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50화
1285화
플레타는 부하의 부름에 답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고개를 돌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검은 그림자를 흡수한 코어의 변화가 빨라졌다.
길쭉한 하체에 단단한 상체가 우뚝 서자 그 위에 머리와 팔다리가 돋아났다. 특히 머리에는 투구를 쓰고 있었는데, 그 이마에는 유니콘의 것 같은 뿔이 솟아 있었다.
그 모양을 자세히 보면 고개가 갸웃한다.
애초에 투구는 머리와 감각 기관을 보호하기 위한 용도다. 그런데 그 안에는 보호해야 할 눈, 코, 입이 없었다. 무엇 하나 지킬 것도 없는 얼굴에 무슨 투구란 말인가.
하지만 그에 답할 수 있는 마법사들은 모두 숨어 있다.
대신 의미 모를 투구의 형상 덕분에 코어가 무엇으로 변하고 있는지 분명해진 것은 좋았다.
“켄타우로스?”
네 개의 다리를 가진 말의 몸에 인간의 상체를 소유한 고대의 이종족.
현재는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 그들을 직접 보았다는 사람은 없다. 멸종된 것인지, 아니면 대륙의 어느 오지나 깊은 던전에 살고 있는지 모를 신비한 종족. 코어는 그런 그들의 형상을 만들어 내고 있던 것이다.
물론 모든 면에서 똑같은 건 아니었다.
진짜를 본 적은 없지만, 듣기로 그 종족이 저렇게 크지는 않다고 하니 말이다.
“…..마법사 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마법사들은 대체 무슨 의도를 갖고 코어로 켄타우로스의 형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인가. 플레타가 내심 고개를 저을 때다.
꾸오오오옹!
어느 정도 형체가 갖춰지자, 인형처럼 멈춰 있던 코어가 움직임을 보였다.
반격의 시작이었다.
그 방법도 평범하지 않았다. 우선 무기가 생겨났다. 무기는 대검을 막고 있던 육각형의 검은 벽이었다. 이 벽의 중간 부분이 뾰족하게 솟아오르며 길쭉하게 늘어났다.
늘어나는 속도는 쏜 화살처럼 빨랐다. 거기에 벽에 연결된 코어 켄타우로스의 팔이 앞으로 뻗어 나오며 속도를 더했다.
빠앙!
평평한 벽에서 순식간에 거대한 기병 창으로 변한 창끝이 일순간에 음속을 뚫어 냈다. 기막힌 순간 가속에 대기가 부서지며 창끝에서 뿌연 연무가 둥글게 퍼져 나온다.
그리고 그 끝에 있어야 할 플레타의 모습이 없다. 기병 창에 꿰여 갈기갈기 찢겨 흩어진 것일까.
“대장!!”
아니다.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오탄의 고개가 한 방향으로 급히 돌아간다. 그곳에는 허공을 나는 커다란 검은 인형이 있다.
엄청난 찌르기에 창끝에서 털려 나간 플레타였다. 그는 순식간에 은색 기사단의 머리를 넘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세상 끝까지 날아갈 것 같다.
“젠장.”
하지만 플레타가 그리 만만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짜릿한 속도감 속에서 대검을 휘둘렀다.
휘잉, 휭. 휘이잉!
한번, 두 번, 세 번,
우뚝.
세 번의 휘두름에 화살보다 빠르게 날려 가던 그의 몸이 디딤판을 디딘 듯 딱 멈춘다. 기병 창이 솟아나고, 플레타가 멈추기까지 1초도 되지 않는 시간,
그런데도 날아가는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바닥에 내려선 플레타는 어느새 후방에 선 은색 기사단보다도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바닥에 내려선 플레타가 코어 켄타우로스를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았다.
플레타를 날려 버린 놈은 어느새 창을 회수한 상태로 멈춰 있었다. 아니, 멈춘 것이 아니라 그 상태로 몸의 세세한 부분을 가다듬어 마저 완성하는 중이었다.
“하! 이거 웃긴 놈이네.”
플레타는 파들거리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자존심이 상했다. 강대한 적이라면 한번 밀어붙였을 때 몰아쳐야 한다. 공격의 맥을 잡았으면 놓쳐서는 안 된다. 그것이 전투의 기본이다.
