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09화
세르네오에게 제로의 소식을 부탁한 지 벌써 일주일 하고도 사흘이 지나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소식도 전해주지 않았다.
아니, 제로의 움직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듯했다.
파리의 전투 이전이었다면 일주일이 멀다 하고 세계 각 곳에서 예고장을 보내고 전투를 벌일 그들이 이번 파리에서의 전투를 끝으로 쥐 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세르네오에게서 전해져 올 소식이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대신 이드들은 그녀에게서 다른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각국 정부에서 행한 비밀스런 일들에 대한 가디언들의 대대적인 조사가 그것이었다.
존 폴켄의 말에 의해 시작된 이번 일은 아직 언론을 통해 크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 일을 알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디언이 서로의 영역과 역할을 침해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 힘을 믿고 정부의 일에까지 개입하려 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표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가디언들에게 직접적으로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각국의 지도자들조차도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의 상황에서 가디언들을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사람, 아니 단체나 국가가 없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가디언들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 가디언의 눈치를 보며 조사에 협조하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더구나 이번 일이 직접적으로는 제로와 연관되어 있으며 간접적으로는 가디언들과 전 세계 모든 능력자들과 연관된 일이란 것을 아는 가디언들은 이번 일에 더욱 철저해지고 있다고 했다.
그 예로 독심술과 최면술에 일가견이 있는 가디언들은 정부 관리 한 명, 한 명을 상대로 질문을 던지고, 엉뚱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를 붙이고 있다는 소식도 있을 정도이니…
가디언들이 이번 일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너무 심심해져 버렸어요.”
라미아는 이드가 자신의 말을 듣던지 말던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작은 한숨을 내쉬며 양손으로 턱을 괴었다.
이드는 라미아의 투정 아닌 투정에 보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로네오의 도움으로 하나로 따아내린 은발과 푸른 원피스는 여름의 끝에 이르러 마지막 힘을 다하려는 푸르름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저 불만 가득 부풀어 오른 사랑스런 사과 빛 뺨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아니, 생동감 있는 그 모습으로 더욱 더 어울리는 것일지도.
지금 두 사람이 나와 있는 곳은 파리에 와서 가디언 본부 이외에 처음 들른 바로 그 공원이었다.
몇 일 동안 기다리던 소식도 없고, 정부에 대한 조사로 인해 텅 빈 가디언 본부에 있기도 그랬던 두 사람은 이곳 공원에 나와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다.
덕분에 지금의 자리는 완전히 두 사람의 지정석처럼 변해버렸다.
워낙에 눈에 띄는 두 사람이 몇 일 동안 나와 앉은 덕분에 일찍 공원에 나온 사람들이 이드와 라미아가 앉아 있는 지금의 자리엔 앉지 않는 때문이었다.
또 이드와 라미아의 얼굴에 반해 몇 일 전부터 알게 모르게 생겨난 몇몇 얼굴 없는 팬들이 두 사람이 공원에 오기 전까지 은밀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벌써 알게 모르게 두 사람의 사진이 이 공원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물론 정작 본인들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말이다.
좌우간 그렇게 나온 공원이긴 하지만 맑은 기운과 공기.
그리고 초록으로 빛나는 생명의 기운 이외에 별다른 흥미 있는 볼거리가 없는 이곳에 몇 일 동안 계속 나오자니 얼마나 심심했겠는가.
이드야 오랜만에 찾아온 넉넉한 여유를 즐긴다지만, 라미아는 그럴 만한 꺼리가 없으니 더욱 심심할 뿐인 것이다.
물론 그 오랜 주인의 기다림을 생각하자면 지금과 같은 지루함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라미아의 기다림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편안하고 깊은 잠과 같은 것이니 비교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더구나 기다림 이후의 생활이 얼마나 숨 가쁘고 흥미진진했었는가 말이다.
이드라는 새로운 주인과 혼돈의 파편이란 존재들과의 전투.
이어진 차원이동과 변신에 처음 겪어보는 새로운 생활과 제로라는 단체의 등장까지.
한마디로 엄청나게 바쁘게 지내왔던 것이다.
‘…… 그러다가 이렇게 할 일이 없어졌으니 더 몸이 근질거리고 심심하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이드는 라미아의 지금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있음으로 해서 조금은 덜하겠지만 꽤나 지루할 것이다.
