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8권 – 10화 : 조조도 한 줌 흙으로 돌아가고

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8권 – 10화 : 조조도 한 줌 흙으로 돌아가고


조조도 한 줌 흙으로 돌아가고

이때 낙양의 조조는 괴이한 환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관공의 장례 를 치른 뒤로 눈만 감으면 관공의 모습이 나타나는 게 그랬다. 조조 는 놀랍고 두려운 나머지 여러 벼슬아치들을 불러놓고 자신이 겪는 괴로움을 털어놓았다.

“낙양의 행궁(宮) 옛 전각들은 전부터 요망한 일이 많았습니다. 새로 전각을 지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 말에 조조도 귀가 솔깃해졌다.

“나도 전부터 전각 하나를 새로 짓고 싶었다. 건시궁(建始宮)이라 이름하여 오래 남을 만한 전각을 짓고 싶었으나 안됐게도 좋은 목수 가 없구나.”

그러자 가후가 나서서 말했다.

“낙양에는 소월(蘇越)이라는 좋은 목수가 있습니다. 손재주와 생각하는 바가 남달리 뛰어난 목수라 합니다.”

이에 조조는 곧 소월을 불러들여 먼저 지으려는 전각의 그림부터 그려오게 했다. 소월은 아홉 간 대전에 앞뒤로 낭하와 누각을 거느 린 전각 한 채를 그려 조조에게 바쳤다. 그림을 본 조조가 고개를 끄 덕이며 말했다.

“네가 그려온 게 꼭 내 마음에 든다. 다만 여기에 쓸 만한 대들보 와 기둥감이 없을까 걱정이다.”

“성 밖 삼십 리쯤 되는 곳에 약룡담(躍龍潭)이란 못이 하나 있습니 다. 그 못가에 약룡사란 사당이 있는데 그 사당 곁에 큰 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높이가 여남은 길이나 되는 배나무로, 그걸 베 어다 쓰면 건시전(建始殿)의 대들보감이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미리 보아둔 게 있었던지 소월이 그렇게 대답했다. 조조는 그 말 에 기뻐하며 곧 사람을 보내 그 배나무를 베어오게 했다. 그런데 다 음 날 이상한 전갈이 왔다.

“그 배나무가 어찌나 단단한지 톱으로 켜도 톱날이 들어가지 않 고, 도끼로 찍어도 도끼가 튀어나온다 합니다.”

조조는 그걸 믿을 수가 없어 몸소 수백 기를 이끌고 약룡사로 가 보았다. 사당 앞에서 말을 내려 그 나무를 쳐다보니 잎사귀는 무성 하여 호화스런 덮개를 둘러친 듯하고 줄기는 쭉 곧게 뻗어 구름을 찌르는 듯했다.

“어서 이 나무를 베어라.”

나무를 보자 더욱 욕심이 난 조조가 그렇게 영을 내렸다. 마침 구경을 나와 있던 동네 사람 몇이 조조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 나무는 나이가 수백 살이 넘고 저 꼭대기에는 신인(神人)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함부로 베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 말을 들은 조조가 성이 나서 소리쳤다.

“나는 천하를 휩쓸고 다니기 사십여 년, 위로 천자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떤 요망한 귀신이 감히 내 뜻을 거스르려 든단 말이냐!”

그러고는 문득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 그 나무를 찍었다. 그러 자 쇳소리와 함께 그 나무에서 피가 튀어 조조의 온몸을 적셨다. 깜 짝 놀란 조조는 얼른 칼을 내던지고 말에 뛰어올라 그대로 궁궐로 돌아와버렸다.

그런데 그날 밤이었다. 낮의 일로 이경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 한 조조가 책상에 기대 앉아 있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났다. 머 리를 풀고 칼을 집었는데 몸에는 검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똑바로 조조 앞에 이른 그 사람이 문득 손가락질하며 조조를 꾸짖었다. 

“나는 네놈이 낮에 칼로 찍은 그 배나무의 귀신이다. 건시전을 새 로 짓겠다니 네놈은 역적질이라도 꿈꾸고 있다는 뜻이냐? 감히 신 목(神木)을 베어 넘기다니! 나는 네놈의 목숨이 이미 다한 걸 알고 특히 네놈의 숨통을 끊어주러 왔다.”

