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49화
“카제씨?”
바로 이드와 한 초식의 무공을 나누었던 마사키 카제였다.
위엄 있는 가제의 어깨 뒤로는 잔뜩 긴장한 표정의 차항운이 서 있었다.
이드와 룬이 대치하는 순간 방을 빠져나가 동료들에게 알리고 카제를 데려온 것이다.
카제는 방 안의 상홍을 잠시 훑어본 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성큼성큼 큼 걸음으로 룬의 곁으로 다가갔다.
믿을 수 없었지만 일촉즉발의 긴장도 그의 등장과 함께 간단히 걷히고 있었다. 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애써 경직된 몸을 풀어주었는데, 그건 여기 서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같은 효과를 주고 있었다.
“자. 단장. 너무 긴장할 것 없네. 그리고 자네들도 이리 와서 앉지. 갑작스런 상황이긴 하지만 우리나 자네나 서로 피를 볼 만큼 좋지 않은 감정은 없지 않은가?”
연륜에서 나오는 노련함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팽팽한 대치로 치달으며 금방이라도 싸움이 일어날 것 같았던 상황이 어느새 물에 젖은 빵처럼 흐물흐물 풀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굳어 있던 사람들도 여유롭고 침착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황에 반전을 유도하고 있는 카제라고 해서 그 속까지 여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잠시나마 겨뤄보았기에 이드의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역시 카제였다. 그런 만큼 그로서는 이드와는 되도록 부딪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자연히 상황을 완화시키는 지금의 행동도 싸움을 유잘하지 않으려는 고윤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연륜이 상황을 돌변시켰다기보다는 룬을 지키고 이드와 부딪치지 않으려는 간절한 노력이 그를 이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결코 사이가 좋을 수는 없겠지요. 브리트니스를 돌려받지 않는 이상은 말입니다.”
그러나 이드는 카제의 의견을 정중히 거절했다. 그로서는 이미 진작에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군의 분명한 의지로 보아 브리트니스에 대한 문제는 힘으로밖에 풀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단호한 대답에 따라 방 안의 공기는 다시 팽팽하게 당겨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얼어붙은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나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기… 오빠?”
언제나 당당하던 나나에게서는 좀처럼 들어보지 못한 조심스런 말투였다.
“저기…. 오빠가 전에 말하던 게 저….. 검이에요?”
끄덕
이드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다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떤 전투에서도 여유로웠던 모습과는 조금은 다른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도 그렇 것이 군이 다루는 힘음 지금까지의 덕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카르네르엘이 말했던 봉인의 힘.
고위 마법에서부터 드래곤의 브래스까지 봉인해버리는 엄청난 능력이었따. 지금까지 서로 치고 받고 때려 부수는 것과는 다른 그 수법에 대해 정확한 대처법을 알 수 없다면 이드로서도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드가 경계를 하거나 말거나 나나는 자신의 말이 먹히는 것 같았는지 금세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럼 장됐네. 괜히 그렇게 분위기 잡고 싸우지 않아도 돼요. 이번에 남궁황 공자가 파유호 언니에게 선물한다고 했던 검이잖아요. 파유호 언니는 그걸 받아서 이드 오빠한테 주면 되니까 뭐, 굳이 싸우지 않아도 될 거에요.”
순간, 나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남궁화의 더 어색한 모습이 왜 그리 한심해 보이는 건지.
그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브리트니스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건 왜 빼먹고 있을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파유호는 브리트니스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
이미 남궁황과 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알고 있는 진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조금 다르게 본 인물도 있었다. 바로 카제였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자, 그러지 말고 여기 와서 편히 앉게. 단장도 긴장을 푸시오.”
카제는 먼저 룬부터 다시 의자에 앉혔다.
당돌한 나나도 얼떨결에 맞은 편 소파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 뒤를 남궁황이 슬며시 따랐다.
이런 상황이니 이드와 라미아도 자연히 따라 앉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밖에 있던 누군가가 차를 내왔다. 양측의 동조가 이루어지자 모든 상황이 저절로 카제가 유도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미 이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이 방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는 것을 이드는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그 사이 룬의 손에 있던 브리트니스는 다시 모습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나타날 때도 그랬지만…. 갑자기 사라졌어. 아공간 마법인가?’