자신 역시 처음 강호를 주유한 후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 버린 저런 지루함을 느껴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는 스스로 여유를 즐기는 방법을 찾는 것이 좋았다.
물론 옆에서 조금 거들어 주면 더 좋고.
“정~ 그렇게 지루하면…. 이곳 파리 관광이라도 할까?”
라미아는 이드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불퉁하게 부은 양 볼은 여전했다.
이드의 의견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생각 없네요. 그럴 것 같았으면 진작에 제이나노를 따라 돌아다녔죠.”
“뭐…. 그거야 그렇지.”
톡 쏘는 그녀의 말에 이드는 펴들고 있던 책을 탁 소리가 나게 덮었다.
라미아의 말대로 시내 관광을 할 생각이었다면 파리에서의 급한 일이 끝나고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제이나노와 함께 파리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런던과 비슷한 볼거리란 말에 이드와 라미아는 함께 가자는 제이나노의 제의를 거절했었다.
런던에서의 관광은 처음 보는 몇 가지를 제외하면 별로 볼거리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레센의 볼거리에 눈이 너무 높아졌다고 할까.
하지만 그것 이외엔 마땅히 추천해 줄 만한 꺼리가 없는 이드였다.
굳이 들자면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독서가 있지만, 그것도 신통치 않았다.
그래이드론과 여러 정보를 주입받은 그녀에게 뭘 읽으라고 하기도 그랬던 것이다.
실제, 자신도 그래이드론을 통해 건네받은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을 다 읽거나 뒤적여 보지를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쩔 수 없이 그녀 스스로 뭘 찾아내기 전에는 저 투덜거림을 그냥 들어주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며 덮어두었던 책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려 할 때였다.
“저 애…..”
라미아로부터 거의 웅얼거림과 다름없는 투덜거림이 멎고 대신 무언가를 가리키는 말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이드는 그녀의 말에 반사적으로 라미아의 시선을 쫓았다.
그 시선의 종착지에는 한 명의 작은 꼬마아이가 서 있었다.
이드의 허리정도에도 미치지 못 할 것 같은 키를 가진 네, 다섯 살 정도의 꼬마아이는 뭔가를 찾는 듯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붉은 곱슬머리와 뽀샤시한 얼굴에 입에 물고 있는 손가락은 일부러 연출이라도 한 것처럼 너무도 귀여워 보였다.
특히나 붉은 눈동자 가득 담겨 곧이라도 쏟아져 버릴 듯 그렁그렁한 눈물은 여성의 보호본능을 극도로 자극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런 보호본능에 자극 받은 여성중 한 명인 라미아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걱정스런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무슨 일이길래….”
“보이는 대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에 두리번거리는 얼굴이면, 길을 잃어버린 거 겠지.”
이드는 자신이 내린 상황판단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상황이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중 가장 흔한 경우가 길을 잃어버리거나 엄마를 잃어 버렸을 때다.
그리고 이런 경우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가 똑같다.
“그럼 찾아 줘야죠.”
이드는 그 말과 함께 아이를 향해 다가가는 라미아를 보며 펴들었던 책을 다시 덮어버렸다.
“그래, 그래. 그래야지. 그나저나 다행이군. 잠시나마 투덜거림이 멎었으니…”
이드는 꼬마가 제때 길을 잘 잃어 버렸다는 엉뚱한 생각을 언뜻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이 꼬마에게 다가간 라미아는 아이의 곁에 쪼그려 앉아서는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천천히 그 둘에게 다가가고 있는 이드의 귓가로 자연히 흘러 들어왔다.
“괜찮아. 울리마…. 길을 잃어버린 거니?”
꼬마를 진정시키기 위해서인지 말을 거는 라미아의 얼굴엔 부드러운 미소가 어려있었다.
꼬마는 그런 라미아를 잠시 멀뚱히 바라보더니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그렁그렁하던 눈물이 끝내 땅으로 떨어져 내리고 말았다.
그 모습에 라미아는 급히 손수건을 꺼내들며 꼬마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괜찮아. 울지마~ 언니가 길을 찾아 줄께 알았지?”
