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2화
529화
“후우. 후우.”
리들리 그레엄은 바쁜 숨을 가다듬고 단단해 보이는 문을 두드렸다.
‘히히. 이번에는.’
리들리는 이전 이드에 대한 급보를 전하러 왔다가 이후에 다시 올 필요가 없다는 말에 여간 실망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힘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 새삼 다시 느끼는 순간이었다.
얼굴 도장을 찍는 데는 실패했지만, 자신이 속한 조직의 힘을 확인할 수 있어서 뿌듯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얼굴을 비출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내가 당번일 때 연락이 들어와서 다행이다. 운이 좋았어. 일단 자주자주 얼굴을 비추는 게 중요하단 말이지.’
실력이 비슷한 경우에는 아는 사람에게 좀 더 기우는 것이 인지상정. 리들리는 이미 세상 살아가는 법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감…… 엥?”
문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인사를 하며 손잡이를 잡아 가던 리들리가 겨우 손을 멈춰 세웠다.
“아이언 마스크 목소리가 맞는데.”
리들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상관은 찾아오는 사람을 한 번도 문 앞에 세워 두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누가 오든 웰컴이었다. 누구는 그걸 자신감이라고 말했다. 누가 찾아오든지 당당하다는 표현이라고 했다.
자신의 상관이 꽤 괴팍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리들리가 듣기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말이었지만, 그 역시 자신의 상관이 사람을 방 안으로 들이지 않고 문밖에 세워 둔 채 용건을 묻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그렇게 당황하는 사이 다시 문 안에서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처음보다 확실히 올라간 음량에 리들리는 ‘앗 뜨거라!’ 싶어서 급하게 대답했다.
“네, 죄송합니다. 3번대 리들리 그레엄, 소드 팰러스에 대한 급한 보고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이드라는 자에 관한 보고라면 이미 받았다. 돌아가라.”
“……………예. 실례했습니다.”
리들리는 안에서 들려온 말에 어쩐지 기운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왔던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 씨. 역시 초인하고 기사는 상극이야. 어떻게 된 게 이 인간 정보만 떴다 하면 뭔가 매끄럽지가 않단 말이야. 이번엔 말까지 더듬고. 뭐, 그런 점에서는 차라리 들어오라고 하지 않으신 게 다행이지. 안 좋은 일로 얼굴 비출 필요는 없으니까.”
리들리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벽을 뚫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남자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놈이 그레엄 자작의 아들인 모양이지? 자작하고는 성격이 많이 다르네. 가벼워.”
남자, 라울은 어두운 방 안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을 쓸어 올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근데 이제 보고서는 다 읽으셨습니까, 아이언 마스크 님? 하하하하!”
라울이 자신이 말해 놓고는 재미있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그러자 그의 맞은편에 앉은 발터가 우묵한 눈으로 읽고 있던 보고서의 마지막 장을 덮어 라울에게 내밀었다.
“웃지 마라. 마음에 드는 별명이니까.”
“허! 그건 또 몰랐네. 새로운 사실을 알았어.”
라울은 정말 그런 줄 몰랐다는 듯 두 손을 펴서 놀라움을 표시하고는 보고서를 받아 들었고, 보고서는 그의 손으로 녹아들며 사라졌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한 거지?”
발터가 보고서의 내용을 가지고 물었다.
“음, 그 부분이 좀 고민이야.”
라울은 정말 머리 아프다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마술처럼 그의 손에 붉은 와인이 든 잔이 들렸다. 라울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눈을 반쯤 감았다.
“우리가 처음 그 남자의 정보를 접하고 꾸며 본 시나리오 중에 들어 있는 일이긴 한데, 우리 예상보다 너무 빨리 튀어나왔어. 원래 이때 나올 카드가 아니라서 상당히 의외다 싶어.”
에단의 수건 털기는 의외로 큰 의미를 가지고 주위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세상 일이 뜻대로만 돌아가면 불가능할 일이 없겠지.”
“크큭. 그렇지.”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네가 직접 찾아왔다는 건 내가 할 일이 생겼다는 말이잖아.”
“이야, 아이언 마스크 님이 눈치도 빠르셔.”
라울은 큭큭거리며 웃고는 잔을 든 손을 뒤집었다. 다음 순간 잔은 이미 그의 손에서 사라진 후였다.
“좀 의외의 일이라서 말이야, 의외의 일과 엮어 볼 생각이야.”
“소드 팰러스의 늙은이들인가?”
초인파의 입장에서는 소드 팰러스가 이드에게 과민 반응을 보인 것도 의외의 결과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설마 그렇게 기겁할 줄 알았나. 내가 그 소식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넌 모를 거야. 검후가 있을 때만 해도 그렇게 꼬장꼬장하던 노인네들이 검후가 사라진 후에 진상 꼰대로 한순간에 페이스 체인지 할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냐고.”
“소드 팰러스와 이드 사이를 불편하게 만들어 보겠다는 건가?”
딴소리를 하고 있는 라울의 말에서 필요한 것들만 쏙쏙 잘도 뽑아서 알아듣는 발터였다.
라울은 그런 그가 마음에 든다는 듯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지. 지들이 알아서 무너져 주겠다는데, 괜히 나서서 봉합해 줄 필요는 없잖아. 그냥 살살 부채질만 해 주면 알아서 타오르지 않을까 기대해 보는 거지.”
라울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이제 네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짐작하겠냐는 듯 발터를 바라보았다.
잠시 산처럼 앉아 있던 발터가 말했다.
“나는 황궁 쪽을 맡으면 되나?”