조조는 깜짝 놀라 큰 소리를 질렀다.

“무사들은 모두 어디 있느냐? 어서 저놈을 끌어내라!”

그러나 무사들은 오지 않고, 검은 옷을 입은 그 귀신이 먼저 칼을 들어 조조를 내리쳤다. 칼을 맞은 조조가 한소리 큰 비명과 함께 눈을 뜨니 다행히도 꿈이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파 참을 수가 없었다.

조조는 날이 밝는 대로 좌우에 영을 내려 좋은 의원을 구해오게 했다. 이곳저곳에서 의원들이 불려와 재주껏 조조의 병을 치료해보 았다. 그러나 머리가 쪼개질 듯한 그 증세는 조금도 낫지 않았다. 조 조를 섬기는 사람들로서는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모두가 걱정을 하고 있을 때 화흠)이 들어와 조조를 일깨웠다.

“대왕께서는 신의라 불리는 화타를 모르십니까?”

“강동의 주태를 치료했다는 그 사람 말인가?”

조조가 그렇게 대꾸했다. 화흠이 맞다고 하자 조조가 왠지 그렇게 미더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말했다.

“그 이름은 들었다만 그 의술은 잘 알 수가 있어야지.”

그러자 화흠이 화타의 의술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화타는 자를 원화라 하며 대왕과 같이 패국 초 땅 사람입니다. 그 의술이 절묘하여 세상에는 널리 그 이름이 알려져 있지요. 환자 를 보면 증세에 따라 약을 달이거나 침을 놓거나 뜸을 떠 반드시 고 쳐낸다고 합니다. 만약 환자의 오장육부에 병이 있어 약으로 다스릴 수가 없으면, 마폐탕(麻肺湯)을 끓여 마시게 하여 마취시킨 뒤 작은 칼로 그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 약물에 씻는다고 합니다. 그때 환 자는 조금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데 씻기를 마친 뒤에는 실로 그 가른 곳을 다시 꿰매 약을 붙입니다. 그러면 스무 날이나 한 달쯤 뒤 에는 원래대로 되돌아가 낫는다니 실로 대단한 의술 아니겠습니까? 하루는 화타가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이 신음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저것은 먹은 게 내려가지 않아서 앓는 소리다.’ 화타가 그렇게 말해 앓는 이에게 물어보니 정말로 그랬다는 것입니다. 화타 가 마늘즙 석 되를 내 마시게 했더니 그 사람은 길이 두세 자나 되 는 뱀 한 마리를 토해내고 체한 것은 곧 내려갔다 합니다.

광릉 태수 진(陳)이 가슴이 울렁거리고 얼굴이 붉으며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증세가 있었습니다. 화타가 약을 지어 먹이니 머리 가 붉고 꼬물거리는 벌레를 석 되나 토해냈다고 합니다. ‘왜 이런 벌 레가 내 배 속에 들게 되었소?’ 진등이 그렇게 묻자 화타가 대답했 습니다. ‘이것은 비린 생선을 많이 잡수시어 생긴 독입니다. 이번에 는 비록 나았지만 삼 년 뒤에 다시 이런 증세가 나타나면 그때는 낫게 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진등은 과연 삼 년 뒤에 죽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마에 혹이 났는데 가려워 견딜 수가 없어 화타에 게 보였습니다. ‘안에 나는 물건이 들었소’ 화타가 그 혹을 보고 그 렇게 말하자 사람들이 모두 웃었습니다. 그러나 화타가 그 혹을 째 자 정말로 참새 한 마리가 날아가고 환자는 곧 나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개에게 물렸는데 거기서 두 개의 살덩이가 자라났습니다. 하 나는 아프고 하나는 가려워 견디지 못하고 화타에게 물으니 화타가 대답했습니다. ‘아픈 살덩이 속에는 바늘 열 개가 들었고, 가려운 살 덩이 속에는 검고 흰 바둑돌 두 개가 들어 있소’ 사람들은 모두 그 말을 믿지 않았으나 화타가 칼로 그 살덩이를 째니 과연 그 말대로 나왔습니다. 이 사람은 실로 옛적 편작(扁鵲이나 창공(公) 같은 명의(名醫)라 할 만합니다. 지금 금성에 살고 있는데 여기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대왕께서는 그를 불러 병을 다스려보도록 하십시오.”

