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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212화


그 덕분에 이드는 전음을 채 끝내지 못하고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야 했다. 소리의 진원지에는 우락부락한 모습의 남자가 한 쪽 발을 앞으로 내디디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방금 전의 충격음이 자신 때문이란 것을 과시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그런 그의 한 쪽 발은 수련실의 바닥을 손가락 두 마디 깊이로 파고 들어가 있었다. 덕분에 그의 발을 중심으로 수련실 바닥은 거미줄처럼 미세한 금이 폭주하고 있었다. 아마 저 바닥을 다시 뜯어고치려면 적잖이 돈이 들어갈 것 같았다.

‘각력(脚力)이 대단한 사람이군.’

“크흐, 좋아. 이번엔 내가 상대해 주지. 쇳덩이 좀 좋은 거 들고 있다고 꽤나 잘난 체하는데…. 그게 언제까지 계속될지 한번 보자구.”

보통의 가디언들 같지 않은 거치른 말투였다. 하지만 그 뜻 하나만은 확실하게 전해져 왔기 때문에 오엘 역시 입술을 앙 다물며 내려트렸던 소호검을 들어 올렸다. 순간 소호검으로부터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예기(銳氣)가 뻗어 나오며 두 사람 사이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흘렀다. 진짜 저대로 맞붙었다가는 어느 한쪽은 크게 다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다치는 사람은 오엘과 약간의 실력 차를 가지고 있는 데다 소호라는 명검까지 상대해야 하는 저 우락부락한 덩치일 것이고 말이다. 세 남자 역시 그런 사실을 눈치챘는지, 그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갈색 머리의 사내가 씨근덕거리는 덩치를 불러들였다.

“야, 덩치. 그만해.”

“뭐?”

모습 그대로 덩치라 불린 그는 갈색 머리 사내의 말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자신 역시 직접 마주 대하자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사내 체면상 물러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마침 뒤에서 물러나라고 하니 좋은 기회이긴 했지만, 막상 물러서자니 왠지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너도 알잖아. 만만치 않은 상대야. 네 쪽이 불리해. 그러니 그만 물러나. 어차피 너하고 쿠가 먼저 잘 못 한 거잖아.”

“…. 쳇, 알았어. 너하곤 다음에 한번 붙어보자.”

“그전에 사과부터 하는 게 예의 아닌가?”

“뭐야? 이게 틸이 참으라고 해서 참으려고 했더니…”

사과를 요구하는 오엘의 말에 막 돌아서려던 덩치는 주먹을 불끈 쥐며 몸을 획 돌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움직임을 막아내는 목소리가 있었다. 조금 전보다 좀 더 힘이 들어가 있는 목소리였다.

“덩치!! 그만 하라고 했잖아. 그리고 그쪽도 이만해 주시죠. 저희들이 원래는 용병 일을 했었기 때문에 입이 상당히 거칠어서 그렇습니다.”

틸이란 사내의 말에 오엘은 눈을 반짝였다. 자신들의 전 동료들 역시 저들과 같은 경우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도… 오엘은 영국에 있는 동료들을 생각하며 조용히 물러나려고 했다. 자신보다 빨리 튀어나온 이드의 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럼. 그 대신 틸이란 분께서 잠깐 동안 오엘과 대련을 해 주는 건 어떨까요? 그러면 서로 크게 손해 보는 건 없을 것 같은데요.”

갑자기 흘러나온 부드러운 듣기 좋은 목소리에 오엘과 틸, 덩치에게 묶여 있던 시선이 한꺼번에 풀려 이드에게로 향했다. 틸은 갑작스레 자신들 사이로 끼어드는 소년의 모습에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이런 상황은 당사자들 혹은 그와 연관된 사람이 아니면 개입할 만한 문제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틸은 오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과연 오엘은 이드의 갑작스런 말에 놀라 그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숙!”

“사…. 숙?”

틸은 오엘이 이드를 부를 때 쓰는 호칭에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알기로는 사숙이란 호칭은 자신의 사부와 사형제지간인 사람을 부를 때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나이 상 사숙과 사질간으론 보이지 않는 때문이었다. 물론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저 사숙이란 소년에게 그런 실력이 있을까? 틸은 오엘과 이드를 번갈아 바라보며 묘하게 두 눈을 빛냈다.