짝!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라울은 정말 기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적당히 완급 조절만 신경 써 줘. 검후가 없는 소드 팰러스는 황제도 부담스러울 테니 곧 어떤 제스처가 있을 거야.”
황제의 입장에서는 강력한 힘을 가진 세력이 자신의 제어권 밖에 나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전이라면 검후가 있어서 절대적인 우군이라 할 수 있었을 소드 팰러스도, 검후가 사라진 지금은 누구의 손에 쥐어질지 알 수 없는 칼이 되어 버린 것이다.
황제 입장에서야 다시 칼자루를 쥘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지만, 그것도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소드 팰러스의 특성상 이국의 기사들도 적잖이 상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도 소드 팰러스가 제국에 위치하고 검후가 제국 황실의 사람인 만큼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과연 황제가 소드 팰러스를 직접 쥐고 흔들고자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여기에 이드라는 절대 가볍지 않은 변수까지 등장했다. 황제 입장에서는 더더욱 쉽게 움직이기 힘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언제든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제국의 힘이다. 황제가 성급히 움직여 압력을 가할 경우 초인파의 부채질이 오히려 약이 되어 버리는 현상이 발생할 수가 있다.
발터가 할 일은 그러한 상황을 막는 일이었다.
“그리고?”
발터가 다음 말을 재촉했다. 라울은 좀 전 고백할 때와 같은 미소를 띠고는 조금 음흉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게일이라고 있지?”
우묵한 발터의 눈에 처음으로 흥미가 일었다. 검후의 유일한 제자.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인간은 수도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 좀 심난한가 봐. 살살 좀 긁어줘 봐.”
“분열인가?”
발터는 라울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괜히 발터가 황궁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라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면 더 바랄 게 없지. 그럼 충분히 이야기가 된 것 같으니 난 이만 다시 가 볼게. 내가 자리를 오래 비우면 우리 쪽 일이 안 돼요, 안 돼.”
발터는 라울의 푸념에 무거운 손을 한 번 흔들어 주었다.
그 정도면 발터로서는 충분한 인사다. 그에 웃음으로 답하는 순간 라울의 몸이 흩어지는 연기처럼 천천히 흐려졌다. 마치 공기 중에 녹아드는 것 같았다.
그러는 중에 라울이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치고 말했다.
“아, 참참참. 그 작자 있잖아. 황제의 남자라는 징그러운 놈. 그놈 조심하는 거 잊지 말고—”
처음에는 또렷하던 라울의 목소리가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공간을 울리며 끊어졌다.
발터는 라울이 사라진 자리를 잠시 바라보다 방문을 열고 나섰다. 자신이 할 일을 알았으니 이제 움직여야 했다. 그의 얼굴에는 아이언 마스크 특유의 괴이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같은 시간.
클라인 백작과 비슷한 보고를 받은 또 한 사람. 그는 발터와 같은 건물에 머물고 있었다.
라울에게 황제의 남자라고 불린 그는 현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촉망받는 제국의 실세로, 대륙에서 가장 젊은 후작이라는 타이틀도 함께 가지고 있다.
레오날도 울 그린 후작.
젊다는 것을 넘어 어린 스물아홉의 나이에 전대 후작으로부터 작위를 물려받고 정계에 진출해서 단 일 년 만에 황제의 남자라고 불린 기린아. 황제의 남자라는 별명은 그만큼 황제의 믿음과 신뢰를 받고 있다는 의미였지만, 그 시작은 치졸한 질투의 산물이었다. 특히 어린 후작이 미혼이라는 점이 저열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한몫을 했다.
만약 당시에 이 별명이 알려졌다면 그 별명을 입에 올린 사람들은 모두 목이 잘렸을 것이다. 황제의 남자라는 별명은 어린 후작뿐만이 아니라 황제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이유다.
아나크렌 제국 일번지 황궁.
그중에서도 황제의 집무실과 가장 가까운 심처를 방으로 배정받고 있는 레오날도 후작의 표정은 매우 좋지 못했다.
한 장도 채워지지 않은 짧은 보고서. 내용은 클라인 백작과 발터에게 건네진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드에 관한 보고였다.
“골치 아픈데. 진퇴양난이야.”
레오날도 후작은 대외비인 검후의 실종이 유난히 뼈아프게 느껴졌다. 다시 한 번 그녀가 황실의 큰 어른이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있음으로 해서 제국은 국력을 크게 살찌우면서 힘의 균형을 잘 맞춰 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힘의 균형추가 사라지면서 저울이 삐걱이기 시작한 것이다.
“일단은…… 지켜보는 수밖에 없나? 젠장, 이럴 때는 소드 팰러스의 열린 시스템이 원망스럽군.”
보안이 철저했다면, 이런 골치 아픈 정보가 외부로 흐르지 않았다면 그가 고민할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검을 수련하는 모든 기사와 검사들에게 열려 있는 소드 팰러스의 시스템상, 핵심 인원만이 공유하고 있는 일부 정보를 제외하면 모두 외부에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또한 소드 팰러스를 견제하기 위해 황제가 만들어 놓은 최소한의 안전장치이기도 했다. 덕분에 소드 팰러스의 정보는 거의 실시간으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기 마련.
레오날도 후작은 길게 한숨을 쉬고는 보고서를 접어 서랍장 제일 위 칸에 넣었다. 항상 보고 고민해야 할 중요사항이라는 뜻이었다.
라울의 당부와는 달리 황제의 남자는 당분간 조용할 듯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배에 구멍이 뚫려 치료를 받고 수일이 지난 어느 날.
배에 구멍을 뚫은 네리베르와 배에 구멍이 뚫린 케마란이 복도에서 마주쳤다.
철컥!
“이 인간들이 진짜 치사하게 나오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