라미아는 꼬마를 쓸어 안아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에 라미아 뒤로 다가와 있던 이드는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 저으며 귀를 틀어막았다.
라미아에게 안긴 꼬마의 눈에서 눈물이 뚜루룩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본 것이었다.
“흑…. 흐윽… 흐아아아아아앙!!!!!!”
원래 아이란 잘 참고 있다가도 누가 감싸주면 그대로 울어버리고 만다.
대개의 어린아이가 그렇다.
누군가에게 보호받는 다는 느낌에 참고 참았던 감정을 그대로 상대방에게 터트려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의 행동패턴을 알리 없는 라미아로서는 여간 당혹스러울 수가 없었다.
달래려는 자신의 말에 오히려 울어버리다니.
라미아는 당혹스런 마음에 꼬마를 향해 울지마를 연발하며 이드에게 구원을 청했다.
‘으앙! 이드님 어떡해요.’
‘어쩌긴 뭘 어째? 아이가 울고 있으니까 당연히 달래야지.’
‘어떡해요? 어떻게 달래는 건데요?’
‘어떻게는 뭘 어떡해야? 넌 아이 달래는 것 본적도 없어?’
이드는 머릿속을 시끄럽게 울려대는 그녀의 목소리에 한 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런 것도 모르냐는 식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에 돌아오는 라미아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네,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 이드님께 물어 보는 거잖아요.’
너무나 간단하고 단호한 그녀의 말에 이드는 당혹감마져 들었다.
하지만 곧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확실히 자신이 라미아를 만난 후 저 꼬마와 같은 나이의 어린아이나 아기를 멀리서 본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직접 접해보거나 달래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라미아가 뛰어나다 해도 모르는 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겠는가.
이드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들고 있던 책을 땅에 내려놓고 라미아의 품에서 꼬마를 안아들었다.
그 사이 꼬마의 울음소리가 더 높아지긴 했지만 이드의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꼬마가 느낀 이드의 품이 라미아와 같은 분위기와 향기를 전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드는 자신의 품에 안긴 꼬마의 등을 토닥이며 부드럽게 얼르기 시작했다.
상당히 어설프고 엉성한 모습이었다.
몇 번 보기만 했을 뿐 실제로 아이를 달래보긴 처음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어설푼 모습도 꼬마에겐 충분한 위로가 됐는지 꼬마의 울음소리는 차츰 줄어들었다.
“흐응, 잘 달래 시네요.”
라미아는 자기도 모르게 슬쩍 비꼬는 투로 말하며 이드의 책을 들고 일어섰다. 먼저 이드를 부르긴 했지만 자신이 달래지 못 한 꼬마를 달래는 모습을 보자 묘하게 기분이 뒤틀렸다. 특히나 지금 이드의 품에서 울음을 그친 채 훌쩍이는 꼬마의 귀여운 모습을 보면, 자신의 역활을 빼앗긴 것 같아 더욱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라미아의 기분은 어렴풋이 이드에게로 전해져 왔다. 서로의 감정을 확실하게 차단하고 있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다행스런 일이기도 했다. 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안고 있던 꼬마를 라미아에게 건네주었다. 지금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지 않으면 잠자리에서 꽤나 고달플 것 같아서였다. 라미아의 고집으로 파리에 오고서 부터 같은 침대를 사용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가디언 본부의 방은 남아도는데도 말이다.
“자, 이제 울음을 그쳤으니까. 네가 알아서 해봐. 그 책은 이리 주고.”
“…. 왜요? 그냥 이드님이 안고 계시지.”
이드는 자신의 말에 괜히 퉁명스레 대답하는 라미아에게 꼬마를 억지로 안겨주었다.
“왜는 왜야? 네가 먼저 아이를 봤으니까 당연한 일이지.”
“칫, 그렇다면… 뭐…..”
라미아는 마지못한 표정으로 꼬마를 냉큼 받아 들었다. 마지못한 표정으로 말이다. 꼬마를 건네준 이드는 그녀의 손에 들린 책을 건네 받으며 한 고비 넘겼다는 심정으로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리고 저 몸과 따로노는 얼굴 표정에 정말 가증스럽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곧 지워버리고 말았다. 혹시라도 이드의 이런 생각이 라미아에게 흘러 들어갈 경우 도저히 상황을 수습할 수 없게 될 것 같아서 였다.
