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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75화


1210화

“……!!”

이쪽을 보는 게르만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놀라긴 이드도 마찬가지다.

검의 모습을 한 라미아를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레센에 막 돌아왔을 때 말고는 그 형태를 띨 일이 없었으니까. 인형을 자신의 몸처럼 움직일 수 있게 된 후에는 더욱 그렇고 말이다.

그랬던 라미아가 본인 스스로 검의 형태를 드러낸 것이다.

놀람을 뒤로 한 이드가 그 검의 자루를 잡았다.

뿌드득.

이질감 없이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참 오랜만이다. 서로 손을 마주 잡은 것 같은 기분이랄까. 세상에 라미아보다 좋은 검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라미아를 두고 너무 좋아하는 것도 좀 뭐했기에 애써 반가움을 감추고서 말했다.

“뭐야? 실력 발휘라는 게 형태를 바꾸는 거였어?”

ᅳ왜요, 이상해요?

“그게 아니라, 이러면 네 실력 발휘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 않나 싶어서. 불만이 있다는 건 아니지만.”

이드는 ‘실력 발휘를 하겠다고 나서는 라미아에 당연히 마법을 생각했다.

그녀의 주력이 마법이니까.

목표 설정부터 시작해서 마법의 종류, 범위, 위력에 유지 시간까지. 모두 라미아의 뜻대로다.

그에 비해 검으로서의 라미아는 그런 주도권을 하나도 쥐지 못한다.

휘두르는 쪽이 아닌, 휘둘리는 쪽이다. 아무리 특별해도 검은 어디까지나 사용자의 뜻에 따르는 도구이니 말이다. 다시 말해 라미아가 검으로 사용될 때 실력을 발휘해야 할 사람은 그녀가 아닌 이드인 것이다.

-그래서요?

“엉?”

-내가 오랜만에 이 모습으로 활약을 해 주겠다는데. 돕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럴 리 있겠어? 네 일이 곧 내 일인데 당연히 나서야지. 뭐부터 할까? 뭐부터 하면 돼?”

무심코 꺼낸 말이 화살이 되어 돌아올 듯하자 식겁한 이드가 얌전히 마나님의 명령을 기다렸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실수다.

자칫 수많은 죄 없는 목숨을 날려 버릴 뻔한 일을 막아 준 마나님의 말씀인데, 감히 사소한 일을 걸고 넘어졌으니.

마침 불의 거인을 숯가루로 갈아 버리고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괴수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어떻게…… 일단 썰어?”

-썰어요. 그럼 저절로 드러날 테니까. 제가 얼마나 결정적인 활약을 하는지.

“예에 분부대로 합지요, 마님!”

슈슈슈슛!

마침 공허의 멍게 놈이 달려오던 속도를 더해 촉수를 작살처럼 쏘아 냈다. 크고 작은 아홉 개의 눈도 번뜩였다. 말 그대로 몸속이 재가 될 정도로 타들어 가는 경험을 통해 이드의 무서움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하나를 쓰나 둘을 같이 쓰나, 한계는 분명하다는 사실.

“타하!”

대포처럼 쏘아 낸 기합에 번뇌마염후를 실어 마안의 권능을 흩어 버린 이드는 곧장 수신만류의 보신경으로 촉수에 올라탔다. 촉수에 진물이 번들거렸지만 이드에게 닿지는 않았다.

용천에서 뿜어지는 내력을 이용해서 촉수 위를 미끄러지는 모습이 마치 파도를 타는 것 같았다.

그에 화가 난 괴수가 촉수를 휘저었지만, 그 정도로 떨어질 이드가 아니었다. 그러자 그런 이드를 노리고 다른 촉수들이 날아들었고, 이드는 기다렸다는 듯 라미아를 휘둘렀다.

쿵.

쿠쿠쿠쿵!

과연 라미아의 날은 예리했다. 이드가 타고 넘던 촉수를 시작으로, 작살처럼 날아들던 촉수들이 소리 없이 잘려 나간 것이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쩌어억!

촉수를 자르며 날아오른 이드가 괴수의 몸통에 긴 칼자국을 만들어 낸 뒤 떨어졌고.