이에 조조도 마음이 움직여 그날 밤으로 화타를 불러오게 했다. 조조를 진맥한 화타가 말했다.

“대왕의 머리가 그렇도록 아픈 것은 머릿속에 바람이 일기 때문 입니다. 병의 뿌리가 골을 싸고 있는 주머니 안에 있어 바람기를 걷 어낼 수 없으므로 약으로는 고칠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방법 은 마폐탕을 드시고 잠드신 뒤에 날카로운 도끼로 머리를 쪼개 그 안에 있는 바람기를 걷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대왕의 병은 씻은 듯이 고쳐질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조조는 벌컥 성을 내며 화타에게 소리쳤다.

“너는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조조는 한평생 암살을 두려워해왔다. 여러 차례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겪으면서 생겨난 두려움이었다. 거기다가 조조가 처음부터 화타를 떨떠름하게 여긴 것은 그가 동오의 주태며 유비 쪽의 관공 같은 이까지 치료해준 적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그가 도끼로 자 신의 머리를 쪼개놓겠다니 절로 그런 의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화타가 눈치 없이 그 같은 조조의 속을 한 번 더 건드렸다. 

“대왕께서는 일찍이 관공이 오른팔에 독화살을 맞았을 때의 일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그때 나는 그 살을 가르고 뼈를 긁어 독을 걷어 냈건만 관공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대 왕께서는 무얼 두려워하십니까?”

그러자 조조는 더 참지 못했다. 얼굴이 새빨개져 꾸짖었다.

“팔을 갈라 뼈를 갉는 일은 참아낼 수 있지만 머리통을 어떻게 쪼갠단 말이냐? 너는 관공과 그토록 정분이 두터웠으니 이 같은 기회를 틈타 틀림없이 내게 원수 갚음을 하려는 것일 게다!”

그러고는 좌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저놈을 끌어다 옥에 가두고 엄하게 고문하여 그 속셈을 밝혀내도록 하라.”

가후가 얼른 나서서 그런 조조를 말렸다.

“저 사람같이 훌륭한 의원은 세상에서 다시 그 짝을 찾을 수 없 을 것입니다. 함부로 다스려 그 재주를 못 쓰게 만들어서는 아니 됩 니다.”

하지만 조조는 오히려 펄펄 뛰었다.

“저놈은 병을 고친다는 구실로 나를 죽이려 했으니 오래전에 죽 은 길평 같은 자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소리치고는 화타를 가두고 고문하는 일을 재촉할 뿐이었다. 천하에 널리 이름을 날리던 화타는 그리하여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그것도 곱게 가두어두는 것이 아니라 엄한 문초를 곁들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 감옥을 지키는 졸개 중에 오압옥(吳獄)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오압옥은 죄 없이 갇혀 모진 고초를 겪는 화 타를 딱하게 여기고, 매일 술과 밥을 화타에게 들여보내주었다. 그 걸 고맙게 여긴 화타가 오압옥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곧 죽게 될 것이오. 죽는 것은 한스럽지 않으나 『청남 서(靑)』를 세상에 전하지 못하는 게 실로 한스럽소. 그동안 공은 내게 두터운 은혜를 베풀었으나 보답할 길이 없어 괴롭던 차에 이제 한 가지 방도를 찾았소. 내가 글 한 통을 써줄 터이니 공은 내 집으로 가서 『청서』를 가져오시오. 공이 그 책을 배워 내 의술을 잇는다면 그보다 더한 기쁨이 없겠소.”

그리고 화타는 그 자리에서 오압옥에게 글 한 통을 써주었다. 글을 받아 금성으로 달려간 오압옥은 곧 화타의 아내를 찾아 그 글을 내보이고 『청서를 받아왔다. 옥중에서 『청서를 받아 살 펴본 화타는 문서를 남겨 그 책을 오압옥의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때가 오면 그 책에 적힌 자신의 의술을 배워 천하가 알아 주는 명의가 되라는 격려를 덧붙였다.

