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60화
1295화
휴일 아침.
억지로 나간 신전에서 신관이 진행하는 지겨운 교리 해설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지금 삐딱하게 선 라울의 얼굴이 딱 그러한 상황 같았다.
지루하고, 지겨울 뿐 아니라 이어질 말에 대한 아무런 기대나 흥미도 찾아보기 힘들다.
실로 불량하기 이를 데 없는 청자의 자세.
이드는 이런 모습에 키득거리며 아내들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 지금 라울 자작의 기분이 이해가 가. 저 마법사가 뭐라고 할지 알 것 같거든.”
“어머나. 저도 그래요.”
끄덕끄덕.
일리나에 이어, 말해 뭐 하냐는 듯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두 사람의 입가에는 포슬포슬 구름 같은 웃음이 걸려 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비웃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러한 세 사람의 모습은 라울과 플레타, 그리고 그의 부대원들에 가려 펠튼에겐 보이지 않았다.
“항복해라. 거부한다면 이 앞, 너희를 기다리는 것은 지옥뿐이다.”
한자 한자 뱉어 낸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공간을 지배하는 음성은 자연스러운 위압감을 만들어 냈다.
황제의 목소리에 위엄이 담기는 것과 같이 말이다.
하지만 펠튼은 황제가 아니었고, 그렇기에 그의 목소리를 위협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플레타 부대도, 은색 기사단도.
심지어 더 나아가 플레타는 노골적인 비웃음을 감추지 않고서, 모든 걸 맡긴다는 듯 라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에 시큰둥한 얼굴을 한 라울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떻게 예상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질 못하는지. 항복하라고? 정말 지겹다.”
“……놈.”
“아, 그나마 지옥을 볼 거라는 말은 그나마 좀 나았어. 그래 봤자 그것도 흔해 빠졌지만. 도대체 얼마나 감이 낡으면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연구실 같은 곳에 너무 오랫동안 처박혀 있었던 거 아냐? 그래서 감각조차 녹슬어 버린 것 같은데?”
그야말로 진심을 담은 비아냥에 펠튼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팼다. 분노보다는 음울함을 담은 눈이 라울을 향하지만, 그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오만하다.’
“우리는 이 아래층을 정복했고, 너희는 그곳에서 한 번 패배했다. 설마 이 사실을 머리 좋은 마법사가 벌써 잊은 것은 아닐 테지?”
라울은 상대를 자극하기 위해 ‘패배를 언급했다.
펠튼을 자극해서 흥분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흥분한 상대는 실수하기 마련.
하나 이런 라울의 계산에 착오가 있었으니, 바로 조셉과 펠튼의 관계를 모른다는 점이었다.
아래층. 조셉과 관계된 언급에 펠튼은 흥분하기보다는 오히려 냉정해졌다. 그런 그의 입가에는 비릿한 비웃음이 떠올랐다.
“오만? 흥, 진정 자만하고 있는 건 너희라는 것을 알아라. 겨우 조셉 그 멍청이를 꺾었다고 영혼의 관 전체를 이긴 양 착각하는 건 네놈들이니까.”
자신은 조셉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렇게 주장하는 펠튼이었지만, 라울이 보기엔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우리? 설마, 자만하는 것은 내 집에 적이 들었는데도 무거운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손가락만 까딱거리는 놈들이야. 이런 놈들은 결국 손가락이 모두 부러지고 난 뒤에야 후회를 하게 되지.”
“야, 적당히 해. 그러다 네 말 듣고 다 몰려오면 어쩌려고.”
플레타가 중요 기밀을 밝힌 것처럼 툴툴거렸다. 당연히 진심은 티끌만치도 없는 농담조의 말.
“그래 주면 고맙지. 수고스럽게 올라가지 않아도 되잖아. 그렇지 않나, 마법사?”
“우린 기다려 줄 수 있다. 지금이라도 가서 탑주를 불러오고, 부관주를 소환해라. 서로 편하게 결판을 내자. 우리도 너희들을 하나하나 상대하려니 시간이 아깝단 말이다.”