퍼서석.

다음 순간 라미아가 가르고 지나간 촉수와 괴수의 몸통이 타들어 가다 못해 한순간 검은 재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더욱 무시무시한 점은 어떤 상처도 재생해 내던 괴수가, 라미아에게 당한 부위는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재생을 막은 거야?”

“끄워워워워!!”

이드도 놀랐지만, 괴수의 반응은 그 이상이었다.

앞서 촉수가 잘려 나갈 때는 분노만을 보이던 놈이, 이번에는 몸을 떨어 고통을 표현하다 못해 처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본능에 충실한 짐승이 뒤로 물러나는 경우는 오직 하나뿐이다. 두려움, 공포를 느꼈을 때.

“저거, 겁먹은 것 맞지?”

-아무렴 어때요.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 중요한 건 아니지. 그런데 궁금하긴 하다. 어떻게 한 거야? 혹시 재생 불가의 저주 같은.

-그런 저급한 수작은 안 썼거든요. 이건 오로지 저의 위대함이 만들어 낸 결과라고요.

“우리 마나님이 위대하긴 하지. 그런데, 정확히 어떤 부분이 위대하다는 거야?”

이드는 진지하게 궁금했다.

하지만 손을 쉬지는 않았다. 겨우 강물에 칼질하는 기분에서 탈출하게 되었지 않은가.

샤샤샤샥!

온통 붉은색으로 물든 라미아의 검신이 사방에 난화십이식의 검강을 뿌려 대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촉수가 뭉텅이로 잘려 나갔다. 

“크에에엑!”

결국 괴수 놈이 한 번 더 거리를 벌렸다. 아니, 적극적으로 이드로부터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승기가 확실히 기울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드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칼질을 하는 한편, 라미아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도대체 저 불사신 같은 괴수에 무슨 수를 쓴 건지 여간 궁금한 게 아니었다.

따로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다.

-마법이 아니라, 이건 그냥 제가 잘났기 때문이라고요. 에헴!

그렇게 한껏 우쭐한 라미아의 말에 따르면 속사정은 실로 간단했다.

검으로서 라미아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오리하르콘 이상으로 공허의 괴수에 상극이라는 것이다.

미스릴과 함께 대표적인 마법 금속으로 손꼽히는 오리하르콘은 특별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특히 신성력을 머금고 저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미스릴보다 더 뛰어났고, 그래서 그만큼 귀하다.

이런 오리하르콘의 성질 중 하나가 ‘순리의 단말’이다. 말은 어렵지만, 이 성질이 가지는 기능은 단순하다. 순리에서 벗어난 흐름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

당연히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닌 이 공간과 공허의 괴수에겐 친할 수 없는 존재였다.

말 그대로 상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상극에도 힘의 우위는 있는 법. 오로지 오리하르콘의 성질에 기대기에는 공허의 괴수가 가지는 ‘뒤틀림’의 힘이 이드가 보유한 오리하르콘보다 컸다.

라미아는 이런 반응을 누구보다 빠르게 파악해 냈다.

문제는 물론 해답까지 나온 상황이니, 방법은 간단했다. 바로 그녀가 직접 나서는 것.

그녀를 구성하는 많은 요소가 오리하르콘 이상으로 순리를 따르는 힘과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드래곤의 손에 태어났으며, 정령왕이 입김을 불어 넣은 존재. 그것이 라미아였으니 말이다.

결론적으로 이런 라미아의 계산은 정확했다.

-절 구성하는 오리하르콘이 가진 순리의 단말로서의 성질은 일반 오리하르콘에 비해 최소 200배 이상 강하다는 말씀!

“쉽게 말해 그냥 설사로 끝날 독이, 온몸이 녹아내릴 정도의 극독이 되었다는 거지?”

말을 해도 꼭…….

순리의 단말을 어디 독 따위에 비교를 하다니.

라미아는 꽤 섭섭한 듯했지만, 대신 이드는 확실히 이해했다. 라미아의 잘난 척도 이해가 되었고, 실력 발휘라는 말도 완벽한 사실이었다. 답이 보이지 않던 문제가 풀리자 콧노래가 났다.

“마님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크워워워워!”

