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65화
세 사람이 걸어가고 있는 성문 앞은 저녁 시간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복잡하지만 활기차 보였고, 대부분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보이는 눈들이었다. 대체로 행복하고, 현실의 시름으로부터 약간은 벗어난 여유들이 있어 보였다.
아마도 이들 대부분이 관광 명소인 페링을 찾는 외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 성문은 관광의 묘미를 깨지 않으려는 듯 대체로 개방적이었고, 통과 절차 역시 까다롭거나 하지 않아 오히려 형식적인 수준이었다.
이드 일행도 간단하게 얼굴만 비추고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뭐 채이나가 있는 한 통과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테지만 말이다.
“테이츠 영지에 어서 오십시오.”
관광 명소의 이미지가 잘 어울리게 도열한 기사들 역시 전투 복장과는 무관하게 장식용 검을 착용하고, 행사용 복장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기사가 아니라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해 고용된 일반인들일지도 몰랐다. 일반인들이 기사 복장을 하는 것은 전쟁터가 아니라면 금기시된 것이지만 관광 대국 특유의 발상이 이런 묘한 규범을 가능하게 한 것 같았다.
이드는 조금은 이러한 관광객 환대 서비스가 낯설기도 했다. 하지만 계급 질서가 확고한 나라에서 이런 풍경은 또 페링이 아니면 보기 어려울지도 몰랐다.
아무튼 서비스용 멘트와 인사를 받으며 들어선 성 안은 호수의 풍경만큼이나 아름답고 화려했다.
사람들 역시 일반적인 성 내의 영지민들과는 달라 보였다. 마치 영지의 귀족들을 모두 불러 모은 것처럼 깔끔하고 화려한 형형색색의 복장들을 하고 있었다. 이곳이 대륙에서 얼마나 잘 나가는 관광지인지 단박에 느끼게 하는 증거들이었다.
거기다 영지의 건물들은 애초부터 관광을 고려해 지어진 듯 반듯반듯했고 예술적인 면이 많이 가미되었으며, 길도 페링 호수로 향하는 큰 길이 널찍하게 뻥 뚫려 뭔가 시원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관광 도시의 면모를 안팎으로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는 게 쉽게 느껴졌다.
“자, 그럼 오늘은 어디서 쉴까? 모두 주머니 조심해. 이런 곳에선 털리기 쉬워.”
잠시 거리를 휘휘 돌아보던 채이나는 곧 큰길 한쪽으로 나란히 서 있는 여관들을 보고는 그곳으로 향했다.
“걱정 마요. 거기다 오히려 이런 곳엔 도둑들이 없을 걸요. 손목 한 번 잘못 놀렸다가는 그대로 목이 날아갈 텐데, 무슨 담이 커서 여기서 작업하겠어요?”
이드는 유유자적 천천히 거리를 걷고 있는 화려한 복장의 남녀노소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아마 저들 중 대부분이 귀족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도둑들도 머리가 있고, 눈치가 있다.
이렇게 귀족들이 많은 곳에서 도둑질을 하다 걸리는 날에는 여기가 그대로 인생의 종착역이 될 게 뻔했다. 다리를 뻗어도 누울 자리를 보고 뻗으라고, 그런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도둑들이 이 대로에서 절대 설칠 리가 없었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흠, 그럼 저건 바보?]
이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들려온 라미아의 말이었다.
이드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느낌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런 썩을…….”
순간 이드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이드의 시선이 향하는 곳 그곳에는 영지 병으로 보이는 복장에 긴 창을 들고 있는 병사가 막 여러 사람들 사이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정규 병사인 것 같았다.
헌데 그냥 지나가면 문제가 아니었다. 이드가 보는 그 순간 그의 손이 번뜩이는 속도로 옆 사람의 품속을 탐험하고 나온다는 게 문제였다. 그냥 봐도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 프로급의 솜씨였다.
