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권 – 8화 : 도적을 베어 공을 이루다
도적을 베어 공을 이루다
영천(川)에서 장보(張), 장량(張)의 대군을 맞아 싸우는 황 보숭과 주준은 노식의 짐작대로 처음 얼마간은 어려운 싸움을 치러 야 했다. 황건적의 머릿수가 워낙 많은 데다 아직은 군사를 일으킨 초기의 승세를 타고 있어 사기가 드높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날이 지남에 따라 황건적의 세력이 차차 잦아들기 시작했 다. 아무리 난세라 해도 관군의 주력 일부가 낙양의 금군(禁軍)이고 보면 병장기와 조련에서 황건적으로서는 따라가지 못할 만큼 정병 인 데다, 황보, 주준 같은 역전의 명장들이 이끌고 있어 머릿수만 으로는 이겨낼 수 없었던 까닭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들판에서 머릿수만 믿고 싸우다가는 잘 조 련된 관군에게 조금씩 조금씩 우리 무리를 잃어 마침내는 지고 만다. 달리 좋은 수가 없겠느냐?”
싸울 때마다 번번이 크건 작건 피해를 입고 물러나게 되자 은근 히 걱정이 된 장보가 아우 장량에게 물었다. 장량이 대답했다.
“이곳에서 물러나 장사(長)로 들어가면 숲이 짙고 골이 험한 산 골이 있습니다. 지키기는 쉽고 치기는 어려운 곳이니 마땅히 의지할 만합니다. 더구나 우리 편의 태반은 그곳 지리에 밝은 인근의 백성 들이니 지리에 어두운 관군을 괴롭히기에 아주 알맞을 뿐만 아니라, 잘만 유인하면 단번에 관군을 깨뜨려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그럼 오늘밤으로 영(營)을 그리로 옮기자.”
장보는 아우의 말에 크게 기뻐하며 그날 밤으로 무리를 장사 산 골로 물리었다. 그러나 관군의 추격을 받지 않기 위해 군막을 거두 지 못하고 오히려 화톳불을 피워 거짓으로 기세를 올린 게 탈이었 다. 심하게 몰리지 않고 뜻한 곳에 이를 수는 있었지만 장사에 이르 자 의지할 군막이 없었다. 삼월이라 하나 아직 노숙을 하기에는 찬 날씨였다. 이에 무리에게 명해 마른 풀을 베어 기거할 초막을 얽게 했다.
그런 소식은 이튿날에야 적도가 물러난 것을 알고 추격해 온 관 군에게도 들어갔다. 섣불리 험한 산골로 군사들을 몰아넣을 수 없어 진군을 멈추고 있던 황보숭은 그 소식에 한 꾀를 생각해냈다.
“적이 숲속에 진영을 세우고 마른 풀로 초막을 얽었다니 불로 공 격해보는 것이 어떻겠소?”
“나도 진작에 화공법을 생각했소이다. 오늘 밤 바람이 계곡 쪽으 로 일 때를 기다려 모조리 태워 죽입시다.”
주준도 손뼉을 치며 그 계책에 찬동했다. 두 장수의 의견이 일치하자 곧 군령이 떨어졌다. 모두 한 다발의 마른 풀을 준비하고 어둠 속에 매복해 있게 한 것이다.
하늘이 돕는 것인지 그날 밤따라 바람이 거세었다. 이경이 지났을 무렵 황보숭과 주준은 산골 어귀에 매복해 있던 장졸들에게 명을 내렸다.
“모두 마른 풀에 불을 붙여 계곡으로 던져라.”
장졸들은 시키는 대로 했다. 불은 아직 푸른 잎보다는 마른 잎이 많은 계곡을 타올라 거센 기세로 황건적의 진영을 덮쳤다. 때마침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풀로 엮은 황건적의 진채는 금세 불바다로 변 했다. 마음 놓고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도적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말을 타려 해도 안장을 찾을 길이 없었고 갑옷을 입으려 해도 그럴 틈이 없었다.
황보숭과 주준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군사를 몰아 허둥거리는 도 적들을 베게 했다. 말과 갑옷은커녕 무기조차 제대로 찾아 쥐지 못 한 황건적의 무리라 그 공격을 막아낼 길이 없었다. 태반은 아직 잠 결인 채 놀란 혼이 되고 나머지는 저마다 살 길을 찾아 달아나기 바 빴다.
도적의 우두머리 장보와 장량도 그에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갑옷도 꿰지 못하고 놀란 말을 집어 탄 채 산길을 달리다가 날이 훤히 샐 무렵에야 정신을 수습하고 무리를 모아보았다. 불에 그을고 화살에 상한 무리는 절반도 못 되는데, 뒤쫓는 관군의 함성만 요란했다.
“안 되겠다. 광종(宗)의 형님한테 가 합세하자.”
장보, 장량은 그렇게 의논을 마치고 길을 잘 아는 자를 앞세워 광종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나마도 여의치 못했다. 미처 이십 리도 가 기전에 한 떼의 군마가 앞길을 막았다.
“천조(朝)를 거스른 도적들아, 어디를 달아나려 하느냐?”
한 소리 호통과 함께 길을 막는 장수를 보니 붉은 전포에 불꽃 같 은 털을 가진 말을 타고 있는데, 그렇잖아도 반나마 얼이 빠져 있는 황건적들에게는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신장(神將) 같았다. 붉은 기 치와 붉은 복색을 한 군사들도 마찬가지로 신장을 옹위하고 선 귀졸 (鬼卒)만 같아 대항할 마음은커녕 가슴부터 먼저 떨려왔다.
그렇게 되니 싸움다운 싸움이 될 리 없었다. 저마다 칼자루를 거 꾸로 잡고 달아나는 도적들을 관병들이 따라가며 짚단처럼 베어 넘 겼다.
장보, 장량의 패잔병을 덮친 것은 다름 아닌 조조의 오천 마보군 이었다. 밤을 도와 영천으로 달려가던 조조는 이경쯤에 갑자기 장사 골짜기 하늘에서 불빛이 하늘로 치솟는 걸 보고 군사를 멈추게 했다.
“저것은 필시 황보, 주 두 장군께서 도적들에게 화공(火攻)을 베푸 신 것임에 틀림없다.”
황보숭과 주준의 장략(將略)을 믿고 있는 조조는 속으로 가만히 그렇게 헤아렸다. 화공이란 들판의 싸움에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 나 어느 쪽인가 산골에 의지한 쪽을 다른 편이 불로 공격했다는 뜻 인데, 험악한 산골에 의지했다면 그것은 분명 지세에 밝고 어지러운 싸움에 능한 도적들일 것이라 짐작이 간 까닭이었다.
그렇다면 똑바로 관군의 진영을 찾아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에 조조는 부근의 지세에 밝은 사졸 하나를 찾아 그곳에서 광종으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기로 했다. 도적들이 패하면 반드시 광 종에 있는 저희 우두머리 장각과 합류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조의 예상은 멋지게 들어맞았다. 광종으로 가는 길목을 지킨 지 일각도 안 돼 장보, 장량의 무리가 밀려온 것이었다.
