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01화


하지만 그 소음들은 모두 활기를 가득 품은 소음들이었다.

“과연 항구도시야. 엄청나게 복잡하잖아. 서로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

이드는 뒤에 따라오는 오엘과 제이나노를 향해 주의를 주고는 라미아의 손을 잡고 앞장섰다.
뒤에 오는 두 사람과는 달리 이드의 말에도 아랑곳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라미아라면 일행들과 따로 떨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서로 영혼이 교류하고 있는 둘이 떨어진다고 찾지 못할 것도 아니긴 하지만 괜히 문제를 일으킬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선착장을 묻는 일행들의 말에 연신 라미아를 힐끔거리며 너무도 상세하게 설명해준 중년인의 말을 다시 한번 기억해낸 이드는 유난히 북적이는 거의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곧장 선착장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라미아와 오엘의 미모에 혹해서 사람이 많은 틈을 타 엉뚱한 짓을 하려는 사람이 몇 있었지만 그들 중 한 명도 성공해 보지 못하고 일렉트릭 쇼크(electricity shock)마법과 소호검의 딱딱한 검집에 흉하게 길바닥에 나가떨어져야 만 했다.
그 중 라미아에게 당한 사람은 그래도 한순간의 기절로 끝을 맺었지만, 세월의 흐름에 강철로 보강된 소호검에 두드려 맞은 사람은 몇 일간 절뚝거리며 주위 사람들의 놀림을 당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나가떨어지는 사람의 단위가 양손을 넘어 갈 때쯤 네 사람은 회색으로 반들거리는 선착장 건물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이 많이 이용하는 이런 건물은 보기 좋도록 밝은 색을 사용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이렇게 반들거리니 회색도 괜찮은 느낌이었다.
오히려 도시적이고 심플한 느낌을 일행에게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행들의 생각은 이드들의 대화를 들은 지나가던 한 행인의 말에 의해 산산이 깨어져 버렸다.

“와하하하!!! 저 찌든 때로 물든 건물이 심플하다니… 크크큭… 처음 오는 사람들은 대개 그렇지만, 이봐 잘 들어. 저 건물도 원래는 흰색이야. 저 회색은 전부 찌들대로 찌든 때가 겹겹이 싸여서 생긴 거라고. 선착장에선 그걸 지우기 힘들어서 반들거리는 그리스라는 마법을 쓴거고. 그러니, 저 건물을 보고…. 낄낄낄…. 심플하다느니, 도시적이라느니 하지 말게나….”

“……… 으윽.”

시원하게 웃으며 다시 갈 길을 가는 남자를 보며 이드들은 건물을 보는 시선이 전혀 달라졌다.
도저히 들어가고 싶지 않은 것이, 처음의 느낌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져 버렸다.
이드가 지금의 상황에 모르는 것이 약이다. 라는 속담이 절로 떠올랐다.
그러나 배를 타기 위해선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일. 선착장 정문엔 벽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문의 정 중앙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방금까진 보이지 않던 모습이었다. 일행들도 실수라도 벽에 닿을세라 최대한 중앙으로, 라미아는 최대한 이드에게 붙어 선착장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선착장 내부는 제때제때 청소를 해서인지 하얀색으로 깨끗해 보였다.

“아, 저기서 배표를 구하는 모양이네요. 어서가요. 이드님.”

라미아가 이드를 잡아끌었다.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창구를 찾은 모양이다. 유백색의 하얀 대리석으로 된 긴 프론트 앞으로 상당수의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하지만 굳이 일행 모두가 가서 줄을 설 필요는 없는 일. 이드와 라미아, 오엘은 마치 짠 듯이 제이나노에게 그 귀찮은 일은 넘겨 버렸다.
평소 하는 일이 없던 제이나노도 일행들의 떠넘김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고 가서 줄을 섰다.
제이나노가 줄을 서 있는 창구 옆으로 벽 일부를 대신해 투명한 창이 선착장 밖의 풍경을 비추어 주고 있었다.
창 밖으론 바쁘게 화물을 내리는 기계와 사람들, 그리고 커다란 한 대의 화물선과 한 대의 여객선이 보였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 없이 밖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을 때였다. 뜬금없이 아까 지나왔던 시장의 풍경이 아른거리는 것이었다.
거리에 늘어놓은 가지각색의 잡다한 물건들과, 먹거리들…
이드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생각에 가만히 있다 슬쩍 옆에 있는 라미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자신의 생각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생각할 수 있는 건 한 가지였다. 바로 자신에게 생각을 흘릴 수 있는 존재. 영혼이 교류하는 존재.

“헤헷.”

라미아는 먹이를 기다리는 고양이와 같은 미소를 뛰우고 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으로 오면서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던 그녀인 만큼 방금 그곳은 좀 더 돌아보고 싶은 생각에 이드에게 자신의 생각을 흘려보냈던 것이다.
라미아는 이드가 자신을 돌아보자 방그레 웃으며 자신이 안고 있던 팔에 얼굴을 살며시 부비며 아양을 떨었다.

