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83화
1418화
이틀이 지났다.
주의를 받은 스케스틱은 그 후 옥상에 오르지 않았다.
다만 이드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는 변화가 생겼다.
일리나와의 데이트 다음 날 라미아에게 데이트를 신청해 외출하고 돌아온 이드는 이런 변화를 금방 알아차렸다.
지금까지 자신을 대하는 스케스틱의 태도는 정중했지만, 존중하는 마음은 느껴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일리나와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날부터 그의 행동에 마음이 실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특히나 사람을 대할 때 스케스틱이 세워 두고 있던 미묘한 간극의 벽이, 이드를 상대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눈치챘다.
검후의 권유를 받아 서재에서 찻잔을 들고 마주 앉았을 때였다.
“혹시 제가 모르는 사이에 스케스틱 님과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갑자기?”
“갑자기 그분의 태도가 신기할 정도로 바뀌었잖아요. 그래서 혹시 뭔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은 거죠.
“그가 왜 그러는지는 나도 잘 몰라. 그래도 뭐, 사이가 좋아져서 나쁠 건 없잖아?”
이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좋지 않은 일이라면 몰라도, 좋은 일이다. 굳이 그에 대한 이유를 억지로 캐낼 필요가 있냐는 말이다.
그러다 괜히 사이만 어색해지면 자신만 손해다.
그 모습이 한심해 보였는지 검후가 작게 혀를 찬다.
“그 대답, 지금 너무 풀어진 것 알아요? 긴장감이 하나도 없는데.”
“항상 긴장을 유지하면 사람이 못 살아. 거기에, 의심할 사람이 따로 있지. 스케스틱을 의심하겠니?”
“제가 언제 그를 의심한다고 했어요!”
“아니야? 아니면 말고. 난 또 시간이 남아돌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줄 알았지.”
그런 적 없다며 펄쩍 뛰는 검후의 모습에 이드가 악동처럼 웃어 보였다. 그러자 검후가 발끈해서는 말했다.
“흥, 전 누구하고 다르게 느긋하게 데이트나 즐기고 있을 시간은 없어서 말이죠!”
“하하. 봤어?”
“어떤 분이 제 앞에서 그렇게 자랑을 하더라고요. 굳이 궁금하지도 않았는데.”
질책의 기운이 다분한 눈길을 한 검후.
그러나 이드는 오히려 어깨를 폈다.
데이트가 즐거웠다고 자랑을 했다지 않는가.
이건 한 명의 남자로서, 또 남편으로서 충분히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드의 입장.
검후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뭐에요? 그 표정은 지금 잘했다는 거예요?”
“데이트가 죄는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는 순간부터 이 세상의 인류는 인구수 감소를 지나 소멸에 이르러 결국 멸망하고 말 것이다.
“누가 죄라고 했어요? 다만, 어른으로서 본을 보이라는 말이죠. 어린 기사들도 외출을 금지하고 열심히 수련하고 있는데!”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다녀왔잖아. 너 말고 아무도 모르잖아. 그렇지?”
“끄응.”
검후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이드의 말대로, 그의 외출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렴 은밀히 움직이는 이드를 누가 찾아낸단 말인가.
“그것 봐. 거기다 혹시 몰라서 신경 써서 얼굴까지 바꿨다고. 어쭙잖게 흔적을 흘린 것도 없단 말이지. 들키지만 않으면 무죄라고 하잖아.”
“……지금 그 말이 왜 나와욧!”
어이가 없는지 검후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본을 보이라고 했지만, 외출을 들키지 않았으니 체면을 구긴 것도 없다.
게다가 이드는 매일 새벽 수련을 나가며 충분히 기사들에게 본을 보이지 않던가. 그 이상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사실 이런 소리도 이드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감히 누가 검후를 상대로 ‘들키지 않으면 무죄’라는 헛소리를 지껄일 수 있을까.
부들대는 검후의 반응이 재밌어 이드는 실실 웃으며 재차 그녀의 신경을 긁어 댔다.
“왜 화를 내니? 혹시 데이트가 부러웠던 거야? 그런 거라면 일리나와 라미아에게 허락을 받은 후 오늘 하루 정도는 내가 데이트 상대가 되어 줄 수도 있는데. 어때?”
뿌득!
“유부남 따위・・・・・・ 필요 없거든요!”
“아하하하!”
데이트가 싫은 것이 아니라 유부남이 싫다는 대답에 이드는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걸로 답이 나왔다.
외출이 문제가 아니라, 데이트 자랑에 샘이 났던 거다.
그러나 이드는 굳이 이 사실을 꼬집지 않기로 했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불똥이 어디로 어떻게 튈지 예측 불허이기 때문이다.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나중에 생각 있으면 말하고.”
“헛소리는 그 정도로 하시죠?”
소파 아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아무래도 이 이상 도발했다가는 진심으로 화를 낼 것 같다.
이드는 자연스럽게 말머리를 돌렸다.
“그럼 그럴까? 그렇지 않아도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은색 기사단 말이야.”
“……저희 아이들이 왜요?”
역시 은색 기사단만큼 검후가 반응을 보이는 이야기도 드물다.
“그 휴가 같지도 않은 휴가. 언제까지 늘릴 거야?”
첫 새벽 수련에서 추가 휴가를 명 받은 은색 기사단이지만, 이후에도 새벽 수련은 멈추지 않았다.
수련을 응원하듯 이드의 교육까지 더해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검후의 휴가 명령도 매일매일 갱신되어 길어지는 중이었다. 장난도 아니고 말이지.
