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843화


1278화

룬 문자가 사방의 벽을 타고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석실이다.

십여 명의 마법사가 이런 룬 문자를 열심히 조정하며 바쁘게 뛰어다닌다. 그러나 이곳의 주인공은 그들이 아니었다.

석실의 중앙.

지름 일 미터는 가볍게 넘을 것 같은 커다란 수정구가 자리했고, 그 주변으로 별의 자리를 따라 다섯 명의 마법사들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

그중 정점의 자리에 선 마법사는 결계를 넘은 이드 일행이 몬스터를 쓰러트리던 모습을 부관주 이더비히와 함께 지켜보던 마법사 중 하나로, 이 석실의 최고 책임자이기도 했다.

“무한성 1층에 대한 공간 접속 시작.”

“공간 접속 성공. 공간 단절이 완료되었습니다.”

오른쪽과 왼쪽에 선 마법사들이 각자 관측하고 있던 내용을 말했다.

그러자 정점의 자리에 선 마법사, 조셉이 수정구 안을 살폈다.

커다란 수정구에 비치는 건 새하얀 배경과 더불어 그 중앙에 서 있는 이백 개의 밀알만 한 그림자들.

바로 이드와 플레타 부대, 그리고 은색 기사단의 모습이었다.

“이로써 토끼를 우리에 가뒀고, 도망갈 길도 막았군. 훌륭하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방심하지 마라. 우리 임무는 토끼를 여기 일 층에서 완전히 요리하는 거다.”

수정구에서 눈을 떼지 않은 조셉의 말에 네 명의 마법사는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놈들이 무한성에 발을 들인 이상 무사히 빠져나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절대 실망하시지 않게 하겠습니다.”

“그러길 바란다. 그럼 토끼 요리를 시작하자. 그림자를 뿌려라.”

“그림자들의 목표 설정 완료. 그림자 숫자는 침입자의 세 배, 그림자를 뿌립니다.”

조셉의 명령에 따라 마법사들이 수정구와 이어진 마법진을 조정했다. 손과 마법진 사이에 마법광이 번뜩이고.

사방 벽을 타고 흐르는 룬어는 빨라졌다 느려졌다를 반복하며 복잡하게 움직인다. 모두 하나로 이어진 파동의 결과물. 석실과 수정구, 그리고 마법사들은 그 자체로 거대한 하나의 마법이었다. 그리고 그 마법에 첫 번째 변화가 일어났다.

부웅.

수정구 주변으로 붉은색 마나로 이루어진 띠가 나타났다. 직후 수정구 안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티끌 없이 하얗기만 하던 배경의 끝에서 검은 파도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자세히 보면 촘촘히 붙어선 밀알 같은 검은 점.

그것들이 커다란 파도를 타고서 수정구의 중심에 있는 이드 일행을 향해 미끄러져 가기 시작했다.


“문이 사라졌습니다.”

공간이 변했다. 알 수 없는 곳이라고 판단한 순간, 가장 먼저 퇴로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은 부대원 하나가 소리쳤다.

입구만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이 넓은 데 출입할 수 있는 문이나 창문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건 끝없이 이어진 백색의 공간뿐.

입을 꾹 다문 플레타가 우묵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라울. 이건 뭐냐. 나도 모르는 사이 우리가 적의 수법에 당한 거냐?”

“달라, 마법사 놈들이 원래 공간에 다른 공간을 겹쳐 놓은 거다. 우리가 있던 곳이 변한 게 아니야.”

“나도 모르게 당한 것이 아니란 말이지?”

“그래.”

“좋아. 그거면 됐어.”

라울의 설명에 플레타의 눈빛이 느긋하게 풀렸다.

자신들이 마법에 의해 다른 곳으로 이동된 상황이라면 그건 심각한 사태였다. 지금이야 백색 공간이지만, 적이 마음먹기에 따라 깊은 땅속이나 바닷속, 혹은 용암 위에 옮겨 놓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그런 능력을 가진 상대와 어떻게 제대로 싸울 수 있겠는가. 응당 싸움을 포기하고 몸을 피하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란다. 자신들이 아닌 공간이 변했을 뿐이라고, 정체불명의 마법에 자신들이 당한 게 아니라, 환경을 변화시킨 것이란다.