이드는 신출귀몰하는 브리트니스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저놈의 검 때문에 이렇게 찾아다닌 노력이 얼만데, 이제는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다니.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이드였다.
이드의 마음을 읽은 라미아가 의문을 풀어주었다.
‘카르네르엘이 말했던 것과 같네요. 갑자기 검이 나타났다더니…..아마 봉인 마법을 사용한 것 같아요. 파리에서 강시를 봉인할 때도 마법 효력에 비해 발산되는 마력이 적었어요.’
생각해보면 그런 것도 같았다. 안으로 가두어 들이는 마법이기에 마법에 들어가는 마력도 안으로 숨어드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따뜻한 차 향이 부드럽게 방 안을 감싸고 돌았다. 하지만 세 사람의 딱딱한 분위기는 전혀 풀릴 줄을 몰랐다. 카제는 일단 그런 분위기부터 깨뜨리고 보자는 듯 크흠, 하고 헛기침을 터뜨렸다. 왠지 할 말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빠른 사람이 있었다.
카제보다 훨씬 목소리가 크고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수다스러움이 경지에 오른 사람. 바로 나나였다.
“자 자, 그러면 빨리 검의 인정을 받아보자구요.”
호기심이 발동한 나나는 뭔가 맡겨놓은 물건 찾으러 온 사람 마냥 당당한 눈으로 룬을 재촉했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지금의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었던 것이다.
저 혼자 다른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나나의 태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고, 룬도 또 어디서 튀어나오는 건지 알 수 없는 브리트니스를 불쑥 탁자 위로 내밀었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파유호는 브리트니스를 조금도 들 수 없었다.
그저 룬의 손 위에 올려진 검이지만 마치 원래부터 그렇게 고정된 물건인 듯 약간의 미동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파유호도 처음부터 자신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란 것을 알았는지 딱 한 번 브리트니스를 잡아보고는 그대로 포기하고 말았다. 자신의 검이 되기엔 그녀 스스로가 너무도 역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한껏 기대하고 있던 나나는 풀이 죽어 조용해졌다. 자연히 세 사람은 뒤로 빠지고 이야기는 다시 룬과 이드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옆에서 그 모양을 지켜보던 카제는 조용히 이마를 두드렸다.
어떻게든 상황을 좋게 풀어보려고 나나의 일 푼의 가능성도 없는 말에 장단을 맞추었는데, 그게 전혀 먹히지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브리트니스를 포기하지 못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겠죠?”
잠시 동안 브리트니스를 바라보던 이드는 거기서 느껴지는 혼돈의 기운에 낮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것은 마치 서로 검을 겨눈 채 결투에 들어가기 전 상대방의 의지를 확인하는 기사의 말투와도 같았다.
“이보게, 그건….”
“네, 변함이 없답니다. 저는…. 제 생명이 다할 때까지 이 브리트니스를 놓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드가 말하려는 바가 심상치 않아서인지 카제가 다시 한 번 나서려 했지만 이번엔 룬에 의해 그의 말이 잘리고 말았다.
곧바로 대답하는 룬의 말까지 이드의 분위기와 다름없지 않은가. 아니, 같다기보다는 아버지의 등 뒤에 숨은 어린아이의 든든함이 떠올라 있었다.
카제는 거기서 그녀가 이드에게 정면으로 맞서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허기사 생각해 보면 이미 싸움은 애초부터 피할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한 번은 부딪칠 수밖에 없는 숙명이 엄연히 예고되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후회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남궁황에 대해서는. 브리트니스를 보고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그로 하여금 일찌감치 발길을 끊지 못하게 한 게 못내 아쉬웠다. 수다스러운 그의 엉뚱한 모습들에 훈이 재밌어 하기에 그냥 무심코 내버려두었던 것이 이런 최악의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이 이토록 후회스러울 줄은 몰랐다.
그러나 이드와 룬의 생각대로 지금 상황에서야 싸우는 것 외에 어떻게 할 수 있는 또 다른 변수도 없었다.