한데도 코어 켄타우로스는 공격보다 몸의 완성을 우선했다. 그건 달리 보면 자신이 그만큼 위협적이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신체를 완성한 후에 싸워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랄까.
물론 저 코어 켄타우로스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한편으로는 다행이기도 했다. 공격의 맥이 끊겼고, 그게 아니라도 코어 켄타우로스가 부대원이나, 다른 일행을 노렸다면 자신의 몫이 사라질 뻔했으니까.
플레타는 훌쩍 몸을 날려 다시 전장으로 돌아왔다.
오탄이 플레타를 아래위로 살폈다.
“깜짝 놀랐습니다. 무사하신 거죠?”
“어이없지만 그냥 던져졌을 뿐이야. 저놈, 힘이 굉장해.”
“그거야 보면 압니다.”
농담이 아니라 덩치가 집채만 하다. 팔 굵기만 어지간한 기둥만 하니, 거기서 나오는 힘이 어떻겠는가.
거기다 그 굵은 팔뚝에 실시간으로 울퉁불퉁한 근육이 솟아오르고, 핏줄이 돋아나며 더 위협적으로 보이게 만들어지고 있다.
무슨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 같은 쓸데없는 디테일에, 보고 있는 쪽에서 신경질이 날 정도다. 하지만 곧 그 근육과 맞붙게 될 플레타는 그 변화 하나하나에 눈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아까 불렀지?”
“네? 아, 네. 중요한 건 아닌데. 부대의 전투가 끝났습니다.”
“……그걸 굳이 그 순간에 알리려 했다고?”
“당연히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건, 부대원들이 상대하던 그림자들이 갑자기 연기처럼 변해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갑자기?”
그제야 플레타의 눈이 좀 전까지 치열했던 전장으로 향했다.
이미 그곳에는 적은 사라지고 진형을 만들어 경계 중인 부대원들만이 남았다.
“정확히는 안개처럼 변해서 저쪽으로 흡수되는 모양새였습니다.’
말과 함께 오탄의 손끝이 코어 켄타우로스를 가리킨다.
순간 플레타의 뇌리에 튕겨 나기 직전, 코어 켄타우로스 주변에 일렁거리던 검은 그림자가 떠오른다.
그것이 여기서 온 거였다니. 아무래도 사라진 그림자 몬스터들이 코어 켄타우로스에 힘을 더해 준 모양이다.
과연, 그런 이유라면 전투 중임에도 오탄이 급히 소리칠 만하다. 그의 부름은 일종의 경고였다.
“마법사 놈들, 흩어진 상태로는 안 될 것 같으니 저것에 몰빵 하기로 작정한 건가?”
“대장 상대로는 해볼 만해 보였나 봅니다.”
“놀리냐?”
“설마요. 눈이 삔 놈들이죠. 대장의 이 무식한 근육과 대검을 보고도 해볼 만해 보였다니. 사람 볼 줄 모르는 놈들이 분명합니다. 본때를 보여 주십시오.”
“말하는 투가 어째 나 혼자 알아서 하라는 것 같다? 넌 보고만 있냐?”
“저야 당연히 대장이 혼자 상대하겠다고 할 것 같아서 한 말인데.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오탄이 눈을 가늘게 뜬다.
플레타는 그 눈매 사이로 비친 눈빛이 요사스럽다고 느꼈다.
‘도움’이 필요하냐고? 이런 전투에선 ‘협공’을 할 거냐고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디 결투도 아니고.’
애초에 도움 따위 받을 생각도 없었고, 협공도 머리에 없었다. 처음부터 혼자 상대하려고 했던 적이다. 그런데 ‘도움이 필요하냐’니, 이건 자존심 때문에라도 차마 대답할 수 없는 말이 아닌가.
심지어 자신을 가장 잘 아는 부대장이라는 놈이.
그야말로 노리고 꺼내 놓은 말이다. 지금까지 뒷짐 지고 구경만 했으니, 이제는 본인더러 적을 상대로 고생 좀 하라는 의도가 분명했다.
“너 이 자식…….”
“부대원들 준비하라고요?”
