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51화
1286화
쩌억.
검이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공간이 갈라진다.
단순한 내려치기처럼 보이는 이 공격은, 보기와 달리 그 속엔 깊은 현기와 파괴력을 품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단순한 내려치기에 공간이 갈라질 리가 있는가.
무엇보다 무거우면서 빠르다. 한 번의 휘두름에 이런 상반되는 느낌을 동시에 주는 공격이 가능하기는 한가.
누군가는 이런 이해할 수 없는 감각에 오싹함을 느낄 것이다. 그렇기에 이 공격의 이름에는 ‘전율’이 붙는다.
전율의 철퇴.
수백 톤의 무게를 내포한 검과 코어 켄타우로스 사이의 공간을 막아서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대로라면 놈의 머리는 통째로 날아가고 만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다.
검은 그림자가 그 중간에 홀연히 끼어들었다. 그림자의 정체는 뾰족한 창끝을 세우고 있는 기병창.
멈춰 있던 코어 켄타우로스가 플레타의 공격에 다시 반응한 것이다. 그만큼 위협적이었던 걸까. 쿠르르릉!
기병창과 대검이 부딪쳤다.
플레타가 들고 있는 대검은 크다. 손잡이까지 일체형으로 제작된 검의 전체 길이는 2m에 달하고, 무게는 19kg이나 된다. 잘 알려진 대검의 한 종류인 클레이모어의 무게가 3kg 정도이니 실로 대단한 무게다.
어지간한 장사가 아니면 제대로 들고 휘두르기도 힘들 거다.
한편으로는 납득이 되기도 한다. 일개 무기에 수십, 수백 톤을 담으려면 무조건 크고 단단해야 하지 않겠는가. 검에 실릴 무게를 따지고 보면 사실 지금도 너무 약하다. 비유를 하자면 이쑤시개 끝에 100kg 짜리 철괴를 묶어 둔 격이랄까. 그럼에도 이걸 가능하게 하는 건 역시 초인기의 힘일
것이다.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일이지만, 사실 플레타의 대검에는 귀한 금속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평범한 검으로는 견딜 수 없으니까.
아무튼, 이런 특별한 대검이지만 막상 기병창과 충돌하는 모습은 말할 수 없이 빈약해 보인다.
코어 켄타우로스가 거대한 만큼 그가 들고 있는 기병창도 거대한 것은 당연했다. 말이 기병창이지, 어디 수백 년 된 거목을 들고 있는 느낌이랄까. 거기에 비하면 2m짜리 대검은 너무도 연약하고 가벼워 보인다.
서로 닿는 순간 부러져 버릴 것 같다고 할까.
하지만 기병창과 대검의 실제 충돌이 낳은 결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푸화화!
실제 깨져 나간 건 기병창이었다. 대검과 충돌한 기병창은 뾰족한 에지부터 시작해서 그 중간까지, 마치 두부가 으깨지듯 순식간에 짓뭉개지면서 폭발했다. 다만 플레타로서는 아쉽게도 기병창을 완전히 부숴 버리지는 못했다.
쿠르르르릉-
대신 중간에 멈춰진 곳에서 땅이 무너지는 소리가 나더니, 충격파가 파도처럼 터져 나왔다. 과연 이 충돌 지점에서 폭발한 힘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대신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 여파를 온전히 감당하기에는 코어 켄타우로스의 커다란 육체가 너무 가볍다는 것.
꾸오오옹!
코어 켄타우로스가 특유의 소리를 내지르며 뒤로 쭉 밀려났다. 심지어 허공을 디디고 있던 몸이 추락했다.
터터텅!
네 개의 다리가 백색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서 겨우 바로 선다. 코어 켄타우로스가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고, 플레타가 선빵을 때린 것이라고는 하지만, 단일 합으로 힘의 우열이 가려진 느낌이랄까.
그리고 이런 느낌은 석실에도 공유되고 있었다.
“……저 괴물은 뭐지?”
“코드 알토가…… 저렇게 쉽게 밀린다고?”
“괜찮아. 아직 알토가 완전히 변이를 마치기 전이라서 그래. 곧 상황이 바뀔 거다. 믿어라!”
마법사들은 한마음으로 코어 켄타우로스를 응원했다.
하지만 그들 중앙에 선 조셉은 이런 마법사들의 목소리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이마에는 진득한 땀이 솟아 있었다.
플레타의 공격에 코어 켄타우로스가 튕겨 나는 모습을 보고 가장 가슴이 철렁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그였다. 코드 알토라면 괜찮을 줄 알았다.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을 줄 알았다.
혹시 그런 생각이 오판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미 되돌리긴 늦었다.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적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아낸 것이 없느냐!”
“죄송합니다. 아직 전해진 소식이 없습니다. 여태까지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바벨의 핵심 공격 부대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만.”
“그딴 건 말하지 않아도 알아!”
“……”
조셉의 면박에 말을 꺼냈던 마법사가 눈을 내리깐다. 스스로 바보 같은 소리를 했다는 걸 아는 것이다.
잠시 그를 노려보던 조셉이 다시 수정구를 살핀다. 그 안에서 플레타가 코어 켄타우로스를 따라 바닥으로 내려서는 것이 보인다. “적이 강력하다면, 우리가 약하게 만들면 된다. 지형 변형은 아직인가!”
“아닙니다. 지금 막 침식 지형으로 변형 완료했습니다!”
“좋아. 적을 바로 설 수 없도록 만들어!”
땅을 디디고 선 기사에 있어서 대지의 안정성은 절대적이다. 그걸 빼앗겼으니, 적의 전투력도 크게 떨어질 것이다. 그런 기대를 안고 조셉은 계속해서 수정구를 노려보았다.
“음?”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한 건 이드였다.