[이드가 보는 게 두 사람째네요.]
“하하하.”
라미아가 이렇게 말하자 이드는 물론 뒤늦게 상황을 안 채이나와 마오도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관광객을 보호해야 할 병사가 소매치기를 하다니. 영지 안에서 저렇게 돌아다니는 걸 보면 진짜 병사인 건 분명한데 말이다.
그래도 나름대로 절묘하다고 해야 할까? 병사가 소매치기를 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하겠는가? 아니, 소매치기가 병사 복장을 하고 있는 건가?
아무튼 그런 작태를 발견하자 채이나의 욱하는 성격이 바로 발동했다.
“난 저런 가면 쓴 놈이 제일 싫어. 마오, 저놈 잡아!”
백 미터 달리기의 총소리를 들은 달리기 선수가 따로 없었다. 채이나의 말에 마오는 항상 품속에 품고 있던 단검들 중 두 자루를 내던지고는 바로 소매치기 병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야, 야. 잠깐.”
괜히 시끄럽게 해서 좋을 것 없다는 생각에 이드가 말려 보려고 말을 꺼냈지만 이미 마오는 저 앞으로 달려 나간 후였다.
마오가 던진 두 자루의 단검은 한 자루는 병사의 가슴을 스치며 옷을 찢고, 다른 한 자루는 그의 신발을 뚫고서 그의 발등에 박혔다.
찌이익…… 푹!
“아, 아악…… 컥!”
가죽과 살덩이를 찔러 대는 소리와 함께 뭔가 한 발 늦은 듯한 병사의 찢어지는 비명이 뒤를 이었다.
생각도 못한 일을 워낙 창졸지간에 당하다 보니 발에 단검이 박힌 것을 인식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린 탓이었다. 하지만 속 다르고 겉 다른 병사는 그 비명조차도 제대로 다 지르지 못했다.
퍼억.
다름 아니라 자신이 던져 낸 비도를 뒤쫓아 온 마오가 병사의 등 뒤를 강하게 차 올리며 그를 걷고 있는 방향으로 날려 버린 때문이었다.
그 발차기의 충격에 품속에 넣은 돈 주머니가 튀어나오며 발등에 단검을 단 병사와 함께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이 갑작스럽고 창당한 사태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끄으…… 한 발 늦었구나.”
이드는 순식간에 종료된 상황을 어이없이 바라보며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부여잡았다. 옆에서 그런 모습을 바라본 채이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너 내가 지금 한 일이 불만이야? 잘못한 건 없잖아.”
“네, 분명 좋은 일이긴 하죠. 저런 놈은 저도 싫어요.”
정말 저런 인간은 싫었다. 뭣보다 최근 이드가 지구에서 보았던 국회의원이라는 정치인들을 생각하면 더욱 짜증이 난다.
몬스터가 나타났다 하면 제일 먼저 가디언 본부로 뛰어 들어와 몸을 숨기고는 가디언들의 수고가 마치 자신들의 성과처럼 목소리만 높이는, 얼굴에 기름기만 좔좔 흐르는 인간들을 가까이서 봤으니 그와 같은 부류인 저 병사가 좋아 보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별로 좋지 않잖아요. 아직 기척은 없지만 분명히 제국에서 열심히 뒤를 쫓아오고 있을 텐데……, 이렇게 튀어 보이는 일을 해서 좋을 게 없다구요.”
“뭐, 그건 그래. 하지만 저런 놈을 그냥 둘 순 없어. 거기다 여긴 라일론 제국이 아니야.”
다른 나라이니 만큼 무슨 큰일이야 있겠냐는 말이었다.
[그것도 그렇긴 하죠.]
라미아도 비슷한 생각인가 보다. 사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라 이드는 어쩔 수 없이 가벼운 한숨으로 마음을 달래고는 소매치기를 제압한 마오에게 다가갔다. 그 주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저, 저건 내 보석 주머니? 저게 어떻게.”