괴수가 용트림을 했다. 촉수를 휘두르고, 이빨을 날리고, 마안을 번들거렸다. 심지어 감추고 있던 브레스와 비슷한 것까지 꺼냈지만, 이드는 이 모든 것을 피하고 막고, 반격해 냈다.

그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수많은 촉수를 가진 괴수의 공격은 마치 군대가 개인을 공격하는 것처럼도 보였기 때문이다.

개인 대 군대.

그렇다면 과연 군대를 상대하는 개인은 어떻게 보일 것인가. 그에 대해서는 게르만이 잘 보여 주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썩고 있는 사이 세상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이냐……….”

그에게 있어 공허의 드래곤…………….

퍽!

“……지독한 여자로군.”

갑자기 날아온 이빨 파편에 두들겨 맞은 게르만은 혀를 내둘렀다.

어쨌든 그에게 공허의 괴수는 대적 불가의 괴물이었다. 괜히 드래곤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괴수가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고 밀리고 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

“혼돈의 파편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는 말이………… 헛소리가 아니었단 말인가.”

게르만은 처음엔 이드의 말을, 혼돈의 파편에 대항하는 단체가 있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혼돈의 파편 개개인이 가진 힘은 드래곤을 넘어선다. 그런 존재를,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여섯이나 인간 개인이 상대할 수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공허의 괴수를 몰아치는 저 모습을 보니, 그 말이 과정도 비유도 아닌 사실 그대로의 말이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주르르륵.

그런 생각에 쭈글쭈글해진 피부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몸속에는 한 방울의 액체도 남아 있지 않은 줄 알았는데.

“어쩌면 내가 이 세상의 멸망이 되는 최악은 피할 수 있을지도……”

그야말로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던 일. 게르만은 그 기적이 바로 눈앞의 두 사람이기를 간절히 빌었다.

자신을 저주할 모든 신을 향해 간절하게.


“크워・・・・・・ 워워워………….”

쿵!

괴수가 바닥에 쓰러졌다. 정확히 말해, 쓰러진 것이 아니라 몸을 지탱할 촉수가 모두 잘려 나간 것이다.

“이발하고 나니 더 흉측하게 생겼네.”

채찍처럼 일렁이던 촉수는 물론이고, 몸을 감고 있던 이차 촉수마저 잘려 나간 괴수의 모습은 껍데기를 벗겨 놓은 구더기 같았다.

머리 위에 붙었던 큰 눈알은 터져서 초자액이 흘러내렸고, 아래쪽에 붙은 여덟 개의 눈도 멀쩡한 것 세 개뿐, 나머지 눈이 있던 자리에는 깊숙한 구멍만 남아 있었다.

그 상태로 괴수가 꿈틀거렸다.

그래 봤자 이제 놈에게 남은 공격 수단은 없다. 세 개 남은 마안은 출력이 너무 낮고, 브레스는 방향이 맞지 않았다.

부르르.

이런 사실을 스스로도 아는 것인지 괴수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죽고 싶지 않은 것일까.

물론 이드가 보기엔 그 모습조차 흉측해 보일 뿐이다.

“마지막 일격이다.”

그그그극!

라미아를 땅으로 향한 이드가 내달렸다. 땅을 달리던 이드의 발이 허공을 밟고, 괴수의 몸을 밟고는 지나쳤다.

그 뒤를 따라 은색 빛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무형대천강이 지난 자리.

쩌어어억!

직후 움직임을 멈춘 괴수의 몸이 절반으로 갈라지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촉수와 마찬가지로 탈 것도 없이 재가 되어 버린 모습. 악취가 없어서 좋다고 해야 할까.

“고생했어, 라미아.”

….돌아가면 성수로 검신이나 좀 닦아 줘요. 우웩~

투덜투덜 불평을 더하는 라미라의 말이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 같아도 그럴 테니까.

그래도 이제 다 끝났다.

그렇게 생각했다.

둥실.

반으로 쪼개진 괴수의 몸에서 사람 머리만 한 까만 무언가가 튀어나와, 하늘에 있는 구멍으로 쑥 빨려드는 모습을 보기 전까진 말이다. 

“저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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