“잠시만 구경하고 오면 안돼요? 네에~?”

살짝 낮게 깔리는 라미아의 목소리. 덕분에 라미아의 미모에 눈길을 주던 몇몇이 절망의 신음을 터트렸고, 몇몇은 이드를 향해 강한 질투와 부러움의 눈빛을 빛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미 그런 눈길들을 예전에 극복했기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만 이드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런 일엔 라미아가 쉽게 고집을 꺾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일찌감치 포기한 것이다.
더 시간을 끌다간 라미아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한 옆에서 가만히 이 광경을 부러운 듯 바라보던 오엘은 이드가 승낙하자 자신도 라미아와 덩달아 작은 미소를 지었다. 라미아보단 못했지만, 이곳에 처음 와본 자신도 이곳으로 오면서 이곳저곳을 흥미있게 바라봤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엉뚱한 맘을 먹고 다가오는 치한들을 휠 씬 빨리 발견해서 해결할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 때였다. 이드의 허락으로 기분 좋은 두 아름다운 여성의 기분을 망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음…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않되겠는 걸요.”

“….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한 순간 세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제이나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연극의 한 장면처럼 양손을 펼쳐 보이더니, 커다란 창 밖으로 보이는 두 대의 배 중 백색과 푸른색이 넘실거리는 여객선을 가리켜 보였다.

“저 배가 조금 있으면 출발하거든요. 그리고 우리는 저 배를 타야하구요.”

제이나노는 네 장의 표를 흔들어 보였다. 제이나노 자신은 알고 있을까. 지금 자신의 모습이 마치 구경갈 수 없게 된 두 사람을 놀리는 듯 하다는 것을. 그것은 상대방이 되기 전엔 모르는 것이다. 표를 흔들어 보이던 제이나노는 자신을 향하는 두 여성의 원망 가득한 눈동자에 등뒤로 왈칵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끼며 슬쩍 흔들던 손을 내렸다. 하지만 두 여성의 눈길은 쉬이 거두어 지지 않았다. 간단한 그 행동으로 구경갈 수 없게 됐다는 짜증이 모두 그에게 향해버린 것이다.
이드는 두 사람의 눈길에 마치 중죄라도 지은 양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제이나노의 모습이 꽤나 불쌍해 보였다. 이드는 그를 구해주는 심정으로 이드와 오엘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두 사람의 등을 떠밀었다.

“자자…. 이렇게 된 거 어쩌겠어. 제이나노가 배 시간을 정하는 것도 아니고. 여긴 다음에 카르네르엘을 만나러 올 때 구경하기로 하고 우선 배부터 타자. 알았지?”

“….. 칫, 이드님, 약속하신 거예요.”

“그래, 그래. 다음에 구경할 수 있도록 해 줄게.”

이드는 그제야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들을 떠밀었다. 그제야 원망의 시선에서 벗어나 고개를 드는 제이나노였다. 이드는 그를 지나치며 따라오라는 손짓을 해 보이며 그녀들을 이끌었다.
제이나노는 그런 이드의 뒤를 죄인 마냥 뒤따랐다. 정말 표 한번 사러갔다가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다.
그러나 제이나노의 수난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돈을 아끼자는 생각에서 선택한 비좁은 3급 이인 용 객실이 문제였다. 그런 좁은 객실에서 삼일을 보낸다고 생각하자니 자연 라미아와 오엘로서는 불만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일행들은 지금까지 한도액이 없는 이드와 라미아의 카드로 여관에 들더라도 깨끗하고 좋은 여관을, 방도 돈보다는 편하고 깨끗한 방을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선호했었다. 한마디로 전혀 돈걱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자면 1급 객실이나, 특급 객실을 택하는 것이 당연했다. 헌데간만에 돈을 아낀다는 제이나노의 생각이 엉뚱하게 작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배는 항구를 떠나 있었다. 그것은 이제 쉽게 객실을 바꿀 수 없다는 뜻이었다. 자연 그 원망이 배표를 샀던 제이나노에게 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 리포제투스님, 제가 오늘 좋은 일 좀 해보자고 한 건데…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요.’

제이나노는 오늘 하루의 일진을 탓하며 리포제투스를 찾았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신성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 그는 다시 한번 구조를 바라는 심정으로 이드에게 구조요청을 청했다. 하지만 자신의 시선을 외면하는 이드의 모습에 제이나노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젠 스스로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두 여인의 원망 가득한 중압감 속에서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래!”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제이나노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순간 두 여인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 졌다.

“…. 그래? 뭐가 그래예요?”