꼬마는 이 품에서 저 품으로 다시 이 품으로 옮겨지는 데도 별다른 저항을 보이지 않았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모르는 곳에서 만난 두 사람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라미아는 한참을 운 덕분에 지저분해 저린 꼬마의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입을 열었다.
“자자… 이젠 울지마. 이 언니가 길을 찾아 줄 테니까. 알았지?”
끄덕끄덕.
“아우, 귀여워라. 좋아. 이 언니 이름은 라미아야. 그냥 언니라고만 부르면 되. 그리고 저기 저 오빠는 이드. 네 이름은 뭐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어오는 라미아의 물음에 눈물에 젖어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두 사람을 번가라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라미아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름을 말해주는게 맘에 걸리는 가 보다 생각하고 꼬마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곧이어 꼬마에게서 흘러나온 말은 그런 라미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디엔, 디엔 판 세니안. 그리고…. 그리고 나는 언니라고 못 해. 엄마가 여자한테는 누나라고 하고…. 또 남자한테는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었어.”
라미아는 그 말에 눈을 끄게 뜨더니 꼬마, 디엔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뽀샤시 하니 새하얀 얼굴과 그런 얼굴선을 타고 내려오는 붉은곱슬 머리에 루비같은 눈동자와 귀여운 얼굴은 언뜻 보기에 귀여운 여자아이처럼 보여 남자애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라미아는 곧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말이 맞다고 정정해 주었다. 그리고 그런 라미아의 머릿속엔 이 디엔이란 꼬마보다 더욱 여성스런 모습을 하고 있었던 첫 만남 때의 이드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호호호… 얘도 커서 이드님 처럼 예뻐지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흐음… 녀석. 그런데 어떻게 길을 읽어 버린 거야? 집이 이 근처니?”
어느새 디엔에게 다가온 이드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원래는 라미아가 알아서 하도록 놓아둘 생각이었지만, 라미아에게서 여성으로 오해받는 디엔의 모습을 보는 순간 동병상련의 감정이 떠올랐던 것이다. 쯧 불쌍한 녀석… 크면 남자다워 질거다.
디엔은 이드의 손길이 싫지 않은지 피하지 않고서 이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야. 여기엔 집 없어. 다른데 있어. 엄마하고 한~ 참 동안 차 타고 왔거든.”
길뿐만 아니라 엄마까지 잃어 버렸다? 거기다 파리에 살고 있는게 아니라면…. 더 찾기 어려울 텐데.
“그럼 넌 어떡하다가 길을 잃어버린 거니?”
디엔은 라미아의 말에 다시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이 말 할 때 마다 고개를 돌려대는 모습이 꽤나 귀여워 보였다.
디엔이란 꼬마는 이번 라미아의 물음엔 답하기 쉽지 않은지 잠시 웅얼거렸다. 누가 뭐래도 길을 잃어버린 이유가 그에게 있을테니 그 잘못을 인정하고 말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드와 라미아가 계속 자신을 보고 있자 디엔은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열었다.
“… 멍멍이… 때문이야.”
“응? 멍멍이?”
“응! 엄마가 어떤 누나하고 이야기하고 있어서 심심했거든. 그런데 밖에서 멍멍이가 보여서 같이 놀려고 따라 왔었는데…. 여기서 잃어 버렸어.”
이드는 그 말에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이다운 말이었다.
“훗, 그 멍멍이…. 아직 이 공원안에 있으면 이 형이 잡아 줄까?”
“응, 응! 정말 찾아 줄 꺼야?”
이드의 말에 디엔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이의 머릿속엔 자신이 개를 쫓아오다 길을 잃어 버렸다는 조금 전의 상황은 이미 깨끗이 지워지고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아마 그 사실보다는 개를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이 더 큰 기쁨으로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의 대화는 한 여성에 의해 깨어지고 말았다. 지금의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 놓는 두 남자와는 달리 지금의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라미아에 의해서 말이다. 그녀는 엉뚱한 이야기를 꺼낸 이드를 향해 눈을 흘기며 디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디엔, 지금은 개를 찾는 것 보다는 엄마를 먼저 찾아야지. 디엔은 엄마가 보고 싶지 않니?”