경악한 그 목소리를 들으니 사건은 무리 없이 금방 마무리될 것도 같았다.
“에휴, 그나마 다행이다.”
곧 소식을 듣고 도시 내부를 담당하는 경비대 대장과 병사들이 달려오고, 병사의 품에서 나온 다섯 개 주머니의 주인들이 고함을 치고, 일의 경위를 묻는 등 저녁 때의 대로가 대낮의 시장통 마냥 한껏 시끄러워졌다.
법을 지켜야 할 병사가 범죄를 저질렀으니 당연히 더 소란스럽고 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일이 일이다 보니 자칫 이드 일행까지 증인으로 얽혀 복잡하게 연관이 될 뻔했다.
하지만 다행히 채이나의 존재가 확인되면서 그런 복잡한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라일론의 레크널 영지에서와는 달리 엘프인 채이나의 존재를 확인한 경비대장이 바로 정중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는 물러난 덕분이었다.
채이나의 존재를 알고도 쉽게 물러서지 않던 레크널의 태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는데, 사실 이런 태도는 드레인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마오가 처리한 일 자체가 죄가 아닌 정의로운 일이었던 데다, 블루 포레스트를 찾는 상당수의 엘프가 그들의 존재를 확실히 해 둔 덕분이었다.
다시 말해 다른 나라에 비해 엘프를 볼 기회가 많았던 드레인 사람들의 머리에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엘프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 확실하고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증인이니 어쩌니 하는 것이 필요가 없었다. 달리 어떤 절차나 심판도 없었다. 엘프가 관련되었다는 것은 진실의 편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고하게 해 줄 뿐이며 따라서 소매치기 병사는 확실한 범인으로 단정되어 곧바로 경비대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날 밤. 일행은 보석 주인의 보답으로 영지에서 최고급에 해당하는 멋진 여관에서 또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머무를 수 있었다. 역시 좋은 일을 하면 복을 받는가 보다.
좋은 일에 대한 대가는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며칠간 노숙을 하면서 써 버린 물건들을 보충하기 위해 시장으로 나선 일행들은 뜻하지 않은 호의를 받게 되었다. 그들의 선행을 목격했던 상인들이 후하게 인심을 쓰느라 저마다 꽤 값나가는 선물을 준 것이다.
어쩌면 그 병사 소매치기로 인해 손해를 본 사람들이 많았는지도 몰랐다. 상인들로부터 자세한 사정은 들을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 병사를 잡은 것은 꽤 화제가 되고 있었다.
일행들을 알아보는 상인들은 선물이 아니더라도 싸게 물건을 팔며 보답하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경비대의 병사들 십여 명이 건달들과 한패를 이루고서 뒷골목에서 상당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는 수사 결과가 나오면서 이드 일행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다. 알고 보니 마오가 꼬리를 붙잡은 셈인데, 그걸로 몸통까지 모두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뭐, 그 한편으로는 채이나가 엘프라는 점도 한몫을 하기도 했겠지만 말이다.
사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런 친절을 거부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이어진 친절은 뜻하지 않은 부작용을 낳았는데, 바로 이런 상인들의 인심에 한껏 기분이 고무된 채이나가 영지에서 며칠을 더 머무를 것을 주장한 것이다.
물론 마음이 바쁜 이드에게는 기운 빠지고 혈압 오르는 일이었다. 곧바로 가는 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걸어가는 수고를 해야 하는 것도 불만스럽고 게다가 조바심 나는데, 한곳에 머물러 며칠 쉬어 가자니!
하지만 그렇다고 채이나의 고집을 꺾거나 설득할 자신도 없는 이드였기에 그저 고개를 숙이고는 마오와 함께 채이나에게 끌려 다닐 뿐이었다.
[에휴, 이드. 쯧쯧쯧.]
또 그런 이드를 그저 불쌍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라미아였다.
