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6화
523화
이틀이 지나자 방 밖 출입이 자유로워졌다.
긴급 대책위에서도 이 이상 이드에게 압력을 가해서 좋을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들도 이드와 완전히 갈라서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었다. 이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그것들을 얻어 갈 생각이었다.
물론, 이드가 순순히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어 줄 리는 없을 테지만, 어차피 각자의 상상은 자유다.
방 밖 출입이 가능해지자 이드는 라미아와 일리나를 데리고 소드 팰러스의 잘 꾸며진 정원을 가장 먼저 찾았다. 일리나가 유난히 갑갑한 방을 불편해했기 때문이었다.
소드 팰러스에 꾸며진 정원은 상당한 크기를 자랑했다.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잠시 동안 미아가 되는 것을 각오해야 할 정도였다.
당연했다. 검에 미친 소드 팰러스에서 나무와 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 정원은 오직 검후와 그 수가 드문 일부 여기사들을 위한 것이었다.
특히 소드 팰러스의 주인을 위한 정원이기 때문에 결코 어중간할 수가 없었다.
이드도 오랜만에 향수가 아니라 은은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섞인 알싸한 나무 냄새와 향긋한 꽃향기에 기분이 좋았다.
다만, 향기를 즐길 수 없는 라미아와 철저히 관리된 정원의 모습에 방 안에 있을 때와는 또 다른 답답함을 느낀 일리나는 산이나 숲을 찾을 수 없음을 아쉬워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에단이 출입 허락을 받아오면서 소드 팰러스 밖으로 나가는 것은 피해 달라는 요청도 같이 받아온 때문이었다. 아직 시르피가 실종되기 전 머물던 곳을 보지 않은 이상, 이드도 소드 팰러스를 떠날 생각이 없기 때문에 순순히 그런 요청을 받아들였다. 어쨌든 답답한 방 안보다 나은 것은 사실.
이드는 정원 의자가 아니라 한적한 나무그늘 아래 일리나와 라미아 두 사람과 둘러앉아 하녀가 가져온 쿠키와 차를 즐겼다.
[그런데 에단은 또 록이라는 친구를 찾아갔나 봐요. 제가 봤을 때는 그 친구를 통해서 해결할 만한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라미아가 이드가 마시는 차를 보고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먹을 수는 있지만 아직 맛을 느끼지 못하는 라미아였다. 차와 쿠키라는 것이 맛과 향기를 느끼지 못하면 흔한 물이나 빵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드는 찻잔을 매만지며 말했다.
“뭐, 에단도 자기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것 같으니까 나쁠 건 없겠지. 두고 보자고.”
“그는 아무래도 소드 팰러스에서 우리를 대하는 태도에 죄책감과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하얀 얼굴 가득 햇살을 머금은 일리나가 쿠키를 오물거리며 말했다. 그녀의 컨디션은 소드 팰러스에 입성 후 가장 좋은 상태였다. 일리나는 최근 에단에게서 느낀 감정의 형태를 이야기했다.
[흥. 당연하죠. 소드 팰러스에 우릴 데려온 게 누군데요. 아얏! 이드!]
통!
흥흥거리며 콧방귀를 뀌는 라미아의 머리에 이드가 알밤을 튕겼다.
“못된 말을 하는 게 요 입이냐~”
이드가 연이어 라미아의 부리를 잡고 흔들었다. 라미아가 날개를 퍼덕이며 ‘꺅꺅’ 비명을 질렀다. 잠깐 라미아와 장난을 하던 이드는 곧 그녀를 놓아 주었다.
“어쨌든 그건 그 녀석의 과인반응이야. 지가 한 일도 아니면서 단체와 자신을 너무 동일시하는 것도 좋지 않은데 말이지. 그냥 내가 속한 곳이 잘못하고 있구나, 하고 확실히 알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데. 그러니까 라미아, 너도 그 일로 에단을 놀리는 건 그만해.”
요즘 에단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단순히 인지하는 선을 넘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건 이드 말이 맞아요. 이전까진 넉살 좋게 라미아의 장난을 받아 준 것 같은데, 요즘엔 정말 기운이 없어 보였어요.”
