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23화
1358화
복잡한 검로를 자유롭게 노니는 검신 위로 검법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무형검강결이 줄기가 되고 수라삼검이 꽃을 피우면, 난화십이식이 화려하게 날갯짓하며 날아오른다.
푸드득.
길고 날카로운 꼬리를 매단 수십 마리의 벌새가 날아오르는 모습이 이럴까.
12대식이 아님에도 검강이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공격에 나선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검법이 아니라 마법이 만든 환상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부정해 봐야 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아름다운 붉은 새의 정체는 세상에 베지 못할 것이 없는 검강이다.
“흐흐흐. 재밌군.”
그리고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존 워스는 오히려 환히 웃으며 검을 뻗었다.
동시에 검신을 쓸어 내는 손.
화아악!
순간 맞닿은 손과 검신 사이에서 새파란 빛이 일어나더니, 그 속에서 수십 자루의 검이 튀어나왔다. 검의 크기는 검지 정도로 작았지만, 대신 그 속도가 매우 빨랐다.
푸른 검은 붉은 새를 노렸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이 검과 새가 만들어 낸 붉고 푸른 선으로 가득 찼다.
푸른 검이 새를 죽이며, 새는 변화무쌍한 날갯짓으로 검을 낚아채 그 날카로운 부리로 검을 물어뜯었다.
쩌어엉!
그때마다 철판을 두드리는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비록 검과 새의 형태를 빌리고 있지만, 그 진짜 정체는 검강이었기 때문이다.
실로 화려하기 그지없는 싸움이었다.
마법끼리 맞붙는다고 해도 이보다 화려할 수 있을까.
멀리서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은색 기사단과 플레타 부대원들은 그저 턱이 아프도록 입만 벌릴 뿐이다.
그러나 지켜보는 이들이 감탄을 하거나 말거나. 이드와 존 워스는 계속해서 서로를 노릴 뿐이다. 그렇게 순식간에 다섯 번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쩌러러렁!
뿌연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검영들.
그 사이사이로 손과 발이 쉼 없이 움직였다.
서로의 빈틈을 만들고, 만들어진 빈틈을 찌른다.
그러면 상대는 이런 공격을 흘리고, 공격으로 인해 드러난 허점을 할퀸다.
퍼펑!
그러나 어느 쪽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지 못한 공격이 공간 속으로 흩어지면, 잠시 맞붙었던 두 사람이 다시 떨어진다.
그야말로 눈 깜빡이는 것보다 짧은 시간에 이어지는 공방.
그 속에서 주고받는 공격과 방어의 횟수는 그야말로 수백 번을 넘는다.
그러나 거리가 생긴다고 해서 전투가 멈추는 것은 아니다.
서로 검을 마주한 전투가 치열하다면, 거리가 벌어진 순간 이어지는 전투는 강렬했다. 허공을 수놓은 붉고 푸른 광채가 채 흐려지기도 전이었다.
“이런 거겠지?”
존 워스의 손끝에서 또다시 수십 자루의 작은 검이 솟아올랐다. 작은 검강의 새파란 광채는 앞의 것보다 더욱 밝았다.
무엇보다 검강의 움직임이 달랐다.
앞의 것이 빨랐지만 직선적이었다면, 이번은 빠르면서도 변화무쌍했다.
그래, 마치 벌새를 닮은 이드의 검강처럼 말이다.
이러한 공격에 즉각 반응한 이드의 입가에는 절로 고소가 지어졌다.
존 워스의 검로 속에 깃든 검의를 단숨에 꿰뚫어 보았기에, 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지금 존 워스의 수법이 앞서 자신의 공격을 카피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사실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다. 흔히 싸울수록 강해진다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이 바로 상대의 수법을 베껴서 익히는 경우였다. 하지만 이런 방법에도 분명히 한계는 있었다.
우선 엄청난 재능이 있어야 했다.
한두 번 만에 상대의 수법을 간파하고, 그것을 몸으로 구현해야 하니까.
간단히 말해 천재여야 했다.