“작게 불러도 충분히 들을 수 있으니까 소리 지르지 말고, 그냥 내 말대로 대련해! 그동안 해 온 기초 수련이 얼마나 잘 됐나, 또 얼마나 실전에 써 먹히나 한번 봐야지. 그리고 이왕 하는 대련인 만큼 상대는 강할수록 좋은 거 아니겠어? 불만… 없지?”

오엘은 자신을 향해 사악해 보이는 미소를 띠우는 이드를 바라보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뭐, 굳이 대련을 피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었지만 말이다. 이드는 오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틸을 바라보았다. 무언으로 그의 대답을 재촉한 것이다.

“뭐, 나도 한번씩 몸을 풀어 줘야 되니까 거절할 생각은 없어. 단, 내 쪽에서도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는데 말이야…”

“말해 봐요.”

“이 대련이 끝나고 네가 내 상대를 잠시 해 줬으면 하는데…. 거절하진 않겠지? 별로 나이가 많아 보이지도 않는데, 저런 대단한 실력의 여성을 사질로 두고 있는 걸 보면 말이야.”

그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여 있는 가디언들 대부분이 이드가 제로와 싸우던 모습을 봤던 사람들인 만큼 이드의 실력을 대충 알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또한 그런 이드의 실력을 모르고 덤비는 틸의 모습이 무모해 보이기도 했다. 그때 그런 틸을 걱정해서인지 가디언들 중 한 사람이 틸에게 다가가 뭔가를 한참 동안 속삭여 주었다. 아마도 이드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는 틸의 눈빛은 점점 더 빛을 더해 갔다.

“호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정말 대단한 실력인데… 그렇담 이거 꼭 대련을 해 봐야겠는걸. 누구 말대로 대련은 강한 사람과 하는 게 가장 좋으니까 말이야.”

틸은 이드의 말을 인용해 가며 말을 이었다. 이드는 그 말에 잠시 동안 틸이란 남자의 눈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다. 말투가 조금 거치른 면이 있긴 했지만 눈이 맑은 것이 단순히 전투를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이드의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섰고, 그에 따라 주위에 몰려 있던 사람들은 수련실의 벽 쪽으로 물러나 주었다. 그리고 그에 맞춰 누군지 모를 사람으로부터 시작 신호가 떨어졌다. 틸과 오엘. 두 사람은 그 신호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격돌하기 시작했다. 탐색전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오엘은 이미 상대가 자신보다 한 단계 위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기기보다는 최대한 자신의 실력을 펼쳐 보자는 생각이기 때문이었고, 틸 역시 오엘을 빨리 쓰러트려 최대한 체력을 보존한 채로 이드와 맞붙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두 사람의 대결은 빠르고 힘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한 사람은 맨손이었고, 한 사람은 명검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거기에서 오는 차이는 전혀 없어 보였다. 박력 있는 대련은 잠시 후 그 끝을 맺었다. 결과는 예상대로 오엘의 패(敗)였다. 하지만 승패와 상관없이 오엘 스스로는 대단히 만족스러운 대련인 듯 했다. 가쁜 숨을 내쉬는 그녀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대련은 그녀의 기본기가 확실해졌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던 때문이었다. 하나의 확인 시험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자, 이젠 내 부탁을 들어 줄 차례라고 생각하는데?”

어느새 가쁜 숨을 모두 고른 틸이 이드를 청했다.

“나야 언제든 괜찮긴 하지만…. 곧바로 싸우는 건 무리가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전혀. 오히려 이 정도 달아올라 있을 때 싸워야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거거든.”

싸움에 미친 싸움꾼에게서 자주 들어 볼 수 있는 말이다. 물론, 정파에도 이런 류의 인물은 다수 있었다. 이런 인물일수록 승패를 확실히 해 주는 것이 좋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이드의 어깨에서부터 손끝에 이르기까지 칠흑(漆黑)의 철황기(鐵荒氣)가 두텁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틸이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 표정을 곧 거두어졌다. 그 대신 조금 전 오엘과 싸울 때와는 다른 마치 거대한 맹수의 발톱과 같은 형태를 취한 청색의 강기가 그의 양 손 다섯 손가락에서 일어났다.