“후우, 이렇게 된 것 어쩔 수 없겠지. 검으로 답을 찾을 수밖에……”
갑자기 입을 연 카제에게서 내공이 실린 웅웅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신호였을까.
츠거거거거걱…..
한 줄기 거대한 기운을 품은 푸른색 그림자가 저 천장의 한 쪽을 시작으로 룬과 이드, 카제와 라미아, 파유호 등이 마주 앉아 있는 중앙의 탁자를 타고 내리며 양측을 정확하게 갈라놓았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서거거걱, 서거거걱, 서거거걱…..
처음 방 안에 앉은 사람들의 눈앞을 지나간 푸른 강기의 기운을 따라 방의 사방에서 소름끼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조금만 손을 내밀면 금방이라도 붉은 피가 번져 나올 것만 같은 파르스름한 예리함을 한가득 담은 소리.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벽 속의 무언가가 잘려 나가는 소리였다.
그리고 세 번 연속으로 이어진 그 소리가 멈추는 순간!
투웅
쿠르르르
산만한 거대한 북을 두드리는 소리, 또 돌이 기계에 갈리는 소리와 함께 기우뚱 앉아 있던 일행들의 몸이 급출발하는 차에 탄 것처럼 한 쪽으로 급하게 쏠렸다.
그리고 눈앞의 풍경이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마주 앉아 있던 룬과 카제 대신에 일행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밝은 하늘과 푸르른 대지였다.
다시 말해 이드와 그 일행은 자신들이 앉아 있던 방과 함께 저택에서 온전히 도려내어져 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길지 않은 한 호흡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유유히 하늘을 날고 있는 방과 그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 정말 동화 속 한 장면을 재연해 놓은 듯 경이로웠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결코 아름다운 동화 속 한 장면이 아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저택에서 강제로 분리된 방은 빠르게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냥 밖으로 나가자면 나갈 텐데…. 괜히 집을 부수는군. 라미아!”
이드는 그 사실을 몸으로 느끼며 느긋한 동작으로 라미아의 허리를 감싸 안으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동시에 라미아를 향해 마음을 전했다. 파유호 일행을 이동시키라고.
“맡겨주세요. 먼저 가서 기다려요. 텔레포트!”
파하앗.
라미아의 외침과 함께 그때까지 정확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하고 있던 나나를 포함한 일행들이 오색 빛과 함께 그 모습을 순식간에 감추었다.
아마 그들은 텔레포트 된 뒤에도 한동안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파유호 일행의 기척이 사라지는 순간!
이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으로 검기를 날렸다.
쩌저저적
마치 완성되지 못한 퍼즐이 떨어지듯 이드의 검기를 맞은 사각의 방이 산산히 조각나며 흩어졌다. 이드는 그렇게 어지럽게 쏟아지는 돌 사이를 수운(水雲)을 사용해 유유히 헤엄쳐 나와 정원의 가운데로 날아 내렸다.
그 뒤를 따라 검기에 잘려진 돌덩이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콰쾅 쿠쿠쿵 텅…..터텅…..
떨어지는 돌덩이들이 바닥을 뒤흔드는 통에 뽀얀 먼지가 수북하게 피어나 정원을 가득 메우더니 잘생긴 저택의 외관을 송두리째 가려버렸다.
이드는 그 먼지 사이로 어딘가 거무스름한 그림자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며 실프를 소환해 먼지를 날려버릴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 건 상대편이 먼저였다. 막 실프를 소환하려던 이드의 기감에 먼지 사이를 가르며 빠르게 내려치는 날카로운 예기를 느낀 것이다.
그것은 소리 없이 형체도 없는 먼지를 깨끗하게 반으로 잘라 내며 이드를 향해 내려꽂히고 있었다.
“시끄러운 시작 종에 가벼운 첫 인사인가? 하지만 어쩌지 난 가볍게 답해 줄 생각이 없는데….금렴단천장(金靈斷天章)!”
쿠구구구구
이드의 손을 중심으로 휘황한 금빛을 머금은 안개가 생겨났다. 마치 떠오르는 아침햇살에 물든 아침안개와 같은 느낌의 부드러움을 담은 기운이었다.
