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52화
1287화
“경공은 아니고. 무게를 조절했나.”
침식 지형으로 변한 땅 위에 태연히 선 플레타.
이드는 단번에 그것이 무공으로 인한 공능이 아님을 알아보았다.
경공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초인기를 사용한다. 검후를 앞에 두고 그렇게 감격스러워하던 것과는 별개로, 플레타의 정체성이 초인임을 증명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여기 마법사들은 어지간히 멍청한 것 같아요.”
그 모습을 함께 보고 있던 라미아가 턱 끝을 들어 올렸다.
“겨우 늪지 따위를 만들어서?”
“이런 공간을 조율하려면 적의 역량 정도는 간파할 줄 알아야죠. 이건 그냥 마력 낭비예요, 마력 낭비.”
일단 그녀도 마법사이기 때문일까. 의미 없는 마력의 사용에 대해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이드는 내심 고개가 갸웃했다.
평소 라미아는 별별 사소한 일에 거침없이 마법을 사용했다. 청소할 때도, 물 마실 때도, 사랑을 나눈 후에도. 그건 낭비가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많이 쓰기는 했지만, 허튼 건 없는 것도 같고.
어쨌든 과거의 그 상황들을 제외하면, 일단 라미아의 말에 틀린 바가 없었다.
전투에 있어 적을 아는 일은 기본 중 기본이다. 자신들이 준비한 수단이 적에게 통할지 아닐지 정도는 계산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이번에 내놓은 침식 지형은 대단한 헛발질이다. 플레타는 물론 나머지 일행에도 전혀 통하지 않았으니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공간을 갈라내는 플레타의 힘을 봤다면 그가 침식 지형 같은 어중간한 수법은 충분히 대처가 가능할 거라고 예상해야 했다.
물론 어떤 때는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탓에 별것 아닌 일에도 치명타를 입거나, 대처가 어려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드문 경우일 뿐,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다. 전투에 그런 우연과 행운을 기대하는 것은 실로 멍청한 짓이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의 마법사들은 설마 그런 걸 기대한 걸까.
그게 아니라면 이 공간과 싸움을 지켜보는 마법사들은 전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 저런 되지도 않는 방법을 골라 사용한 것이 아니겠는가.
“확실히 멍청한 짓이기는 하지. 그래도 덕분에 하나는 알았잖아. 마법사들이 이 공간을 지켜보고 있으며, 변형시킬 수 있다는 거.”
“그거야 처음부터 알고 있던 일이잖아요.”
“짐작과 확인은 다른 거니까. 그리고 첫 개입은 허술하지만, 이후에는 어떨지 몰라. 갑자기 이 공간을 물로 채울 수도 있는 일이고. 조심해야지.”
백색 공간을 물로 채운다.
그건 침식 지형으로 만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움직임은 둘째치고, 제대로 호흡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아무리 침식 지형에 영향을 받지 않는 플레타라고 해도, 그런 상황까지 대처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을 미리 할 필요가 뭐 있어요? 저 많은 초인 중 수중 호흡을 해결할 사람이 최소 한 사람 정도는 있겠죠. 정 없으면…… 이드가 나서면 될 일이고.”
라미아는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 이드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곤 눈을 반달로 만든다.
이드는 대답 대신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맞다. 바벨에 사람이 없으면 이드가 나서면 된다. 아니면 검후라도. 원래 그러려고 온 거니까.
다만, 그럴 경우 목숨은 살릴 수 있겠지만 바벨의 자존심이 죽는다.
서로 어색해진다고 할까?
될 수 있으면 지금 이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면 좋지 않은가.
“그러자면 플레타 씨가 마법사들이 딴짓하기 전에 저 코어를 파괴해 줘야 할 텐데. 그렇지 않습니까, 라울 자작?”
“걱정하지 않으셔도 잘할 겁니다.”
라울이 답했다.