“한 놈도 남기지 마라.”
조조는 몸소 칼을 뽑아 우왕좌왕하는 도적들 가운데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대장의 그 같은 모습에 관군들도 사기 백배하여 황건적을 쳐부수었다. 장보, 장량 형제는 간신히 몸을 빼쳐 달아났지만 조조 의 전과는 실로 대단했다. 베어 거둔 적의 머리가 만을 넘었고, 빼앗 은 기치와 북이며 마필이 또한 적지 않았다.
한바탕 싸움에서 크게 적을 깨뜨린 뒤 조조는 비로소 황보숭의 본진을 찾았다. 도적을 태반이나 놓쳐버려 분해하던 황보숭과 주준 은 뜻 아니한 조조의 승전보에 몹시 기뻐했다. 비록 장보와 장량의 목은 얻지 못했지만 그들의 세력을 완전히 꺾어버린 것이나 다름없 었다.
“그렇지만 아직 이 부근에 미처 저희 우두머리를 따라가지 못한 도적들이 바위 틈과 숲 사이에 많이 숨어 있을 것이네. 다시 한번 군 사를 풀어 그것들을 쓸어버리세.”
한차례 조조의 공을 치하한 뒤 주준과 의논을 마친 황보숭은 다 시 조조에게 그렇게 명했다. 이에 관군은 한 번 더 그 부근 숲속을 훑 다시피 하여 숨은 도적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유현덕이 관우, 장비와 수하 천오백을 거느리고 그곳에 도착한 것은 관군의 잔적 소탕도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마군보다 보졸이 많은 터라 하늘을 찌르는 불길을 보고 말을 달려와도 한 걸음 늦게 되고 말았다.
“그대들은 어디서 온 군사인가?”
처음 현덕의 군사들이 나타나자 황건적의 한 갈래가 저희 패거리 를 도우러 온 줄 알고 긴장했던 관군이었으나 현덕이 대장 뵙기를 청하자 황보숭이 나타나 물었다. 현덕이 말 위에서 공손히 군례를 올린 뒤에 노식의 뜻을 전했다. 황보숭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노중랑의 뜻은 고마우나 보다시피 장량과 장보는 기세가 다하고 힘이 부치어 이미 달아나버렸네. 틀림없이 제 형이 있는 광종으로 몸을 의탁해 갔을걸세. 그렇게 되면 오히려 위태로운 것은 그쪽에 계신 노중랑일세. 우리도 일대의 잔적들을 뿌리 뽑으면 뒤따라가려 니와 그대들은 즉시 돌아가 노중랑장을 도와주게.”
실로 맥빠지는 말이었으나 듣고 보니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에 유현덕은 황보숭, 주준의 군사와 작별하고 다시 오던 길을 되 짚어 광종으로 향했다. 지친 군사들을 대신해 장비가 한동안 투덜거 렸지만 그도 곧 유비의 꾸짖음에 입을 다물었다.
유현덕의 군사들이 영천에서 광종까지의 길을 중간쯤 되돌아갔을 때였다. 한 떼의 인마가 죄수를 실은 수레 한 채를 호위하여 마주 오 고 있었다. 아마도 나라에 중한 죄를 지은 죄인을 호송해 가는 듯 했다.
유비는 군사를 물려 길을 내주게 한 뒤 무심코 수레 안을 들여다 보았다. 놀랍게도 안에 타고 있는 죄수는 바로 스승 노식이었다.
“스승님 이게 어인 일이십니까? 무슨 죄로 이렇게 엄한 호송을 받 으십니까?”
놀란 유비가 말에서 뛰어내리며 물었다. 크고 맑은 눈에 금세 눈 물이 어렸다. 노식이 그런 제자를 그윽이 바라보다가 긴 한숨과 함 께 대답했다.
“나는 장각의 본거를 에워싸고 있으면서 몇 번인가 장각을 공격 했지만 그자가 요사한 술법을 쓰는 바람에 이기지 못했네. 그러나 에움을 풀어주지 않는 한 끝내 도적들이 항복할 것으로 보고 기다리 는데 조정에서 좌풍(左)이란 내시 하나를 보내왔더군. 싸움이 시 일을 끄는 이유를 알아보라는 명을 받고 온 것일세. 그런데 그자는 내 해명은 들으려고도 않고 은근히 뇌물만 요구해왔네. 군량도 부족 한 판에 어찌 그자에게 뇌물로 바칠 전곡(錢穀)이 내게 있겠는가? 이에 거절했더니 조정에 돌아가 모함을 한 모양일세.”
“그자가 어떻게 모함했기에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도대 체 스승님께 덮어씌운 죄목이 무엇입니까?”
유비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노식이 다시 한번 탄식과 함께 대답했다.
“이 노식이 흙담과 목책만 높이 하고 싸움은 않아 군심은 태만하 고 사기가 떨어져 이기지 못한다고 한 모양일세. 성상께서 진노하시 어 중랑장 동탁(董卓)으로 하여금 나를 대신케 하고, 나는 경사( 師)로 잡아들여 죄를 물으시려는 걸세.”
들을수록 기막히는 말이었다. 싸움터에 나온 장수를 격려는 못할 망정 간신의 참소만 믿고 큰 죄인 다루듯 하니 온화한 유비도 피가 거꾸로 돌 듯 노기가 솟았다. 성미가 급하고 난폭하기로 이름난 장 비가 어찌 그 소리를 듣고 참을 수 있겠는가. 금세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칼을 빼어 호송하는 군사들을 베고 노식을 구하려 했다. 비 록 자신도 노기가 솟았지만 일이 일인지라 유비가 급히 그런 장비를 말렸다.
“조정에도 공론이 있을 터인즉 감히 무슨 짓을 하려 드느냐? 얼른 칼을 거두지 못하겠느냐?”
함거 안의 노식도 엄한 목소리로 장비를 꾸짖었다.
“이 나도 순순히 따르거늘 네가 감히 제명(命)에 거역하려는 것이냐?”
그제서야 장비도 할 수 없이 칼을 거두었다. 이에 호송하는 군인 들은 범 피하듯 장비를 피하여 말과 수레를 몰아 갈 길을 재촉했다. 자칫하다가는 애매한 귀신이라도 될까 겁을 먹은 탓이었다.
침착한 관우였으나 그 일에는 어지간히 분기가 치솟는 듯했다. 평 소와는 달리 장비를 말리려고 들지는 않고, 노식을 실은 수레가 지 나가기 바쁘게 유비에게 말했다.
“형님, 이제 우리는 탁군으로 돌아가시지요.”