“후후후…. 저 정도로 검을 쓸 줄 아는 사람의 사숙이라길래 검을 쓸 줄 알았는데. 이거 의외인걸.”

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양손을 들어 마치 거대한 기세로 일어선 맹수의 그것과 같은 자세를 잡고 있는 틸의 모습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취한 강기의 형태나, 기수식으로 보이는 지금의 자로 봐서 틸이 장기(長技)로 사용하는 무공은…. 조공(爪功)이다.

‘이 모습을 보고 오엘이 실망하지나 않았으면 좋겠군. 틸의 주무기인 조공도 아닌 단순한 권각법에 졌다고 말이야.’

“그래서 뭐가 불만인가요? 불만이라면 검으로 해 줄 수도 있는데….”

“아니, 오히려 기뻐서 말이야.”

전에 한 번 들어 본 말이었다. 이드는 입가로 씁쓸한 미소를 띠어 올리며 한 손을 허리에 또 한 손을 중 단전 앞으로 내 뻗었다.

“얼마 전에 누구도 그런 말을 했었는데…. 말이야.”

사아아아악.

틸의 발이 땅에 끌리며 그 위치를 바꿨다. 먼저 선공을 할 생각인지 그 모습이 마치 먹이를 향해 곧 이라도 뛰쳐나갈 맹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호~ 나하고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 만나 보고 싶은걸. 간다!!! (맹호지세(猛虎之勢)!”

크아아아앙!!!

아련히 환청이 들리는 듯하다. 수련실이 떠나갈 듯한 기합성과 함께 앞으로 달려 나가는 틸의 동작과 기세는 맹호 그 자체였다. 호랑이가 뛰어오르듯 순식간에 이드와의 거리를 좁힌 틸은 양팔을 크게 벌려 이드를 향해 덮쳐들었다. 호랑이가 사냥하는 모습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동작이었다. 하지만 절정의 경지에 이른 강호인들은 호랑이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지금과 같이 공격해 올 경우 빠른 보법으로 그 품으로 파고 들어가….

“분뢰보!”

검이나 권으로 겨드랑이 부분을 치거나 가슴을 직접 찔러 심장을 멈춰 버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철황쌍두(鐵荒雙頭)!!”

쿠우우우

묵직한 기운을 머금은 이드의 양 주먹이 틸의 겨드랑이 아래 부분을 향해 날아들었다. 만약 이 권을 그대로 맞게 된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심장 정지를 일으키거나 심장이 폐와 함께 그대로 터져 버릴 것이다. 분명 보통의 짐승이라면 꼼짝없이 죽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인간이었다. 그것도 맹수의 공격법을 연구해서 사용하는 인간. 틸은 양쪽에서 조여 오는 이드의 주먹을 보며 휘두르던 손의 속력을 한순간에 더 하며 머리를 중심으로 회전하며 뛰어 올라 이드의 공격을 깨끗하게 피해 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느새 틸의 손가락에 자리하고 있던 청색의 강기가 이번엔 맹금류의 그것처럼 길게 뻗어 나와 이드의 등을 향해 내리꽂히는 것이 아닌가.

“이글 포스(청응지세(靑鷹之勢))!!”

이드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감각에 다시 한번 분뢰보의 보법을 밝아 순식간에 앞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그런 이드의 행동이 조금 늦었던 때문인지 등 뒤로부터 지이익 하는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이드는 얼굴을 찌푸리며 앞으로 달려 나가던 그 속도 그대로 허공으로 회전하며 등 뒤 아직 허공에 떠 있는 틸을 향해 한 쪽 손을 맹렬히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팔 전체를 뒤덮고 있던 철황기가 기이한 모양으로 회전하더니 주먹만한 권강(拳剛)을 토해내는 것이었다. 그 모습은 저번 부룩과의 대련에서 그를 쓰러트렸던 철황유성탄과도 비슷해 보였다.

“철황포(鐵荒砲)!!”