하지만 그 기운이 가진 힘은 그저 부드럽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공기를 가르며 흘러내리던 푸르른 예기에 물든 검기가 그대로 안개의 기운에 붙잡혀 버린 것이다.
그렇게 두 기운이 맞닿자 이드는 푸른 검기를 따라 단천의 기운을 흘려보냈다.
그것은 마치 검날에 맺힌 아침이슬이 또르르 굴러가는 서늘한 풍경이었다. 푸른 검기를 따라 흐르는 황금빛 기운은 순식간에 뻗어나가 곧바로 검기의 주인의 몸속에 흐르는 내력을 뒤흔들어 놓았다.
“커억…..어떻게 검기를……”
먼지를 갈라내며 이드에게 첫 공격을 가한 남자는 선홍색 핏줄기를 뿜어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동시에 그가 뻗어낸 검기는 황금빛 안개와 함께 허공에서 부서져 내렸다. 기운의 소멸이었다. 하지만 결코 적지 않은 기운이기 때문일까.
푸화아아악
검기가 잘라놓은 길을 따라 먼지가 양쪽으로 순식간에 밀려나며 사라져버린 것이다.
피를 본 탓인지 정원엔 어느새 맹렬한 전투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안전한 곳으로 부축해주어라. 지그레브에서와는 달리 이번엔 사정을 봐주지 않는군. 자네….”
카제는 수하에게 부상자를 옮기도록 명령하고는 곧바로 이드를 노려보았다. 비장해진 카제의 손에는 그가 애용하는 짧은 목검이 은빛으로 물든 채 들려 있었다. 싸움을 시작한 이상 확실히 손을 쓸 생각인 것이다.
“지그레브와는 상황이 다르니까요. 더구나 지금은 목표로 하는 물건이 눈앞에 있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이 많으니 적당히 해서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아닙니까?”
정황은 정확하게 이드의 말대로 였다. 룬을 등 뒤에 두고 카제를 중심으로 서 있는 스물하나의 인원. 그들 모두가 남궁황 정도는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다.
그들을 한꺼번에 상대한다고 이드가 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만, 귀찮아질 것은 확실했다. 그래서 강한 힘으로 한 명씩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릴 생각을 한 이드였다. 그리고 그 첫 타에 맞은 것이 방금 전 검기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저도 그렇지만 여기 라미아도 빨리 일을 마치고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싶거든요. 그렇지?”
이드는 라미아를 향해 슬쩍 윙크를 해보였다. 무언의 뜻을 담은 행동이었고, 서로의 생각을 확실히 알고 있는 라미아였기에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예쁜 집도 사야 한다구요. 그러니까…… 이번 일은 여기서 끝을 맺어야죠. 안티 매직 에어리어!”
낭랑한 라미아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펼쳐지는 마법 역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서서히 들어 올려진 그녀의 손에서 시작된 오색으로 빛나는 한 줄기 빛의 실.
그 빛의 실이 그야말로 빛과 맞먹는 속도로 저택을 포함한 일정한 지역을 휘감으며 거대한 마법진을 그려내고는 스르륵 녹아내리듯 사라져버린 것이다.
바로 라미아가 원치 않는 마법이 사용되는 것을 막아내는 마법진이었다. 정확히 이동용 마법의 사용을 말이다. 혹시 모를 룬의 도주를 미리 막아놓은 것이다.
“헛헛…. 괜한 수고를 하는군. 룬님이 이곳에서 끝을 보실 마음을 먹은 듯하니까 말이네.”
카제는 허허롭게 웃고는 손을 들어 주위에 있는 스물한 명의 무인들을 몇 명씩 뭉쳐서 배치했다.
이드는 일사불란한 적의 동태에 일라이져를 꺼내 들고는 라미아를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녀가 마법을 봉인하고 있는 이상 라미아가 특별히 나설 일은 없기 때문이었다.
“뭐, 간단히 들어놓은 보험이라고 생각해주세요.”
부우우
카제의 말에 가볍게 응수한 이드는 일라이져의 검신으로부터 카제와 같은 은백의, 하지만 좀 더 투명한 검강을 뻗어냈다.
“먼저 시작하시죠.”