이드의 말에 웃음이 감돌던 디엔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쓸데 없는 고집을 피울 정도로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는 아이는 아닌지 라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보고싶어. 그러면….. 멍멍이는 나중에 찾을 께.”
“그래. 그래야지. 그럼 디엔은 엄마가 어디 있었는지 기억나니? 주위의 건물이라던가, 사람이라던가.”
그녀의 물음에 디엔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라미아에게 답할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디엔의 한 쪽 손이 저절로 올라오며 자신의 귓가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본인은 모르는 듯 한 것이 무언가를 생각할 때의 버릇인 것 같았다. 하지만 버릇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라미아는 그 모습이 귀엽기만 할 뿐이었다.
“아, 생각났다. 엄마하고 같이 엄청 큰 건물안에 들어갔었어. 하얀색 건물인데 방도 많~고, 사람도 많~ 았어. 그리고 바닥에는 이상한 그림들이 마구마구 그려져 있었어. 또, 또…. 엄마하고 이야기 하던 누나도 누나 처럼 이뻤어.”
뭔가 상당히 흔한 설명이었다. 허기사 어린아이에게 더 자세한 설명을 바랄 것도 못되었다. 그러나 그 중 자신에 대한 칭찬이 들어있었단 이유 때문에 라미아는 기분이 좋기만 했다. 아이의 칭찬이란 가장 진실되고 사심(私心)없는 칭찬이기 때문이었다. 그레센 대륙의 명언 중에 아이의 말보다 더욱 진실 된 말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라미아의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심하단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드의 모습에 순식간에 기분이 다운되어 버린 것이다. 라미아는 디엔의 눈을 피해 이드를 향해 뾰족히 혀를 내밀어 보이고는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 다시 입을 열었다. 이드는 그녀의 그런 모습에 피식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럼, 다른 건 뭐 생각나는 것 없니?”
“우웅…. 모르겠어. 아, 맞다. 들어가는데 무슨 커다란 글자도 보였었어.”
“글자? 무슨… 현판(懸板)같은 걸 보고 말하는 건가?”
이드와 라미아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 정도의 설명으로 이 아이가 있던 곳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경찰서로 대려다 주면 간단한 일이겠지만 찾아보지도 않고 그러긴 싫은 느낌이었다. 물론 좀 더 그 마음속을 파고 들어가면 할일 없이 늘어져 있던 차에 만난 좋은 일거리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 더 강하겠지만 말이다.
“그럼 너 엄마하고 같이 갔던 건물에 가보면 어떤 건물인지 알 수 있어?”
“응! 나 알아. 엄마하고 같이 들어갈 때 봐서 알아.”
“그럼…. 방법은 한가지뿐이군. 직접 돌아다니며 찾아보는 수밖에.”
결론을 내린 이드는 공원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높고 낮은 건물들이 들쑥 날쑥 들어서 복잡하다면 복잡하다고 할 수 있는 주위 풍경이었다. 하지만 디엔이란 아이의 나이와 몸을 생각해 볼 때 이 공원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진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렇다고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주위를 살피며 이른바 “큰 건물”이라고 할 정도의 건물들의 위치를 대충 기억해두고는 디엔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자, 그럼 이제 이 누나하고 형하고 같이 엄마를 찾아보자. 디엔 네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생각나는 곳까지 가르쳐 줄래?”
“응. 나는 저기로 들어왔어. 저기.”
디엔은 한쪽 방향을 가리켜 보이며 가까이 있는 라미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드는 빙긋 웃으며 디엔과 함께 걸어가는 라미아의 모습을 보며 그 뒤를 따랐다.
“뭐… 이렇게 시간 보내는 것도 좋겠지.”
이드는 손에 책을 든 채로 양손을 머리 뒤로 돌려 깍지끼며 상당히 느긋한 모양을 했다.
라미아의 손을 잡은 디엔은 수시로 멈춰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신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꽤나 침착해 보여 길을 찾지 못해 눈물이 그렁거리던 때와는 전혀 달라 보였다. 옆에 자신을 보호해줄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디엔을 퍽이나 편하게 만들어 준 것 같았다.