그로부터 한 보름 뒤 화타는 결국 옥중에서 죽었다. 오압옥은 좋 은 관을 사서 화타의 시체를 정성껏 염해 장사 지내준 뒤 집으로 달 려갔다. 『청서를 익혀 죽은 화타의 뒤를 이으려 함이었다.

그러나 오압옥이 집에 돌아가니 뜻밖의 일이 벌어져 있었다. 아내 가 『청서』를 아궁이에 쑤셔넣고 태우는 중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오압옥이 깜짝 놀라 그렇게 소리치며 급히 불타는 책을 꺼냈으나 책은 이미 다 타고 마지막 한 장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성난 오압 옥이 그 아내를 꾸짖자 그 아내가 천연스레 대꾸했다.

“이 책을 공부해 마침내 화타의 신묘한 의술을 익힌들, 화타처럼 옥중에서 죽게 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아녀자의 좁은 소견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어지러운 세상에 대 한 날카로운 지적이 담긴 말이었다. 오압옥은 꾸짖어보았자 이미 늦 은 일이라 말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그 때문에 결국 화타의 『청낭 서』는 세상에 전해지지 못하고 다만 닭, 돼지의 불까기 [] 따위의 하찮은 의술만 남겨지게 되었다. 타다 남은 『청서의 마지막 장에 실려 있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흥미로운 화타의 죽음은 조조의 정전(正 傳)격인 「무제(武帝紀)」에도, 화타의 열전(列傳)에도 나와 있지 않 다. 『연의』를 지은이의 윤색이거나 민간의 전설인 듯하다.

한편 조조는 화타를 죽인 뒤로 병세가 더 나빠졌다. 거기다가 오 와 촉의 뒷일까지 걱정되다 보니 하루도 아픔이 멎을 날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곁에 두고 부리는 벼슬아치가 들어와 알렸다. 

“오에서 사신을 보내 글 한 통을 올려왔습니다.”

조조가 그 글을 받아 읽어보니 내용은 대강 이러했다.


‘신(臣) 손권은 천명이 이미 주상께로 돌아갔음을 잘 알고 있습니 다. 엎드려 바라건대 어서 빨리 대위(位)에 오르시어 역적 유비를 쳐 없애시고 동서(東西) 양천(兩川)을 평정하도록 하옵소서. 그리되 면 신은 곧 아랫것들을 거느리고 주상께로 항복해 돌아가겠습니다.’


너무도 갑작스런 항복이요, 분에 넘치는 아첨이었다. 조조는 그러 는 손권의 속셈을 금세 꿰뚫어보고 그 편지를 여럿에게 내보이며 껄 껄웃었다.

“이 어린 놈이 나를 추켜세워 화로 위에 앉게 하려는 수작이로구나!”

조조는 아직도 자신이 제위로 나가는 위태로움을 그렇게 비유해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진군을 비롯한 조조의 사람들은 그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여럿이 입을 모아 조조에게 권했다.

“한실(漢室)이 기울고 시든 지 이미 오래되고, 전하의 공덕은 산처 럼 우뚝하여 천하의 뭇 백성들은 오로지 전하만을 우러르고 있습니 다. 이제 손권까지 스스로 신하 되기를 빌며 항복해 온 것은 하늘과 사람이 아울러 전하를 따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 서는 그들의 바람을 저버리지 마시고 하루 빨리 대위로 나아가도록 하옵소서.”

그러나 조조는 여전히 웃음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나는 한나라를 섬긴 지 오래되었다. 비록 약간의 공덕이 백성들 에 미쳤다 하나, 이미 왕의 자리에 오르고 이름과 벼슬도 더할 바가 없다. 어찌 이보다 더 큰 것을 바라겠는가. 천명이 내게 이르렀다 해 도 나는 오히려 주의 문왕(王)을 따르리라.”