결국 눈에 뵈는 게 없어진 채이나가 고집을 부리면서 이드는 사흘을 영지에서 더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사흘이 지난 뒤에는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하며 자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처음 며칠 더 머물러야겠다는 거의 통보에 가까운 말을 꺼낼 때 이드는 정말 아찔했었다. 채이나의 그 좋아하던 얼굴로 미루어 본다면 적어도 일주일은 꼼짝없이 잡혀 있어야 될 줄 알았는데, 사흘이라니 그나마 다행인 셈이었다.
물론, 이렇게 된 데는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바로 좋은 일에 대한 대가의 보상 기간이 이틀 만에 끝나 버린 것이 그 이유였다.
처음엔 상인들도 즐겁고 고마운 마음에 물건을 싸게 주었지만, 그게 하루 이틀을 넘기자 그것이 그들에게 상당한 손해가 된 것이다. 고마운 마음도 잠시지, 물건을 팔아 살아가야 하는 입장에서 언제까지 손해를 볼 수 없었던 그들은 이틀째부터 깎아 주거나 얹어 주는 것 없이 물건의 제값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덤으로 들어오는 공짜 물건들이 없어지자 채이나는 미련 없이 영지를 떠나기로 결정을 내렸다.
더 있어서 들어오는 것도 없고, 영지와 호수 구경은 이틀 동안 원 없이 충분히 했기 때문에 바로 떠나기로 한 것이다. 이드로서는 그저 고마운 일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부인 오늘 떠나신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일행들이 떠나기로 한 날 이른 아침.
이드 일행이 아침을 먹고 쌉싸름한 차 한 잔으로 입가심을 하고 있을 때 다가온 기사의 말이었다.
분명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 갑자기 얼굴을 들이대자 세 사람은 모두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계속 함께 다닌 만큼 그런 사실은 누구보다 그들 자신이 잘 알았다.
“네, 좋은 아침이군요. 헌데, 누구시죠? 그쪽은 저희를 아는 듯합니다만. 저희들은 그쪽을 전혀 모르겠군요. 소개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런, 죄송합니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라멘 데파라, 드레인 테이츠 영지의 주인이신 돈 테이츠 백작님의 기사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런데 기사님께서 무슨 일로…….”
이드는 기사라는 신분에 채이나가 또 엉뚱한 말을 할까 싶어 재빨리 이렇게 손수 접근한 목적을 물었다.
하지만 기사는 오히려 당사자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드의 물음이 거슬렸는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하기사 그게 아니더라도 미녀와 이야기를 하는데 끼어들었으니 좋아할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크흠, 백작님의 명령으로 왔네. 영지의 불행을 해결해 주신 감사의 뜻으로 페링을 바로 건널 수 있는 배를 준비했지. 그리고 부인, 이것은 백작님께서 드리는 편지입니다.”
라멘이라 밝힌 기사는 이드에게 퉁명스레 대답하고는 채이나를 향해 표정을 밝게 꾸미며 품에서 새하얀 봉투를 꺼내 들었다.
채이나는 슬쩍 라멘을 흘겨보더니 봉투를 받아 들고는 그 속에 든 편지 한 장을 꺼내 읽었다.
“흐응…….”
잠시 후 편지를 모두 읽고 난 채이나는 슬쩍 라멘을 바라보더니 그것을 이드와 마오에게 건네주었다.
편지는 한 면을 모두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꽤나 긴 장문의 편지였다.
하지만 이드는 첫마디를 읽고부터 한심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거의가 칭찬과 미사여구로만 도배되어 말을 빙빙 돌리는 전형적인 귀족 스타일의 현란한 말투로 이루어진 편지였다.
‘참, 한심하단 말이야. 그냥 간단히 용건만 쓰면 얼마나 좋아.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영지에서 있었던 일은 영지의 망신이다. 다른 곳에 소문내지 마라. 엘프가 소문내면 쪽팔려. 소문 내지 않으면 다음에 올 때 사례하지. 시장에서 욕심 부렸던 것 다 알아, 뭐 이런 내용이잖아. 줄이면 딱 서너 줄인데, 지금 이게 몇 줄이야.’