“흐아압!!”

틸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쇳덩이 같은 권강을 허공에 뜬 상태 그대로 조강으로 뒤덮힌 손으로 땅으로 쳐내려 버렸다.

키가가가각.

콰콰쾅.

마치 쇠를 긁어내는 거북한 소리가 수련실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 소리가 수련실 내부를 울린 것은 순간이었고 곧바로 이어진 커다란 폭음과 충격에 그 듣기 거북했던 소리에 대한 기억은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크으윽…. 압력이 보통이 아닌데…”

틸은 등 뒤로 느껴지는 묵직한 통증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토하고 말았다. 다행히 철황포의 진로를 바꾸긴 했지만 지지 기반도 없이 허공에서 그 짓을 한 대가로 수련실의 벽까지 날아와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만큼 날아 왔다는 것은 철화포라는 권강이 압축된 압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만큼 상대의 내공이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도대체 뭘 했길래 저 나이에 이런 힘을 가지게 된 거지?’

틸은 등과 함께 뻐근한 손목을 풀어내며 수련실 중앙에 피어오른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아마 이번 대련이 끝나고 나면 수련실 수리비로 꽤나 돈이 빠져나갈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본부의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세르네오에게는 하나의 일거리가 더 늘게 되는 것이고 말이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자 차츰차츰 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상대편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틸은 그 모습에 다시 조강을 형성하고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그런 행동은 한순간 굳어지고 말았다. 다름 아닌 자신을 향해 검게 물든 주먹으로 자세를 취하고 서 있는 이드의 모습 때문이었다. 분명 저 자세는 조금 전 철황포를 날린 후의 자세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른 공격을 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하지 않았다는 뜻과도 같다. 그리고 조금 전 철황포의 방향을 바꾸고 벽에 처박혔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다. 거기에 철황포와 같은 위력의 권강이 하나 더 날아든다면?

“칫, 졌구만…. 하지만…. 아직 내가 쓰러진 건 아니지. 베어 포스(포웅지세(暴熊之勢))!!”

크아아아악

마치 곰과 같은 모습으로 허리를 숙인 틸은 엄청난 속도로 이드를 향해 달려 나갔다. 이드는 그 모습에 양 주먹을 허리 뒤로 한껏 끌어당겼다. 이 틸이란 남자와의 대련에서는 단순히 패배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 주는 것보다 직접 수련실 바닥에 쓰러뜨리는 것이 가장 확실하게 대련을 끝내는 방법인 것 같았다. 이드는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을 더했다.

꾸우우욱.

“철황십사격(鐵荒十四擊) 쌍연환(雙連換)!!”

이드의 기합성이 이번엔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무식하게 달려오는 틸의 전신을 스물여덟 개의 주먹이 난타하기 시작하며 가죽 포대를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수련실을 울렸다. 비록 스물여덟 번이나 되는 주먹질이기는 하지만 그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눈 몇 번 깜빡이는 시간 동안 모두 틸의 몸에 적중되고 말았다.

끄아아아악.

‘쓰러지지 않았다?’

이드는 그 기세가 확실히 줄긴 했지만 아직도 자신에게 달려오는 틸의 모습을 보며 강하게 진각을 밟아 내뻗었다. 이번엔 그의 오른손만이 출수 되었다. 하지만 진각의 힘을 담은 그 위력은 앞서 터져 나온 스물여덟 번의 주먹질보다 배는 더한 충격을 틸에게 전해 주었다.

퍼엉!

철황십사격의 초식에 따른 마지막 주먹이 정확하게 틸의 가슴을 쳐 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주먹이 틸의 몸에 충격을 가한 후에야 그는 졌다는 듯이 그대로 쓰러질 수 있었다. 거치른 숨소리에 입가로 흘러내린 핏자국과 여기저기 멍든 몸이 말이 아닌 듯 보였지만 그 고통에 신음해야 할 틸은 가쁜 숨을 뱉어 내는 와중에도 뭔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쿡쿡거리며 웃고 있었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며 정말 선하게 생긴 것 답지 않게 강단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철황십사격을 맨몸으로 세 번에 걸쳐서 맞고서야 쓰러지다니. 그것도 마지막엔 그 위력이 두 배가 된 철황십사격을 맞고서 말이다.