“아… 아무 것도… 가 아니라. 내가 선원에게 다른 객실이 있는지 물어 보고 올게요. 있으면 객실을 바꿀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제이나노는 횡 하니 객실을 뛰쳐나가 버렸다. 뭐라 할 새도 없이 그가 나가 버리자 라미아와 오엘은 순식간에 굳었던 표정을 풀고 침대 가에 걸터앉았다. 그런 그녀들의 표정은 상당히 안정되어 전혀 화났었던 사람 같지가 않았다.
자연 그 모습에 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화난 거 아니었어?”

이드가 자신들을 바라보자 라미아와 오엘은 서로를 한번 바라보고는 혀를 낼름 빼물었다.

“별로요. 사실 관광도 못하고 객실도 이래서 조금 짜증이 나길래 제이나노한테 퍼부은 것뿐이 예요. 사실은 별로 화난 것도 아니죠. 하지만…. 이 좁은 객실은 정말 싫어요. 그렇죠? 오엘.”

“휴~ 정말요. 이런 곳에서 삼일이나 있자면… 상당히 답답할 것 같아요. 더구나 창문도 손바닥 만 하잖아요.”

이드는 투덜거리는 불만거리를 털어놓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 슬쩍 제이나노가 뛰쳐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한마디로 제이나노는 오늘 재수 없게 걸려버린 것이다. 지금도 라미아와 오엘의 눈초리를 생각하며 선원을 찾아 통사정하고 있을 제이나노를 생각하니, 쯧쯧쯧 하는 혓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바다 한 가운데서 바라보는 주위의 풍경은 전혀 볼 것 없는 푸른 물뿐이다. 그러나 바다에 나오면 가장 볼 만한 것이 또 이 푸른 바닷물이다.
소인들은 바다에 나와 처음 느끼는 감정은 신기함과 광활함. 그리고 푸르른 바다에 대한 감탄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몇 일지나지 않아 지켜움으로 바뀐다. 전혀 변하는 것 없이 파란색만을 간직하고 있는 바다와 짠내 가득한 바닷바람 그들은 그 지겨움에 금방 지쳐 버린다.
현인들이 바다에 나와 처음 느끼는 것은 바다에 대한 감탄과 안락함과 편암함이다.
그리고 그것은 몇 일이 자나 절대적인 사색의 공간으로 변해 많은 삶의 자문을 구하게 하고 자신과거를 되돌아보는 거울이 되어 준다.
그렇다면 지금 여객선을 스치듯 지나가며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내는 저 은빛 반짝이는 고기떼를 바라보며 군침을 삼키는 이 사제는 소인일까 현인일까?

“하아~ 점심을 그렇게 먹어 놓고, 그렇게 군침이 넘어 가는 거냐? 배 안불러?”

“물론 배는 부르지. 그래도 맛있는 건 맛있는 거 아니겠어? 게다가 저번에 맛 봤던 그 회를 생각하니까 저절로 군침이 도는걸.”

말도 않되는 제이나노의 말에 이드는 뭐라 말도 못하고 시선을 바다로 떨구었다.
결국 객실을 구하지 못하고 축 쳐져 돌아온 제이나노였지만 라미아와 오엘이 잠시 아쉬워 할 뿐 별다른 화를 내지 않자 금방 이렇게 되살아 난 것이다. 거기에 방금 전 식당에서 푸짐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소화도 시킬겸 해서 나온 갑판에서 저 물고기를 때를 발견하고 평소 이상으로 말이 늘어 버린 제이나노였다.
이드는 그렇게 흥분하는 그를 향해 저 물고기들이 횟감으로 쓸게 못된다는 것을 알려줄까 하다 생각을 접었다.

“따뜻한 햇살에 시원한 바닷 바람, 그림 같은 물기고떼……. 후아~ 잠오는 구나…. 응?”

분위기에 취해 풀리는 기분에 늘어지게 하품을 늘어놓던 이드는 갑자기 방금 전까지 안정적이던 오엘의 기운이 갑자기 돌변하는 느낌에 선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앙 갑판의 선두 측 끝 부분. 이드 바로 옆에서 물고기 떼를 바라보던 라미아와 오엘은 어느새 물기기 떼를 따라 그곳가지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헌데 그곳엔 그녀들 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꽤나 덩치 크고 분위기 있어 보이는 남자들 셋이 같이 서있었던 것이다. 물론 점심 식사 직후라 갑판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고 저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 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과 라미아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분위기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몇 번인가
격었던 장면.

“젠장…. 저런 날파리 같은 놈들은 어딜 가도 한 두 녀석은 있다니까.”

“후후후…. 그냥 아름다운 연인을 둔 남자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럼 이제 짠하고 왕자님이 등장하셔 야죠?”