[쿠쿡…… 정확히 마흔두 줄이네요. 정말 할 말을 이렇게 늘이는 것도 기술이에요.]
라미아의 말마따나 기술이든 어쨌든 참 한심한 편지였다.
하지만 채이나의 성격을 짧은 시간 잘 알아낸 편지기도 했다. 엘프인 채이나를 물건으로 설득할 생각을 하다니. 다른 엘프는 어떤지 몰라도 채이나에게는 잘 통할지도 모를 그럴싸한 유혹이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이드의 생각대로 채이나는 별다른 갈등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승낙을 했다.
“편지는 잘 받았어요. 백작님께 그렇게 하겠다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해 주세요. 그런데 배는 언제 가죠?”
“감사합니다, 부인. 배는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습니다. 백작님의 배려로 여러분들을 위해 저희 영지가 보유한 수군의 가장 빠른 배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군사용으로 사용되는 수군의 배라니, 과할 정도로 신경을 많이 쓰고 있음에는 틀림없었다.
하기사 드레인에서 엘프의 말이 가진 힘이 대단하긴 하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소매치기를 잡은 선행까지 적당한 명분을 더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좋아요. 그럼 바로 가죠. 이드, 아들! 가자.”
따로 무언가를 챙길 것도 없는 단출한 일행이었다. 필요한 것은 모두 아공간에 들어 있었다.
채이나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라멘도 덩달아 황급히 일어났다. 설마 이렇게 바로 가자고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이봐, 주인.”
기사는 급히 일어나 문 쪽으로 성큼 나서며 여관의 주인을 불렀다.
“예, 기사님. 부르셨습니까.”
“여기 세 일행의 숙박비를 계산하고 싶은데. 얼마인가.”
기사는 품에서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얼마가 되었든 내어 줄 것처럼 손을 크게 벌려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러나 액수 대신 다른 대답이 나오자 기사의 손은 빈 허공만 허무하게 쥐어야 했다.
“크흠, 그 계산은 이미 저분들께서 식사와 함께 모두 하셨습니다, 기사님.”
“그, 그런가.”
라멘은 여관 주인의 말에 손에 든 주머니를 서둘러 품속에 집어넣었다. 당당하게 나섰다가 그게 쓸데없는 일이었다는 말을 들으면 민망하고 당혹스럽다. 지금의 라멘처럼 말이다. 또 그런 상황을 넘기기 위해 지금의 라멘처럼 행동한다.
“자, 가시죠. 제가 앞장을 서겠습니다.”
라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여관 문을 나섰다.
라멘이라는 기사는 기사 특유의 거만한 태도가 몸에 배어 있긴 했지만 아직 순진함이랄까, 그런 것도 있는 듯해서 오히려 친근함을 주기까지 했다.
“쿡쿡…… 우리도 빨리 따라가죠. 이러다 놓치겠네. 아저씨, 잘 쉬고 갑니다.”
“아, 자네도 여행 조심하고. 두 분도 또 들러 주시구요.”
이드는 며칠 동안에 불과했지만 들고 나며 얼굴을 익힌 여관 주인에게 아쉬운 인사를 건네고는 채이나와 마오의 등을 떠밀며 여관을 나섰다.
기사는 벌써 저 앞에서 슬쩍 뒤를 돌아보며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망한 행동을 하기는 했지만 본연의 임무를 잊지는 않은 것이다.
“저기 멀리 보이는 저곳이 페링 호수의 안전을 지키는 수군의 진영입니다.”
테이츠의 수군은 영지의 제일 외곽에 있었다.
영지 전체가 관광지와 관광 상품이라 해도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만큼 테이츠 영지는 유난히 특색이 있는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거칠고 딱딱한 군부대가 가까이 있어서 좋을 것이 없었다.
