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54화
1289화
둥실- 대기를 빨아들이는 흡입력 때문일까.
떨어져야 할 검이 허공에 떴다.
그렇게 중력의 법칙을 벗어난 검 주변으로 번쩍이는 스파크가 튀더니, 호숫가 달빛 같은 뿌연 빛이 아른거리며 일어났다. 한계까지 모여든 기운에 자연적으로 검강이 발생한 것이다.
이 어이없는 현상에 이드는 혀를 내둘렀다.
“기가 막히네. 진짜 무위검을 일으켰어.”
저건 앞서 보였던 흉내 따위가 아니었다.
긴 시간 유지될 것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저 순간만은 진정한 무위검이었다.
“후읍!”
검을 놓은 플레타가 한 번 더 몸을 비틀었다.
저 덩치에 저런 유연함이 어디 숨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꺾었다가 한계에 이른 순간, 채찍처럼 꼬았던 허리를 풀었다.
그리고 그 힘을 그대로 전달받은 주먹이 검의 손잡이 머리 부분을 때렸고,
허공에 떠 있던 검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토레노 아발란체.
콰아아아앙!
쿠오오오옹-
직후 한발 늦은 폭음과 함께 비명같이 높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 소리를 따라 눈을 돌린 사람들이 본 것은, 말의 몸통과 인간의 상체가 연결된 허리 부분이 절반 이상 뭉개진 상태로 휘청거리고 있는 코어 켄타우로스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누가 깔고 앉은 파이처럼 뭉개진 이 모습은 단순히 후폭풍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플레타가 때려 낸 검은 한순간 음속의 몇 배를 넘는 속도로 코어 켄타우로스의 신체를 뚫고 들어갔고, 그 검이 가지는 어마어마한 충격량이 뒤늦게 코어 켄타우로스의 육체를 때려 파괴한 것이다.
검에 실린 충격량이 얼마나 굉장하기에 지금과 같은 꼴이 되는지 짐작이나 되는가.
“하지만 저래서는 앞의 공격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당연히 저게 끝이 아닐 테지요.”
이드가 쉴라의 의견에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말처럼 아무리 강한 공격으로 코어 켄타우로스의 육체를 파괴해 봤자 그 안에 숨은 진짜 코어를 파괴하지 않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플레타가 과연 앞서와 똑같은 공격을 했을까?
아닐 것이다.
이드가 본 플레타는 그렇게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소탈하고 진솔한 동시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라울이 그렇게 믿고 있지 않았던가.
심지어 그게 아니더라도 방금 검을 때려 내기 전 플레타의 모습은 심상치 않았다.
극한으로 힘을 압축한 모습. 그리고 저절로 드러난 무위검.
‘무위검의 진짜 위력은 겨우 저 정도가 아니야.’
진정 경지에 올라 일으킨 건 아니라도, 짧은 순간 검에 깃든 힘은 분명한 무위검의 그것이었다.
그런 위력이라면 진작에 코어 켄타우로스의 허리를 자르고 몸을 관통해야 했다.
무엇보다 저 검에는 무위검의 검강뿐 아니라 수백 톤의 무게가 더해져 있지 않던가.
그런데 관통은커녕 몸에 박혀 버렸다.
이것이 노린 바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즉, 이걸로 이번 공격이 끝난 게 아니라 오히려 이제 시작일 거라는 말이지.’
그러니 어서 보여 줬으면 한다. 과연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인지.
그런 생각으로 코어 켄타우로스에서 눈을 떼지 않았을 때였다.
고오오오옹~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한 것일까.
길고 안정된 울음소리와 함께, 뭉개진 몸을 복구하며 걸어 나온 코어 켄타우로스가 플레타를 노려보았다.
플레타는 현재 무기를 잃은 상태.
해서 지금이라면 그를 죽일 수 있다고 판단하기라도 한 건지, 상대를 향해 창을 내민 코어 켄타우로스가 앞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대로 돌격하려는 듯한 몸짓.
그러나 코어 켄타우로스는 끝내 앞으로 뛰쳐나가지 못했다.
