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87화
1422화
이탈자 혹은 도망자라는 단어는 보고서 어디에도 없다.
“응, 없어.”
소드 팰러스에 소문이 들어간 건 빨라야 이틀 전일 터였다. 도망자가 나오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인지도 몰랐다.
“그렇군요.”
“안심한 얼굴이다?”
도망자가 나오길 바라며 소문이 퍼지기를 기다린 검후가 아니던가. 그래 놓고 지금에 와서는 또 없다는 말에 안심하는 건 뭔가.
“솔직히 그래요.”
“도망치는 놈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녔어?”
“물론 그렇죠. 하지만 이제 막 소문이 닿았잖아요. 그런데도 그 즉시 도망자가 발생했다면 저는 아마도…………..”
“아마도?”
“슬펐을 것 같아요. 많이.”
그렇게 말하며 씁쓸한 미소를 보이는 검후.
당연히 자신보다 검왕을 선택한 배신자들의 선택에 새삼 섭섭한 마음이 들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음. 겁쟁이들이 많이 나올까 봐 걱정했던 거야?”
“틀려요. 애초에 전 겁이 많은 걸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걸요. 싸워야 할 때 물러서지 않는 용기만 있다면 그 겁은 신중함으로 변하니까요.”
겁의 다른 이름은 신중함이다.
이드는 그 말을 몇 번 곱씹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에 물러서지 않는 용기만 있다면’ 검후의 말이 옳기 때문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상대를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는 오히려 수명이 짧은 법이니까.
호기가 높으면 만용이 되고, 만용은 결국 자멸에 이르게 만든다. 언뜻 투쟁심과도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히 말해 그보다 질이 나쁜 경우다.
“다만 소문을 듣고 바로 움직였다는 건 겁이 많고 적고 이전의 문제죠. 그건 신중하지 못하고 충동적이란 뜻이잖아요.”
“그렇지. 지휘관으로서는 최악이지.”
이드도 검후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기사란 고위 직종이다.
아무리 애송이 취급을 받아도 그 전력은 감히 병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군에서는 기본적으로 장교 취급이다.
아무리 신입이라도 기사라면 그 아래 최소 다섯 이상의 병사를 두고 부리게 된다. 다시 말해 지휘관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런 지휘관이 충동적이고 신중하지 못하다면 어떨까.
뻔하지 않은가. 그 아래 병사들은 지옥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나마 경험으로 끝나면 다행이다. 운이 나빠 갑작스러운 몬스터의 준동이나 영지 간 전쟁이라도 터진다면?
모르긴 몰라도 살아남기는 어렵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슬펐을 거라는 검후의 말도 바로 거기서 나온 것이었다.
소드 팰러스에도 그런 멍청한 기사 놈이 있다는 방증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드는 과연 도망자가 없는 이 상황을 순수하게 기뻐해도 좋을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과연 바로 도망치지 않았다고 해서 멍청하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 본질적인 의문이 든 것이다.
나름 신중하게 고심해서 선택한 것이 검왕이고, 그 결과가 배신이지 않은가.
자연히 이드로서는 냉소적인 태도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흥, 그래 봤자 오십보백보지. 어차피 차이가 나도 하루 이틀 아냐?”
“그렇기는 해요.”
콧방귀를 끼는 이드의 말에 검후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검후의 도착까지 3일 남았다. 소문이 실시간으로 퍼지고 있는 만큼, 소드 팰러스에서도 검후의 현재 위치를 알 것이다.
일분 일초가 줄어들 때마다 배신자들의 마음도 급해질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그들로서는 최소 검후가 도착하기 하루 전에는 움직여야 안전했다.
“모르긴 몰라도 오늘 밤부터는 도망자가 나오기 시작할 거야.”
이건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이드의 말대로 하루냐, 이틀이냐의 차이라는 말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멍청이도 있겠지만.”
“그래서 이렇게 시간을 만들어 주고 있죠.”