그런 관우의 어조에는 썩어빠진 조정에 대한 실망이 짙게 배여 있었다. 유비도 그런 관우의 뜻을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짐짓 모르는 체 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이미 노중랑께서 잡혀가신 마당에 광종으로 가본들 무슨 소용이 겠습니까? 차라리 탁군으로 돌아가 도적들로부터 고향 땅이나 지키는 편이 낫겠습니다.”
가만히 헤아려보니 그도 옳은 말이었다. 낯선 장수 밑에서 의붓자식 대접을 받으며 싸우기보다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네 말이 옳다. 길을 북쪽으로 잡아라.”
이윽고 유비는 관우의 말을 좇아 노식에게서 받은 천 명만 광종 으로 돌려보내고 자신의 의군 오백은 탁군을 향하게 했다.
유, 관, 장 삼형제와 오백 의군이 북쪽으로 길을 잡은 지 이틀이 되었을 때였다. 한군데 산모퉁이에서 지친 용사들을 쉬게 하고 있는 데 홀연 산 뒤편에서 크게 함성이 일었다.
놀란 현덕이 급히 군사들을 정돈시킨 뒤 높은 곳으로 말을 달려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니 한군(漢軍)이 대패하여 쫓겨오고 있었다. 뒤를 쫓는 것은 저마다 머리에 누런 수건을 동인 황건적이었는데 그 수가 산과 들을 가득 메우고 있는 듯했다. 앞선 자가 들고 있는 깃발 에는 ‘천공장군(天公將軍)’이란 넉 자가 크게 씌어 있었다. 그걸 본 현덕이 놀란 목소리로 관우와 장비에게 소리쳤다.
“바로 황건적의 괴수 장각의 군사다. 급히 싸울 태세를 갖추라.”
그리고 스스로 말을 달려 적도를 맞으러 달려 나갔다. 관, 장 두 사 람도 급히 군사들을 수습해 그런 유비를 호위하듯 따라나섰다.
한참 승세를 타고 관군을 추격해 오던 황건적들에게는 마른날의 날벼락 같은 일격이었다. 그들 삼형제만도 무서운데 그 뒤에 오백 용사가 받치며 부딪쳐오니 방심해 있던 황건적들이 당해낼 수가 없 었다. 먼저 선봉이 뭉그러지고 이어 뒤따르던 본군마저 어처구니없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때쯤 간신히 숨을 돌린 관군도 돌아서서 그들 삼형제와 오백 용사의 뒤를 밀어주었다. 그러자 장각의 군사들은 완전히 싸울 뜻을 잃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현덕과 관우, 장비는 그런 황건적을 오십여 리나 쫓아버린 뒤에 관군의 대장을 만났다. 대장은 바로 노식을 대신해 광종의 관군들을 거느리게 된 중랑장 동탁이었다.
동탁은 노식의 군사들을 인수받기 바쁘게 장각의 본거지를 공격 해 들어갔다. 적의 수효도, 그들이 근거하고 있는 지세도 모르면서 조급한 공명심으로 군사를 내몬 것이니만큼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한 싸움에 크게 져서 백여 리나 쫓기다가 요행 유비의 군사를 만나 구함을 받게 되었다.
동탁의 자는 중영(仲潁)으로 농서군(隴西郡) 임조(臨) 땅 사람이 었다. 젊어 호걸 사귀기를 좋아하였는데 매양 강인(人)들의 땅을 드나들며 그 추장이나 거수帥, 부족의 우두머리)들과 사귀었다. 뒷 날 마음을 잡고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고 살았으나 강인들과의 교 유는 계속되어 자주 내왕하고 지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동탁이 소로 밭을 갈고 있는데 강인 추 장과 거수 몇이 그를 보러 왔다. 그러자 동탁은 그 자리에서 밭 갈던 소를 잡아 그들을 대접해 보냈다. 이에 감격한 강인 추장들은 염소, 양 등의 잡축畜)으로 보답을 했는데 그 수가 천여 마리나 되었다. 환제 말년에 양가의 자제로 우림군(羽軍, 황제를 경호하는 군대)을 뽑 았는데 무예가 뛰어난 동탁은 군사마(軍司馬)로 천거되었다.
그 뒤 중랑장 장환(張奐)을 따라 병주(州)의 민란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낭중(中)이 되었다. 그때 동탁은 따로 비단 구천 필을 상으로 받았는데, 자신은 한 자투리도 가지지 않고 모조리 수하 장 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뒷날의 욕된 이름과는 무 관한 뛰어난 무장이었다.
낭중에서 오래잖아 광무(武)의 영(令)으로 천거되고, 이어 촉군 (蜀郡) 북부교위, 서역(西域) 술기교위(戌己校尉) 등을 거쳐 병주 자 사에 이르렀다가 하동 태수를 배수받게 되었다. 농서 땅의 농 사꾼 자식으로서는 놀라운 성공이었다. 주로 그의 벼슬을 높여준 전 공은 강(), 호(胡) 등 오랑캐와의 싸움에서 얻어진 것으로 그는 그 들과 대소 백여 회의 싸움을 치러진 적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젊은 날 오랑캐 땅을 넘나들고 그 추장들과 사귀면서 그들의 습성과 생태 를 관찰할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그릇이 크고 작음은 그 지위가 높고 귀해질 때에 가장 잘 드러나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동탁의 그릇도 대단한 것은 못 되어 하동 태수가 되면서부터는 사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젊을 때의 호기와 배포는 탐욕으로 바뀌고, 관대함과 순후함은 오만과 남 모를 야심으로 변했다.
불행히 유비 삼형제가 만난 동탁도 이미 사람이 변한 뒤의 동탁이었다.
“장군들은 어느 군에 속해 있으며 직위는 무엇이오?”
간신히 구함을 받아 한숨을 돌린 동탁은 세 사람을 불러 그렇게 물었다. 목숨을 구해준 감사가 아직 남아 있어 제법 은근한 목소리였다.
“저희들은 탁군에서 온 의군들입니다. 아직 관직을 받은 게 없습니다.”
유비가 그렇게 대답하자 갑자기 동탁의 얼굴이 싹 변했다.
“뭐? 아직 백신(白身)이라고?”
마치 그런 하잘것없는 자들에게 구함을 받은 것이 욕스럽다는 태 도였다. 그러나 더욱 심한 것은 그다음 말이었다.
“알았네. 그럼 이만 물러가보게. 내가 어쩌다 도적들의 꾀에 속아 약간 몰리기는 했지만 이제는 별일 없을 것이네.”
그러고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급히 세운 군막 안으로 들어 가버렸다. 성미 급한 장비가 그 꼴을 가만히 보아 넘길 리 없었다. 원래 험한 얼굴이 한층 험악해지며 칼을 빼들고 소리쳤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저를 구해줬는데 저놈이 어찌 이리 무례할 수 있소? 내 저 배은망덕한 놈을 단칼에 요절내버려야겠소.”
당장이라도 장막을 찢고 달려들어가 동탁을 벨 듯한 장비의 기세 였다. 유비가 놀라 그런 장비의 소매를 잡고 말렸다.