천하의 삼분의 이를 얻었으면서도 오히려 몸을 굽혀 은(殷)을 섬 긴 이가 주의 문왕이었다. 그러나 그 아들 무왕 대에 이르면 끝내 은 을 멸하고 오백 년 주실(周)을 열게 된다. 얼핏 들으면 조조의 겸 손이요, 충심 같지만 실은 그 말 속에는 자기 한 대를 뛰어넘은 야심 이 감추어진 말이었다. 사마의가 그 뜻을 알고 더 이상 제위에 오르 기를 권하지 않는 대신 잊고 있던 일을 깨우쳐주었다.

“손권이 이미 스스로를 신하라 부르고 우리에게로 왔으니, 그에게 벼슬을 내려 기운을 돋워주신 다음 유비와 싸우게 만드십시오.”

“그래야겠지. 절로 굴러들어온 이 좋은 기회를 어찌 놓치겠느냐?” 

조조는 그렇게 말하고 곧 황제께 표문을 올려 손권을 표기장군 남창후侯)로 삼고 형주목을 겸하게 했다. 그날로 새로운 관작을 내리는 사자가 천자의 조서와 더불어 동오로 달려갔다.

손권의 귀순으로 위세는 더욱 높아졌지만 조조의 병세는 갈수록 나빠졌다.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말 세 마리가 나란히 한 구유에서 여물을 먹고 있었다. 너무 생생한 꿈이라 깨어난 뒤에도 조조는 묘 하게 마음에 걸렸다. 가후를 불러 꿈 얘기를 하며 물었다.

“지난날에도 말 세 마리가 한 구유에서 여물을 먹고 있는 꿈을 꾼 적이 있는데, 나는 마등 삼부자가 화근이 되리라는 뜻쯤으로 여겼 다. 그러나 마등이 이미 죽었는데도 어젯밤 다시 말 세 마리가 한 구 유에서 여물을 먹고 있는 꿈을 꾸었다. 이게 좋은 꿈인가? 나쁜 꿈 인가?”

가후가 듣기 좋은 말로 둘러댔다.

“말을 먹이신 것이라니 좋은 징조올시다. 말들이 조씨(曹氏, 구유를 뜻하는 槽를 曹로 해석해서)에게로 돌아와 기름을 받는데 의심쩍으실 게 무어 있습니까?”

그러나 실인즉 그 말 세 마리는 사마의와 사마소, 사마사 세 부자 를 뜻한 것이었다. 평소 사마의의 지혜와 야심이 남다름을 알고 은 연중에 걱정해온 게 꿈으로 나타난 것이리라.

그런데 바로 그날 밤이었다. 침실에 누운 조조는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어쩔거려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위에 엎드렸다.

갑자기 나는 비단폭을 찢는 듯한 소리에 다시 깨난 조조가 놀라 바라보니 문득 눈앞에 복황후와 동귀인 및 두 황자(皇子)가 복완, 동 승 등과 나타났다. 합쳐서 스무남은쯤 되는데 모두가 조조에게 참혹 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었다.

“이놈 조조야. 목숨을 내놓아라.”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귀기 서린 안개에 싸여 선 그들은 한결 같이 조조를 향해 그렇게 소리쳤다. 조조는 급히 칼을 뽑아 허공을 베었다. 갑자기 쨍그랑 소리와 함께 탑전(楊殿)의 서남쪽 모퉁이가 쪼개져나갔다.

그제서야 자신이 헛것을 본 걸 깨달은 조조는 놀라 땅에 자빠졌 다. 가까이서 모시던 신하들이 급히 조조를 구해 별궁으로 옮기고 조용히 병을 보살피게 했다.

하지만 다음 날도 남녀가 어울려 곡하는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밤새껏 전 밖에서 들리는 곡성에 시달리던 조조는 새벽이 되자 여러 신하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나는 싸움말에 올라타고 삼십여 년을 보냈으나 괴이한 일은 믿 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연일 괴이한 일이 벌어지니 어떻게 된 일인가?”

“대왕께서는 도사를 불러 초제(醮祭)를 차리고 빌게 하십시오. 그 런 일에는 초제가 으뜸입니다.”

신하들이 한결같이 그렇게 아뢰었다. 그러나 조조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탄식했다.