“왜요, 귀엽잖아요.”
“……기특하긴 하지.’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하냐는 듯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말하는 검후. 그 모습이 어쩐지 조금 전 이드와 많이 닮았다.
“이드도 그렇게 생각하죠? 그런데, 안 그래도 이제 슬슬 그만해야 할까 봐요. 굳이 더 숨어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거든요.”
“검왕이 근처까지 온 거야?”
이드가 빈 찻잔을 내려놓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검후가 은색 기사단에 외출 금지 명령과 더불어 휴가를 내린 이유가 무엇이던가. 바로 검왕 때문이다.
물론 고생한 기사들을 쉬게 하려는 목적도 있다. 또 영혼의 관에서 보고 들은 것이 많기에 그걸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목적에 바로 검왕이 있다.
검왕이 도착하면 검후가 그의 목을 벨 것이고, 그 자리에는 은색 기사단이 함께할 터였다.
검후는 그때를 위해 은색 기사단이 마음의 정리를 할 시간을 준 셈이었다.
이미 검후에 대한 배신으로 인해 검왕에게 분노하고 있는 기사들이지만, 그럼에도 검왕 역시 한때 그들의 스승과도 같은 사람이었으니 마음이 복잡한 사람이 없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기사단은 짧은 시간에 마음을 정리하고 수련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이며 검후를 기쁘게 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분명 잘못된 인연을 끊어 내고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릴 때를 앞둔 검후의 표정이 썩 개운치가 않다. 아니, 오히려 좋지 않아 보인다. 검왕에 대한 감정도 충분히 정리가 끝났을 텐데.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뭔가 계획과는 다른 일이 발생했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크다.
아니나 다를까. 검후가 크게 한숨을 쉰다.
“하아~ 원래라면 그래야 했겠지만요.”
“그 말은, 혹시?”
원래라면 그래야 했다는 건, 지금 상황은 다르다는 말이 아닌가.
이제 와 달라질 가능성이라고는 딱 하나뿐이다.
검왕이 이쪽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어떤 형태로든 그에 대응하는 것. 가장 쉬운 방법으로는 잠적이 있겠다.
그걸 피하기 위해 기사단의 외출도 막았는데, 뭔가 눈치라도 챈 걸까.
이드의 모습에서 이런 짐작을 읽어 낸 검후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지만, 아직은 아니에요.”
“아직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다는 시점에서 이미 충분히 문제인 것 같은데. 황궁에서 새로운 소식이라도 전해 온 거야? 어제까지만 해도 별말 없었잖아.”
검왕이 소환에 응한 후, 황궁에서는 그와 관련된 정보를 매일매일 검후에게 전해 오고 있었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두라는 듯이.
아마도 황제가 그 나름대로 신경을 쓴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전해지는 정보는 중간중간 확인된 검왕의 동선과 소드 팰러스의 동향, 그리고 검왕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몇몇 귀족들에 대한 정보 정도였다.
귀족들의 이름이 언급되었다는 시점에서 이것은 일종의 살생부라고 취급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검왕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던가.
그런 그와 깊이 교감했다면 그 사실 하나로 죽을 이유는 충분했다. 어쩌면 황제는 이들의 처리에 대해 검후에게 의견을 묻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검후는 이들 귀족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처리는 철저하게 황제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황제의 결정을 충분히 존중하며 따르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었다. 검후 나름대로 책임을 다하겠다는 표시였다.
검왕이 다른 마음을 품어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른 것에는 부하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본인의 잘못도 분명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황제가 소식을 전해 왔어요. 전날 검왕으로부터 벨루토 인근을 지나는 중이라는 보고가 있었다고. 그런데 정작 벨루토에서는 검왕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네요.”
“검왕이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면 모를 수 있잖아?”
제국에 검왕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정작 검왕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감시를 위해 황제가 미리 길목에 보내 놓은 자들인걸요.”
그건 아니라는 검후다.
과연 그런 목적이라면 검왕의 얼굴을 모를 수 없지.
그렇다면 길이 엇갈린 것은 아닐까.
‘아니, 그럴 일은 없어.’
혼자 추측해 본 이드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거야말로 가능성이 적은 일이었다. 황제의 명을 받아 안티로스로 향하는 검왕이 굳이 잘 닦인 길을 두고 험로를 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검후가 확신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말로는 ‘아직’이라고 하지만, 이미 확신하고 있는 검후가 아닌가.
“그럼 시르피, 네 생각은 어떤데? 검왕이 알아차린 것 같아? 지금 말하는 걸 보면 뭔가 짚이는 부분이 있는 모양인데.”
“전 그렇다고 생각해요. 더 기다려 봤자 검왕이 안티로스에 나타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가 정말 황제의 명을 따랐다면 지금 그가 있어야 할 곳은 벨루토 인근이 아니라 대전 앞이었어야 해요.”
“확실히…….”
이드는 조용히 납득했다.
하룻밤 만에 영혼의 관에서 제국의 국경을 넘은 검왕이다. 안티로스까지는 거리가 더 멀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상황의 급박함에서 차이가 있다고 한들, 황제의 명령이 아닌가. 거기에 지금 검왕은 어떻게든 황제의 호감을 사야 하는 입장. 느긋하게 움직일 여유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 검후의 말처럼 이제야 벨루토 인근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사소하게 넘길 수 있는 일이지만, 오랫동안 검왕을 알아 온 검후는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것 같다.
이드 역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눈썹을 까닥였다.
“빌어먹을 인간이 끝까지 말썽이네.”
“누가 아니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