“필요 없어! 저 정도는 내가 처리한다.”
“흐흐. 그럴 줄 알았습니다. 제가 조바심에 괜한 소리를 한 거지요. 믿고 있습니다!”
“징그러워. 임마!”
흉측하게 웃는 오탄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낸 플레타가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 나갔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오탄을 상대로는 도움 따위 필요 없다고 했지만, 사실 정말 필요가 없을지는 장담하기 힘들었다.
‘속도도 속도인 데다, 무엇보다 힘이 보통이 아니야. 200톤의 무게를 날려 버렸어.’
자신과 대검을 더한 무게가 200톤이다.
보통은 튕겨 내긴커녕 그 십 분의 일의 무게에도 짓눌려 뭉개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저 코어 켄타우로스는 그 무게를 아무렇지 않게 튕겨 냈다. 그리곤 화살처럼 쏘아 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다. 지금의 무게로는 적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자신의 힘이자, 진짜 무기인 무게를 더 높일 필요가 있다.
“과연 어디까지 견딜지 해 보자고.”
무게에 무너지는 건 자신일까. 코어 켄타우로스일까.
어느 쪽이라도 자신이 지는 일은 없다. 비록 오탄이 저렇게 말하긴 했어도, 자신이 진짜 위험하다 싶으면 부대원을 이끌고 합류할 것이다. 게다가 보는 데 있어서는 누구보다 뛰어난 라울도 있다.
그놈이라면 나서야 할 때를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 보면 오늘처럼 맘 편히 싸우기 좋은 날도 드물다. 라울은 물론 검후와 명예 후작까지. 아주 등 뒤가 든든하다 못해 안락하다.
“그럼 어디, 오랜만에 코가 삐뚤어지게 달려 볼까. 가볍게 두 배 증량부터!”
플레타가 훌쩍 뛰어올랐다. 그가 노리는 것은 투구를 쓴 머리.
코어 켄타우로스는 어느새 몸의 모든 부위가 완전하게 틀을 잡고 있었다. 오직 한 곳, 얼굴만이 덜 다듬어진 상황.
어쩌면 얼굴이 가장 중요하지 않은 부위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투구까지 쓰고 있으니까. 하지만 달리 말하면 현재 완전히 자리 잡지 못한 얼굴이 가장 약한 부위라는 의미기도 하다.
점프와 동시에 플레타의 가슴속에선 초인력이 용솟음쳤다.
바벨의 간부라는 직책에 어울리는 강력한 거대하고 강력한 힘. 그것은 곧 플레타의 온몸을 채우고, 손에 들린 대검으로까지 뻗어 나간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곳을 채웠을 때, 초인기가 발동해 초인력에 의미를 부여한다.
플레타 200톤. 대검 200톤. 합 400톤.
그레센 바다에 떠다니는 대형 화물선보다 큰 무게. 살포시 발 한 짝만 올려도 저 숲의 제왕이라는 오우거가 뭉개질 정도로 엄청난 무게.
그 무게가 허공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묵직하고 빠르게.
일반적이라면 뛰어오르긴커녕, 무게가 더해진 순간에 땅으로 떨어져야 옳았다. 하지만 플레타의 몸과 대검은 그 물리적인 기본 법칙을 무시했다. 모두 초인기의 신비다. 플레타가 원하지 않을 때, 그의 그 무게는 모두 아래쪽이 아닌 온전히 그의 몸 중심을 향한다.
오직 그가 원할 때만 원하는 방향으로 그의 무게가 작용한다.
지금도 그렇다. 현재 400톤의 무게는 온전히 플레타의 몸과 대검의 중심으로 향해 있다. 중력이라면 그대로 콩알 크기로 압축될 그런 힘이
플레타와 대검의 중심으로 뭉친다. 그 인력이 대기의 기운을 급격히 끌어모은다.
그것은 그대로 힘이 되어 대검속에는 신비로운 영기가 되어 쌓이고, 플레타의 몸속에선 내공으로 변해 내달린다.
짜릿한 그 감각에 플레타의 입술이 꿈틀거린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모른다. 그의 온 정신이 검과 코어 켄타우로스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휘잉!
대검이 코어 켄타우로스의 머리를 노리고 휘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