“성인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에 죄를 얻으면 빌 곳이 없다[獲罪於 天無所禱也]고 했다. 일찍이 없던 일이 이제 와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 내 천명이 다된 듯싶다. 천명이 이미 다한 것을 무슨 수로 구하 겠는가?”

그러고는 초제를 차리는 걸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었다. 조조의 병세는 더욱 나빠져 이제는 눈까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조조는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 고 사람을 보내 하후돈을 불렀다.

어렸을 적부터의 벗이요, 사십 년이 넘는 세월 자신을 위해 충성을 아끼지 않은 그를 불러 뒷일을 의논코자 함이었다.

조조의 부름을 받은 하후돈은 급히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조조가 있는 전문(殿門) 앞에 이르니 문득 복황후와 동귀 인에다 두 황자, 복완, 동승 등이 음습한 기운에 싸여 앞을 가로막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하후돈은 그 자리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곁 에 있던 사람들이 급히 부축해 정신이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때부터 그도 병을 얻었다.

하후돈을 불렀으나 오지 않자 조조는 다시 조홍, 진군, 가후, 사마 의 등을 불러오게 했다. 그들이 모두 조조가 누운 침상 앞에 이르자 조조는 힘없이 뒷일을 부탁했다. 조홍을 비롯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 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조조를 위로했다.

“대왕께서는 옥체를 보증하시옵소서. 며칠 되지 않아 깨끗이 털고 일어나실 것입니다.”

그러나 조조는 그들의 말을 받아주지 않았다.

각오가 선 사람처럼 죽을 채비에 들어갔다.

“내가 천하를 종횡하기 삼십여 년 그동안 뭇 영웅들이 일어났으 나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다만 강동의 손권과 서촉의 유비가 남았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병이 무거워 그대들과 다시 마음을 털어 놓고 말할 틈이 없을 것 같다. 특히 그대들에게 집안일을 부탁하니 부디 이대로 이루어지게 되기를 빈다. 나의 맏아들 앙은 유씨(劉氏) 의 소생이나 불행히도 일찍이 완성의 싸움에서 죽었다. 따라서 이제 내 아들은 변씨(氏) 몸에서 난 비와 창과 식과 웅 넷뿐이다. 내가 평생 사랑했던 것은 셋째 식이었으나, 사람됨이 겉으로만 화려하고 성실함이 적으며 술을 즐기고 몸가짐을 함부로 해 세자로 세우지 않 았다. 둘째 창은 용맹스러우나 꾀가 모자라고 넷째 웅은 병치레가 잦아 제 한 몸 보살피기도 바쁘다. 이에 비해 맏이 비만은 돈독함과 두터움을 갖추고 공손하며 삼갈 줄 아니 내 뒤를 이어갈 만하다. 그 대들은 내가 죽은 뒤에도 마땅히 그를 도와 큰일을 이루게 하라.” 

바로 유언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조홍을 비롯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마침내 울며 조조 앞을 물러났다.

조조는 또 근시를 시켜 모아두었던 명향(香)을 모두 가져오게 하여 자신을 섬기던 여인들에게 나눠주며 당부했다.

“내가 죽은 뒤에 너희들은 부지런히 여공(工)을 익히도록 하라. 길쌈을 많이 하고 그 실로 신을 삼아 팔면 너희들이 쓸 돈은 너희가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모두 동작대에 모여 살며 매일 제사를 올리되 반드시 기생들로 하여금 춤추고 노래하며 상식(食)을 올리라 했다. 그밖에 조조는 또 창덕부(彰德府)에 명하여 강무성 밖에 거짓 무 덤 일흔두 개를 만들게 했다. 뒷사람들에게 자신의 무덤이 어디 있 는지 모르게 하여 파헤쳐짐을 피하려 함이었다.

모든 당부가 끝난 뒤 조조는 한소리 긴 탄식과 함께 눈물을 주르 르 쏟더니 문득 숨이 끊어졌다. 그의 나이 예순여섯, 때는 건안 이십오년 정월이었다.

뒷사람이 「업중가(鄴中歌)」란 노래 한 편을 지어 조조의 삶을 읊었다.