상대가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아는 라울.
하지만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영혼의 관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이쪽이었기 때문이다.
저들에겐 지원할 전력이 있으며, 누가 뭐래도 영혼의 관은 저들의 안방이다.
그것은 곧 시간이 길어질수록 적의 전력은 더 강해지고, 그 수도 늘어날 수 있다는 의미와 같았다.
물론 라울의 예상처럼 펠튼은 그 말을 들어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탑주를 부르고 부관주를 소환하라고?
이곳에 오기 직전 부관주로부터 활약을 기대하겠다는 압박을 받은 펠튼이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침입자들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그에겐 그만한 자신감이 있었다.
물끄러미 라울을 바라보던 펠튼이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을 쓸어 본 후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좋다. 포기하지. 굳이 죽겠다면· 그래, 바라는 대로 죽여 주겠다.”
“드디어 헛소리는 끝인가?”
“흐~ 헛소리? 과연 조금 후에도 그런 말이 나올까? 하나 단언해 두지. 네놈들이 초인인 이상, 절대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없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그런데, 무슨 수로 우리를 죽이겠다는 거지? 설마 숨어서 마법만 쓰겠다는 건 아니겠지.”
“…….”
펠튼은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라울의 물음이 신호가 된 듯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쪽 벽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삼백 명은 되는 듯한 인원이 걸어 나왔다. 척척척.
그들은 마치 병사처럼 줄을 맞춰서 발을 구르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 병사들은 아니었다. 입고 있는 옷이나 들고 있는 무기가 조금씩 달랐다. 병사라기보다는 외려 용병에 가까운 모습. 그런 그들의 모습을 살핀 플레타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기가 막히는군. 그렇게 잘난 듯 떠들어 대더니, 겨우 용병 따위를 내밀어? 이래서야 아래층하고 다를 게 뭐야?”
“겨우 용병 따위가 아니야.”
눈을 가늘게 뜨고 용병들을 살핀 이드가 작게 말했다. 그 혼잣말을 들은 검후가 물었다.
“용병이 아니면요?”
“초인. 저들에게서 거칠고 강렬한 초인력이 느껴집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명예 후작.”
이드의 말에 기감을 뻗어 가던 검후가 고개를 저었다. 거리도 거리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녀의 기감이 이드만큼 뛰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녀는 이드의 말을 온전히 신뢰했다.
“그럼 저 삼백이 모두 초인이란 말인데. 초인으로 초인을 상대할 생각인 걸까요?”
그렇게 묻는 검후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적지 않은 전력이지만, 바벨을 상대로 초인을 내세우다니. 물론 초인의 능력은 개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평균적인 초인 전력을 따지자면, 그중 최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모두 바벨에 있다. 달리 바벨이 초인을 위한 기구가 아니다.
“그렇겠지.”
“초인 중에 바벨과 척을 지려는 자들은 없을 텐데. 저런 자들을 잘도 모았군요.”
모든 용병이 용병 길드에 속한 것은 아니고, 길드에 속한 용병이라고 모두 길드와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듯.
초인 중에서도 드물지만 바벨에 속하지 않은 초인이 있다. 그뿐 아니라 바벨과 관계가 틀어져 냉담하게 지내거나, 심지어는 바벨을 상대로 싸우는 초인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이들은 초인 중에서도 매우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은 세상의 모든 초인의 이익을 위해 애쓰는 바벨의 존재에 만족한다. 그리고 이런 점은, 좋은 초인기를 각성한 초인일수록 더하다. 능력이 뛰어날수록 바벨에서도 더 신경을 써서 대우를 해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바벨과 사이가 좋지 않은 이들은 어떤 문제가 있거나, 약한 초인기로 인한 대우에 불만을 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말이다.