애초에 이드와 라미아의 목소리가 그렇게 작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심전심이었을까. 멈춰 있던 플레타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코어 켄타우로스 역시 움직였다. 놈의 부서졌던 창은 어느새 멀쩡한 모습으로 복구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만들어지는 중이었던 투구 속 얼굴도 눈코입이 선명하게 자리 잡았다.
미완성의 몸이 온전히 완성된 것이다.
콰콰곽!
코어 켄타우로스는 당장 창을 앞세우고 달려들었다. 그가 이 공간의 코어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법이 그런 것일까.
침식 지형은 코어 켄타우로스의 발목을 잡지 않았다. 오히려 단단히 놈의 발을 받쳤다. 워낙 커다란 몸이기에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공격 사거리에 드는 순간, 창이 움직였다.
슈슈슈슉.
한 번의 찌르기에 창이 수십 개로 분열해 플레타의 주변 백 미터를 감쌌다. 무리를 담은 허상이나, 극한의 속도가 만든 잔상도 아니다. 모든 창이 실체다.
“흥, 여전히 내겐 너무 가벼운 공격이야.”
코어 켄타우로스의 공격을 눈앞에 둔 플레타는 오히려 웃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서 대검으로 땅을 찍어 냈다.
리버스 호라이즌.
백색의 바닥에 드레스 자락의 그것 같은 풍성하고 완만한 주름이 만들어진 순간, 대검이 연어처럼 뛰어올랐고.
콰르르르르-
그런 검로를 따라 백색의 바닥이 솟아올랐다. 그 모습은 마치 하얀 폭포가 거꾸로 용솟음치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주변 땅이 몽땅 튀어 오른 것이다.
이 공간이 하늘도 땅도 백색이어서 그렇지, 그렇지 않았다면 하늘과 땅이 일순간 뒤집힌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그야말로 땅이 일어나는 대지진을 떠올리게 만드는 장관. 과연 검으로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은 모습.
무엇보다 이 공간의 특이성을 생각하면 저 모습은 더욱 특별하다.
솟아오른 것이 단순히 바닥이 아니라, 공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플레타의 검은 공간을 통째로 일그러트리고 뒤집었다는 것. 그렇게 일어난 바닥이 코어 켄타우로스의 창에 가 부딪혔다.
해안가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의 모습이 저럴까. 다만 여기서 부서지는 것은 파도가 아니라, 절벽 대신 높게 솟은 검은 창이었다. 콰득.
콰드드득.
파도에 쏠린 모래처럼 높이 솟은 창들이 쓸려 나갔다. 몽땅 부서져 검은 그림자로 변했다. 그럼에도 코어 켄타우로스의 얼굴에는 표정이란 것이 없다. 만들어진 얼굴이기 때문일까. 다시 회복하면 되기 때문일까.
“그 무표정이 얼마나 가는지 보자!”
살짝 짜증이 난 목소리와 함께, 흩어지는 검은 그림자를 뚫고 플레타가 불쑥 튀어나왔다. 어쩌면 그도 지형이 변한 상태에서 시간을 오래 끌어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이어지는 공격들이 빨랐다.
마치 누가 등 뒤를 민 듯 허공을 죽 미끄러진 플레타의 검이 코어 켄타우로스의 머리를 내리쳤다. 코어 켄타우로스는 그 공격을 투구에 솟은 뿔로 막았고, 그 직후 창을 들지 않은 주먹을 날렸다.
그에 플레타는 피하는 대신 온몸으로 주먹을 내리찍었고, 막대한 중량에 코어 켄타우로스가 주춤하는 반동으로 뛰어오르며 녀석의 턱을 향해 검을 올려쳤다.
그야말로 흐르는 듯 자연스러운 공방이었다.
무엇보다 빨랐다. 한쪽은 극도로 무겁고, 한쪽은 거인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컸음에도 둘 다 평범한 사람은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태연하게 공수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런 움직임 속에서도, 공격의 주도권을 잡은 사람은 확실하게 구분이 되었다.
