

“설마…… 오리하르콘? 몸속에 박힌 금속을 토해 내다니,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몸뚱이야!”

금속 주변의 검은 살덩이가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타들어 가는데 그 정체를 모를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놈은 사람으로 치면 목 아래와 가슴과 허리 정도에 박힌 무기들을 한데 모아 토해 버린 것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무기들이 하나같이 제 모습을 잃어버린 상태라는 거다. 오리하르콘에 놈의 몸도 녹았지만, 놈의 독에 오리하르콘도 견디지 못하고 녹아내렸다는 증거.

저 덩어리는 녹다 만 오리하르콘 무기들이 한데 뭉쳐진 금속 덩어리였던 거다.

이드는 이마를 짚었다.

“저게 안 먹히면 어쩌라는 거야.”

이건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자르고 부숴도 죽지 않는 놈은 어떻게 죽여야 할까. 강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처치 곤란이라고 할까.

물론 아예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드는 싸우는 중에 괴수의 상태를 면밀히 살피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덕분에 알아낸 사실이 하나 있었다.

게르만과 고목이 괴수로부터 재생 능력을 부여받은 것처럼, 괴수 역시 외부로부터 재생에 관련한 어떠한 힘을 끌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외부’는, 이드가 서 있는 이 공간 자체를 말한다.

이걸 뒤집으면, 이 공간을 파괴하면 괴수 놈의 불사에 가까운 재생 능력도 사라질 것이라는 거다.

“결국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 건데.” 

웃긴 일이다.

아직 게르만에게 듣지 못한 이야기가 있지만, 필요한 건 들었다. 어차피 그에게 크게 기대할 것이 없기도 했고,

그런 이드가 잡은 목표는 하늘에 뚫린 구멍이다. 그 구멍과 함께 이 공간을 파괴하려면, 괴수를 먼저 처리해야 한다. 그런데 괴수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또 이 공간을 먼저 파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인데.

“에라이, 나는 모르겠다. 그냥 몽땅 한꺼번에 날려 버리면 해결되겠지?”

이드는 꼬이기 시작하는 상념에 고개를 젓고는, 가장 간단한 해결책을 꺼냈다.

아무리 복잡한 미로도 벽을 모조리 부수면 깔끔하게 해결이 가능한 것처럼. 괴수와 함께 이 공간을 동시에 파괴해 버리면 굳이 선후를 고민할 필요가 없기는 하다.

“되기는 뭐가 돼요!”

그리고 그런 이드 옆으로 한심해 죽겠다는 얼굴을 한 라미아가 다가섰다.

이드는 그녀와 함께 게르만을 돌아보았다. 상태가 좋지 않던 그는 어느새 상당히 진정된 모습으로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다만 특이하게도 그는 목 아랫부분이 석화되어 있었다.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모습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사람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곳은 목 위로 머리뿐이었다.

“저래도 돼? 호흡은?”

모든 주요 장기가 들어 앉은 몸통 부위는 팔다리가 석화된 것과는 이야기가 다르다. 석화되는 순간, 혈액 순환과 호흡이 멈추며 사지와 뇌로 피와 산소가 돌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심장 마비와 같은 상황이라고 할까.

당연히 정상적이라면 살아 있을 수 없겠지만.

“어차피 살아 있는 것도 아니었는걸요. 다 알아서 조치했죠. 저 상태로도 최소한 반나절은 버틸 수 있을 거예요.”

반나절.

게르만의 넋두리를 들어 주기에는 차고 넘칠 시간이다.

더욱이 라미아가 보증하지 않았나. 그러니 더 물어볼 것도 없다. 게르만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었기에 이드는 다른 문제에 대해 말했다.

“그나저나, 왜 다 부수면 안 된다는 건데?”

“에휴~ 이드조차 이러니 마법사들이 기사들 보고 무식하다는 소리를 하는 거라고요.’

“잠깐만. 그건 너무 갔잖아. 기사들 무식하다는 소리가 왜 나 때문이야!”

“크워워워!”

“넌 닥치고 있고!”

난데없는 비난에 발끈한 이드가 어이없어했다. 때마침 속에 든 독을 토해 내고 멀쩡해진 괴수 놈이 용트림을 했지만.

짜증이 더해진 이드에게 반응할 틈도 없이 얻어맞고는 저만치 튕겨 났다.

그러자 라미아가 불의 거인을 불러내 쓰러진 괴수를 불태우게 만들고는 말했다.

“보통 기사는 마법 지식이 없어서 그렇다지만, 머리에 든 것도 많은 이드가 그런 말을 하니까 그렇죠. 이 공간의 마법적 구성을 보고도 한 번에 날려 버리겠다니. 마법의 ‘마’ 자라도 알면 그런 소리 못한다고요.’

“아무리 그래도… 내가 무인이지, 왜 마법사야.”

이드는 억울해했지만 목소리는 한층 작아졌다.

라미아의 말처럼 이드의 머릿속에 든 마법 지식의 양은 대마법사 레벨을 아득히 벗어난 정도였으니까. 더욱이 그걸 기초로 간단한 기초 마법들은 직접 시전해 본 전적도 있고 말이다.