“정말 엄청난 강골이네요. 그렇게 맞고서야 쓰러지다니….”

“크흑, 컥… 튓! 뭐 이 정도야. 오히려 오랜만에 뻑적지근하게 몸을 푼 것 같아서 좋기만 하구만. 그나저나 옷 찢어진 것 괜찮냐?”

주위의 도움으로 일어나 앉은 틸은 떨리는 손으로 이드의 상체를 가리켜 보였다. 이드는 그 모습에 슬쩍 뒤로 돌았다. 이드의 등 뒤의 옷은 칼로 잘라 놓은 듯 깨끗하게 잘라져 있어 그 사이로 유백색의 뽀얀 이드의 등살이 훤히 보이고 있었다. 아래, 위 양쪽에 조금씩이나마 천이 연결되어 있어 겨우 벗겨지지 않고 버티는 모양이었다.

“뭐, 보시다시피. 버려야겠지만 신경 쓰지 말아요. 그랬다간 나는 틸 씨 병원비를 책임져야 할 것 같으니까.”

“하하핫…. 그러지. 참, 그런데 아까 나처럼 자네에게 맨손으로 덤빈 사람이 또 있다고 했었지?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지?”

“그건 알아서 뭐 하게요?”

“당연히 찾아가서 한번 붙어 봐야지. 너하고 한바탕 했다면 보통 실력이 아닐 테니까 말이야. 요즘은 맨손으로 싸우는 사람이 얼마 없거든.”

이드는 그의 말에 피식 웃어 버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못 말릴 싸움꾼이란 뜻이기도 했고, 가르쳐 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사람…. 부룩은, 저번 영국에서 있었던 제로와의 전투에서 아깝게…. 전사했어요.’

이드는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없도록 틸에게 전음을 전했다. 이곳에 모인 가디언들 모두는 몬스터와 제로를 상대로 싸우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누군가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별로 할 말이 되지 못하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여기 가디언들 모두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사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이드의 대답을 들은 틸은 호기롭게 뿜어내던 투기를 순식간에 거두어들였다.

“뭐…. 후에, 아주 먼 후에 기회가 되면 한번 붙어 보지, 뭐.”

한 마디로 죽은 다음에 붙어 보겠단 말인가?

“정말… 못 말리겠네요. 그럼 그래 보시던가요.”

이드는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으며 몸을 돌렸다. 그에 따라 오엘과 라미아가 다가왔다. 싸움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는지 빠져나간 사람들 덕분에 들어올 때와는 달리 수련실의 입구는 한산했다. 이드는 입구를 나서며 등 뒤로 손을 돌렸다. 아무 걸리는 것 없이 자신의 맨살이 만져졌다. 한 마디로 지금 자신이 걸치고 있는 옷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결론 내는 순간 이드의 발걸음은 자동적으로 자신과 라미아가 쓰고 있는 방 쪽으로 돌려졌다.

“그래, 대련해 본 느낌은? 이제 기초 훈련은 그만해도 될 것 같아?”

이드는 본부 건물로 들어서며 오엘에게 물었다. 그녀가 대련을 끝내고 슬쩍 미소짓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네, 제게 필요한 기초 훈련은 완성된 것 같아요. 이젠 청령신한공 상에 기재된 고급 검법들과 여러 가지 수법들을 공부할 생각이에요. 이번 대련으로 기본기가 충분하다는 건 알았지만, 그 틸이란 남자를 상대할 초식이라던가, 힘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거든요.”

정확한 판단이었다. 이제는 청령신한공 상의 여타 웬만한 초식들은 혼자서 수련해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수련하면 되겠지… 그런데, 아직 제이나노는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네…”

이드는 본부의 숙소 중 한 방문 앞을 지나며 중얼거렸다. 그 방은 다름 아닌 제이나노의 방이었다.