쿠우쿠우우우-
울음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지, 가닥가닥 끊어지는 울음소리를 내며 높이 들었던 발을 내렸다.
심지어 발을 내리다 못해 그대로 풀썩 주저앉고 만다. 혹시 앞선 공격의 충격이 다 가시지 않은 것일까.
아니었다.
“토레노 아발란체는 지금부터가 진짜지. 너 같은 놈에겐 딱일 것이다.”
전신을 땀으로 적신 플레타가 하얀 이를 내비칠 때였다.
퍽.
가죽 북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말을 닮은 하체의 엉덩이 부분이 갑자기 푹 꺼져 버렸다.
이내 곳곳에서 비슷한 소리를 내며 코어 켄타우로스의 몸이 쪼그라들었다.
수십 개의 풍선으로 만들어진 켄타우로스의 풍선 몇 개가 터진 것 같은 모습. 그러나 그건 겨우 시작이었다.
쿠오오옹~
왜 갑자기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일까.
다급한 느낌의 울음소리를 낸 코어 켄타우로스가 몸을 일으키려 애를 썼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검은 그림자가 뭉클 일어나 푹 꺼져 버린 몸체를 복구하려 한다. 하지만 그 또한 쉽지 않다. 살짝 복구되던 몸체가 다시 꺼지고, 모여든 검은 그림자가 꺼진 자리를 중심으로 무언가에 끌려가듯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코어 켄타우로스의 몸은 더욱더 빠르게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그 모습은 조금 전 플레타의 대검과도 비슷했다.
아니, 더 격렬했다.
대검은 크기가 줄었을 뿐 검의 모양을 유지했지만, 코어 켄타우로스는 그렇지 못했다.
퍽.
답답한 소리와 함께 코어 켄타우로스의 머리가 사라졌다.
밖으로의 폭발이 아니라,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머리 다음은 팔, 어깨, 가슴, 허리였다.
그렇게 인간의 상체가 모두 사라졌을 때, 그건 더 이상 코어 켄타우로스의 형상이 아니었다. 그저 검은 그림자의 덩어리였다.
그리고 이런 덩어리조차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고, 이내 자리에 남은 것은 숯처럼 새까맣게 변한 검과 갑옷을 잃고 맨몸을 드러낸 코어 두 개뿐이었다.
그리고 이 중 검게 변한 검 역시 곧 코어 켄타우로스처럼 아기 주먹 크기로 쪼그라들어 바닥에 떨어지고, 최종적으로는 코어만 남게 되었다.
“찾았다.”
이런 코어를 노려보는 플레타의 웃음이 사납다.
이내 플레타가 코어를 향해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검도 없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주변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스르릉.
허리 근처를 스친 플레타의 손에는 어느새 조금 전, 작은 쇳덩이로 변한 것과 완전히 똑같은 모양의 대검이 들려 있었다.
토레노 아발란체라는 비기를 사용했을 때, 검이 파괴되는 상황에 대비해서 미리 준비해 둔 것이리라.
익숙한 대검이 손에 잡히자 플레타는 망설이지 않고 내리쳤다.
전율의 철퇴.
코어 켄타우로스의 내부에서는 그리 빨리 움직이던 코어는, 왜인지 플레타의 대검 앞에서는 그 움직임이 너무 느렸다. 어쩌면 플레타의 대검이 만들어 낸 인력에 잡힌 것일지도 모를 일.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원인이 무엇이든 코어는 대검을 피해 내지 못했고.
쩌억.
한순간에 반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저게 무슨 수법이지?”
이런 과정을 지켜보던 이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코어 켄타우로스가 붕괴되던 모습을 생각하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 같았는데.
그가 아는 무위검에 그러한 공능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위검이 아닌 플레타의 초인기였을까.
“전 대충 알 것 같아요.’
“그래? 뭔데?”
라미아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본다.
“플레타 대장의 초인기가 무게를 다루는 거잖아요. 아마도 그 능력으로 형성한 초질량으로 만들어 낸 마이크로 블랙홀을 사용한 것 같아요.”
“……어?”
이드는 귀를 팠다. 자신이 뭘 들은 걸까.