“저자가 비록 무례하나 명색 조정이 보낸 관리니 어찌 함부로 죽일 수 있는가?”
관우도 장비가 노식을 구하려들 때와는 달리 간곡하게 말렸다.
“아우, 참게, 저런 하찮은 인간을 죽이고 나라의 죄인이 되어서야 쓰겠는가?”
하지만 장비는 더욱 노해 떠들었다.
“저런 배은망덕한 놈을 죽이지 않고 오히려 저놈의 밑에 들어 그 명령이나 받을 작정이시오? 나는 죽어도 그 짓은 못하겠소. 두 분 형님께서나 여기 계시려면 계시오. 나는 다른 데로 가보겠소.”
이번에는 금세 소매를 떨치고 홀로 떠나가려는 듯한 기세였다. 이 에 현덕도 마음을 돌리고 뒤따르며 달랬다.
“우리 셋은 한날 태어나지는 못했어도 한날 죽기로 맹세한 몸이 다. 헤어진다니 당키나 한 말이냐? 함께 있지 못하면 같이 떠날 뿐 이다.”
현덕이 그렇게 나오자 장비도 조금 마음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좋소. 그렇게 말씀하시니 분이 좀 풀리는 것 같소. 그럼 형님들 함께 떠납시다. 이 더러운 놈의 막하에는 잠시라도 더 머뭇거리고 싶지 않소.”
이에 세 사람은 서둘러 수하 용사들을 점고한 뒤 동탁의 진채를 떠났다. 그래도 인사나마 갖추려고 유비가 한 번 더 만나기를 청했 으나 끝내 동탁은 군막에서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다.
유관, 장 세 사람은 다시 탁군으로 돌아갈까 했으나 곧 마음을 돌려먹고 주준 장군의 막하로 갔다. 큰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났다가 아무것도 이룬 바 없이 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들을 따르는 오백 용사들의 생각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때 주준은 장사에서 패해 흩어진 황건적의 두 괴수 가운데 장 보를 쫓고 있었다. 아우 장량은 황보숭의 선봉인 조조와 곡양(曲陽) 땅에서 큰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현덕의 의군이 찾아들자 황보과 나누어지는 바람에 군사가 모 자라 고심하던 주준은 반갑게 그들을 맞아들였다. 그리고 군량과 병장기를 아끼지 않고 그들도 관군과 똑같이 대해주었으며, 현덕 등 삼형제를 대하는 것도 그 어느곳에서보다 따뜻하고 은근했다.
“현덕은 두 분 아우와 함께 이끌고 온 오백으로 선봉을 맡아주시 오. 사졸이 모자라신다면 따로이 관군 천 명을 더 붙여드리겠소.”
이렇게 현덕을 선봉으로 삼은 다음 다음 날로 장보를 찾아 나섰다. 장보는 그동안 수습한 무리 팔구만을 이끌고 어느 험한 산기슭에 의지해 진을 치고 있다가 현덕이 이끄는 관군의 선봉이 싸움을 돋우 자 쉽게 응했다. 황보숭의 군사들이 떨어져나가 주준의 군사들이 몇만 안 된다는 걸 알자 다시 용기가 솟은 까닭이었다. 거기다가 곡 양 땅에서 싸우는 아우 장량의 전세가 별로 이롭지 못하다는 풍문까 지들은 터라 빨리 주준의 군사들을 깨뜨리고 아우를 돕고 싶기도 했다.
유현덕의 선봉을 맞아 싸우러 나온 황건적의 장수는 장보의 부장 (副將) 고승(高昇)이었다. 그는 장보의 명을 받자 긴 창을 휘둘러 용 맹을 뽐내며 달려 나왔다.
“네가 저자의 목을 가져오너라.”
유비는 장비를 시켜 고승을 맞게 했다. 그러지 않아도 몸이 근질 거려 못 견뎌하던 장비가 명을 받기 무섭게 사모를 치켜들고 말을 달려 나갔다. 그러나 고승은 원래 장비의 적수가 못 되었다. 불과 몇 번 부딪기도 전에 고승은 비명조차 제대로 못 지르고 장비의 창에 꿰어 말 아래로 떨어졌다.
“이때다, 모두 나아가 도적을 뿌리 뽑아라.”
현덕이 그 광경을 보고 수하 장졸들에게 소리쳤다. 아직 사졸들의 무기와 갑주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사졸들 사이로 두꺼운 갑주에 몸을 싼 장수가 말 위에서 길고 무거운 무기 를 휘두르며 뛰어들 때에는 그와 똑같은 장수가 아니면 사졸들로서 는 막을 길이 없었다. 그것이 당시의 싸움이 일쑤 장수들 사이의 기 병전만으로 결판짓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뒷날 잘 조련된 갑졸들에 의한 대(對)기병전술이 발달하기까지 몇백 년이고 그런 형태의 싸움은 반복되었다.
그 싸움에서도 그랬다. 한 창에 고승을 떨어뜨린 장비가 고리눈에 호랑이 수염을 곤두세우고 장팔사모를 휘둘러 적진으로 뛰어들자 대장을 잃은 졸개들은 사태 무너지듯 밀리기 시작했다. 그걸 다시 현덕의 인마가 뒤쫓으니 황건적들은 산골짜기의 저희 본진으로 도 망치기 바빴다. 승세를 탄 현덕의 군사들은 더욱 급하게 도적들을 쫓았다.
그렇게 오 리쯤이나 뒤따랐을까. 홀연 산골짜기에 바람과 함께 한 줄기 검은 기운이 일었다. 기이한 느낌이 든 현덕이 군사를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그러자 멀지 않은 작은 봉우리에 한 술사(術士)가 검 은 옷에 긴 머리칼을 날리며 칼을 짚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입으로 는 무언가 주문을 외고 있는 것이 요사스런 법술을 펼치고 있음에 분명했다. 바로 적의 괴수 장보로서 형 장각에게서 배운 술법을 베 풀고 있는 모양이었다.
평소에는 별로 방술이니 요술이니 하는 것을 믿지 않는 현덕이었 지만 그 같은 광경을 보니 어쩐지 가슴이 선뜩했다. 그래서 일단 군 사를 물리려는데 갑자기 바람이 더욱 거세지고 날이 컴컴해지며 때아닌 뇌성까지 울렸다. 그리고 수많은 인마가 하늘로부터 현덕군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듯했다.
현덕은 크게 놀라 급히 군사를 물리라는 영을 내렸다. 하지만 그 괴이한 사태에 잔뜩 겁을 먹은 군사들에게 그런 군령이 제대로 지켜 질리 없었다. 대오고 뭐고 없이 저마다 칼자루를 거꾸로 잡고 산아 래로 내닫기에 바빴다.
황건적들이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일제히 등을 돌려 어지러 운 현덕의 군사들을 덮쳐오니 이번에는 반대로 현덕의 군사들이 눈 사태 무너지듯 무너져 내렸다. 참담한 패배였다. 간신히 주준의 진 중에 이르러 군사를 점고해보니 태반이 꺾이고 상해 있었다.