그를 포함해 모두의 눈이 바닥으로 내려서는 플레타를 향해 있을 때, 문득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지지력이 약해졌다.
그리고 곧장 바닥이 물컹거리기 시작했다.
“이드, 바닥이 가라앉아요.”
일리나가 말했다.
바닥은 단순히 물컹거리기만 할 뿐 아니라, 위에 있는 사람들을 그 안으로 빨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마치 바닥이 늪으로 변한 것 같았다. 이때쯤엔 다른 사람들도 변화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늪이다! 땅이 늪으로 변했어!”
“지지대를 찾아!”
“방패다! 방패를 바닥에 깔아.”
당황한 가운데, 대응책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곳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던 백색 세상이다. 쓰러진 나무나 바위 같은 지지대는 처음부터 없었다. 아니, 애초에 땅이 늪처럼 변한 것도 보기에 따라 기괴하다. 눈으로 볼 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 없이 평평한 바닥이다. 황궁의 대전처럼 돌을 깔아 놓은 것 같달까. 그런 바닥이 갑자기 푹푹 빠지며 다리를 잡아끄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당혹스럽기는 플레타 부대보다도 은색 기사단이 더했다. 플레타 부대에는 별별 능력을 가진 초인들이 많았고, 마법사도 있는 데 반해 은색 기사단은 오로지 기사들뿐이었으니까.
“비올라 마법사, 방법이 없겠습니까.”
이런 부하들의 모습에 쉴라가 비올라를 찾았다. 믿음직하긴 라미아가 최고지만, 비올라가 있으니 우선 좀 더 대하기 편한 그에게 먼저 방법을 구하는 것이다.
“하, 하하, 당연히 있지요.”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말에 기분이 좋은 걸까. 비올라가 짐짓 호탕하게 웃으며 두 팔을 걷어 올렸다.
그러나 그가 활약할 기회는 없었다.
비올라가 앞으로 나서서 무얼 하기도 전에, 이드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실프’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 빠르게 달려오던 귀여운 정령.
그런데 이번엔 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라미아가 그 이유를 말했다.
“하급 정령의 힘으로는 이 공간으로 비집고 들어서기 힘들어요.”
“그럼 로이콘.”
-부르셨습니까.
중급을 건너뛰고 바로 상급 정령을 불러낸 이드. 그 부름에 로이콘이 나타났다.
“여기 사람들이 디디고 설 수 있는, 공기의 바닥을 만들어 줘.”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로이콘이 사라진 직후. 늪처럼 변한 바닥에 기우뚱거리던 기사, 무릎까지 다리가 바닥에 빠진 기사들이 갑자기 둥실 떠올랐다. 갑작스러운 현상이지만 그 힘에 반항하는 이는 없었다. 당황스러운 중에도 이드가 정령을 불러 어떤 명령을 하는지 모두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떠올랐던 그들이 다시 바닥에 내려졌을 때, 물컹하던 바닥은 단단해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유리처럼 투명한 무언가가 새로운 바닥이 되어 그들을 받치고 있었다.
“와~ 씨. 내가 활약할 기회를 이렇게 뺏어 가기 있습니까?”
“와~씨?”
입안에 든 사탕을 뺏긴 표정을 하고서 불만을 토하는 비올라를 향해 이드가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말실수였습니다.”
“이번은 넘어가 준다. 그리고 어차피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아니기는요. 플로터로 장판을 깔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데. 오히려 이런 일에 상급 정령을 부리는 게 낭비라고요.”
“낭비는 무슨. 그리고, 플로터? 잠시면 괜찮겠지. 하지만 여기에 얼마나 있을 줄 알고? 몇 시간 동안 유지할 수 있겠어? 전투가 벌어지면 그 충격량에 대한 감당이 가능하냐고.”
은색 기사단의 숫자를 생각할 때, 비올라의 마나량으로 플로터 마법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최대 1시간이 넘지 않는다. 그 이상 유지는 힘들다. 그리고 플로터의 유지 시간은 그 위에 얼마의 무게가 올라 있냐에 따라 변한다. 다시 말해,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그로 인해 진각이나 바닥에 대한 충격이 더해지면 유지 시간은 그만큼 줄어든다는 말이다.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내용에 비올라는 조용히 쭈그러졌다. 어디 하나 틀린 구석이 있어야 꿍얼거리기라도 해 보지. 이건 자존심을 내세워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비올라를 닥치게 만든 이드가 라울을 찾았다.
“플레타 부대에도 도움이 필요합니까?”
현재 로이콘이 받치고 있는 건 후방에 선 이드 일기와 은색 기사단 뿐이다. 좀 전까지 전투를 벌이고 있던 플레타 부대와는 거리가 있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이 정도 문제는 충분히 대응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그의 말대로였다.
당황하던 은색 기사단과 달리, 플레타 부대는 흐트러짐 없이 똑바로 서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들의 발아래로 회색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로이콘처럼 누군가의 초인기로 바닥을 대신한 것 같았다. 정확히 어떤 초인기인지 알 수 없지만, 라울의 가벼운 표정을 보면 문제없는 것이 확실한 듯했다.
그리고 힘에 겨우면 그때 도움을 요청하지 않겠는가. 굳이 이쪽에서 도움을 주지 못해 안달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늪으로 변한 바닥에 대한 대응을 끝낸 이드가 다시 코어 켄타우로스와 플레타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이쪽은 바닥에 대해 이렇게 문제를 해결했지만, 과연 플레타는 어떨까.
처음부터 허공을 디디고 있던 코어 켄타우로스야 상관이 없겠지만 플레타는 무게도 있어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닐텐데.
하지만 이런 우려를 비웃듯 플레타는 당당하게 바닥을 디디고 서 있었다.
그런 그의 발은 한치도 바닥으로 파고들지 않았다. 마치 무게가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