라미아는 지은 죄가 있어 두 사람의 꾸짖음에 움츠러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우우. 알았어요. 그만할게요.]
이드는 자신의 두 연인의 모습에 빙그레 미소를 띠다가 문득 에단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게일 인테그란이라……………’
“크흠. 큼! 현제 마스터의 라이벌 되는 사람의 이름입니다.”
황당한 표정의 이드를 향해 에단이 굉장히 어색한 표정으로 꺼낸 말이었다.
그와 함께 긴급 대책위에서 이드가 소드 팰러스를 장악하는 것을 경계하고 위험시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첫날 이드에게 보인 억지에 가까운 무례와 감금은 그것을 피하기 위한 주도권 싸움의 일종이라는 설명이었다.
“허, 참. 사람을 어떻게 보고 말이야. 내가 설마 여동생 같은 아이의 집을 빼앗을까.”
이드는 나무들 너머로 반짝이는 검궁과 그 안에서 촛불 하나 켜 두고 흉계를 꾸미고 있을 것 같은 긴급 대책위를 상상하고는 혀를 찼다.
에단은 며칠 동안 계속해서 얼굴을 마주하는 록을 보며 내심 신음했다.
그는 록이 이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록이 해 주는 이야기를 통해 추측한 사실이지만, 이미 소드 팰러스에서는 게일을 검후의 후계로 생각하고 그를 소드 팰러스의 주인으로 만들기 위한 확실한 지지 세력이 형성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 세력이 중심이 되어 갑자기 튀어나온 이드에게 맹렬한 적대감을 표하며 그를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드가 그 이름만으로 게일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일 큰 문제는 지금도 그들이 실시간으로 세력을 넓혀 간다는 것이다.
옆에서 보는 에단으로서는 갑갑하고 괘씸했다. 어디 함부로 할 상대가 없어서 이드를 상대로 수작을 부린단 말인가. 감히 마인드 마스터를 상대로 말이다.
하지만 이걸 대놓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답답했다.
에단은 일단 록을 시작으로 아래에서부터 이드에 대한 거부감을 지워 나갈 생각을 했다.
이드가 얼마나 소드 팰러스에 머물게 될지 모르는데, 그냥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다가는 정말 이드와 소드 팰러스 간에 건널 수 없는 강이 생겨 버릴지도 몰랐다.
‘어쩌면 소드 팰러스가 둘로 찢어질지도 모르지.’
하지만 에단은 떠오른 생각을 곧바로 지웠다. 가장 중요한 이드가 소드 팰러스에 큰 관심이 없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에단이 알기로 이드의 관심은 그가 사라진 후 나타난 초인과 실종된 시르피, 그리고 이드와 같이 모습을 감춘 후 전혀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은 혼돈의 파편에 있을 뿐이다.
“야, 야! 말하다 말고 지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한참 생각이 빠져 있던 에단의 발을 록이 툭툭 차서 깨웠다. 에단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흔들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젖은 수건에서 물방울이 록의 얼굴에 튀었다.
“에퉤퉤! 야! 감정 있음 칼을 들어. 어디 더러운 걸레 물을 튀기냐.”
“아, 미안하다. 잠깐 딴생각이 나서 말이다. 그런데 걸레 물이 뭐냐, 걸레 물이 네 눈엔 이게 걸레로 보이냐?”
“허, 그럼. 네 눈에는 다르게 보이냐? 아리따운 레이디의 손수건에서 튀었다면 그것이 흙탕물이라도 성수요, 시커먼 남자새끼 땀을 닦던 손수건에서 튀었다면 그것이 식수라도 걸레 물이지. 당연할 걸 묻고 있어. 얌마, 너 같으면 내 손수건에서 튄 물을 먹고 싶으냐?”
“……”
당당하게 궤변을 늘어놓는 록의 말에 에단은 차마 진실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만약 에단이 고개를 끄덕인다면 당장 실험해 보겠다는 듯 살벌하게 눈을 빛내고 있는 록의 모습 때문이었다. 진실은 둘째 치고 자신도 심정적으로 동감하고 있는 말이라 도저히 록의 손수건에서 떨어진 물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리얼하게 떠오르는 상상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다.