이드의 푸념을 들었는지 어느새 고개를 들어 상황을 파악한 제이나노가 여유있게 이드에게 농담을 건넸다. 보통의 평번한 여성이라면 이럴 사이도 없이 뛰어가 보았겠지만 라미아와 오엘은 절대 평범하지 않기에 이렇게 여유 넘치는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서긴 나서야 하기에 천천히 라미아들에게 다가갈 때였다. 이드의 눈에 자신과 제이나노 보다 좀더 빨리 라미아와 용병들을 향해 다가가는 두 명의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오호… 왕자님 보다 얼치기 기사의 등장이 더 빠른 것 같은데…. 뭐, 저 실력으로 봐선 스토리 전개상 별다른 기여도 못 하겠지만 말이야.”

이드와 제이나노는 걸음을 멈추고 재미난 구경거리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연극은 예상한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용감히 나선 두 기사가 용병들의 무례를 항의하고 그에 코웃음치는 용병들. 느끼한 기사들의 대사와 그에 대응하는 거칠고 욕설이 썩인 용병들의 응수. 그런데 그 중 한 명의 용병이 검을 뽑으면서 스토리가 이상한 길로 흐르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저 용병의 검에 얼치기 기사가 나가 떨어져야 하는데 오히려 용병이나가 떨어져 버린 것이다. 아니, 그 표현은 맞지 않았다. 나가 떨어졌다 기보다는 용병스스로 뒤로 훌쩍 뛰어 바닥에 드러 누워버린 것이었다.

“하. 하. 저거… 정말 연극이잖아.”

보통 사람은 잘 모를 지도 모르지만 꽤나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치 첼 수 있는 말 그대로의 연극. 짜고 하는 싸움이었다. 이드는 그 모습에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고전적인 수법이네요. 아가씨를 찝적대는 악당과 그것을 구하는 기사. 그것이 인연이 되어 사랑은 이루어지고…. 쳇, 바보들. 그런 것도 상대를 봐가며 해야 먹혀들지.”

제이나노는 한참 연극중인 그들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열심히 씹었다. 자신의 생각엔 오엘이나 라미아 모두 그들의 연극에 넘어가 주기엔 너무도 실력이 뛰어났던 것이다. 오엘은 검기를 다룰 줄 아는 경지에 다다른 고수이고 라미아역시 고위 마법사, 거기다 간간이 보이는 날렵한 몸놀림은 무술도 제법 한 듯하니. 두 사람에게 저 어설픈 연극에 넘어가라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배우들은 관객의 생각은 상관치 않고 자신들의 연기에 충실하게 정말 열연을 하고 있었다. 특히 그 중 얼치기 기사역의 두 청년은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으며 열연 중이었다. 용병들 역시 과감한 스턴트를 멋지게 해보였다. 모두 한번씩 갑판 위를 굴렀다. 그러자 그 장면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던 갑판 위의 사람들이 와 하는 환호를 질렀다. 그 소리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용병들이 일어나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하더니, 뒤돌아 도망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헌데 공교롭게도 그들이 도망치는 방향이 바로 이드와 제이나노가 서서 구경하던 곳이었다.

이드는 그들의 모습에 제이나노를 뒤로 물러나게 했다. 저쪽에 보이는 얼치기 기사들은 오엘이 검집에 손을 가져가는 것으로 보아 그녀들이 직접 처리 할 모양이었다. 자동적으로 여기 있는 이 용병들은 자신의 몫이 되는 것이다.

“젠장할 놈들…. 저 놈들 하는 짓이 꽤나 고단수야…. 도대체 저 짓을 얼마나 해본 거야?”

“크크크… 다~ 타고난 재주 아니겠냐. 근데 저 것들 정말 가슴 설레게 예쁘던데…. 넘겨주지 말걸 그랬나?”

“아서라. 저 놈들 뒤에 있는 놈들도 생각해야지. 저것들이 뭘 믿고 저렇게 까불어 대는데? 우리는 그저 받은 돈으로 기분이나… 응? 이건 또 뭐야?”

자기네끼리 낄낄거리던 용병들은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예쁘장한 이드의 모습에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더구나 그 예쁘장한 얼굴이 자신들을 깔보는 듯 하자 더욱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드는 자신의 모습에 자동적으로 얼굴을 험악하게 찌푸리는 그들의 모습에 차라리 연기를 했으면 꽤나 잘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떠 올렸다.

“아까 연기는 훌륭했어. 그 실력으로 연기를 하지…. 쯧쯧”

“뭐야… 그런 허접해 보이는 몸으로 그래도 한가닥하는 놈이라 이거냐?”

그들은 태연히 서있던 자세를 바로 했다. 그들 스스로가 꽤나 실력이 있다는 용병인 만큼 자신들의 연기를 알아보려면 그래도 어느 정도 실력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몇 몇 경우엔 눈썰미가 좋아 알아 볼 수도 있지만, 그런 상대라면 이렇게 나서지 않기 때문이었다.

“반응은 좋은데… 이미 늦었어. 이런 일 일수록 상대를 잘 봐가며 해야지. 그렇지 못하니까 저 꼴 나는 거라구.”

“끄아아악!!!”