다만 아직은 마법보다는 무공이 더 좋아 관심이 덜할 뿐.

이드를 보고 마법사라고 하면, 딱히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어려운 위치에 있는 게 사실이었다.

이드는 쩝 하고 입맛을 한번 다신 다음 말했다.

“그래도 부수고 죽이긴 해야 할 거 아냐. 저걸 그냥 둬?”

“누가 그냥 두래요? 하지만 이드 생각처럼 단숨에 날려 버리면 엄청난 백파이어가 발생할 거란 말이에요.”

“백파이어면, 충격파?”

““・・・・・・ 결이 좀 다르긴 하지만, 결과가 같기는 하죠.”

묘하게 뭔가를 포기한 것 같은 라미아에 살짝 자존심이 상하는 이드였지만 굳이 추궁하지는 않았다. 그럴 상황도 아니고, 어차피 결과는 같다고 했으니까. 당장 이드에게 중요한 것은 저 ‘결과’였다.

백파이어건 충격파건.

어쨌든 어떤 현상으로 인한 2차 피해를 의미하는 것이니까.

“이 공간이 소멸했을 때의 충격파라면…… 그 영향권에 황궁과 발라파루가 들겠네?”

현재 이드가 선 공간은 황궁 지하실에 있는 작은 방과 겹쳐진 공간이라고 했다. 그러니 이 공간이 소멸된다면.

이드가 나타나는 것은 황궁의 지하가 될 것이고, 충격파 역시 그 지하에서 터질 거라는 말이다.

라미아가 조심하라고 말하는 정도이니, 규모가 작지는 않을 테고. 모르긴 몰라도 백악궁은 그냥 날아가고, 그 파편에 황궁의 건물들도 좀 상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드의 이런 예상은 스케일이 너무 작았던 모양이다.

“그 정도면 감사하죠. 굳이 제가 나서서 말릴 필요도 없고. 황궁 좀 부서진다고 나나 이드가 아쉬울 일도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 우리가 카논에 지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입장을 정리하자면 카논이 가해자에 이드가 피해자 정도가 된다.

그것도 힘없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인생을 날려 버릴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명분까지 빵빵한 피해자 말이다.

“그럼 황궁 밖에서도 피해자가 많이 나올 정도란 말이네?”

이런 관계인데도 굳이 라미아가 말리는 이유는 하나다. 바로 죄 없는 카논의 백성들.

기사 시작으로 그 위에 존재하는 지배 계급이야 직간접적으로 혼돈의 파편과 관련되어 있을 테니 어찌 되든 상관이 없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의 희생은 이드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피해자를 가장 적게 잡았을 때, 현재 발라파루에 거주하고 있는 인구의 절반 정도는 죽어 나갈 거예요. 당연히 황궁은 흔적도 남지 않을 거고요.” “……미친놈들. 도대체 뭘 깔고 앉아 있는 거야.”

이드는 예상을 훨씬 넘어가는 희생자의 숫자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더욱이 발라파루 인구의 절반도 최대치가 아니라, 최소치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카논 제국의 수도가 흔적만 남을 거라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발라파루에 거주하고 있는 인구가 몇이더라.

그래도 제국이니까, 최소 십만은 넘지 않을까?

혼돈의 파편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위험한 장치를 황궁 지하에 박아 놓은 걸까. 황궁이 날아가게 되면 게르만과의 계약에도 문제가 생길텐데.

이드가 이곳까지 발을 들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카논 지도부를 날려 버리고, 지들이 직접 앞에 나설 생각이었을까?”

있을 수 없는 일도 아닌 것이, 혼돈의 파편과 게르만의 계약 내용에는 꼭 카논의 황족이 대륙을 통일해야 한다는 내용은 없다. 그저 카논의 이름을 거론했을 뿐.

“알게 뭐겠어요. 어차피 우리가 그렇게 만들 것도 아닌데.”

“그렇긴 하지.”

이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라미아의 어깨에 척 하니 팔을 둘렀다.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왜 이래요?”

“내 옆에 있어 줘서 고맙다고. 네가 없으면 내가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지 까마득하다.”

이드의 말에 라미아가 키득거렸다.

하지만 이드는 어디까지나 진심이었다. 이 자리에 라미아가 없었다면?

어쩌면 정말 대참사가 발생했을지 모른다. 그 정도 재난이라면 이드도 피해가 없다고 장담할 수 없다.

물론 도망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다. 하지만 이 공간을 파괴한 여파로 인해 죽어 버린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도 도망칠 수 있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자괴감에 빠질 만큼 이드의 정신이 약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되겠어? 말만 해.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이드가 할 건 딱히 없어요. 오히려 제가 오랜만에 힘 좀 쓰게 생긴 거죠.”

“네가?”

“오랜만에 실력 발휘네요.”

라미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전신에서 휘황한 빛이 일어났다.

그리고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인간의 모습이 아닌, 검이라는 태초의 모습으로 변한 라미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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