“・・・・・・ 멍청이들의 이런 스승의 깊은 마음을 알아야 할 텐데 말이다.”
검후의 말에 이드의 입가에도 그녀의 것을 닮은 조소가 매달렸다.
대로를 바람처럼 내달리던 그들이 지나는 영지의 영주 성마다 들어오는 초대에 꼬박꼬박 응해 묵는 이유는 달리 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이미 소드 팰러스에 가 있는 은색 기사단 덕분에 빨라진 속도를 조절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 오로지 배신자들의 도망칠 시간을 만들어 준 것이다. 참으로 따뜻한 스승의 배려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방문으로 인해 검후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낭설이 아닌 진실로 확인되었다.
소문에 갈팡질팡 흔들려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배신자들의 등을 밀어 주는 확실한 신호탄이었다.
덕분에 배신자들의 발등에는 말 그대로 불이 떨어졌다.
“아무래도 황금마차의 주인은・・・・・・ 정녕 검후인 모양이오.”
“확실…… 한 거요?”
“케일과 바룬, 그리고 하바드가 확인한 사실이오. 아무렴 세 사람이 검후의 얼굴을 모르겠소.”
방금 언급된 사람들은 모두 오래전 소드 팰러스를 졸업한 기사들이었다. 동시에 각각 검후가 방문한 세 개 영지 소속 기사들이기도 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 중에도 그들과 크고 작은 인연이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 이상 부정하지 못했다.
“검후가・・・・・・ 돌아왔소.”
“…..”
누군가의 확인 사살에 지독한 침묵이 숨통을 조여 왔다.
그러다 누군가 더는 참지 못하고 붉어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탁자를 내리쳤다.
쾅!
“거짓말이오! 나는 못 믿겠소! 이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이오!”
“그럼 그 세 사람이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말이오?”
“그렇겠지! 그게 아니면……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온단 말이오! 모두 아시지 않소. 검후는 그때 죽었소. 검왕의 검에 베였단 말이오!”
“……그래, 베였지. 하지만 알지 않소? 그때 죽은 건 아니었다는 걸.”
현실을 부정하는 것 같은 남자의 말에 이어지는 차분한 목소리.
어째서일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남자의 고함보다 그 음성이 더 날카롭게 고막을 찌르고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 드는 까닭은.
“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에 악을 쓰던 남자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와 함께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기세가 전신에서 뿜어졌다.
그러나 겨우 그런 걸 두려워할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차분한 목소리의 주인 역시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말을 이었다.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오. 당신 말처럼 검왕이 검후를 베긴 했으나, 그때 검후는 죽지 않았지. 모두 다 아는 일이잖소.”
그래, 그 말대로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사실이다.
검후가 검왕의 검에 쓰러진 배신의 그 날,
하물며 이 자리에는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도 있었다. 그 외에도 많은 기사가 그날의 사건에 관해 이야기했다.
당연히 여기서 진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차분한 목소리의 남자가 그런 좌중을 훑어보았다. 그의 눈에는 한심함과 씁쓸함이 교차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오. 그저 멀리 떠났던 사람이 돌아왔을 뿐, 고난과 위기를 극복하고, 그분다운 결말이지.”
“그래서? 축배라도 들자는 말이오?”
또 다른 사람의 빈정거림.
차분한 목소리의 남자는 그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라는 말이오. 인정하시오. 우리의 선택과 배신은 실패했소.”
우리는 실패자다.
우리가 졌다.
분명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도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는 듯했다.
사람들의 팔다리에 힘이 빠지고 고개가 저절로 떨어졌다.
쿵덕쿵덕.
심장 뛰는 소리에 머리가 울린다.
방금 남자의 말도 그렇고, 귀가 언제 이렇게 좋아진 것일까.
문득 떠오른 바보 같은 생각에 헛웃음이 난다. 그런데 도저히 입꼬리가 올라가질 않는다.