덕분에 일행은 영지의 대로를 통해 호수까지 나와 저 멀리 보이는 수군의 진영까지 걸어가야 했다. 대충 마음이 정리가 된 듯한 라멘이 마차를 준비하겠다고 나섰지만, 마차를 기다리는 게 오히려 번거로워 거절하고 그냥 걷기로 했다.
또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호수를 따라 걷는 게 상당히 마음에 들기도 했으니까.
“역시 그렇게 커 보이지는 않네요.”
“채이나, 여긴 바다가 아니라 호수라고요.”
페링의 수군 진영이 전체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곳에 도착하자 라멘이 그곳을 가리켜 보였다.
“하하하, 그 말이 맞습니다. 광대한 바다를 지키는 게 아닌 이상 저 정도의 수군이면 페링 정도는 충분히 커버가 됩니다. 더구나 저희 영지의 수군들은 늘 페링과 함께 하다 보니 물에 익숙해서 수전엔 당해낼 군대가 없지요. 가끔 나타나는 수적 놈들과 수상 몬스터도 이곳에서만큼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라멘은 자신감에 넘쳐 말했다. 일반적으로 내륙뿐만 아니라 바다를 끼고 있는 나라라도 정예 수군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해전은 그저 특수한 경우에 발생하는 전투 양상이었고, 육전의 기사단 전투로 성을 함락시키거나 방어해 내면서 승패를 가름하는 게 대부분이라고 봐야 했다.
그래서 수군의 가치는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강력하게 만들 필요도 거의 없겠지만) 부수적인 혹은 특별한 경우에만 발생하는 정도에 그치므로 무시당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정예화된 수군에 대한 자랑을 듣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고 조금 낯설기까지 했다. 이것 역시 호수와 강이 많은 드레인의 지형적 특징에서 비롯된 듯했다. 그러니까 이 나라를 지탱하는 군대는 수군이 제일 우선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게다가 전투 역시 그런 모양이었다.
페링은 아카이아처럼 크진 않지만 작은 남작의 영지만한 규모를 가진 거대한 호수다. 결코 작지 않다는 말이다. 그 작은 남작의 영지에도 산적들이 들끓는 경우가 많은 만큼 이 페링에도 적지 않은 수적들이 설치고 있었다.
특히 수적들은 고기 잡는 어부인 척 위장을 하고 있다가 감시 초소가 미치지 못하는 지점을 지나는 여객선을 습격하기 때문에 더욱 골치 아픈 족속들이었다.
거기다 육지에서보다 감당하기 훨씬 곤란한 수상 몬스터들까지 수시로 출몰했으니 호수의 적(敵)들에 대한 골치는 두 배로 아픈 셈이었다.
당연히 그런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그래서 조직적인 군대 규모로 생겨난 것이 호수를 지키는 수군으로, 지금 이드 일행이 향하는 곳에 머물고 있는 저들이었다.
이드는 라멘의 설명을 들으면서 중원의 장강수로십팔채(長江水路十八採)와 동정호(洞庭湖)를 누비는 수적들이 생각났다.
호수의 수적들과 몬스터들이 그들과 묘하게 겹쳐져 생각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이곳의 수적은 무공을 익히지도 않았을 것이고, 중원에는 몬스터가 없다는 차이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이곳에는 그런 이들이 없는가 하는 의문으로 이어졌다.
“라멘 경, 그러면 강에도 수적이 있습니까? 전문적으로 단체를 이뤄 강에 오고 가는 배를 터는 자들 말입니다.”
뭔가 기대감 섞인 이드의 물음에 라멘은 잠시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나라의 녹을 받고 국경과 영지를 지키거나 영지민을 위해 치안을 유지하는 게 주된 임무인 기사라는 직분으로 자기 나라에 도적들이 있다고 당당히 말하기가 껄끄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란 생각이 들었는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있네. 호수에 수적이 있는 만큼 강에도 그들이 가끔씩 모습을 보이네. 하지만 절대 많지는 않아.”