마치 미리 맞춰 놓은 듯 이드의 말이 끝나자 마자 처절한 비명성이 갑판 위에 울려 퍼졌다. 그 비명성에 세 용병은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는 듯 화장실에서 뒤를 닦지 못한 찝찝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엔 소호검을 검집에 맞아 한쪽에 나가 떨어져 깨진 턱을 잡고 뒹구는 얼치기 기사 1이 있었다. 그 뒤를 이어 나머지 얼치기 기사 2역시 십여 개에 달하는 주먹만한 파이어 볼에 둘러싸여 꼼짝도 하지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벌벌 떨고 있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얼치기 기사들의 연기에 빠져 있던 사람들의 웅성임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 중 눈치 빠른 몇 몇 용병들은 대충 상황이 이해가 가는지 기대하는 표정으로 이번에 용병들과 이드들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상황을 확인한 세 명의 용병 연기자들은 다시 이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방금 소년이 상대를 봐가며 연기를 하라는 말이 이해가 됐다. 세 명은 이드를 바라보며 표정을 굳혔다. 방금 두 여성중 은발의 아름다운 소녀의 마법을 보고 나니 눈앞에 있는 이 예쁘장한 소년도 도저히 만만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다. 자신들이 먼저 시작한 이상 쉽게 물러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은 슬며시 자신들의 무기에 손을 얹었다가 곧 들려오는 이드의 목소리에 순간 멈칫 손을 멈추었다.

“흐음…. 무기를 꺼내면 좀 더 심하게 당할텐데. 그냥 간단히 몇 대 맞고 해결하는 게 어때?”

그들은 이드의 말에 서로를 돌아 보다 결정을 내린 듯 각자의 병기를 뽑아 들었다.

“…. 말은 고맙지만 우리들은 용병이다.”

이드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들이 확실히 생각이 있고 뛰어난 용병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이들이 여기서 고이 물러나면 주위에 있는 다른 용병들에 의해 좋지 않은 소문이 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실력 없어 보이는 기집애 같은 꼬맹이-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는 이드였다.-에게 겁먹고 도망쳤다고.

그렇게 되면 앞으로 그들에겐 일거리가 없을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니 자신들이 이기든 깨지든 우선은 싸우고 봐야 하는 것이다.

같은 상황에서 무식하게 덤벼들기만 하는 용병들과는 확실히 질이 다른 용병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고이 보내 줄 수는 없다. 이드는 가만히 두 손을 늘어트리며 몸을 편히 했다. 전혀 싸울 사람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런 모습이 더 위협적이고 무서운 것이란 걸 용병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럼 빨리 끝내도록 하자고…. 이건 분뢰보(分雷步)라는 거지.”

신기루일까. 말을 하고 가만히 서있던 이드의 신형이 마치 환상인양 흔들리더니 허공 중에 흩어져 버렸다. 잔상까지 남기는 분뢰보를 이용한 절정의 이형환위(以形換位)의 수법이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용병들 등 뒤로부터 들려오는 이드의 목소리와 허공을 가르는 기분 나쁜 소음들.

“철황십사격(鐵荒十四擊) 이연격(二連擊)!!”

쇄애애액…. 슈슈슉…..

순식간이었다. 총 스물 여덟 번의 주먹질이 뒤도 돌아보지 못한 용병들의 전신을 질타했다. 거기다 이드의 주먹이 향한 곳은 맞더라도 생명이나 용병생활엔 지장이 없지만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곳. 세 명의 용병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무기을 떨어트린 채 갑판 위를 뒹굴었다. 너무나 깔끔하고 빠른 동작에 빙글거리며 구경하던 몇 몇 용병들은 헛 바람을 들이키며 섬뜩함마저 느꼈다. 만약 자신들이라면 어땠을까 만약 저 가녀린 손에 단검이라도 하나 들려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저들이 배에 있는 동안은 수도원의 수도사처럼 조용히 지낼 것을 다짐하는 그들이었으니. 이드와 라미아들은 손하나 대지 않고 미리 생길 자잘한 소동거리를 미연에 방지한 것과 같이 되어 버렸다. 그 사이 얼치기 기사 2또한 사우나실에 있는 것처럼 땀을 뻘뻘 흘리다 주먹만한 화이어 볼 두대를 맞고 새까맣게 변해서는 그자리에 뻗어 버렸다.

“칫, 별 이상한 녀석들 때문에 좋은 기분 다 망쳤어요. 오늘은 정말 뭐가 안되나 봐.”

상당히 화가 난 듯 양 볼을 가득 부풀리며 라미아가 이드에게 다가왔다.

이드는 그런 라미아의 모습이 귀여워 그녀의 머리를 쓱쓱 쓸어 내리며 선실로 발길을 돌렸다. 주위의 저 시선들 때문에 갑판에 계속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자… 내려가자. 이런 날은 그저 방에서 노는게 제일 좋아. 오늘은 네가 하자는 대로 놀아줄게.”

“후움… 정말이죠?”