이드는 일라이져를 앞으로 내뻗으며 카제와 그의 수하들의 공격을 기다렸다. 하나하나 확실히 상대할 생각을 굳힌 이드였다.
카제 역시 그런 이드의 의지를 확인한 것인지 늙은 몸을 긴장시키며 룬을 지키는 무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는 합공을 하도록 하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방법이긴 하지만….. 자네의 실력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일세. 모두 긴장해라! 상대는 본인보다 강하다. 공격을 피하고 짝을 이루어 공격한다. 또한….. 원거리 공격을 위주로 한다. 가라!”
본래 저런 공격 방향의 지시 같은 것은 몰래 하는 것이 아닌지…..
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을 향해 기기묘묘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검기를 막아 갔다. 이십일 인의 무인 모두 카제를 확실히 믿고 있는 때문인지 카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말을 따른 원거리 공격이 상당한 내력을 담고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후우! 오랜만의…..실력발휘다. 무형기류 전(轉)!”
자잘한 비무 따위가 아닌 정말 오랜만에 몸으로 경험하는 전투라 힘이 솟는 모양이었다. 불끈 힘이 들어간 팔을 따라 휘둘러지는 일라이져의 검로에 그어지듯 쏟아져 나온 강기무가 이드를 중심으로 원을 형성하며 회전을 시작했다.
주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공격에 둥근 강기의 그림자로 몸을 가린 모습이 껍질 속으로 숨은 거북이와 같았다. 하지만 무작정 공격을 막는 것이 아니었다.
쓰스스스스
강기무 자체가 유유(幽柔)한데다 원의 형상을 하고 회전까지 하고 있었기에 공격해 들어온 강기의 기운들이 모두 이화접목의 수법에 걸린 듯 약간씩 궤도를 수정해 이드를 아슬아슬하게 비켜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위험이 비켜갔다 싶은 순간 이번엔 이드의 공격이 이어졌다.
“무형기류 산(散), 변(變) 무형비엽(無形飛葉)!”
한밤중 고요한 가운데 바람에 나뭇잎이 바닥을 쓸며 날리는 소리가 이러할까.
싸아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강렬히 회전하던 압축된 강기무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작은 반달형으로 변해 회전하더니 카제를 비롯한 이십일 인을 향해 쾌속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절묘한 방어에서 공격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는 한 수였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초식의 변화에 급히 이드의 공격에 대항하던 사람들 중 몇 명이 허둥대다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대단하군….. 예상은 했지만 참으로 대단한 실력이네.”
카제는 일도로 강기의 파편을 처리하고는 감탄에 찬 눈으로 이드를 바라보았다.
적이기 이전에 순수하게 이드의 실력에 놀라고 있는 것이다. 젊은 나이에 참으로 기적과도 같은 성취.
“그 실력으로 나와 한번 어울려 보세나. 현천대도(玄天大刀)!”
콰르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검은 칼, 번개가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카제의 손에 들린 목도를 중심으로 생겨난 회색의 거대한 도가 허공에서 이드를 향해 떨어져 내린 것이다.
그것은 다른 변식도 없었고, 속도도 빠르지 않았다. 오직 힘. 이름 그대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큰 칼의 기세만이 담겨 있는 강력한 초식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드를 긴장시키기엔 모자랐다.
“강함이라면 지지 않지요. 무형대천강!”
이드는 일라이져에 형성되는 은색의 검강으로 회색빛 대도를 향해 찔러 갔다. 베기와 찌르기. 힘과 힘의 부딪침은 그대로 힘으로 터져 나와 주위에 커다란 충격파를 생성시키며 다시 한 번 거대한 먼지바람을 일으켰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뿌연 먼지 속에서 이드와 카제는 마치 옛날 미 서부의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흑백 영화를 찍듯이 서로를 향해 천천히 움직여 나갔다. 그리고 이런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더해질 때마다 먼지바람도 조금씩 찢겨 나가며 다시 화면은 총천연색으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화면에서는 카제가 손해를 보고 있었다. 다름 아니라 카제의 몸 여기저기에 혈흔이 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부상 입은 흔적들을 확인하자, 잠시 뒤로 물러났던, 방금 전 공격으로 이제는 십육 인이 되어버린 무인들이 공격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이드의 움직임은 지금보다 세 배나 빠르게 바빠져야 했다.