“많지 않다구요?”
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원에서는 물길이 모인 호수보다 도주와 추적이 용이한 강에서의 활동이 더 많았는데, 여긴 반대라니.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군다나 호수는 노출이 커서 쉽게 발견되거나 여러 척으로 함정 추적이 이루어지면 잡힐 수밖에 없는 약점이 있었지만 강은 강의 수리를 잘 알고 있는 수적이라면 위장과 탈출이 용이해 창궐할 가능성이 훨씬 많은 게 상식이었다.
“크흠, 이해가 되지 않나 본데 내 설명해 주지. 우선 강에서 활동하는 수적은 호수에 나타나는 자들의 반의 반도 되지 않아.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강과 호수라는 환경과 사용 목적의 차이 때문이야.
우선 사용 목적부터 따져 볼까? 여기 페링과 같은 호수에 띄우는 배는 그 목적이 거의가 관광과 휴식이야. 반면 강에서 운행하는 배는 물건과 사람들의 운반이 그 주목적이지.
자, 그럼 여기서 질문. 이 두 곳에 떠다니는 배들 중에 어느 쪽이 더 많은 경비를 세워 둘 것 같나?”
“……강 쪽?”
이드의 대답에 라멘은 후후후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강에서 운행하는 자들의 경비가 더 튼튼하다. 사람이나 짐이나 모두 지켜야 할 것들을 운반하고 있으니 경비가 착실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호수는 휴식과 관광이 그 주목적이다 보니 아무래도 나태해지고, 풀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때는 호위를 위해 항상 함께 있는 호위 기사들도 귀찮아지기 마련이다. 당연히 경비가 허술할 수밖에 없고. 소규모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수적들에겐 잘 차려진 밥상에 만만한 먹잇감이 되는 것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수적들에겐 호수보다 강이 몇 배나 위험하다는 약점이 있었다.
다름 아니라 호수와 강의 넓이의 차이와 함께 마법사의 존재 때문이었다.
멀리서 보고 쏠 수 있는 마법의 존재란 그 마법을 막을 방법이 없는 수적들에겐 말 그대로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절대 경험하고 싶지 않은 악몽!
그런데 강의 경우 이 마법이 실행되기가 쉽다. 일단 강은 일직선상에 있다 보니 따로 쉽게 피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다. 강은 호수보다 그 넓이가 좁다. 그러다 보니 준비만 잘 하고 있으면 마법사가 강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지나가는 수적을 의외로 쉽게 소탕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정말 뛰어난 자가 그렇게 작전을 세우면 수상은 물론 지상에서까지 공격을 받게 되기 때문에 꼼짝없이 수장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반면 호수는 상황이 좀 다르다. 바로 그 넓은 크기 때문에 자유로운 운항이 가능했고, 호수에 듬성듬성 떠 있는 작은 섬들을 기반으로 숨을 곳도 있었다.
또 마법사도 좋든 싫든 배에 타고 움직여야 했는데, 흔들리는 배에서의 마법은 구사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었다. 전문적으로 선상 마법사를 길러낸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으므로 육지에서 활동하는 것과 많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차이가 나다 보니 수적들이 자연스럽게 호수로 모여들게 된 것이다. 또 그렇게 모이다 보니 강에서 활동하는 수적들의 숫자가 자동적으로 줄게 되는 상황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적은 수의 수군에 당하기도 하고, 오히려 물줄기가 빠른 곳이나 여울이 많은 곳에서 특히 강점을 가진 수상 몬스터의 공격을 받아 제대로 대항도 하지 못하고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생겨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적어도 수상 몬스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일은 거의 없는 호수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잘만 하면 비슷한 규모의 수적패들과 동업까지 가능하다는 장점 때문에 강을 활동 범위로 삼는 수적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으며, 출현의 빈도도 많이 적어졌다. 이제는 호수로 몰려드는 수적을 상대하기가 훨씬 쉬워져 수군은 활동 수적의 리스트까지 확보할 수 있었고, 어떤 경우에는 거점까지 추적해 소탕하기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러한 양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시간만 흐르면 강의 수적들은 자연 소멸할 것이라 했는데 라멘은 그게 정말 사실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정도면 충분한 설명이 됐나?”
