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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29화


1364화

끈적하고 비릿한 액체가 혀에 엉킨다.

“퉤!”

입에 고인 피를 뱉어 낸 이드가 짧게 한숨을 쉰다.

태양 속으로 뛰어들 때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여기저기 베이고 찢긴 옷자락에선 핏자국이 보였고,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카락도 엉망진창에, 왼쪽 귀에서는 피까지 흘렀다. 특히 왼쪽 옆구리에 길게 베인 흔적은 매우 위험한 상황을 넘겼다는 증거로, 모두 태양 속에서 벌어진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드에게 이런 상처들은 별것 아니었다.

진짜 신경이 쓰는 건 따로 있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고 걱정할 사람.

“또 일리나를 걱정시키게 생겼네. 당신, 이 죄를 어쩔 거야.”

마음 같아서는 일리나를 대신해 당장 피해 보상 청구라도 하고 싶지만, 일단 꾹 참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검후가 인정하지 않은 백화난무가 거대한 고치를 만들고 있었다.

고치의 정체는 바로 존 워스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검화.

다만 그 숫자가 너무나 많아 언뜻 봐서는 마치 커다란 고치처럼 보였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일견 평온해 보이는 외견과 달리, 그 내부에서는 초속의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존 워스는 고치를 벗어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중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찌이잉-

강철을 깎아 내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고치를 가르고 삐죽 고개를 내미는 은의 검신.

“손님. 몸이 충분히 뜨거워지기 전에 나오시면 곤란해요.”

친절한 안내와 함께, 삐져나온 검신을 두드려 고치 안으로 밀어 넣는 이드.

그 순간. 벌어진 틈 사이로 존 워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그 눈동자는 조용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이 정도로는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듯.

이드도 충분히 인정하는 바였다.

그는 메르시오와는 달랐다.

더 정교하고, 더 빠르고, 더 교활했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메르시오보다 강했다.

그를 죽이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순간이 필요했고, 최강의 한 수가 필요했다.

다행히 그중 후자는 이미 이드가 가지고 있었다.

12대식.

의형강기의 극한이자, 자신이 쌓아 올린 무공의 정수.

이드는 이를 완전한 상태로 펼쳐 내기 위해 땅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존 워스와 같은 강적을 상대로 굳이 익숙하지 않은 공중전을 이어 갈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먼저 내려가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드가 고치를 발로 찼다.

훌륭한 중심 이동에서 이어지는 힘의 폭발은 모든 축구선수가 본받아야 할 슈팅의 교과서와 같았다.

뻐엉!

중력이 당기는 힘까지 더해져, 추락하는 고치의 속도는 대단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지표에 닿은 고치는 땅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전진이 멈추는 순간, 폭발을 시작했다.

쿵!

처음엔 사방 일 킬로미터 정도의 땅이 지진이 난 듯 들썩였다.

콰과과과광!

그러나 뒤이어 화산이 터진 듯 사방 백 미터 정도의 지표가 통째로 날아가더니, 곧 시뻘건 버섯구름을 피워 올렸다. 그건 실로 어마어마한 광경이었다.

그로 인한 피해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다.

타란 백작의 진지와 남아 있던 인원은 폭발에 쓸려 갔고, 영혼의 관에 생겨난 균열도 몇 배로 커졌다.

그나마 멀쩡한 곳은 최상층뿐.

오늘을 무사히 넘기더라도, 영혼의 관의 철거는 확정적이다.

“헐…….”

보호 벽 뒤에서 빼꼼히 얼굴만 내밀어 이러한 참상을 살핀 오탄은 할 말을 잊었다.

대신 오랜만에 존경을 담아 플레타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보호 벽을 세우라고 하신 건 대장이 오늘 내린 명령 중 최고였습니다. 이게 없었으면 진짜. 허우~”

농담이 아니라, 정말 사상자가 나왔을 것이다.

당장 든든하게 선 보호 벽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지금 그곳엔 크고 작은 파편들이 깊이 박혀 있었다.

가장 얕은 것이 새끼손가락 깊이다.

그 강도를 생각하면…………….

그래도 적절하게 보호 벽 뒤로 숨은 자신들은 그나마 다행이지, 주변에 있던 나무들은 지금 거의 절반이 부러지고 쓰러졌다. 조금만 늦었으면 자신들도 저런 모습이 되었을지 모르는 일.

“알면 좀 잘해라.”

“지금보다 어떻게 더 잘합니까?”

존경은 엄지 하나로 충분하다.

대장의 요구를 단호히 끊어 낸 오탄이 저 아래, 폭발의 중심지를 살폈다.

폭염과 먼지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본래 그렇게 간단히 사라질 것들이 아니지만, 곧장 다시 이어진 명예 후작과 존 워스의 전투로 인해 모두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콰콰쾅!

덕분에 폭음은 여전히 폭음이 멈추질 않는다.

다행이라면 다행히 살 떨리는 충격파가 전해지지는 않지만.

“역시, 나가면 안 되겠죠?”

“저 양반들만큼만 실력에 자신 있으면 안 될 거야 없지. 나가서 구경할래?”

“・・・・얌전히 닥치고 있겠습니다.”

플레타가 말하는 ‘저 양반들’은 일리나와 검후, 그리고 쉴라와 스폴 네 사람이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보호 벽 뒤로 숨을 때도 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물론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

그 증거로, 현재 네 사람 주변의 땅은 여전히 깨끗한 상태였다.

“좋은 결정이다. 저 양반들이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이렇게 많은 파편을 막아 줄 수는 없다고.”

“알죠. 저 같은 건 우선순위도 한참 뒤에 있을 텐데. 대략 201번째 정도?”