실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괴이한 술법에 관해 들은 적은 많았으나 막상 겪고 보니 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어 대장 주준과 그 일을 의논해보았다.
주준도 처음에는 그 일을 믿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가 장비와 관 우까지 나서자 고개를 기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 요사한 술법이 있으면 그걸 깨치는 방법도 있으리라.”
그리고 널리 장졸들에게 물은 바, 돼지와 양과 개의 피가 요술을 깨치는 힘이 있다는 말을 듣고 명했다.
“우리가 이미 요사한 술법이 있음을 믿게 됐으니 그 깨치는 비법 또한 믿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부터 군사를 풀어 되도록 많은 돼지 와 양과 개의 피를 거두어들이도록 하라.”
그리고 현덕으로 하여금 이튿날 한 번 더 장보를 시험하게 했다.
이튿날 현덕은 관우와 장비에게 각기 천 명의 군사를 주어 전날 구해 온 돼지와 양과 개의 피가 든 동이를 가지고 약정된 산기슭에 매복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남은 군사와 더불어 장보가 싸움을 걸어오기를 기다렸다.
전날의 승리로 한껏 기세가 되살아난 장보는 이튿날도 한낮이 되 자 졸개들을 시켜 기치를 드날리며 현덕의 진문 앞에 나타나 싸움을 걸어왔다. 이미 준비해둔 게 있는 터라 현덕 또한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곧 군사를 모아 일진을 부딪쳐갔다. 장보의 졸개들은 짐짓 힘들여 싸우는 체하다 다시 전날의 그 골짜기로 현덕의 군사들을 유 인해들였다. 현덕은 좀 꺼림칙했으나 모르는 체 그런 도적들을 뒤쫓 았다.
장보는 전날의 그 봉우리에 역시 전날과 같은 복색으로 나타났다. 그가 주문을 외자 곧 큰 바람이 일어 모래가 날며 돌이 구르고 날이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물러서라. 조금만 물러가면 관, 장 두 장군이 저 요사스런 술법을
깨쳐줄 것이다.”
현덕은 미리 세워둔 계획대로 그렇게 영을 내렸다. 군사들도 이미 들은 게 있는 터라 하늘에서 쏟아지는 인마의 그림자에도 현혹됨이 없이 대오를 갖추어 골짜기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때를 놓칠세라 황건적들이 다시 현덕의 군사들을 쫓아 나왔다. 그 러나 이번에야말로 그들이 전날의 빚을 갚아야 할 차례였다. 한군데 산모퉁이를 돌아서는데 미리 숨어 있던 관우와 장비가 산 중턱에 나 타나 개와 돼지와 양의 피를 쏟았다.
그러자 하늘로부터 어지러이 쏟아진 인마는 종이에 그린 사람과 풀잎으로 엮은 말이 되어 땅바닥에 떨어지고 바람과 검은 기운도 차 차 걷히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황건적들이 크게 놀랐다. 믿고 있던 자기들 괴수의 술법 이 어이없이 깨어졌을 뿐만 아니라 좌우 양편에서 관우와 장비의 일 천 군사가 쏟아져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도망치던 현덕도 군사를 돌려 마주쳐 오고 뒤를 기다리고 있던 주준의 중군이 받치니 견딜 재간이 없었다.
그렇게 되자 싸움이라기보다는 한바탕 일방적인 살육전이 전개되 었다. 승세를 탄 관군은 닥치는 대로 황건적을 베고 찔렀다. 그제서 야 무기를 놓고 목숨을 애걸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그들도 무고한 인 명을 살상하지 말라는 현덕의 엄명이 군사들에게 닿기 전에는 무사 하지 못했다.
현덕은 난전 가운데서도 적의 괴수 장보를 찾았다. 저만치 장보가 있음을 알리는 ‘지공장군(將軍)’의 큰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현 덕은 그걸 보자 싸우던 적도를 제치고 똑바로 그를 향해 말을 몰았 다. 그 뒤를 어느새 왔는지 관우와 장비가 호위하며 따랐다.
난군 가운데서 갈팡질팡하던 장보도 범 같은 세 장수가 그를 향 해 덮쳐오는 것을 보았다. 자신은 도저히 그 상대가 되지 못함을 깨 닫고 한 가닥 살길을 뚫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현덕이 그를 놓아 보 낼 리 없었다.
탁군의 유협 시절에 사냥으로 익힌 활솜씨를 내어 한살[矢]에 장보의 왼쪽 팔죽지를 보기 좋게 꿰뚫어놓았다. 그러나 장보는 화살조차 뽑을 틈이 없이 저희 무리가 점거하고 있는 양성(陽城)으로 달아나 굳게 성문을 닫아 걸고 지키기만 하였다.
나중에 그곳 주민들의 말을 듣고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현덕이 장보에게 당한 것은 무슨 신통한 술법이 아니었다. 그들이 일시 몸 을 피한 그 산골짜기의 지세와 기후가 묘해 오후가 되면 한때 큰 바 람이 일고 안개 구름이 짙게 드리우는 곳이었다. 그런 사실을 우연 히 그 지방 출신의 졸개에게서 들은 장보는 그런 지세와 기후를 이 용해 신통한 술법을 부리는 척했다. 곧, 바람이 일고 안개가 끼는 시 각에 관군을 유인해 겁을 먹게 한 뒤 종이에 그린 사람과 풀잎으로 엮은 말을 날려 신병(神)이라도 내려오는 양 꾸몄다.
그걸 알 리 없는 관군은 첫날 겁먹고 혼란되어 속지 않을 수 없었 으나 다음 날은 달랐다. 돼지와 개의 피가 요술을 푼다고 믿자 그기 후와 지세에 가려진 진상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백성들 사이에 무슨 신화처럼 퍼져 있는 장각 형제의 신통력이란 게 대개 그러했다.
장보의 무리가 양성에 틀어박혀 굳게 지키기만 하니 싸움은 자연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주준은 일면 군사를 풀어 성을 공격하는 한 편 탐마(馬)를 곡양에 보내 황보숭의 소식을 알아 오게 했다. 며칠 이 안 돼 나는 듯이 돌아온 탐마가 곡양의 소식을 전했다.