“아, 예. 설명 감사합니다.”
이드가 지금까지 들었던 꽤 자세하고 명쾌한 수적 활동 현황에 대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자 라미아가 그 내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결국 중원과의 차이점인 마법과 몬스터 때문에 수적이 거의 없다는 말이네요.]
‘마법과 몬스터들이라……. 확실히 수적들이 기를 못 쓸 만도 하네. 중원에도 저런 조건들이 있으면 수적들이 말끔히 사라지려나?’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중원의 강을 지배하는 수적들이 들으면 기겁할 생각을 그려 내 보았다.
뒤이어 이드는 드레인의 사정을 몇 가지 더 물어 들을 수 있었다. 라멘도 채이나와 이야기할 거리가 없어서인지 이드의 말에 처음보다 잘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을 걸어서야 네 사람은 수군의 진영을 눈앞에 둘 수 있었다.
과연 군이 머무르는 곳이라고 해야 할까? 호수의 물과 닿아 있는 부분을 빼고 나머지 부분을 돌과 나무로 만든 높은 돌담이 죽 이어져 있었고, 그 앞으로 수 명의 병사가 굳은 표정으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열려진 문 안으로 보이는 진영 안은 마치 줄을 세워 놓은 듯 가지런히 건물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사이로 많은 군인들이 바쁘게 다니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좀 더 안쪽으로 건물에 가려 돛만 보이는 다섯 척의 큰 배가 보였다.
아마 저곳이 이드 일행이 타고 갈 배가 준비되어 있는 선착장이 있는 것 같았다.
“자, 제 임무는 여기까지입니다. 진영 안에서부터는 이 병사가 대신 여러분을 안내할 겁니다. 부인. 잠시 동안이지만 아름다운 분을 모시게 되어 즐거웠습니다.”
진영 앞에 서 있던 병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라멘이 한 병사와 함께 다가와 한 말이었다.
“저희도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즐거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라멘의 인사에 채이나가 나서 살풋 미소로 화답을 했다.
그녀의 뒤에서 이드와 마오 역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세 사람의 인사에 라멘은 크흠, 헛기침을 하고는 병사에게 잘 모시라는 당부를 남기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세 분에 대한 명령은 이미 받아 두었습니다. 가시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라멘이 자리를 뜨자 병사가 입을 열었다. 당당하게 말하는 폼이 일반 병사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추측컨대 진영의 관문을 지키는 자들의 우두머리인 모양이었다. 이 병사의 절제된 행동을 보아 진영의 군기가 상당한 것 같았다.
“호호호…… 그럼 부탁드려요. 어서 호수를 건넜으면 하거든요.”
하지만 그런 군기도 채이나의 미모 앞에서는 힘을 못 쓰는 모양이었다. 부드럽게 웃어 보이는 채이나의 놀라운 애교 짓에 그 당당한 병사의 표정이 무참히 깨져 버린 것이다.
“따 따라오시죠.”
이드는 그 모습을 보며 지구에서 적용되던, 특히 라미아가 가장 많은 덕을 본 절대 진리 하나가 생각났다.
“미인은 뭐든지 용서가 된다. 인간사의 진리지. 마오야, 기억해 둬라.”
[크큭…… 호호호.]
뭔가 근엄하게 내뱉는 이드의 한마디에 마오는 묘한 표정으로 채이나를 보았고, 라미아는 참지 못하고 결국 웃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