“요즘 바쁘잖아요. 사제일 하느라고….”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일 정도 정신없이 파리 시내 곳곳을 관광이란 이름으로 돌아다닌 제이나노는 그 후부터 사제로서의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솔직히 지금까지의 사제와는 거리가 먼 모습을 생각해 본다면 잘 매치가 되지 않는 모습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그 일을 하고 몇 일 후 한번 들려본 바로는 정말 대사제라는 이름에 걸맞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일 동안 돌아다니며 찾은 건지 파리 어느 뒷골목 작은 공터에 자리 잡은 그는 대사제라는 이름에 걸맞은 큰 신성력으로 무상으로 사람들을 치료했고, 그로 인해 모여든 사람들을 상대로 마치 옛날 이야기를 해 나가듯 리포제투스의 교리를 쉽게 풀이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 설명에 이미 그를 통해 신성력이라는 것을 체험한 몇몇 병자들은 곧바로 그 자리에서 리포제투스의 신자가 되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은근히 귀를 기울였다. 특히 사람을 치료할 때 생겨나는 신비한 빛줄기를 보기 위해 모여드는 아이들은 재미있는 이야기와 신기한 것들을 보여주는 제이나노를 꽤나 좋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의 입을 통해 제이나노의 이야기가 주위로 퍼져나갔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아침 일찍 본부를 나선 제이나노는 밤이 늦어서야 지친 몸으로 본부로 돌아오고 있었다. 때문에 요즘엔 그와 마주 앉아 여유 있게 이야기 나누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하지만 그게 사제의 일이라며 불만은커녕 오히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다니는 그였다. 물론…. 아직 무언가 맛있는 요리를 먹을 때만은 그 표정이 못했지만 말이다.

틸과의 전투 후 그와 꽤나 편한 사이가 되었다. 또한 그날을 기점으로 라미아가 이드를 향해 심심하다고 투덜대는 일이 없어졌다. 가디언들이 몰려들어 본부가 북적이는 데다, 이런저런 서류 일로 바쁜 세르네오와 디엔의 엄마를 대신해 라미아가 디엔을 대신 돌봐 주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심심할 시간이 없어진 것이다. 좋은 일이었다. 단지 하나, 그 투덜거림을 대신해 이드를 들들 볶아 대는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아기를 가지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것도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놀리는 투로 말이다. 지금은 겨우겨우 무시하고 있긴 하지만 그녀가 놀리는 게 더 심해질 경우 노이로제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몇 일이 다시 지나갔고, 정부와의 분위기는 점점 나빠져 갔다. 조사 결과가 나오더라도 가디언들이 직접적으로 그들을 처벌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부로서는 가디언들을 압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현재 가디언들이 아니라면 그런 내용의 조사를 해 나갈 단체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떤 곳에서 국가를 대상으로 조사에 들어가겠는가. 더구나 그 사실이 언론을 타고 국민들 앞에 밝혀질 경우 그들은 여론에 따라 법적 처벌을 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에서조차 매장 당할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 정부로서는 급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미국과 아랍 등 몇몇 국가에 대해 조사를 해 나가던 가디언들도 이곳과 비슷한 몇몇 단서들과 증거들을 찾아냈다는 연락이 왔다. 그중 확실한 증거가 될 만한 것들도 있긴 했지만, 그것을 곧바로 언론에 터트리지는 않았다. 다만 그 증거의 내용이 가디언들 사이에 퍼져나갔는데, 그것은 제로가 말했었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아 가디언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몇몇 가디언들은 자신들이 이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제로와 싸웠었나 하고 후회를 하기까지 했다. 이드는 그런 가디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를 쭉 들이켰다. 지금 이드가 있는 곳은 가디언 본부의 휴게실이었다.

“이로서 가디언과 각국의 정부는 완전히 갈라서게 되는군.”

“당연하죠. 능력자들을 인간 대접을 하지 않았던 정부에게 가디언들이 편들어 줄 이유가 없죠. 자, 사과. 이드님도 여기 사과요. 오엘도 먹어요.”

라미아는 자신이 깎아 놓은 사과를 접시에 담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조사 결과가 발표되는 날이 바로 제로가 다시 활동하는 날이 되겠지. 와사삭.”