“히얏! 수라참마인. 철황포!”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바쁘게 움직이던 어느 순간, 운룡대파식의 연천만해(燃天彎海)의 초식으로 거꾸로 서 있던 이드의 입에서 기합성이 터져 나오며 순식간에 핏빛으로 붉게 물든 강기가 주변의 공격을 막고 철황포로 앞에 붙어서 공격하는 카제를 떨어트렸다.
그러자 틈이 생겨났다. 당연히 이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고, 이드의 손가락 끝이 붉게 물들었다.
“혈뇌천강지(血雷天剛指)!”
쩌러렁
이드가 가진 지공 중 가장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순식간에 뻗어나간 지력에 다섯 명이 전투 불능이 되고, 세 명이 부상을 입었다.
카제는 그 참담한 광경을 바라보며 승패를 불 보듯 뻔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드의 승리였고, 그것은 이 싸움이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애초에 정해졌던 것인지도 몰랐다.
판단이 내려지는 순간 카제는 손을 들어 모두를 물러나게 만들고는 룬을 불렀다.
“정말 강하군, 정말 강해….. 별수 없이…… 단장이 나서 주어야겠네.”
카제는 룬에게 뒷일을 맡기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이드를 약간은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혹시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였다.
잠시 후면 이들을 죽이지 않고 제압할 수 있었고, 이런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변수는 없었다. 룬이 개입한다는 말에 이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 당사자를 바라보았다.
뿐만 아니라 카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일제히 룬을 향했는데, 룬은 그 시선들 속에서 가만히 검을 들어 잠시 싸움을 멈춘 이드를 가리켰다.
순간 브리트니스와 룬의 손에서 검은색의 희미한 형상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것이 다였다. 브리트니스는 다시 내려졌고, 상황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하지만 장내의 사람들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남은 십일 인과 카제는 뭔가를 아는 표정이었고, 이드와 라미아는 희미하지만 아주 촘촘한 비단결 같은 옅은 기운의 흔적을 그제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기운이 약해. 저걸로 뭘 할 수 있다고?’
이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또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뒤로 물러나 있던 라미아는 미미한 기운에 대해 파악하려고 마나를 펼쳤다.
그 사이 다시 카제와 십일 인 무인의 원거리 공격이 시작되었다.
당연히 이드는 그 공격을 막거나 부수어버리고는 절묘하게 공격으로 초식을 전환해 날렸다.
분명히 날렸다.
“엇? 뭐, 뭐야!”
이드는 전투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갑자기 동작을 멈춘 채 황당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분명히 상대를 향해 날린 공격이 중간에서….
“사라졌다?”
사라져버린 것이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알 수 없는 일에 당황했지만 느긋하게 생각해 볼 여유는 없었다. 카제와 무인들의 공격이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공격을 막고 반격을 했지만 역시 날아가던 검강은 중간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아니, 무언가에 먹혀버렸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 듯싶은 상황이었다.
“칫, 이건…..뭐야. 백화난무, 수라만마무!”
이드의 기합과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붉은빛의 축제가 벌어졌다. 붉은 꽃잎과 붉은 강사가 사방으로 뻗어나간 것이다. 이번 한 수는 상대의 생명을 고려하지 않은, 그러니까 상대를 갈가리 찢어버리기에 충분할 만큼 확실한 살수였다.
하지만 그런 날카롭고 강력한 살수도 중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이드는 공격을 멈췄다. 대신 오직 방어에만 주력했다. 그리고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는 건……. 다른 공격도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지만, 방금의 상황으로 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고……. 그럼 12대식을 사용해야 하나? 설마, 룬이 손을 쓴 게 이런 것일 줄이야.’
자신의 검강이 사라지는 순간 그곳에서 너울거리는 희미하지만 존재감 있는 기운을 느꼈었다. 바로 룬에게서 비롯되던 기운!
이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에 대해 알아보겠다던 라미아의 말을 기억하고는 그녀를 불렀다.
‘라미아!’