그렇다면 그저 마음 편하게 싸우면 된다.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너무도 간단히 납득하고 넘어가는 플레타를 이드가 황당한 듯 바라보았다.

“플레타 대장은 이 공간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지 않는 겁니까?”

“굳이 찾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놈들이 저희를 모종의 감옥 같은 데 가둔 것이 아니라면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공격해 올 테고, 그걸 부수면 출구는 자연스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일이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다 그렇기는 뭐가 다 그렇다는 말인가. 마법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는 걸까.

이드는 뭐 이런 대답이 다 있냐는 눈으로 플레타를 보았다. 바벨에도 이런 막무가내의 인간형이 있었을 줄이야.

슬쩍 돌아본 라울이 어쩐지 자신의 눈을 피하는 것 같다. 과연 말하는 사람,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따로라는 걸까.

그에 비해 같은 바벨 소속인 다른 사람들은 덤덤한 표정이다. 원래 플레타가 지휘하던 그의 부대원은 그렇다 치고. 이번 작전을 위해 새롭게 소집한 사람들도 플레타의 이런 스타일이 익숙하다는 것일까.

“그런가요. 플리타 대장의 말대로 일이 쉽게 풀렸으면 좋겠습니다만.”

“잘 풀릴 겁니다. 보십시오. 제 말대로 놈들도 공격을 시작해 오고 있지 않습니까. 아탄, 전투 준비!”

플레타가 어느새 풀어 낸 대검을 들어 백색 공간 지평선 끝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좀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있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검은 선으로 보이는 그것은 빠르게 일행들을 향해 미끄러져 왔다.

“부대, 전투 준비, 2열 러그 쉴드 진형이다! 마법사들과 기사들은 3열을 형성, 후위에서 대기!”

“후방이 빕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오늘은 괜찮다. 후방을 살펴 주실 손님들이 많으니까.”

아탄이 말하는 ‘손님’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뻔했다.

“재밌는 자로구나. 두 명의 상관은 우리에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도록 하겠다는데, 저렇게 당당히 후방을 맡기다니 말이야.” 그와 함께 검후의 눈이 한곳을 향했고.

어느새 은색 기사단을 한데 모아 진형을 수습하고 난 스폴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렇게 네 덩이로 나뉘어 있던 진형이 순식간에 바뀌는 사이.

검은 파도는 어느새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몬스터?”

파도를 이루고 있는 검은 형체의 정체를 확인한 플레타가 짜증과 실망이 섞인 표정을 노골적으로 떠올렸다.

몬스터는 밖에서 이미 쓸어버리지 않았던가. 설마 영혼의 관 마법사 놈들은 학습 능력을 담당하는 뇌가 없는 걸까?

최소한 저것보단 본격적인 공격을 기대했기에 실망이, 그리고 자신들을 얼마나 쉽게 보고 있으면 또 같은 걸 내놓았는가 하는 짜증이 올라왔다. 

“글쎄요. 몬스터는 몬스터인데. 평범한 놈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조심해야 할 것 같군요.”

이런 플레타를 향해 이드가 말했다.

진형이 바뀌며 라미아와 일리나를 포함해 바벨 소속이 아닌 사람들은 모두 뒤로 물러났지만, 이드는 여전히 플레타와 함께 가장 앞에 서 있는 상태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들이 생기기는 몬스터처럼 생겼지만, 진짜 몬스터는 아닌 것 같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저렇게 온통 새까만 오크와 오우거를 보신 적 있습니까? 전 들어 본 적도 없는데요.”

“그건・・・”

크게 생각지 못했습니다만, 그렇군요. 저렇게 생긴 오크는 저도 본 적이 없습니다.”

대검을 어깨에 턱 하고 걸쳐 멘 플레타의 눈이 가늘어졌다.