그러나 무작정 개를 쫓아오다 길을 잃어버린 아이가 기억하고 있는 길이란 한계가 있었다. 공원을 벗어나 별로 멀리가지 못 한 사거리에서 디엔이 멈춰서고 만 것이었다. 디엔이 기억하고 있는 길이 이곳까지 였던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사거리라니….
이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들이 걸어 온 곳을 제외하더라도 길이 세 갈래로 갈리는 것이다.
“자~ 그럼 어느 쪽을 먼저 찾아볼까? 라미아, 네가 정해.”
“그럼, 우선 이 쪽 부터….”
라미아는 이미 생각해 둔 것처럼 다른 길을 가지 않고 똑 바로 걸어 나갔다. 라미아가 선택한 길은 상당히 넓은 도로를 중심으로 마치 오래된 고목처럼 수많은 작은 골목길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곳을 다 뒤져 볼 필요는 없었다.
이미 이곳으로 오기 전에 큰 건물 몇 개를 이미 확인해둔 이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디엔을 중심에 두고 각자 디엔의 손을 잡은 세 사람은 골목 이곳 저곳을 휘저어가며 이드가 보아두었던 건물을 찾아 다녔다. 길을 찾기란 대충의 위치만 알아둔다고 해서 쉬운게 아니었다. 이드와 라미아는 그것을 통감하며 한참을 뒤적인 끝에 하얀색 거대한 건물을 찾아 낼 수 있었다. 일층 전채를 거대한 유리로 둘러 세운 그곳은 무슨 회사인지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디엔은 그 건물을 보는 순간 더 볼 것도 없다는 양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댔다.
그 모습이 얼마나 깨끗한지 이드와 라미아는 다시 한번 보라는 말도 해 보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것은 두 번째 건물 앞에서도 마찬가지 였다. 기가 막히게도 두 번째로 찾은 건물은 다름 아닌 창고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부터 이드는 다리가 아프다고 투정을 부리는 디엔을 등에 업고 걸어야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뒤졌지만 세 사람은 디엔이 들렀었던 건물을 찾지 못했다. 오히려 이곳 파리의 골목이 거미줄처럼 복잡하다는 것만을 실감했을 뿐이었다. 분명히 대충의 위치를 알고 가는데도 길을 잃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디엔이 길을 잃은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부터는 이드의 등에 업힌 디엔이 꾸벅꾸벅 졸고 있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런 상태라면, 디엔의 엄마가 있는 건물을 찾는다 하더라도 똑바로 알아볼지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이드와 라미아는 잠시 의견을 나누다 가디언 본부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이렇게 해서는 디엔의 엄마를 찾아 주지 못할 것이란 결론이 내려진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자는 아이를 그냥 경찰서에 맞길수도 없다는 생각에 가디언 본부로 데려가기로 한 것 이었다. 그곳에서 경찰서로 연락할 생각이었다. 가디언 본부에서 하는일이 하는 일인 만큼 경찰과도 공조가 잘 되어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 였다.
“쌕…. 쌕….. 쌕……”
이드는 자신의 등뒤에서부터 들려오는 편안한 숨소리를 들으며 라미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드의 한 쪽 팔을 잡은 채 귀엽다는 듯 이 디엔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얼굴이 꽤나 편안해 보여 과연 라미아도 여자는 여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꼭 여자가 아니라더도 아이가 자는 모습은 그 누구에게나 천사처럼 평화로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디엔과 같은 귀여운 아이라면 어련할까.
그때 였다.
저 앞쪽 가디언 본부 쪽에서 뭐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과연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꽤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는데, 대개가 가디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 모습에 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아침 라미아와 함께 나올때 만해도 한산하기만 하던 가디언 본부가 처음 이곳에 도착 할 때 처럼 붐비다니…
“무슨… 일이 있나본데요? 저기, 저 앞으로 세르네오까지 나와 있는 걸요?”
과연 라미아의 지적대로 가디언 본부의 정문앞에는 여느 때와 같이 액세서리같은 엄청난 길이의 연검을 허리에 걸친 세르네오가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몇 번 보지 못한 조급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무슨… 큰일이라도 터진건가? 갑자기 없던 가디언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있고 말이야.”
“우선은 가까이 가봐요.”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발걸음을 빨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