“미안하다!”
에단은 자기 죄를 스스로 자백했다. 록은 그 사과를 받아들인 후에 에단이 들고 있는 젖은 손수건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도대체 그 이드라는 사람한테 뭘 배운 건데? 젖은 손수건으로 보여 줄 만한 일이 뭐가 있다고. 혹시 빨래 짜는 법이라도 배웠냐? 키키킥.”
록은 자신이 말해 놓고도 웃긴 듯이 낄낄거렸다. 하지만 록 앞에서 자신이 배운 재주를 내보이려던 에단으로서는 김이 빠지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쓸데없이 예리한 시키!’
에단은 이드에 대한 강렬한 거부감을 내보이는 록을 만나며 그에게 이드에 대한 호감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또 이드가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소드팰러스를 손에 쥐려는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강조했다.
그것을 위해 그가 이드와 만나게 된 상황과 그가 목격한 이드의 활약상에 대해서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심드렁하던 록도 어쩔 수 없는 기사인 듯 이드가 실력을 내보이는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였다.
그와 함께 에단은 이드가 진정으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며 증거로 그에게서 배운 새로운 기술을 보여 주겠다고 오늘 물에 젖은 손수건을 손에 들게 된 것이다.
하지만 록의 쓸데없이 예리한 감 때문에 이미 김이 빠져 버렸다.
“잘 봐, 임마! 이건 그런 단순한 일이 아냐. 이 속에 들어 있는 법칙과 이것을 이용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중요 한 거야. 내가 보여 주는 것을 통해서 이 기법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잘 생각해 보란 말이야.”
에단은 교육 중에 들었던 말과 이드에게 들었던 말을 잘 버무려 나름대로 그럴듯하게 폼을 잡았다. 그나마도 친구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생판 남이었다면 부끄러워서 절대 하지 못할 짓이었다.
과연 친구답게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록의 답은 간단했다.
“지랄이 참 풍년이다. 헛소리 작작 하지? 나 그냥 간다?”
에단은 신랄한 록의 말에 뒤틀리는 입매를 겨우 부여잡고 그동안의 결과물을 털었다.
록의 얼굴 앞에 말이다.
팡!
“큽! 우엑!”
록은 그의 얼굴 앞에 갑자기 생겨난 안개를 들이마시고는 목을 부여잡고 급하게 뒤로 물러서서 에단을 떨리는 손으로 가리켰다.
“빌어먹을 놈· 네가 어떻게 독을…………….”
“…..애냐?”
“거 새끼가 장난 잘 받아 주는 거 같더니만.”
록은 잠시 어릴 때처럼 시시덕거리며 잘 놀던 에단의 차가운 반응에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그의 눈은 허공으로 흩어지는 물안개에서 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저 자식이 새로운 기술을 보여 준다고 해서 당연히 검술인 줄 알았는데, 이건 뭐지?”
록은 헛소리로 받아 넘겼던 에단의 일장 연설을 다시 상기하며 흩어지는 물안개 사이로 손을 휘둘렀다. 순간 미세한 습기가 느껴졌지만 그것은 손이 멈추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물의 입자가 정말 아침의 안개처럼 미세하게 쪼개졌다는 의미다. 단순히 수건에 묻어 있던 물을 턴 것이 아니다.
에단은 록의 눈빛이 변한 것을 지켜보며 회심의 미소를 띠고 물었다.
“어때? 신기하지?”
“빨래 말리는 방법이? 퍽이나! 그런데 어떻게 하는 거냐? 빨래 말리기에 좋을 것 같은데 좀 가르쳐 주지?”
“낄낄낄. 이런 얌통머리 없는 놈. 이 몸이 고생해서 배운 걸 평가절하 하는 것도 모자라 그냥 날름하시겠다?” “원하는 게 뭐냐?”
“글쎄다. 크큭.”
에단은 록이 흥미를 보이자 그 앞에서 몇 번 더 수건을 털고는 록과 투닥거리며 검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러는 중에 한 작은 수련장 앞에서 각자 눈에 익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와 두 사람의 발을 붙잡았다.
“마스터?”
“케마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