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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848화


1283화

대검이 느릿하게 휘둘러졌다.

화려한 검기는 없었다. 강맹한 검강이 타오르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힘도 실려 있지 않은 건 아니었다. 느릿하게 아지랑이를 베어 가는 검신 주변의 공간이 묘하게 일렁인다. 마치 뜨겁게 달아오른 칼을 보는 것 같다.

아무런 힘도 깃들지 않았다면 결코 볼 수 없는 현상. 즉, 대검에 특별한 힘이 깃들었다는 증거.

대검의 주인이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생각하면 그 정체는 뻔했다.

초인력.

다만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는 초인기인지를 알 수 없을 뿐이다.

그런 정체불명의 힘을 품은 대검이, 골든 디스크가 만들어 낸 아지랑이의 일부를 베고 들어갔다.

출렁.

그러자 순간 아지랑이에 커다란 파문이 생겼다. 그건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맹이를 던진 것 같은 모양새였다.

차라라랑!

이런 파문에, 아지랑이를 만들어 내던 골든 디스크가 서로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또 그중 일부는 회오리에 휩쓸린 듯 아지랑이를 타고 딸려 와 대검에 부딪혀 깨져 나가기도 했다.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다.

“저 빌어먹을 자식이!”

그런 모습에 라울이 발을 구르며 플레타를 욕했다.

지금 현상도 그가 조금 더 조심한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그 섬세한 힘 조절이 귀찮아 그 뒤처리를 라울에게 떠넘긴 것이니, 어찌 욕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억지로 떠넘겨진 일이라고 무시할 수는 없다.

라울은 씩씩거리면서 손을 썼다. 이대로 뒀다간 차원 로드가 공간으로 숨어 들어가고, 힘들게 찾아낸 코어도 다시 놓쳐 버릴지도 모르는 일. 곧 라울의 뜻에 따라 흩어져 있던 골든 디스크 일부가 새로운 원을 만들며 차원 불안정성을 유지시켰다. 그 크기는 앞선 것의 두 배. 덕분일까. 아지랑이에 생겨난 파문은 그대로지만, 그 흐름에 골든 디스크가 딸려 들어가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끌끌. 처음부터 이랬으면 좋았잖아. 쪼잔한 자식.”

그리고 갑자기 그 크기를 키운 아지랑이의 문에 플레타는 악동처럼 히죽거렸다. 라울이 길길이 날뛰는 모습이 보지 않아도 그려졌다. 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도와야 한다는 사실에 온몸을 비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로 말하는데, 골든 디스크의 파괴는 플레타 본인도 바란 바가 아니었다.

자신은 그저 목표로 한 코어의 파괴에 온 힘을 다할 뿐이다. 라울만큼 많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공간 너머에 숨어 있는 코어를 파괴하기 위해선 그만큼 특별한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쯤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비기 중 하나를 꺼내 들었고, 골든 디스크의 파괴는 그 과정에서 벌어진 일종의 사고에 불과했다.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공간을 여는 크기를 작게 잡은 라울의 탓이랄까.

뭐, 그런 사소한 문제는 나중에 따져 볼 일이고. 지금은 코어를 때리는 이 공격에 온 정신을 집중할 때였다.

그리고 거인의 발자국.

이 공격이 제대로만 들어간다면 코어는 파괴될 수밖에 없다. 그런 확신을 담아 플레타는 대검을 든 손에 힘을 더했다. 투두두둑.

그에 따라, 아지랑이를 넘은 대검이 그물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차원 로드를 끊어 내기 시작했다.


“끄악. 막아! 막으란 말이다!”

수정구를 통해 이런 모습을 코앞처럼 생생하게 바라본 조셉은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나 이런 조셉의 고함에도 마법사들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런 게 있었다면 벌써 했을 거다.

당장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현상에 대한 파악이 전부였다.

“공간 내 새로운 중력원 확인! 적 초인의 초인기로 의심됩니다!”

“변동 중력을 차원 로드가 견디지 못하고 파괴됩니다!”

“코어 심도 -12. 현계 직전입니다!”

“아앗! 코어 보호 장벽에 변동 중력원 접촉!”

동시에 터지던 보고 속에서 또다시 비명에 가까운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수정구가 하얗게 번쩍였다.

조셉은 차마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적의 공격을 견디길 바라만 봐야 한다. 괴롭고 수치스럽다.

하지만 내심 간절히 빌었다. 부디 자신의 코어가 자랑스러운 코어가.

적의 공격에서 버텨 주기를 견뎌 주기를.

가능하다면 코어에 공격이 닿기 전에 적 초인의 힘이 다하기를 빌었다. 하지만 그런 바람이 무색하게도 다급한 마법사들의 목소리가 그의 고막을 두드렸다.

“히익! 첫 접촉으로 삼십 층의 보호 장벽이 단숨에 부서졌습니다. 사십 오층! 육십 층! 칠십팔! 백십.”

“그, 그마아안!! 멈춰, 이 자식아!!!”

마치 숨통을 조여 오는 것 같은 보고에 참지 못한 조셉이 두 눈을 부릅뜨고서 소리쳤다. 그건 보고하는 마법사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수정구 속에서 코어를 향해 대검을 내리치고 있는 플레타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외침이었다.

그야말로 난리가 난 석실.

하지만 이런 석실과 달리, 즐거운 듯 플레타와 라울의 연계를 지켜보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이드 일가와 은색 기사단이 그들이었다.

