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34화
1369화
빠드득!
라울이 이를 갈았다.
냉정해지려 애써 보지만, 마음 같지 않다.
다시 생각해도 참담하고 비참했다.
라미아로부터 들은 설명은 그 정도로 끔찍한 것들이었다.
말이 좋아 특정 조건에서 발생하는 일이라지만, 그 속뜻을 누가 모를까.
결국은 혼돈의 파편이 저 좋을 대로 휘두른다는 말이 아닌가.
그들이 허락한 초인은 강해지고, 미움을 받으면 약해진다.
보지 않아도 뻔하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내가 아니라 남에 의해 휘둘리는 신세라니.
스스로 강하다고, 남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잠깐 떠오른 상상에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든다.
동시에 바벨에 좋지 않을 거라던 라미아의 말이 완벽하게 이해가 되었다.
그럴수록 한 사람을 향한 분노가 진하게 타올랐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보기엔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존 워스가 바벨을 노린 것 같은데 말입니다.”
“・・・・・・ 진짜 내 의견이 궁금한 거 맞아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명예 후작 부인이 아니라면 누구도 답해 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아닌데? 아무리 봐도 이미 답을 정해 놓고 묻는 거 같은데?
물론 그렇다고 라울이 원하는 답을 들려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지만.
라미아가 입을 열었다.
“일단, 제 생각은 달라요. 물론 처음에야 바벨이 가장 손해가 클 거예요. 하지만 그건 초인으로 이루어진 조직의 특성 때문이고, 결국 피해를 보는 건 모든 초인이 되겠죠. 특히 정기적인 초인기 프리징은 모든 초인을 움츠러들게 할 겁니다.”
“제 시각과는 다르시군요.”
라울은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단기적으로는 초인력의 증감이 크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라미아가 보기에 초인에게 있어 가장 심각한 문제는 프리징이었다.
중장기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끼치며, 어쩌면 초인 몰락의 시작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사실 프리징이 언제, 어떻게 발생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나 확실한 것은, 프리징이 발생했을 때 초인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그 시간 동안은 초인기를 각성하기 전의 일반인이나 다름없어진다는 뜻이었다.
이 정글과 같은 세상이 그 순간을 그대로 둘 리가 없다.
초인과 적대 관계에 있는 개인이나 세력은 모두 이때를 노리고 검을 들 것이다.
끔찍하고 참혹한 사냥 축제가 열린다는 의미다.
과연 주기적으로 사냥당하는, 그래서 전력에서 제외되는 초인들이 계속해서 신뢰를 받을 수 있을까. 라미아는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게 시작이다.
그렇게 주류 집단으로부터 서서히 신뢰를 잃고 도태되는 것.
그것이 라미아가 생각하는 초인의 미래였다.
물론 이런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일이 늘 긍정적으로 돌아가지는 않기에, 최악의 상황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었다.
‘까놓고 말해서 이건 최악도 아니지. 진짜 최악은……..’
초인의 멸종.
순간 떠오른 문장에 라미아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어 털어 버렸다.
아무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으리란 생각에서였다.
초인은 세상이 혼돈의 파편과 싸우기 위해 만들어 내는 존재다.
세상에 멸망하지 않는 이상, 초인은 끝없이 태어난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이상해. 존 워스는 어째서 초인이라는 장애물을 즉각적으로 치워 버리지 않은 걸까?’
혼돈의 파편에게 있어 초인은 방해물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처리 방식은 명백히 비효율적이었다.
정말 초인을 방해물로 생각하고 제거하고자 했다면, 이번 기회를 통해 아예 초인기를 박탈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더 이상 초인이 각성할 수 없도록 막아 버린다면?
짜잔!
초인의 멸종이 완성된다.
이런저런 조건을 걸어 두는 것보다 오히려 간편하다.
그런데 존 워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도대체 혼돈의 파편에게 초인은 무슨 의미이기에 그들을 남겨 둔 것일까.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을 텐데.
“뻔합니다. 목줄을 채워 바벨을 써먹으려는 것이겠지요.”
씨근덕거리는 라울의 말에 라미아는 고개를 저었다.
“확실한 목줄이 될지도 의문이지만, 글쎄요, 혼돈의 파편에게 굳이 바벨이 필요할까요?”
“……”
전 대륙이 바벨을 원한다.
라울은 그렇게 당당히 외치고 싶었지만, 차마 지금 그런 멍청한 소리는 할 수 없었다.
분명 전 대륙이 바벨을 원하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
바벨이라는 단체의 힘은, 국가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하물며 저 최강이라는 아나크렌조차 바벨을 거부할 수는 없다.
아니. 모르긴 몰라도, 황제가 직접 나서서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이다.
하지만 혼돈의 파편은 다르다.
라울은 오늘 혼돈의 파편으로서 나선 존 워스를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너무도 이질적이다.
그리고 목적성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
다만 그런 중에도 알 수 있었던 사실은, 최소한 저들의 목적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마왕처럼 세계를 정복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게 목적이었다면 미완의 마탑과 바이트 타블렛을 이용할 방법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했겠지.’
당장 라울의 머릿속에서만 벌써 수십 가지의 계획이 떠올랐다.