둘째로 최소한 비슷한 수준이어야 가능했다.
아무리 천재라도 한계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수법을 간파하면 무얼 하나.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구현할 수 없는데.
하지만 엄청난 천재가 무공의 수준 또한 높다면?
그럼 뭐,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냥 두 눈 뜨고 비전 무공을 순식간에 도둑맞게 되는 거지.
바로 이드의 경우가 그랬다.
물론 평소에는 도둑맞는 쪽이 아니라 도둑질하는 쪽이었다.
굳이 훔칠 생각이 없어도, 그냥 눈에 보였다고 할까?
실제로 그렇게 얻은 것들이 꽤 있었다.
물론 이드도 이렇게 얻은 무공을 대놓고 써먹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도의적인 문제가 있었으니까.
그게 아니라도 남의 무공을 도둑질하는 것은 그야말로 생사결단을 내자는 뜻과 다를 바가 없는 일.
자칫했다가는 해당 무공을 익힌 문파 전체와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골치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드가 자신의 무공을 훔쳐 갔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이들도 있었다.
이때 그들의 반응은 참으로 다양했다.
놀람과 분노, 허탈과 자괴, 경악과 슬픔 등.
당사자가 긴 시간 해당 무공을 익히며 쌓은 감정이 한 번에 폭발하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이드로서는 이해는 하지만 공감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잠시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완벽히 공감할 수 있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지금 눈앞에서 존 워스가 자신의 수법을 그대로 카피하고 있는데.
도리어 모를 수가 없는 일 아니겠는가.
마치 과거의 그들처럼 말이다.
‘이런 기분이었구만, 그 양반들’
미안한 기분이 든 이드는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막상 당하는 입장이 되어 보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던 탓이다.
굳이 자신의 수법을 카피하지 않아도 충분한 공격 수법을 가지고 있는 놈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것인지.
“나와 놀아 보겠다는 건가? 무공 뒤에 정체를 감추는 게 얼마나 더 가능할 것 같나.”
“그런 오해라니. 안타깝군. 난 순수하게 이 무공을 좋아할 뿐이다. 봐라, 얼마나 효율적인지. 이 땅에도 진작 이런 것이 개발되었더라면 우리가 깨어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지.”
“・・・・・・ 게르만이 봉인을 풀었기에 너희들이 깨어난 것이 아니라는 소리냐?”
존 워스의 방금 발언은 지금까지의 선후 관계를 뒤집는 말이었다.
이제 와서는 아무래도 좋은 문제이기는 하지만,
방화나 자연 발화나, 산에 불이 났다는 결과는 동일하니까.
존 워스는 대답 대신 삐딱하게 고개를 꼬았다.
“기쁘지 않나? 당신이 살던 차원에선 우리가 깨어날 일이 없을 테니까.”
“흥, 만약 깨어났다면 기지개를 켜기도 전에 죽었을걸.”
콧방귀를 날리는 이드.
하지만 내심은 달랐다.
혼돈의 파편이 중원에 나타났다면?
그랬다면 무림은 저들을 막을 수 있었을까?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에 그 답은 알 수 없다.
대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만약 혼돈의 파편을 막아 내더라도, 그 피해가 어마어마했을 거라는 점.
다만 존 워스의 말처럼, 자신의 고향에 혼돈의 파편이 깨어날 일은 없었다.
그건 다른 시간 축의 지구를 보고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혼돈의 파편은 멈춰 버린 세계라는 어항에 넣어 놓은 메기다.
즉,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세상에는 필요 없는 존재가 바로 혼돈의 파편이었다.
“그보다, 이제 그만 숨기고 있던 검이나 꺼내 놓으시지?”
“흐흐, 보고 싶다면 꺼내게 만들어 보든가.”
“그렇지 않아도, 그러려고!”
중간에 잠시 말을 끊은 순간이다.
엄지발가락으로 차올린 작은 돌멩이 하나가 눈앞에 떠오른 것과 동시였다.
톡.