‘알아냈어요. 이드님의 공격이 사라지는 것을 통해 알아낸 사실인데….. 아무래도 이드님의 공격은 중간에 봉인당한 듯해요.’
‘봉인?’
카르네르엘의 말이 다시 생각나는 이드였다.
‘네, 아마 이드님을 중심으로 크게 원형을 그리면서 봉인의 힘이 진을 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기운이 중간에서 이드님의 공격을 가로채서 봉인하는 거죠.’
‘대응법은?’
이렇게 막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고위의 봉인 마법이긴 하지만 강력하진 않아요. 제가 해체할 수 있어요. 하지만 방금 전 룬의 모습을 봐서는 금방 다시 마법을 펼쳐질 거예요.’
‘그럼?’
‘직접 공격을 하세요. 이 마법은 중간에 이드님의 공격을 잡아먹는 것이지, 직접적인 타격을 막아내거나 이드님의 신체를 구속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좋아.’
공격접이 정해지자 이드는 온몸에 내력을 돋웠다. 그리고 상대방의 생명에 대해서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원한이 없기에 웬만해서는 생명을 취하지 않으려 했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그것을 신경 써 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중간에 강기가 먹히는 모양으로 봐서 카르네르엘이 걱정했던 대로 자신이나 라미아를 대상으로 봉인 마법이 펼쳐질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정확한 상대의 힘에 대해 알지 못하는데 겔게 끄는 것은 위험하다.
이드는 다시 한 번 사방에서 덮쳐드는 공격을 상대하고는 크게 일라이져를 허공에 뿌렸다.
“찻, 화령인!”
이 공격은 봉인의 힘을 다시 확인하고, 상대의 눈길을 끌며,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는 일수였다.
이드는 강기의 칼날이 허공을 나는 순간 일라이져를 허공에 던지고 칼날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허공을 날아가는 강기에 전혀 뒤지지 않는 분뢰보의 속도로 천방치축 사방으로 번개가 뻗어나가듯 그렇게 이드의 몸이 사방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철황기(鐵荒氣) 철황파산(鐵荒破山) 연환격(連還擊)!”
이드의 팔이 검게 물들고 그 주먹에 철황권의 파괴력이 날뛰었다.
빠각 뻐걱 콰아앙
검게 물든 번개가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그가 지나간 곳에서는 뼈가 부서지는 소름 돋는 소리와 함께 폭음이 일어났다.
남아 있던 카제와 십인 인은 갑작스런 이드의 쾌속적인 행동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다. 룬의 능력을 확실하게 믿고 있었고, 원거리에서 초단거리로, 검에서 권으로 바뀐 이드의 공격이 너무나 갑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크아악…..가, 강……해”
검게 물든 이드의 주먹이 막을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것은 카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옆구리로 깊게 틀어 박혔다 빠져나가는 이드의 주먹에 카제의 허리가 그대로 숙여진 것이다. 더구나 이드의 주먹이 순식간에 빠져나갔음에도 그대로 함몰되어 있는 것이 늑골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수가 부서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드가 카제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자 뚝뚝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목소리로 카제의 입이 열렸다.
“…..커…..헉…. 루…… 룬의….. 생명…..은…….살려…….죽……..큭…….”
끝까지 마지막 할 말을 마치는 카제의 입에서는 한 줄기 핏줄기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부러진 늑골이 내부 기관을 찌른 것이다.
좀 전 검으로 싸울 때도 한참이나 공수가 오갔는데 반해 주먹을 든 후에는 카제조차도 금세 처리되어 버렸다. 이드가 상대를 생각하는 그 작은 사고의 차이가 이런 상황의 변화로 나타난 것이다.
“말씀은 기억하겠습니다. 하지만….. 어찌 될지 답을 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다만, 저도 생명을 거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상황이 좋지 않아 과하게 손을 썼지만 제가 거둔 생명은 다섯. 되도록 바라시는 대로 처리하죠.”
이드는 애써 스스로를 속이고 싶지는 않았다. 앞으로의 일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결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대답을 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전투 상태가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카제는 그런 이드의 불투명한 대답으로도 충분했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릎을 꿇었다. 보기 좋던 수염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 그들의 패배를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