블랙홀? 초인기에 대한 설명이 갑자기 과학 시간으로 바뀐 것 같은 기분이다.
멍청한 얼굴을 한 이드에 라미아는 방긋 웃으며 마무리를 했다.
“그냥 그런 줄 아세요.’
“아니, 그냥 그런 줄 알라니. 블랙홀이라며, 그게 그렇게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또, 만든 블랙홀은 어떻게 중화시키는데? 그게 그렇게 쉽게…… 설마?”
블랙홀에 얽힌 여러 가지 불합리를 언급하던 이드는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블랙홀은 만드는 것도 어렵지만, 만들어진 블랙홀을 사라지게 하는 일 역시 그만큼 어렵다.
블랙홀 자체는 초인기로 어떻게 만들었다고 치자. 하지만 없애는 건? 그건 초인기를 거둔다고 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한번 내리막을 구르기 시작한 바퀴가 멈추기 힘든 것과 같은 이치다.
블랙홀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그만한 방법이 필요하다.
이 블랙홀을 여닫는 방법의 불합리에 대해 따지던 이드는 문득 블랙홀을 어떻게 소멸시켰는지를 깨달아 버린 것이다.
이드가 떠올린 방법은 무위검이었다.
마이크로 블랙홀이 열리기 전부터 검에 담겨 있던, 무엇이든 잘라 버릴 수 있는 무위검의 공능. 그게 역할을 다한 블랙홀을 잘라 소멸시켜 버린 것이다.
결국 무위검은 처음부터 공격용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지금 이드가 생각하고 있는 그게 정답이에요.”
“미쳤네. 너무 굉장하잖아. 블랙홀에 무위검이라니. 그거면 혼돈의 파편과도 해볼 수 있겠는데?”
플레타가 새삼 달리 보이는 순간이었다.
진짜 코어의 존재만 알면 플레타가 해결할 수 있다던 라울이지만, 그 수단이 설마 이런 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이드다. 다루기에 따라서는 혼돈의 파편과도 싸워 낼 수 있는 힘이다.
“굉장하죠. 굉장하긴 한데, 그만큼 한계도 분명해요.”
라미아의 평가는 냉정했다.
사실 그녀의 말도 옳았다.
아무리 대단한 블랙홀과 무위검이라도 그게 진짜 오롯이 플레타의 능력인 것은 아니었다.
무게 조작이라는 수단을 통해 잠시 불러낸 현상일 뿐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굉장한 일인 것은 분명했다. 경천동지에서 동지 정도는 되지 않을까.
당장 코어 켄타우로스를 향했던 토레노 아발란체를 땅속으로 쏘아 내면, 국지적인 지진 정도는 만들어 낼 수 있을 테니까.
“두 사람 다, 저길 봐요. 공간이 무너지고 있어요.”
일리나가 반쪽 난 코어를 가리켰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 코어를 중심으로 백색의 공간에 검은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검은 균열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중이었다. 저 균열이 반대쪽에 닿는 순간, 이 백색 공간은 붕괴하리라.
이드 일행이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따로 해야 할 일은 없었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럼 슬슬 나서볼까?”
다만, 무슨 생각일까.
그저 가만히 구경하고 있을 생각이 없는지 이드가 한발 앞으로 나섰다.
같은 시간, 석실에서는 마법사들이 허둥지둥 석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수정구를 중앙에 둔 마법사들도 조셉을 재촉 중이다.
“플로어 마스터. 이 플로어는 끝났습니다. 이동하셔야 합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무차원 공간의 붕괴가 여기까지 미칠지 모릅니다.”
“내・・・・・・ 코어가………… 제대로 손도 써 보지 못했는데.”
하지만 이런 중에 조셉은 멍하니 수정구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맥없이 반쪽 난 코어의 모습이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던 것일까.
그러나 아무리 충격이 커도 가만히 앉아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는 일.
마법사들의 재촉에 결국 조셉도 출구를 향해 등을 돌렸을 때였다.
불쑥.
수정구 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손이 조셉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뭐?”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조셉의 얼굴이 창백해질 때였다. 수정구 속에서 이드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나왔다.
“잡았다. 역시 여기 있을 줄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