“황보숭 장군은 싸움에 크게 이기고 동탁은 싸울 때마다 지니조 정은 황보숭 장군으로 하여금 동탁을 대신케 하여 그 장졸들까지 함 께 거느리게 했습니다. 황보숭 장군이 동탁의 군을 아울러 적의 본 거지에 이르렀을 때는 적의 괴수 장각이 이미 병들어 죽은 뒤라 그 아우 장량이 무리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황보숭 장군은 조조를 선봉으로 삼아 일곱 번을 이기고 마침내 곡양에서 장량의 목을 베었습니 다. 그리고 이미 죽은 장각은 그 무덤을 파헤쳐 몸은 육시戮屍)에 처 하고 목은 잘라 경사로 보내 효수케 했습니다. 이에 우두머리를 잃 은 도적들이 모두 항복하기에 이르러 조정은 황보숭에게 거기장군 (車騎將軍)을 더하고 기주(冀州牧)을 삼았으며, 조조 또한 황건적 토벌에 공이 크다 하여 제남(南)의 상(相)으로 가게 되었다 합니 다. 또 중랑장 노식도 황보숭이 표를 올려 공은 있을지언정 죄는 없 다며 극력 변호한 결과 다시 중랑장으로 복관(復官)되었다 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 주준도 조바심이 일었다. 함께 제명을 받아 나란 히 싸움터로 나왔건만 황보숭이 이미 적의 본거지를 평정한 그 마당 에도 자신은 그 한 갈래조차 깨뜨리질 못하고 시일을 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주준은 그날부터 더욱 장졸을 독려하여 양성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성벽이 워낙 높고 두꺼운 데다 도적들은 악착같이 항거를 하 니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손문대(孫文臺)는 어찌하여 아직 오지 않는가. 그만 있어도 하루 면 족히 이 성을 깨칠 수가 있을 것이건만………….”
세 번째 양성 공격에서 또다시 실패하자 주준은 유비와 황건적 깨칠 일을 의논하다 말고 그렇게 탄식했다.
“손문대가 누구오니까?”
주준의 말이 하도 간곡해 슬몃 부러움이 인 유비가 물어보았다. “강동의 범 같은 장수외다. 나이 열여덟에 이미 의군을 이끌고 회 계의 요적 허창 부자를 토벌하여 이름을 떨쳤는데 현덕께서는 아직도 모르고 계시오?”
“그렇다면 오군(吳郡)의 손견(孫堅) 말씀입니까?”
“그렇소. 문대는 그의 자요. 출정 때에 그를 좌군사마(佐軍司馬)로 불러 잠시 썼으나 다급한 성이 많아 구원을 내보냈는데 어찌 된 셈 인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소. 그가 선봉을 서준다면 이까짓 성 하나 우려빼기야 어린아이 팔목 비틀기보다도 훨씬 수월할 것이오.” 그러자 유비는 은근히 호승심(好心)이 일었다. 손견의 영명은 익히 들어온 터이지만 자기라고 반드시 그만 못하랴 싶었던 것이다. 마침 마음속에 생각해둔 계책도 있고 해서 호기롭게 말했다.
“장군께서 양성을 우려빼는 일은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이 유 아무개에게도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계책이 있다니 그게 무엇이오?”
주준이 호기로운 유비의 말에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유비는 곧이 곧대로 일러주는 대신 한층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대단찮은 것이오니 하루만 말미를 주십시오. 그럼 장군께서는 내 일 해가 지기 전에 장보의 잘린 목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준의 군막을 물러나온 뒤 관우와 장비를 가만히 불렀다. “자네들은 우리 의군 가운데서 글 잘하는 이와 팔 힘이 세어 멀리 화살을 날릴 수 있는 궁수 여남은 명만 골라오게.”
“갑자기 무엇에 쓰시려고 그러십니까?”
관우가 얼른 뜻을 알아들을 수 없는지 그렇게 물었다.
“가만 앉아서 장보의 목을 얻어볼까 해서 그러네. 어쨌든 시키는대로 사람이나 모아 오게.”
그러자 관우도 더 캐묻지 않고 밖으로 나가 유비가 구하는 사람들을 모아 왔다. 유비는 먼저 글 잘하는 이들에게 말했다.
“적이 이토록 굳게 버티는 것은 아직 믿는 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각, 장량이 이미 죽고 나머지 무리도 모두 항복했다는 걸 알면 마음이 달라질 것이다. 성안의 적이 믿게끔 그 소식을 전하고 항복을 권하는 글을 짓되, 특히 장보의 목을 베어오는 자는 그 지은 죄를 묻지 않고 크게 상을 내린다고 일러주어라.”
그리고 각기 시킨 대로 글을 닦아 올리자 이번에는 궁수들에게 그 글발을 나눠주며 말했다.
“너희들은 성의 네 대문으로 흩어져 이 편지들을 화살에 달아매 쏘아 넣어라.”
그제서야 관우와 장비도 유비의 뜻을 알겠는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유비는 초조한 마음으로 성안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였다. 주준에게 큰소리 쳤지만 과연 황건적이 스스로 항복해 올지는 아 직 의문이었다.
이때 양성 안에는 엄정(嚴)이란 자가 장보를 도와 관군에 대항 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 군사를 일으킬 때부터 장각 삼형제의 손발 로 싸워온 터라 누구보다도 처음의 그 대단했던 기세를 잘 보아온 자였다. 따라서 얼마간 버티고만 있으면 마침내 장각의 본대가 자기 들을 구해주리라 믿었다. 관군에게 포위당해 바깥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때문이었다.
그런데 유비가 쏘아 보낸 글발을 보자 크게 놀랐다. 장각, 장량이 이미 죽고 그 무리마저 항복해버렸다면 일은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거기다가 성안에는 이미 식량이 다해 군마까지 잡아먹는 형편이었 고, 민심도 날이 갈수록 흔들리고 있었다.
하기야 관군이 계교로 거짓 소문을 퍼뜨리는 것이라는 의심이 들 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항복을 권하는 문면(面)은 간곡하 기 그지없었고, 멀찌감치서 에워싸고 있는 관군의 진영도 구원병에 대한 근심은 전혀 없어 보였다.
이에 엄정은 투항을 결심하고 그날 밤 자정이 넘기를 기다려 장 보의 침실로 들어갔다. 시위하던 자들이 있었으나 장보가 가장 신임 하는 엄정이라 별로 의심하지 않고 길을 내주었다.
엄정은 장보의 침상 곁에 이르기 무섭게 칼을 빼어 깊은 잠에 빠 진 장보의 목을 쳐버렸다. 원래가 대단한 무골은 못 되는 데다 밤낮 을 가리지 않는 관군의 공격에 지쳐 잠에 취해 있던 장보는 비명 한 마디 없이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말았다. 엄정은 피가 뚝뚝 돋는 장보 의 목을 높이 쳐들고 그제서야 놀란 얼굴로 모여든 시위들에게 외 쳤다.
“듣거라. 장량은 관군에 베임을 당하고 이미 병들어 죽은 장각도 관이 뻐개지고 시신이 흩어지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장보 가 홀로 버티고 있었으나 더 올 원군도 없고 성안에는 이미 쌀 한 톨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구태여 항거하다가 뒷날 성이 깨어지면 옥과 돌이 함께 타듯[]이 성안에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게 되리라. 장보야 천조를 거스른 죄인이니 죽어 마땅하려니와 그들 형 제의 달콤한 꾀임에 넘어가 멋모르고 따라나선 너희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느냐? 이에 성문을 열고 장보의 목을 바쳐 너희들의 억울한 죽음이라도 면하게 해줄 양으로 이 목을 잘랐다. 누가 감히 막아서려느냐?”