“그래, 그래… 어서어서 갑시다~~”

이드는 장난스레 말하며 라미아의 어깨를 잡고서 밀고 나갔다. 그 뒤를 따라 오엘도 시큰둥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평소 그 느긋하고 수다스런 성격의 제이나노는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 여유 있는 시선으로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아까 배를 지나갔던 물고기 떼가 모여 있는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아~ 회 먹고 싶다.”

그 날 저녁 배는 중간 기착지인 그리프트 항에 정박했다. 런던으로 향하며 유일하게 들르는 항구였다. 제이나노의 말에 따르면 일행들은 런던에서 다시 프랑스로 가는 배편을 구해야 된다고 한다. 배가 그리프트 항에 정박하고 있었던 시간은 두 시간으로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에 비해 배를 내리고 올라탄 사람의 수는 엄청났다. 새로 탄 사람들은 자신들의 객실을 찾아 또 한바탕 떠들썩해졌다. 덕분에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객실로 돌아가기 위해 이드들은 식당으로 향할 때의 세배에 달하는 시간을 걸렸다.

삼일간의 배 여행은 상당히 괜찮았다. 하지만 그 말이 적용되지 못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드였다. 배 여행이다 보니 지루한 것은 당연한 것. 덕분에 이드는 라미아의 장난감 신세가 돼야했다. 거기에 더해 그리프트 항에서 탑승한 용병들이 첫 날 낮에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 이드를 찾아온 것이다. 거의 대부분은 직접 목격한 용병들의 말대로 조용히 쥐 죽은 듯 지냈지만, 한 두 명의 호승심 강한 용병들은 이드에게 비무를 가장한 싸움을 걸어왔던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시기를 잘 골라야 한다고, 용병들이 이드를 찾아 왔을 때가 전날 그가 라미아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려 피곤해 있을 때였다. 그런 상태의 이드에게 싸움을 걸었으니. 이드는 그 상대를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사용해 버렸다. 덕분에 그 뒤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용병들은 금새 줄행랑을 놓아 버렸지만 말이다.

삼 일째 되는 날 런던에 도착한 일행들은 항구 앞 선착장에서 곧바로 프랑스로 가는 배편을 구할 수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하거스들이 있는 가디언 본부에라도 들렸다 가고 싶었지만 가디언 본부가 항구와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시간이 되지 않아 포기하고 배에 올랐다. 그러나 배에 오른 순간 들려오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오엘을 시작으로 일행들은 급히 배에서 내려야 했다.

이드들이 들은 이야기는 다름 아니라 제로에 대한 것이다. 보통 때라면 정부측이 지던가 이기던가 해서 그 지역이 제로에게 넘어갔다 정도가 다인 그렇게 무겁지 않은 주제여야 하는데 이번엔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다를 것이 리버플에서 있었던 전투로 그 곳을 방어하던 가디언과 용병들의 희생이 엄청났다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제로 측에서 사용한 대형 마법에 의해 도시의 일부가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다른 때의 소식과 달리 너무나 많은 인명의 피해가 있었다는 소리였다.

선창장을 나선 일행들은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가디언 본부로 향했다. 가는 도중 디처에 대한 걱정을 쉽게 접지 못하고 있는 오엘은 라미아와 이드가 진정시켜 주었다. 가디언 본부까지는 꽤나 먼 거리였지만 도로가 막히지 않는 관계로 일행들은 금세 본부 앞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이었다. 그러나 리버플의 사건 때문인지 밖에서 보는 가디언 본부의 분위기는 그렇게 좋아 보이지가 않았다.

1층 로비에는 민간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각자 뭔가를 준비하고 있거나 얼굴 가득 걱정이 묻어 나는 것이 리버플의 사건으로 사고를 당한 사람들의 가족들 같아 보였다.

그 모습이 오엘의 걱정을 부채질했는지 오엘이 이드의 행동을 재촉했다. 이드는 그녀의 말에 따라 곧바로 본부 위로 올라갈까 하다가 저기 사람들로 붐비는 프론트로 다가갔다. 누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괜히 올라가서 우왕좌왕 하는 것보다 이 방법이 낳을 것 같아서 였다.

프론트에는 총 다섯 명의 인원이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이드들이 이 곳 본부에 머물 때 조금 얼굴을 익힌 사람이었다. 그 역시 일행들을 알아보았는지 아는 채를 했고, 덕분에 일행들은 쉽게 빈이 있는 곳을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이드들이 머물 때 가 본 곳이라 일행들은 금방 빈을 찾아 낼 수 있었다. 헌데 찾아낸 그의 모습이 상당히 가관이었다. 두툼한 붕대로 한쪽 팔을 둘둘 감고 있었고 얼굴 여기저기도 반창고 투성이었다. 그가 가디언이 아니었다면 동네골목에서 깡패들과 드잡이 질을 한 것이라 생각하기 딱 알맞은 모습이었다.