모두 지독한 무력감 때문이다. 수련생 시절을 지나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받은 후로는 좀처럼 느껴 본 적이 없던 탈력감.
아무것도 모르던 애송이 시절엔 분명 절망스러운 순간도 많았다. 그러나 함께 소드 팰러스를 졸업한 동료와 선후배들의 든든한 도움으로 그 모든 어려움을 헤치고 나올 수 있었다. 심지어 소드 팰러스라는 배경 덕분에 한두 번의 실수는 큰 징계 없이 넘어가기도 했다.
그런 경험과 기회를 통해 소드 팰러스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쌓이고 쌓여 바위처럼 단단해졌다. 동시에 그런 소드 팰러스의 상징과 같은 검후에 대한 존경도.
분명 그랬는데.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이냐.’
왜 지금 나는 검후가 돌아온다는 사실을 이렇게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어디서부터 잘못한 것일까.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그와 같은 후회가 휘몰아쳤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배신을 결심하던 그 선택의 순간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후였다. 욕망과 욕심에 한순간 눈을 감아 버린 멍청이들의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다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래서 인정하고 나면, 다 괜찮아지기라도 한단 말이오?”
악을 쓰던 남자가 차분한 목소리의 남자를 노려본다. 차분한 목소리의 남자는 그 시선을 덤덤히 받아 내며 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소. 하지만 최소한 현실을 부정하다 배신자의 낙인이 찍혀 목이 잘리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오.”
흠칫.
배신자로 낙인찍혀 목이 잘린다.
그 말에 악을 쓰던 남자를 포함, 여럿이 몸을 떨었다. 그건 비유가 아니라 바로 눈앞에 다가온 현실이기 때문이다. 검후가 도착하는 순간 저 말은 현실이 될 것이다. 이 자리에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끈적한 식은땀에 목덜미가 서늘했다.
“씨이발! 나는 이런 결과를 바란 것이 아니었는데…..!”
으득!
“일이 이 지경인데 도대체 검왕은 어디에 있는 거요! 이 개자식은 일을 벌였으면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냐!”
“이봐! 개자식이라니!”
“아니, 내 말이 틀렸소? 다 죽게 생긴 판에 저 혼자 빠져 있는 놈이 개자식이 아니면 뭐요!”
“…….”
고함을 지르는 남자의 모습에 여럿이 기막혀했다.
틀린 말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과연 그가 그 말을 할 만한 입장인가. 누구보다 열렬히 검왕을 추켜세우고, 추앙하던 사람이 그 자신이었으면서. 새삼 저런 놈과 대계를 함께했다는 사실에 몇몇은 허망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들을 제외한 대부분은 고함을 지르는 남자의 말에 동조했다.
현 상황을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다. 책임을 강요할 대상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살아날 구명줄이 필요했다.
“내 알기로 검왕은 현재 황제의 명을 받아 임무를 나갔을 것이오.”
“그거 확실하오? 소문을 살펴보면 검후는 수도에서 출발했소. 그런데, 황제의 명으로 임무를 받았다고? 목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나, 나도 자세한 건 모르오.’
“살아 있기는 할 거요. 검왕의 목이 떨어졌으면 벌써 전 대륙에 소문이 났을 테니까.”
“그럼 이건 검왕을 소드 팰러스와 떼어 놓고 소드 팰러스를 먼저 정리하려는 작전인 겁니까?”
“알 수 없지.”
‘개자식’ 발언에 맘속에 있던 주저함이 풀린 것일까. 여러 가지 의견들이 튀어나왔다.
“어차피 이 자리에 없는 사람 언급해 봤자 소용없고! 검왕이 없으면 그 대신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오.”
“현재 소드 팰러스의 책임자라면 마르텔뿐인데.”
블러디 혼.
마르텔의 별명을 떠올린 사람들의 얼굴이 동시에 흐려졌다.
도저히 그에게서 차분한 대책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