시위들도 저녁나절에 날아든 관군의 편지에 대해 들은 적이 있 었다. 거기다가 엄정 또한 무예가 절륜하여 한꺼번에 달려들어봤자 이길 것 같지 못하니 평소 장보에게서 두터운 은혜를 입은 자들 몇 몇을 빼고는 일제히 무기를 내리고 엎드리며 말했다.
“저희들도 장군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이에 힘을 얻은 엄정은 그들을 이끌고 똑바로 성문을 나가 주준 의 막하에 투항해버렸다.
뜻하지 않게 성을 빼앗고 장보의 목을 얻게 된 주준의 기쁨은 컸다.
“우리 군사들이 굳게 에워싸고 있어 바깥의 소식이 성안으로 들 어가지 못한 것을 미처 몰랐구려. 그러나 화살 한 개 쓰지 않고 적의 거성을 우려뺏으니 이는 손자가 이른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계책이 아니겠소?”
그렇게 유비를 치하했다.
은근히 마음 죄며 기다렸던 유비도 그제서야 활짝 웃으며 겸양을 했다.
“모두가 장군의 복덕이올시다. 이 비는 잠시 호랑이의 위세를 빌 려 으스대는 여우[狐假虎威]를 본떴을 뿐입니다.”
그러나 유비는 알고 있었다. 모든 종교 집단에서처럼 황건적도 출 발은 베풂의 원리에 바탕하였다. 처음 한동안은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앓는 자에게 치유를, 절망하는 자에게 희망을 약속했고, 그 단계에서는 작은 베풂만으로 민중을 감동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 권력 추구의 집단으로 변질하면서 그 원리도 베풂에서 다스림으로 바뀌자 사정은 변했다. 다스림이란 말에 포함된 요구에 비례해 그들 을 따라가는 민중의 요구도 커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민중을 자기편으로 잡아두는 길은 결국 물욕과 권력을 이용해 달래거나 공포로 묶어두는 따위 세속적인 길밖에 남 지 않는다. 이른바 신정국가(神政國家)가 보편적으로 걷게 되는 길 로, 몰락의 징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내부의 달램이나 위협에 익 숙해지는 만큼 외부로부터 오는 유혹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이렇 게 명료한 의식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유비는 급속히 정치 집단으로 변질된 황건적에게도 그런 약점이 있음을 알아차렸음에 틀림이 없다. 그리하여 장보의 무리가 이제는 더 이상 항복보다는 죽음을 택하는 광신적인 종교 집단이 아니라 궁지에 몰린 군사 집단 에 불과하다는 판단에서, 이익으로 달래고 죽음으로 위협한 것이 보 기 좋게 들어맞아준 셈이었다.
주준은 장보의 목을 얻고 양성을 우려뺀 여세를 몰아 인근 여러 고 을의 황건적을 소탕한 뒤 황제에게는 표(表)를 올려 승리를 알렸다. 하지만 장각 삼형제가 죽었다고 해서 황건의 난이 그대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장각의 막하에 있다가 요행 관군의 토벌 을 면한 조홍(趙弘), 한충(韓忠), 손중세 사람이 특히 세력이 강했는데, 그들은 무리 수만을 모아 오히려 죽은 장각의 원수를 갚 겠다고 떠들어대며 완성苑) 일대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조정은 주준의 승전에 치하를 내릴 겨를도 없이 그들 황건 잔당의 소탕을 명했다. 이에 주준은 그 명을 받들어 다시 군사를 그들이 근거하고 있는 완성으로 돌렸다.
“좋다. 먼저 지공장군의 원수부터 갚자.”
조홍, 한충, 손중 세 우두머리는 장보를 죽인 주준의 군대가 진격 해 온다는 소리를 듣자 그렇게 의논을 맞추고 한충을 보내 대적하게 했다.
먼저 완성의 서남쪽으로 짓쳐온 것은 유현덕과 관, 장 두 아우가 이끄는 선봉군이었다. 이를 본 한충이 무리 가운데서 가장 날래고 젊은 자들만 뽑아 이끌고 마주 나왔다. 그러나 미처 싸움이 어우러 지기도 전에 동북쪽에서 함성이 일며 또 한 떼의 관군이 완성을 취 하려 들었다. 주준 스스로가 이끄는 이천의 철기(鐵騎)였다.
그걸 본 한충은 크게 놀랐다. 힘이 될 만한 군사들은 자신이 다 끌 고 나오다시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완성의 동북쪽이 제일 허술했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다가는 의지할 성마저 잃게 될 판이었다.
다급해진 한충은 눈앞에 있는 유현덕의 군사를 제쳐놓고 성의 동 북쪽을 구하려고 말 머리를 돌렸다. 유현덕이 그런 한층을 곱게 돌 려보낼 리가 없었다. 군사를 몰아 그 뒤를 따르며 엄살(殺)하니 적 은 동북쪽에 이르지도 못하고 대패하여 성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뒤따라온 주준은 군사를 나누어 성을 사면에서 에워싸게 하고 성 안으로 일체의 양곡을 들이지 못하게 했다. 완성은 황건 잔당이 얻 은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라 군량이 비축되어 있을 리 없었다. 거기 다가 뒤따라와 구해줄 줄 알았던 조홍과 손중마저 소식이 없자 한충 은 사람을 보내 항복을 애걸해왔다.
그러나 주준은 도적들의 항복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해 유현덕이 주준에게 물었다.
“옛날 우리 고조(高祖)께서 천하를 얻으신 것은 적이라도 항복하 는 자는 모두 거두어 쓰신 까닭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어찌 장군 께서는 한충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으십니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오. 진(秦)에서 항우에 이르는 때는 천하에 큰 난리가 일어 백성들에겐 정한 주인이 없었소이다. 이에 항복을 받아들이고 오는 것을 권하여 내 백성으로 삼고 힘을 길렀던 것이오. 그러나 지금은 해내(內)가 하나로 황은(皇恩)에 의지하고 있는데 오직 황건적들만이 모반을 일으켰소. 만약 그 항복을 용납한 다면 어떻게 옳고 착한 일을 권장할 수 있겠소? 저희가 유리하면 마 음대로 겁탈과 노략질을 일삼다가도 언제든 형세가 불리해지면 항 복하여 목숨을 보존하려 들지 않겠소? 이 항복을 받아들여주는 것 은 도적들의 나쁜 마음을 길러줄 뿐이니 결코 양책)이 못 되오.”
주준은 냉엄하게 대답했다. 유현덕이 좋은 낮으로 다시 한번 권 했다.