“빈씨…. 빈씨도 당한 겁니까?”

“하하하… 소식을 듣고 온 건가? 뭐… 보시다 시피 내 꼴이 말이 아니지. 이번엔 저번과 달라도 너무 달랐어. 아, 이럴게 아니라 우선들 앉지.”

빈은 붕대를 감고 있지 않은 팔로 일행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하지만 일행들은 쉽게 그 자리에 앉지 못했다. 자리에 앉는 것 보다 오엘이 알고 싶어하는 소식이 먼저이기 때문이었다.

“저기… 그것보다 저희 팀원들은….”

“아, 이런. 그게 제일 궁금할 텐데… 생각을 못했군. 다행히 이번 전투에 디처 팀원 중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네.”

오엘은 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려다 그의 말이 조금 이상한 것을 알았다.

“목숨을 잃은 사람이 없다니요? 그럼…..”

“음, 다친 사람은 있네. 하거스는 다리가 부러졌고, 비토는 복부에 검상을 입었네. 그래도 두 사람 모두 정신도 말짱하고 이젠 걸어도 다니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거야.”

“하아~ 다행이네요.”

오엘은 팀원들의 안전을 확인하고서야 자리에 앉았다. 일행들도 그제야 그녀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갑자기 어떻게 된 거죠? 이곳을 나서서도 제로에 대한 소식은 몇 가지 듣긴 했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이 죽은 경우는 없다고 아는데요. 아, 고마워요.”

이드는 비서로 보이는 아가씨가 건네주는 차를 받아들며 빈을 바라보았다.

“후루룩…. 하아… 솔직히 지금까지 사상자가 없었던 건 아니네. 록슨에 직접 격은 자네도 알다시피 제로와 싸우면서 사상자는 항상 있었어. 다만, 그 수가 많지 않고 일반인이 다치는 경우가 없어서 크게 보도되지 않은 것이지. 하지만 이번은 달라. 아.주. 다르지. 자네, 저번에 네게 물었었지? 중국 던젼에서의 일과 제로의 관계.”

그의 말에 이드와 라미아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마저 내려놓고 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모습이 얼마나 진지했는지 중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도 못하는 오엘과 제이나노도 덩달아 찻잔을 놓고 말았다.

“그… 썩을 놈의 마족이…. 이번에 같이 왔단 말입니까?”

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던젼 안에서 보기 좋게 놓여버린 보르파를 생각했다. 빈이 중국에서의 일과 제로의 일을 연관시키기 위해서는 그 놈의 마족 놈이 꼭 등장해야 되기 때문이다. 과연 이드의 생각이 맞았는지 빈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저번에 다시 온다던 그 세 놈과 함께 참혈마귀라는 강시 스무 구를 이끌고 왔더군.”

“….. 결국 가져간 모양이네요. 근데, 제로가 마족과 손을 잡고 있다는 말입니까? 명색이 사람들을 위해 국가를 없애겠다는 단체가?”

제로란 단체에게 속은 느낌이 들어 이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비록 마족이 무조건 사악한 존재는 아닐 지라도 피를 좋아하고 욕망에 충실한 종족인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존재들과 손을 잡은 만큼 좋게만 봐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빈이 이드의 말에 고개를 저어 부정해주었던 것이다.

“그건 아니네… 조금 의아한 일이지만, 그 마족의 이마에 황금빛 종속의 인장이 찍혀 있었네. 스무 구에 이르는 강시들에게도 마찬가지고.”

이드는 그 말에 다시 찻잔을 들었다.

“그럼 그 마족이 제로에 종속됐다는 뜻 인데…. 그럼 이번에 민간인이 죽은 것도 그 녀석 짓인가요?”

라미아가 이드를 대신해 물었다.

“후~ 그렇지. 그 놈. 던젼에서 그렇게 도망칠 때와는 확실히 다르더군. 마족은 마족인지… 강시들과 몬스터들이 공격하는 틈을 타 강력한 흑마법으로 공격해 온 거지. 그것도 두 번이나. 처음엔 우리들이 피해서 우리들 뒤쪽의 도시가 부셔졌고, 두 번째 공격엔 우리들이 당했지. 하지만 그런 무차별적인 공격인 제로의 생각은 아닌지 도시가 부서지자 저번에 왔었던 두 마법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마족과 강시들을 돌려보내고 우리들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철수해 버리더군.”

빈은 이미 식어버려 미지근해진 차를 한번이 들이 마셔버리고 뒷말을 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미안하다는 사과로 끝날 일은 아니지. 그들이 사과한다고 무고한 도시 사람들이 살아나는 건 아니니까.”

빈은 민간인들이 일에 휘말린 것이 분한 듯 사납게 눈을 빛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보통 때 보이는 그 성격 좋아 보이던 모습과는 또 달랐다. 그의 갑작스런 분위기 변화에 방안은 살벌한 침묵이 흘렀다.