“하! 잘도 그러겠다.”

그야말로 이상한 자신감에 플레타가 콧방귀를 끼었다.

“그런데, 이대로 괜찮을까요? 전투가 너무 요란해서 다른 영지에서도 이 사태를 알았을 거 같은데. 지원이 오지 않겠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너 같으면 이 자식아, 저 꼴을 보고도 오겠냐?”

쯔엉!

플레타가 턱으로 가리킨 곳에서는 마침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거대한 검강이 대지를 갈라 나가고 있었다.

물론 다른 영지는 고사하고, 산 하나 넘으면 볼 수 없는 장면이다.

하지만 적어도 조금 전까지 검은 하늘을 환하게 비추던 태양, 그리고 화산이 폭발한 것 같은 진동과 폭음은 모를 수가 없다. 만약 자신이 주변 영지의 영주들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릴까.

분명 말을 달릴 것이다.

이곳의 반대 방향을 향해서.

“확실히…… 추가 병력이 오지는 않겠네요. 최소한 하루, 이틀 사이에는.”

“그래. 아마 상황을 보고 받은 왕성에서 명령이 내려오면 그제야 느릿느릿하게 기어 올 거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자신들은 이미 마스를 떠나 있을 것이라며 키득거리는 플레타였다.

“그런데 대장은 저 전투가 그렇게 오래 이어진다고 보시는 겁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야, 말이! 내가 볼 땐 저 전투, 곧 결판이 날 거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이기는 건 당연히 명예 후작님 쪽이겠죠?”

묻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바람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도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이드가 죽는다면 저 존 워스의 검이 자신들을 향할 게 뻔하니까.

저런 괴물을 상대해야 한다는 건 상상만 해도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행히 플레타는 그의 바람을 배신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흐름으로는 그렇지. 일단 명예 후작이 세 번이나 확실한 치명타를 우겨 넣었잖냐. 그거야말로 명예 후작이 한 수 앞선다는 확실한 증거지.”

한 번은 운이지만, 세 번은 실력이다.

이러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검후가 쉴라를 향해 눈짓했다.

“단장의 생각은 어떤가?”

“저자, 말투와 행동은 가벼우나 전황을 읽는 눈은 제법 정확한 듯합니다. 저도 그의 의견과 같습니다.”

쉴라의 대답에 검후는 일리나를 돌아보았다.

눈먼 공격을 요격하고 보호막 뒤로 피난을 지시하는 등 꼭 필요할 때 적절히 나서긴 했지만, 그런 순간을 제외하고 일리나의 눈은 이드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검후는 그러한 일리나의 마음을 이해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편이 목숨을 걸고 싸움에 나섰는데, 그걸 지켜보는 마음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더욱이 상대가 어디 보통 존재이던가.

무엇보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 재회한 두 사람이었는가 말이다.

검후가 일리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드가 이길 거예요.”

“그거, 내가 이드를 걱정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가요?”

“걱정하고 있었던 거 아니에요?”

“맞아요. 하지만 이드에 대한 걱정은 아니었어요. 많이 다치면 슬플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럼 뭘 걱정한 건데요?”

“라미아요.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 보면 지금도 영혼의 관 안에 있을 텐데. 이드의 전장과 너무 가까워요.”

“그러고 보니. 하지만 라미아의 마법이라면 아무리 급박한 상황에서도 몸을 뺄 수 있으니까 오히려 이드보다 걱정이 덜할 것 같은데요?”

특히 돌발 상황에 즉시 발동하는 단거리 공간 이동의 경우 라미아에게 있어서는 숨 쉬는 것과 같이 쉽지 않던가.

그런데도 걱정이라니?

“라미아뿐이라면 그렇죠. 하지만 그녀가 저기 있는 건 바이트 타블렛 때문이잖아요. 라미아라면 급하다 한들 그걸 그냥 포기하진 않을 거예요.” 

“으음.”

그러자 일리나의 말을 들은 검후의 얼굴에도 걱정이 머무르기 시작했다.

바이트 타블렛.

모르지 않는 사실임에도 잠시 잊고 있었다.

영혼의 관이 보여 준 마법들을 생각하면 결코 간단히 포기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특히나 존 워스가 부관주의 구출을 부탁받고 나타난 시점에서, 그가 바이트 타블렛과 어떤 형태로든 접촉을 했다고 보아야 하는 상황. 아직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나 확실한 점은, 혼돈의 파편에는 유리하고 이드에게는 불리한 형태의 조치를 취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한 사태는 막을 수 있을 때 확실히 막아야 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돕고 싶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음뿐이다.

이드의 전장을 무사히 건너는 것도 문제이고, 막상 가더라도 마법사가 아닌 자신이 라미아를 도울 방법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도는 무사히 바이트 타블렛을 수습하고 돌아오길 바라는 일뿐.

“이드도 라미아가 아직 영혼의 관에 남아 있다는 걸 알고 있기는 한 거죠?”

“물론이에요. 우리는 언제나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음? 그럼 혹시 지금 라미아의 상황도?”

“이드가 땅으로 내려오기 전까지는 괜찮았어요. 탑주의 연구실에 들어섰다고 했거든요. ・・・・・・ 그 후에는 아직 연락이 되지 않고 있지만요.” 

일리나의 얼굴이 어두웠던 진짜 이유였다.

하지만 그때까지 별일이 없었다면, 지금도 괜찮은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 목적지에 닿았다고 하지 않는가.

검후는 밝은 목소리로 확신하며 말했다.

“라미아는 절대로 괜찮을 거예요.”

“고마워요.”

친근하게 감정을 주고 받는 두 사람.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한 사람의 존재를 잊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바로 라미아와 동행한 라울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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