“사방에서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으면서 적의 항복을 용납하지 않 으시면 적은 자연 죽기로 싸울 것입니다. 만 명만 한마음이 되어 싸 워도 당하기 어려운데 성안에서 가만히 있다가는 죽게 될 수만의 목 숨들이 마음을 합쳐 대항해 오면 어떻게 당하시겠습니까? 굳이 항 복을 용납하실 수 없다면 성의 동남을 비우고 서북만을 공격하는 것 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적은 반드시 성을 버리고 달아날 뿐만 아니라 구태여 싸우려 들지도 않을 것이니 오히려 사로잡기 쉬울 것 입니다.”
그러자 주준도 그 말을 옳게 여겨 현덕의 계책을 따랐다. 동쪽 남쪽 두 곳의 군마를 빼낸 뒤 서쪽과 북쪽에서만 치열한 공격을 퍼붓 게 한 것이었다.
오래잖아 과연 한충은 졸개들과 함께 성을 버리고 빈 동남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주준과 유현덕은 군사를 몰아 그들을 쫓았다. 미리 예측된 도주라 베이고 사로잡히는 자가 태반이었다. 한충도 끝내 무사하지 못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졸개들을 짓밟으며 황 망히 길을 앗아 달아나는데 어디선가 날아간 화살이 등줄기에 박혔 다. 한충은 한마디 구슬픈 비명과 함께 말 위에서 떨어지고 대장이 죽는 걸 본 적은 한층 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관 군은 더욱 기세를 올려 비질하듯 그런 적도를 쓸어갔다. 그런데 그 로부터 오래잖아서였다. 갑자기 요란한 함성과 함께 두 갈래의 대군 이 관군을 밀어왔다.
이미 죽은 한충의 패거리인 조홍과 손중이 뒤늦게야 구원을 나온 길이었다. 예측하지 못했던 적도들의 역습인 데다 그 수 또한 적지 않아서 관군의 기세는 자연 꺾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승세를 탄 조홍과 손중은 그대로 관군을 밀어붙이고 다시 완성을 탈환해 자기 들의 근거로 삼았다.
주준과 유현덕은 십 리나 군사를 물린 뒤에야 간신히 난군(軍) 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곳에 진채를 내리고 다시 완성을 빼앗을 계책을 의논하고 있는데 홀연 동쪽에서 한 떼의 인마가 달려왔다.
혹시 황건의 잔당들이 추격해 온 것이 아닌가 싶어 바라보니 한 청년 장수가 앞장서 말을 달려오는데, 얼굴이 넓고 희며 호랑이 허 리에 곰의 어깨였다. 그 뒤로는 다시 네 부장이 쇠채찍과 철사모 (蛇)와 대도(大刀)와 쌍도(刀) 등 각기 자랑하는 무기를 들고 따르고 있었다. 바로 강동의 손견과 그의 네 장수 황개, 한당, 정보, 조무였다. 하비(下匹)에서 의군 천오백을 일으켜 잠시 주준의 막하 (幕下)에 속했으나, 위급을 호소하는 성이 많아 이곳저곳을 떠돌며 싸우다가 다시 몇 달 만에 본진에 합류하는 길이었다.
“이제 손문대가 돌아왔으니 두려워할 게 무엇이냐.”
주준은 몸소 군막을 나가 손견을 맞으며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그리고 간단한 군례가 끝나기 무섭게 유비에게 손견을 소개했다.
“자, 서로 이름이나 통하도록 하게. 전일에 내가 말한 적이 있는 오군의 손견일세.”
“탁군 유비라 하옵니다.”
유비는 공손히 손을 모으며 다시 한번 손견을 뜯어보았다. 한눈에 비범함이 드러나는 용모였다. 짙은 눈썹 아래 부리부리한 눈에서는 정기가 쏟아지는 것 같고 우람하면서도 다부져 보이는 체격에서도 야생말과 같은 힘이 용솟음치는 듯했다. 조조처럼 날카롭고 세련된 것도 아니고, 원소처럼 품위와 교양의 후광을 입고 있지도 않았지 만, 분명 그것은 영웅이라 불릴 수 있는 자들의 특징을 이루는 어떤 힘이었다.
‘아아, 세상에는 정말 인물도 많구나…………….’
유비는 다시 한번 속으로 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이한 감탄에 젖기는 손견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한 시골뜨기의 군 대장으로 여기며 가볍게 답례를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을 위압해오는 정체 모를 힘을 느끼며 홀로 중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예사롭지 않은 녀석이다………’
유비가 손견에게서 느꼈던 그 맹렬하고 야성적인 힘은 다음 날 완성 공격이 시작되자 유감없이 드러났다. 주준이 서문을 공격하고 유비는 북문을 맡았으나 가장 볼만한 싸움을 벌인 것은 남문을 맡은 손견이었다.
손견이 스스로 앞장서 성벽 위에 기어올라 적병 스무남은 명을 베어 죽이니 피를 뒤집어쓰고 칼춤을 추는 그 모습이 도적들에게는 그대로 악귀야차(惡鬼夜叉)와 같았다. 아무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하 고 그를 피해 달아나기 바빴다. 그러자 그 빈 곳으로 정보, 황개, 한 당, 조무 등이 이끄는 천오백 용사들이 뛰어들어 완성의 남문은 순 식간에 함락되고 말았다.
성벽 아래서 그걸 본 적장 조홍이 말을 달려오며 손견에게 창을 내질렀다. 성벽 위에 있던 손견은 몸을 날려 조홍의 창을 빼앗은 뒤 거꾸로 그를 찔러 말 위에서 떨어뜨렸다. 이에 놀란 조홍의 말이 좌 우로 날뛰며 제 편을 짓밟으니 황건적들은 더욱 낭패했다.
이미 성을 지키기는 틀렸다는 걸 알아차린 적장 손중은 남은 졸 개들을 이끌고 북문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유현덕이 관, 장 두 아 우와 길을 막았으나 싸울 마음은커녕 길을 앗기에만 바빴다. 현덕이 그를 곱게 살려 보낼 리 없었다. 가만히 활을 내려 시위에 화살을 먹인다.
“이놈, 어딜 가려느냐?”
현덕의 나지막한 호통과 함께 날아간 화살은 그대로 손중의 목줄 기를 꿰뚫고, 손중은 한마디 비명과 함께 몸을 뒤집으며 말에서 떨어졌다.
이때 주준의 대군이 가세하여 뭉그러져 달아나는 적의 뒤를 치니 적의 잘린 목만도 만이 넘었고 항복한 자의 수는 다시 그 몇 배가 되었다. 주준은 그 기세를 늦추지 않고 남양(南陽) 일대까지 내려가 적의 잔당들을 뿌리 뽑았다. 그때에 평정된 군만도 십여 개를 헤아 렸다. 황건의 난을 마무리짓다시피 한 큰 전공이었다.
주준은 더 이상 날뛰는 황건의 무리가 없자 군사를 돌려 낙양으 로 개선했다. 유, 관, 장 삼형제도 오백 의군들과 함께 주준의 개선군 을 따라 낙양으로 갔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그들이라 감개 못지않게 기대도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