특히 그중 일리나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대검의 검신에 일렁임이 생겨날 때부터 유심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주변의 기운이 저 검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어요.”

“무공은 아니에요. 대기가 자연스럽게 상동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흡인력에 끌려가는 거네요.”

“초인기겠죠?”

“정확히는 초인기로 인해 발생한 자연 현상에 가까워 보여요.”

“전 그의 초인기가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요.”

이드는 그럴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한 의식이나 고절한 무공 없이 대기에 존재하는 기를 끌어모으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하물며 이런 현상의 원인이 초인기의 직접적인 능력이 아니라, 부차적인 현상일 뿐이라니. 어지간해서는 그 속에 든 진실을 꿰뚫어 보기가 힘들다. 무엇보다 일리나가 쉽게 간파하기 힘든 이유는 플레타의 초인기가 밖으로 드러나는 형태의 것이 아닌, 안으로 한없이 수렴하는 형태의 초인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플레타의 초인기라도 이드의 예민한 기감과 신안까지 피해 내지는 못했다. 이드는 기감을 통해 플레타와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손에 잡힐 듯 읽고 있었고, 덕분에 플레타의 초인기에 대해 확신할 수 있었다.

“일리나가 알아보기 어려운 건 당연해요. 그게 저 초인기의 특징일 테니까요. 그의 초인기는 간단해요. 바로 무게 조작.”

“무게…… 조작이요? 뭔가를 무겁게 하거나, 가볍게 하는 그런 걸 말하는 건가요?”

“가볍게도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다른 물건에도 능력을 쓸 수 있는지도. 하나 확실한 건, 현재 본인을 포함해 그가 가진 대검의 무게를 엄청나게 늘려 놓았다는 건 확실해요.”

“……얼마나요?”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백 톤 정도? 각각의 무게로 말이에요.”

플레타와 대검의 무게를 합하면 이백 톤이라는 말이다. 일리나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게 가능해요?”

그녀의 짧은 질문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물리 법칙 안에서 그게 가능한지, 백 톤의 무게를 뼈와 살로 만들어진 인간의 몸이 견딜 수 있는 것인지 등등.

그런 의미를 가진 의문에 이드는 간단하게 어깨를 으쓱여 답했다.

“가능하고 말고 이전에 이미 일어난 일인걸요. 그리고 초인기잖아요. 초인기를 상대로 상식을 따질 순 없죠.”

무공이나 마법도 그렇지만, 특히 초인기는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형태로 발현되는 경우가 많다.

또 자연계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자주 있다. 당장 차원진으로 공간 이동이 어려운 이때, 초인은 태연하게 공간을 넘어 다니고 있지 않은가.

초인기는 정령과 닮아 있다. 정령은 그 속성 안에서는 그야말로 무한하게 자유로운 존재들이다. 그러니 초인도 자신의 초인기 안에서는 무한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럼 대기의 기운이 빨려 들어가는 건, 초질량으로 인한 일종의 인력 때문일 수 있겠네요?”

사실 농담 같은 일이다.

아무리 좁은 범위에 거대한 무게가 실렸다고 한들, 인력이 발생할 정도라니. 하지만 이 질량을 조종하는 것이 초인기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사실 정확한 사실 관계를 따지고 보면 이드가 말했던 ‘무게 조작’이라는 플레타의 초인기도 그것이 무게 조작인지, 질량 조작인지 당사자의 말을 들어 보기 전에는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지금 중요한 건 능력의 정체가 아니라, 그 능력이 아군에게 있으며, 적에게 충분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능성은 충분하죠. 대검 주변이 일그러져 보이는 것도 그 비슷한 이유일 테고요. 아무튼, 정확한 원인이 무엇이든 대단한 수법이에요. 인공적인 무위검을 만들어 냈으니까.”

무위검.

현경의 끝자락에서, 의지로서 대기의 기운을 움직일 수 있을 때 형태만이나마 만들어 볼 수 있는 공능의 하나.

그야말로 절대자의 증거.

이드의 이런 극찬에 일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과 비교하기엔 위력이 너무 떨어져요.”

“그렇죠. 하지만 당장 눈앞에 있는 코어에 닿기에는 충분한 힘이에요. 그거면 충분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이런 이드의 말과 동시에, 대검이 코어에 닿았다.

쨍강.

유리가 부서지는 소리가 모두의 몸을 두드리며, 대검 끝에서 눈 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은 너무 강해 사람들이 똑바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들었다.

검은 몬스터와의 전투도 잠시 멈췄다. 아니, 그쳤다.

!!!

강렬한 빛에 휩쓸린 일부 몬스터들이 태양 아래 나온 뱀파이어처럼 재가 되어 흩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적을 앞에 둔 상황이라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 모습을 지켜본 플레타 부대원들은 환호했다.

“플레타 대장 만세!”

“믿고 있었습니다!”

이대로 전투가 끝나는 것인가. 죽여도 죽여도 다시 나오는 놈들도 이걸로 끝이 나는 것일까. 하나 불행히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크윽!”

눈부신 빛살 사이로 답답한 신음성이 실려 나온 다음 순간, 그 한없던 빛이 그쳤다. 너무 밝던 빛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백색의 공간에 밤이 찾아온 듯 어둡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떨어져 내리는 플레타의 커다란 인형. 미간에 주름이 가득한 그의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런 그를 대신해 이드가 짧게 결과를 평했다.

“아쉽네. 조금 약했어.’

정말 조금이었는데,

플레타의 한 수면 충분히 통할 것이라 짐작했던 이드도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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