적을 좀 더 자세히 살피려는 것이다.

이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검은 파도는 분명 몬스터의 형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보면 놈들의 피부는 잉크처럼 까만 데다, 피부와 근육은 만들다 만 조각상처럼 각지고 거친 모양이었다.

눈도, 코도, 입도, 형체는 알아볼 수 있지만, 결코 살아 있는 이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 바로 놈들이 숨을 쉬고 있지 않다는 거다. 진짜 몬스터들이라면 벌써부터 비릿한 노린내가 물씬 풍겨야 할 텐데, 그런 것이 없다. 거친 호흡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고함과 야성에 끓어오른 울음소리도 없었다.

수상한 점이 이 정도 모이면 모를 수가 없다.

“알겠습니다. 모양만 비슷할 뿐, 몬스터가 아니로군요.”

“거기에 살아 있지도 않지요.”

이드의 한마디에 플레타가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죽지 않는 것들은 골치 아픈데……”

죽지 않는 것. 이미 죽어서 다시 죽일 수 없는 것.

언데드를 상대하는 건 여러모로 쉽지 않다.

질척거린다고 해야 할까. 목을 베어도, 심장을 찔러도 죽지 않는다. 그야말로 베는 맛이 없는 적.

하지만 원하지 않는 상대라고 싸우지 않을 수도 없는 일.

“아탄.”

“알고 있습니다. 대언데드전을 가정하고 전투를 시작하겠습니다.”

“좋아. 아무래도 마법사 놈들이 꼼수를 부리는 것 같은데, 우리 플레타 부대를 상대로는 그딴 더러운 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 주자!” “오오!”

“명예 후작께선 뒤로 물러나 계시지요?”

“적당한 때가 되면 그렇게 하겠지만, 전투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이드가 내놓은 거절의 말에 플레타는 더 권하지 않았다.

그가 있든 없든 전투는 시작될 것이고, 그러는 중에 이드가 다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

어쩌면 그 타이틀이 가지고 있는 실력을 보게 될지도 모를 일.

‘아니지. 이제 시작인데 벌써 손님들이 손을 쓰게 할 수는 없지. 이번 공격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선에서 정리한다.’

그야말로 미묘한 승부욕이라고 할까.

만약 알았다면 이드가 그게 무슨 쓸모없는 고집이냐고 할 만한 그런 생각.

플레타는 혼자만의 결심을 단단히 굳히며 부대를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부대, 전진! 지금부터 적을 소각한다!”

“충!”

명령을 받은 부대원들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결코 후방의 인원과 많은 거리를 두지는 않았다.

앞의 적을 공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뒤에 있는 아군을 보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은 그 기본적인 사항을 철저히 지켰다.

그리고 이런 플레타 부대를 검은 파도가 덮쳤다.

첫 충돌이 일어났다.

가장 선두에 선 건 각자 개성에 맞는 무기를 든 초인들. 그들의 무기가 상대의 공격을 막고, 튕겨내며 적을 베었다.

츠걱.

쇠와 쇠가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는 없었다. 몬스터의 형태와 마찬가지로 오크가 든 무기도, 오우거의 손톱도 모두 쇠가 아닌 검은색의 무언가였으니까.

하지만 진짜 예상외는 따로 있었다.

초인들의 무기와 부딪힌 적의 무기와 손톱이 너무 무르다는 것이었다.

플레타 부대원들의 무기는 너무나 쉽게 적의 무기와 몸을 갈랐다.

오히려 놀랄 정도로 쉬웠다. 하지만 그 다음 상황은 그들이 예상한 바와 달랐다.

스르륵.

분명히 검에 갈라진 몸이, 순식간에 붙어 버린 것이다. 더욱이 몸을 가르고 그 안에 박힌 무기가 뽑히지도 않는다?

쩌억.

검은 조각상 같은 오크의 입이 쩍 벌어지고, 놈이 든 창을 찔러 온다.

하지만 무기가 박혀 버린 부대원은 그 모습을 당황스럽게 바라만 볼 뿐이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