즉, 바벨의 핵심 전력과 제대로 싸울 수 있을 정도라면 애초에 그럴 만한 이가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렇다면 바벨과 싸우겠다는 하급의 초인들을 모아서 플레타 부대와 싸워 봐야 의미가 있을까?
그 승패는 뻔한 것인데 말이다.
“모은게 아니야. 아니, 아닐 겁니다.”
무심코 답하던 이드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수정했다.
다행히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었고,
관계를 알리고 싶지 않은 바벨의 사람들은 모든 관심이 갑자기 나타난 초인들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그들도 상대가 단순한 용병이 아닌 초인임을 알게 된 상태였다.
골든아이를 통해 적을 살핀 라울이 사실을 밝힌 것이다.
“잘도 우리와의 싸움에 나설 초인을 긁어모았군.”
검후는 봤다.
새로 나타난 적이 초인이라는 말에, 플레타 부대는 술렁이기보단 오히려 더욱 사납게 전의를 일으켰다. 같은 초인으로서 자신을 바벨과 싸우겠다는 상대에, 영혼의 관에 붙었다는 사실에 분노한 것이다.
하지만 당장은 그들보다 이드의 말이 더 신경 쓰인 그녀가 물었다.
“모은 게 아니라는 건 무슨 말인가요?”
“이곳은 영혼의 관이잖습니까. 초인 마법을 만들어 내는 마탑 말입니다. 초인 마법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초인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르지는 않으실 텐데요.”
“……”
이드의 말처럼, 검후도 모르는 사실은 아니다.
이드와 쉴라를 통해 생명의 관에서 초인기를 이식한 몬스터에 대해 들었으며, 정신의 관에서도 그와 비슷한 경우를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규모가 달랐다.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초인이 삼백이라니. 어떤 초인기를 가졌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소 기사로 취급될 정도의 평균 전력만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거의 백작급 전력이라고 할 수 있다.
유지하는 것도 만만치 않으며, 키워 내기는 그보다 수십 배는 더 힘든 기사전력 삼백.
그걸 영혼의 관에서 뚝딱 만들어 낸 것이다.
물론 이들을 만들기 위해 영혼의 관에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들였는지는 아직 모른다. 삼백의 기사를 정상적으로 만드는 것 이상의 수고가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찌 되었든 초인을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초인 제작에 성공했다면 그 과정을 개선하는 건 시간을 들이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
결과적으로 삼백의 기사 전력을 기존보다 쉽고 빠르게 확보할 방법을 찾은 것이다.
“알죠.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더구나 거리가 있다지만 제가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안정적인 모습이라니. 마스가 제국과 검을 들면서까지 마탑을 품에 안은 이유가 있었군요. 저걸 봤다면 어떤 나라라도 탐을 냈을 겁니다.”
사실 마스는 아직 영혼의 관에서 만들어 낸 초인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걸 기대하고 마탑을 품에 안은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네요. 영혼의 관에서 만든 초인들이 신기하긴 하지만 저들로 저희를 상대하려는 건.”
300 대 200.
숫자는 저들이 많다.
하지만 실전 경험과 전투 능력을 따지면 아무래도 이쪽이 압도적으로 우수할 것이다. 아무렴 영혼의 관에서 만든 초인이 실전을 경험했다면 얼마나 하고, 전투 능력을 개발하면 얼마나 했을까.
이런 당연한 의문은 다른 사람이라고 가지지 않은 게 아니었다.
“초인 중에 최고를 모은 우리 부대를 상대로 겨우 이 정도라면 실망이 큰데? 겨우 이걸 준비해 놓고 항복하라고 한 건가?”
뽀득뽀득.
플레타가 어느새 새롭게 뽑아 든 대검을 든 손목을 풀었다. 그 모습은 마치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것 같은 야생마 같았다. 그에 펠튼이 고개를 저었다.
“설마. 저것들은 그저 빗자루 용도일 뿐이다. 진짜는 이것이지.”
쿵!
말과 함께 펠튼이 지팡이를 내리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