푸칵.
파화확
계속해서 부서지고 복구되기를 반복하는 코어 켄타우로스의 모습. 그와 함께 사방으로 아른거리는 검은 그림자.
공격의 주도권을 쥔 쪽은 분명 플레타였다.
“쿠쿡. 아하하하.”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검후가 갑자기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갑자기 무슨 이유일까? 그녀를 향해 시선이 모여들자 검후가 눈가를 적신 눈물을 닦아 내며 기가 막힌다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참, 저자의 검술이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대단한 힘이 느껴지긴 합니다만. 어찌 웃으십니까?”
이드가 쉴라의 물음에 자신도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웃을 수밖에. 저 플레타라는 자. 나를 보고서 타라툼을 익혔다고 밝혔는데. 보거라. 지금 그의 검에서 타라툼의 흔적이 보이느냐?”
“그러고 보니……”
현재 플레타의 검술은 딱히 검술이라고 부를 것도 없이 베기, 내려치기, 그리고 찌르기라는 극히 단순한 기본기의 조합일 뿐이었다. 타라툼이라는, 관성을 극한으로 이용하는 고급 대검술의 모습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군요.”
“그래. 그런데 지금 그의 검은 타라툼을 따를 때보다 더 강력하지. 저런 검술을 두고 타라툼을 익혔다고 소개했다니. 우습지 않니?”
“하지만 저래서야 검술이라고 부르기 힘들지 않을까요?”
스폴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명예 후작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대단한 검술입니다. 단순함에서 저만한 힘을 끌어낼 수 있다면 대단한 거죠.”
“하지만 지금 저 위력은 그의 초인기에서 나오는 것이잖습니까.’
“그건 스폴 경의 말이 옳아요. 하지만 결과를 보세요. 그의 초인기가 아무리 대단해도, 검술 실력까지 높여 주진 않습니다. 자신의 초인기를 저렇게 자연스럽게 검으로 뽑아낼 수 있으려면 얼마나 노력했겠습니까. 초인기를 사용했다 해도, 플레타 대장의 검술은 어떤 면에서는 극에 이른 중검이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아요.”
무공으로 치면 순일(純)의 만류귀종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드의 극찬에 스폴을 포함한 은색 기사단의 시선이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는 그저 강력한 초인기를 가진 초인을 보는 시선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강력한 초인이면서 동시에 뛰어난 무인 정도로 수정되었달까.
“그렇게나…….”
“물론 저대로라면 아무리 대단한 중검을 가지고 있어도 결국엔 먼저 지쳐 쓰러지고 말 테지만 말이죠.”
이드가 플레타의 지금 상황을 냉정히 평가했다.
분명 공격의 주도권은 플레타에 있다.
그러나 그의 공격이 적에게 치명타가 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코어 켄타우로스의 턱을 부수고, 어깨를 부수고, 가슴에 구멍을 뚫었지만, 적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인상은 전혀 없었다.
코어 켄타우로스의 속도와 힘, 회복력 그 어떤 것도 줄어드는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나 코어 켄타우로스는 살아 있지 않아 체력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
어쩌면 마법사들이 마나만 공급한다면 무한히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태로 전투가 계속된다면 결국 살과 뼈로 이루어진 플레타가 먼저 지치고 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울 자작님이 나설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
“제 짐작대로라면 라울 자작님은 저 코어 켄타우로스의 공략법을 찾으셨을 거 같은데요. 아닙니까?”
“이거 참. 제가 그렇게 알기 쉬운 사람인지 처음 알았군요.”
이드의 말에 라울이 음흉하게 웃었다.
그와 함께 펼쳐진 그의 손 위에는 조그마한 톱니바퀴가 찰칵찰칵 돌아가고 있었는데, 그런 톱니바퀴에 비치는 것은 다름 아닌 코어 켄타우로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