하나 그게 아닐지언정 굳이 이런 이상하고 비효율적인 형태로 제약을 건 까닭은, 어쩌면 알 수 없는 제약이 작용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이런 여러 가지 상황을 조합하면 나오는 결론은 하나다.
혼돈의 파편은 바벨을 원하지 않는다.
아니, 원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
바벨을 거부하다니.
어떤 사춘기 소녀처럼 ‘내게 이런 건 네가 처음이야.’라며 매달릴 생각은 없다.
다만 바벨에 속한 한 사람의 간부이자, 초인으로서 자존심이 상했다. 동시에 결심했다.
바벨을 원하지 않은 그 결정을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만약 입 밖으로 냈다면 라미아가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폭소를 터트렸을 발언이지만, 라울은 그저 진지하기만 했다. 그렇게 혼자만의 결심을 가슴에 새긴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제약은 그 셋뿐입니까? 아니면 혹시 더………..”
“그렇게 싫은 얼굴 해도 어쩔 수 없네요. 앞의 세 개에 비하면 정말 정말 사소하지만, 몇 개 더 있어요.”
“그렇다면 당장 듣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어? 궁금하지 않아요?”
라미아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내 집에 불이 난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내 몸에 실시간으로 수갑과 족쇄가 채워지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저 태도는 뭘까?
앞의 세 조건을 듣고 펄펄 뛰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 맞는 걸까.
그렇게 의심을 받는 라울이었지만, 그도 이유는 있었다.
길게 한숨을 쉰 라울이 돌연 품에서 약병을 하나 꺼내 마시고는 눈가를 꾹꾹 눌렀다.
“약이에요?”
“편두통약입니다. 너무 신경을 썼더니, 미칠 것 같군요. 여기에 골칫거리를 더했다가는 정말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습니다. 정말 필요하면 나중에 듣죠.
“……나중에 따로 정리해서 적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만, 가급적 받지 않는 쪽으로 부탁드립니다. 아직 그 빌어먹을 제약들이 확실하게 정해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걸 막으려고 온 거긴 하죠.”
너무 진지하게 파고들어서 이미 확정된 기분이 들었던 모양이다.
라미아는 다시 한번 마법의 고삐를 조였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꼭 좀 막아 주십시오.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뭐든지 돕겠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진심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뿐이다.
마법사도 아닌 그가 지금 도울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결국 말뿐이라는 거지.
말로 천 냥 빚도 갚는다지만, 라미아는 그런 실천 없는 공약은 좋아하지 않았다.
덕분에 라울을 향한 그녀의 눈길은 짜디짰다.
“어차피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할 생각이거든요?”
“거기서 더 신경을 써 달라 부탁드리는 겁니다.”
“……조금 전에, 뭐든지 돕겠다고 했죠? 그럼 마법사를 데려와요. 여기 탑주급의 실력자로. 그게 힘들면 재촉하지 말고 그냥 좀 닥쳐 줄래요?”
“……”
확실히 자신의 입장은 잘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조용히 찌그러지는 라울을 보며 라미아는 조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구렁이처럼 능글맞아 보였는데.
이렇게 보니 나름 솔직 담백한 느낌도 있었다. 마법사들을 잡았을 땐 좋아하고, 제약을 들었을 땐 분노하고, 자신의 말에는 기가 죽어 바로 꼬리를 내리고,
라울의 이런 면을 좋게 본 것일까?
라미아는 어쩌면 검후가 라울에게 생각보다 큰 원한을 품고 있지 않은 이유가 그의 이런 모습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모습 자체가 노린 것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볼 때 그래 보이지는 않았다.
만약 이 철없어 보이기까지 한 솔직한 태도가 연기라면?
그는 당장이라도 진로를 배우로 바꿔야 했다.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대배우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런 잡생각과 달리, 라미아의 손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법진을 수정하고, 법칙을 비틀고, 마나를 재배치했다.
츠팟.
탑주의 머릿속에 아름답게 피어 있던 마법진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열쇠뿐.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된다.
라미아가 열쇠를 뽑기 위해 손을 댔다.
그러다 문득 몸을 멈추고 라울을 돌아보았다.
“……?”
라미아의 말에 따라 얌전히 서 있던 라울이 눈만 깜빡거렸다.
결코 불만의 표시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려면 이 열쇠가 필요한데, 이걸 뽑으면 탑주는 죽을 거예요.”
“……그렇군요.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라울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탑주를 향한 동정의 시선도 잠깐이었다.
그와 탑주의 관계에는 서로 마음 아파할 만한 정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서로를 이용한 것일 뿐.
무엇보다 라미아는 탑주가 이미 죽었다고 말했다.
당장이 아니라도, 어차피 그는 써먹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하세요.”
“전혀 없습니다. 빠르게 진행해 주십시오.”
오히려 재촉하는 라울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흡! 흡흡!!”
“음!! 으으음!”
한쪽에 꽁꽁 묶여 있던 마법사들이 온몸을 꿈틀거리며 자신들의 의사를 표시하려 애썼다.
그들의 몸짓은 자못 애처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라미아도 라울도, 그들의 외침에는 관심이 없었다.
찰칵!
라미아가 무심하게 열쇠를 뽑았고.
스르륵.
탑주의 머리가 힘없이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