이드는 깎아 놓은 사과 한 조각을 와삭 깨물었다. 정부와 가디언의 사이가 갈라지고, 더 이상 국가의 일에 가디언이 나서지 않게 된다면 제로로서는 아주 쉽게 모든 도시를 접수하고 국가를 해체시켜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제로가 움직이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던 때문인 것이다.

“그럼 우린 그때까지 조용히 시간만 보내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네요. 디엔, 천천히 먹어야지.”

라미아가 손수건을 들어 디엔의 입가로 흐른 과즙을 깨끗이 닦아 주었다.

“뭐, 그렇지. 느긋하게 기다리면 되는 거야. 기다리면….”

“그런데….”

조용히 입을 여는 오엘의 목소리에 이드와 라미아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 평소 이드와 라미아가 이야기할 때는 그 사이에 잘 끼어 들지 않던 그녀가 입을 열었던 것이다.

“요즘 들어 가디언들의 출동이 평소보다 배 이상 많아진 것 같은데…. 걱정이네요.”

그렇게 말하는 오엘의 시선은 휴게실 한쪽에 앉아 있는 가디언의 붕대 감긴 팔에 머물러 있었다. 확실히 이틀 전부터 몬스터의 출연이 부쩍 늘어서 희생자가 평소의 세 배 이상이라고 세르네오가 말했었다. 더구나 이놈들이 갑자기 똑똑해졌는지 따로 떨어져 다니지 않고 몇 마리씩 뭉쳐서 다니는 통에 처리하기도 여간 힘든 게 아니라고 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뭐. 누가 몬스터를 조종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 그렇다면 몬스터들 스스로 움직이는 거란 이야긴데… 그것까지 가디언들이 통제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 그저 습격하는 몬스터들을 그때그때 막아내고 없애는 방법밖에 없지.”

확실히 그 방법뿐이었다. 좀 더 화력이 보충되고 사회가 완전히 안정된 후라면 몬스터 토벌과 같은 일도 생각해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제이나노는 오늘도 아침 일찍 나가는 것 같던데… 이쯤에서 쉬어 주는 게 좋을 텐데 말이야. 한꺼번에 너무 무리하는 것도 좋지 않은데.”

이드가 그렇게 제이나노의 걱정을 하며 다시 사과 한 조각을 막 집으려 할 때였다. 요란한 경보음 소리가 가디언 본부가 떠나가라 울려 퍼진 것이었다. 그 소리는 요즘 들어 자주 들리는 것으로 바로 가디언들을 급히 소집하는 소리였다. 또 어딘가 몬스터의 습격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으아~ 저 지겨운 소리. 젠장….”

“정말 미치겠네. 이 놈의 몬스터는 수지도 않나?”

“끙…. 투덜거릴 힘 있으면 빨리들 일어나서 출동해.”

휴게실에 축 쳐져 있던 가디언들이 온갖 불평을 늘어놓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런 그들의 얼굴엔 한 가득 피곤함이 깃들어 있었다. 너무 잦은 출동에 피곤이 누적된 것이었다. 축 처진 그들의 모습은 도와줄까 하는 마음이 절로 들게 만들 정도였다.

‘아닌 게 아니라, 너무 먹고 놀기만 할 게 아니라. 저런 일이라도 도와야 하는 거 아닐라나?’

그때 본부 곳곳에 달려 있던 스피커가 다시 한번 울렸다. 하지만 이번엔 방금 전과 같은 경보가 아닌 많이 듣던 고운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아. 본부 내에 있는 이드, 라미아, 오엘 양은 지금 즉시 본 본부 정문 앞으로 모여 주세요. 다시 한번 알립니다. 이드, 라미아, 오엘 양은 지금 바로 본 본부 정문 앞으로 모여 주세요.”

“…… 무슨…. 일이지?”

앞서 이름이 호명되었던 세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세 사람의 이름을 부른 목소리는 다름 아닌 세르네오였다.

…………
이글 포스. 베어 포스…. 내가 써놓긴 했지만 조금 유치한 느낌이.
근데 써 놓고 보니까. 요즘 어디서 하고 있는…. 제목이 뭐더라… 무슨 레인저였나?
하여간 거기 나오는 대사하고 비슷한 느낌도….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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