빈과의 이야기를 마친 일행들은 그의 안내로 디처의 팀원들이 입원해 있는 병실을 찾았다. 가디언 본부가 워낙 크다 보니 그 중 몇 층을 병원으로 개조해서 쓰고 있는 것이었다. 과연 빈의 말대로 하거스와 비토는 전혀 다친 사람답지 않게 쌩생해 보여 오히려 피부에 윤기가 흐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빈은 그 모습이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힐링포션에 신성력까지 동원해 치료했으니…. 그렇게 했다면 확실한 반응이긴 했다.

특히 하거스는 그 넘치는 힘이 입으로 몰렸는지 괜히 오엘을 놀리다 두드려 맞는 모습까지 보이고 말았다. 덕분에 분위기는 빈과의 대화 때와 달리 많이 풀려 부드러워져 있었다. 이드는 그 기분으로 일행들과 함께 병실을 나서다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빈을 바라보았다.

“아, 이왕 온거 수련실에 잠시 들러서 부룩을 보고 싶은데….. 왜… 그러시죠?”

이드는 자신의 말이 계속 될수록 얼굴이 굳어 가는 빈의 모습에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을 지울 수 없었다. 덕분에 애써 뛰어놓은 분위기는 순식간에 다시 가라앉아 버렸다.

라미아는 이드의 그런 불길한 느낌을 느꼈는지 가만히 다가와 이드의 어깨를 쓸어 주었다. 그때 빈의 입술이 묵직하게 열렸다.

“뭐라 말해야 할지. 부룩은 이번 전투에서… 전사했네. 흑마법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쓸려버렸지.”

“으음…. 어쩌다….”

부룩의 전사했다는 사실에 이드는 고개를 숙이며 깊은 침음성을 발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꽤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기에 여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룩의 죽음에 분노에 떨 정도도 아니었다. 이미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이드였기 때문이었다. 또 앞서 중원과 크레센에서 많은 죽음을 봐왔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신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 지금엔 당연히 다시 환생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던 때문이기도 했다. 다만 잠시나마 검을 나누었던 오엘이 그의 죽음에 분해 할 뿐이었다.

좌우간 이번일로 인해 각국의 제로에 대한 경계와 전투가 한층 더 치밀해지고 치열해 질 것이 확실했다. 그날 밤 일행들은 저번처럼 빈이 마련해준 방에 머물렀다. 부룩에 대한 이야기까지 듣고 나자 이미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지금 이런 상황에 발길을 돌리자니 그 또한 마음에 걸려 오엘과 제이나노의 의견에 따라 가디언 본부에 몇 일 머무르기로 결정을 내렸다.

샤라라라락…. 샤라락…..

이드가 손에 든 수건으로 촉촉이 물기를 머금은 라미아의 머리카락을 털어 내자 그녀의 은빛 머리가 하나가득 반짝이며 허공에 흩날렸다. 지금 이드와 라미아가 있는 곳은 빈이 마련해준 이드의 방이었다. 라미아는 그런 이드의 방에 들어와 씻고서 이드에게 머리를 털어 달라며 수건을 건넨 것이었다. 이미 식사도 끝마친 밤 시간이기에 제이나노는 자신의 방에서 오엘은 오랜만에 팀의 동료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쩝, 어째 상당히 찝찝해. 카르네르엘에게 들었던 그 괴상한 아티팩트를 지닌 소녀도 그렇고, 계속 제로 놈들하고 엮이는 게…. 앞으로 꽤나 골치 아파 질 것 같지?”

라미아는 이드의 말에 가만히 눈을 감고 이드의 손길에 머리를 맞기고 있다가 편안한 목소리로 그의 말에 답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은 꽤나 나른한 것이 자신의 머리를 손질하는 이드의 손길이 상당히 기분 좋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렇지만 저들도 나쁜 뜻으로 이런 일을 하는 건 아니니까 크게 부딪히기야 하겠어요? 음… 이드님, 머리끝에 묻은 물기도 닦아 주셔야 되요.”

“그래, 알았다. 알았어. 도대체 누가 누구의 주인인지 모르겠다니까.”

“그야 물론 이드님이 주인님이시죠. 호홍~ 참, 그 보다 여기엔 얼마간 머무르실 거예요? 아무래도 이곳에 머무르는 이상 큰일이 생기면 모른 채 하기 어렵잖아요. 정~ 귀찮게 하면 한번에 뒤집어 버리는 수도 있지만…”

“글쎄…. 이곳에 머무르는 건 제이나노와 오엘의 문제니까 말이야….”

이드는 물기를 다 닦아낸 수건을 옆으로 놓고 라미아의 머리카락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 내리며 테이블 위의 일라이져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조만 간에 저 녀석을 다시 휘둘러야 할 상황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라미아는 색색거리는 규칙적인 숨을 내쉬며 이드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왔다. 편안한 그 느낌에 못 이겨 졸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