어느새 뻗어 낸 주먹이 돌멩이에 닿았고, 직후 주먹에서부터 전달된 검고 무거운 내력이 자석에 달라붙는 철 가루처럼 돌멩이 주변으로 달라붙으며 튀어 나갔다.
쿠쾅!
하얀 고리를 층층이 만들어 내며 로켓처럼 날아가는 돌멩이.
하지만 그 속에는 태산처럼 무거운 힘이 구겨 넣어져 있었다. 때문인가.
돌멩이의 속도는 그리 빠르지 못했다.
이드와 존 워스라면 충분히 피하고도 남을 것 같은 속도.
하지만 이드는 존 워스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저 돌멩이는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흐음.”
과연 예상대로 존 워스는 이런 사실을 알아차린 듯, 방어에 나섰다.
굳은 눈빛을 한 채 높이 든 검이 새파랗게 물들어 흔들리자, 선명한 검영이 겹겹이 겹치며 순식간에 높은 성벽을 만들어 냈다. 성벽의 정체는 천검의 요새.
바로 지금의 존 워스를 철벽의 검왕으로 있게 만든 그의 검기(劍技)였다.
그런 검으로 쌓아 올린 성벽에, 이제는 흑진주로 변한 돌멩이가 충돌했다.
높이 솟은 성벽에 비하면 흑진주는 작은 점에 불과했지만, 그 속에 담긴 힘은 결코 작지 않았다.
오히려 더없이 크고 무거웠다.
까아앙!
충돌의 순간 발생한 소리는 커다란 종소리를 닮았다.
파동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땅을 흔들었다.
진짜 성벽이었다면 오히려 견디지 못했을 충격량.
그러나 천검의 요새는 굳건할 뿐 아니라, 반격까지 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차차차차착!
성벽 상단에 위치한 검이 일제히 일어나 검 끝을 아래로 향했다. 검이 노리는 것은 다름 아니라 흑진주와 이드.
피피피핏!
직후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검 끝에서 무수한 강기가 쏟아져 내렸다.
성벽 위에서 쏟아지는 강기의 비는 마치 성 위에 선 궁병의 화살처럼 보였다.
이에 이드는 머리 위로 일라이져를 높이 세워 올리며 무형기류의 초식을 사용했다.
푸화화확!
초식의 묘리에 따라 일어난 강기의 구름은 순식간에 이드의 모습을 가렸고, 뒤이어 쏟아진 강기의 화살 또한 흔적 없이 삼켜 버렸다. 강기와 강기의 충돌이었지만 어떤 소리도 흔적도 없었다.
그야말로 기묘하기 그지없는 강기의 구름.
물론 이드에겐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 뿐이었다.
그렇게 강기의 화살을 막아 낸 이드는 일라이져를 허공에 박아 두고, 두 손을 들어 건곤을 움켜잡았다.
두 손이 태극을 그리며 건곤을 바꾸기를 수차례.
어느새 일어난 흑백의 기운이 두 주먹에 깃들자, 이드는 이를 즉시 흑진주를 향해 뻗어 냈다.
투투투퉁!
건양과 곤음.
상극하는 흑백의 기운은 땅에 스며드는 물처럼 흑진주 안에서 고였다.
그에 따라 흑진주의 검은색은 퇴색하여 회색이 되었고, 알사탕만 하던 크기도 수박 정도로 커졌다. 결정적으로 매끄럽던 표면에 무언가 형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위엄이 느껴지는 부리부리한 눈동자와 구불구불 솟아 있는 한 쌍의 뿔, 그리고 길게 늘어진 수염.
그렇다.
흐릿하긴 하지만, 그건 분명 용의 얼굴이었다.
이드 일가를 제외하고, 이 땅에서는 그 존재를 알지 못하는 신령스러운 생명체.
꾸워어어어-
그 용이, 지금 막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입을 벌렸다.
그러자 회색으로 변하며 사라졌던 흑진주의 검은색이 용의 입속에서 다시금 나타나더니.
다음 순간.
피이이잉-
그대로 앞으로 뻗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