성은 업성에 물은 장수漳라,

이 땅에 맞춰 이인이 일어났네.

큰 꾀 멋있는 일 모두 글하는 마음에서 나왔고,

임금과 신하는 형과 아우, 아비와 자식같이 지냈다.

영웅은 속된 가슴으로 헤아릴 수 없고,

그들고 남 또한 여느 눈에는 보이지 않는 법,

공 으뜸 죄 으뜸 두 사람 아니고

더러운 이름 향기로운 이름 모두 한 몸에 붙었네.

빼어난 글 드높은 패기

어찌 여느 무리와 함께 될 수 있으리.

창을 뉘어놓고 대를 쌓아 태행산과 겨루었으되 

힘과 운세 따라 머리 숙이고 쳐들 줄도 알았다 

이런 사람이 어찌 역적질인들 못할까. 

작으면 패자(者)요, 크면 왕 아닌가 

패자며 왕 노릇 아녀자를 울리는 법,

불평해본들 모두가 부질없는 짓이네.

도사 불러 목숨 비는 일 이롭지 못함 잘 알았고,

아낙들 불러 향(香) 나눠주니 정 없는 사람도 아니네.

오호라

옛사람 하는 일 크고 작음 가림이 없구나.

적막하든 호화롭든 다 뜻이 있어 한 일.

서생들아, 가볍게 무덤 속 사람을 논하지 말라.

무덤 속 사람이 되려 그대들 되잖은 서생 티를 비웃으리라.

『연의』를 지은 이는 조조에게 지나치게 엄격했으나 그의 삶을 이 업중가로 마무리한 일만은 예외일 것 같다. 조조의 삶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요약한 글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하면 진수의 평은 아무래도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듯하 다. 진수는 「무제기 끝에서 조조를 이렇게 평하고 있다.


‘한말(漢)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군웅이 잇따라 일어났으되 그 중에서도 특히 원소는 범같이 천하를 넘보는 게 누구도 맞설 자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태조(조조)는 슬기와 지모를 다하여 마침내 천 하를 마음대로 하게 되었다. 신불해(申), 상앙(商鞅)의 법술(法 術)을 꿰뚫었고, 한신(韓信), 백기(起)의 기이한 계책을 갖추었다. 인재를 거두어 쓰되 모두 그 그릇에 맞게 썼으며, 사사로운 정보다 는 능력을 먼저 헤아렸고, 쓸 때는 지난 허물을 상관하지 않았다. 그 리하여 마침내 황실의 기틀을 잡고 큰일을 이루어냈으니 그 밝은 지 략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할 만하다. 그저 여느 사람이 아니라고 말 할 정도를 넘어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진晋) 시대의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도 조조를 좋게만 말하고 있는 셈이다. 다른 곳에서 그의 평은 매우 날카롭고 정확하나 조조에게는 지나치게 한쪽으로만 치우쳤다는 소리를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면 조조는 진실로 어떤 사람이었을까. 천칠백 년의 세월과 정사보다는 야사, 전설, 무명씨의 잡저에 의지해야 하는 부담은 있 지만, 한번쯤은 그의 삶을 종합적으로 음미해보는 것도 뜻이 있을 줄 믿는다.

먼저 한 정치가로서의 조조를 살펴보자. 흔히 조조의 권세를 표현 할 때 ‘협천자 영제후

구절을 쓴다. 곧 천자를 끼고 諸侯)’란 제후를 호령했다는 뜻인데, 이는 조조가 권력과 정통성의 연관을 그 만큼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뜻도 된다.

오랜 세월 실권을 잡고 있었으면서도 조조는 단 한 가지 자기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제외하고는 제실(室)의 권위에 직접적으로 도 전하는 법이 없었고, 또 부득이 해 손을 대도 끝내 천자를 해치지는 않았다. 자신을 겨냥한 서너 차례의 암살 음모가 모두 외척을 통해 헌제와 이어져 있었건만, 『연의에서조차 조조가 직접 헌제를 핍박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얼핏 보아서는 대단한 너그러움 같으나 실은 그만큼 정통성이 가 지는 힘을 의식했다는 편이 옳다. 그가 몇십 년을 더 살았다 해도 반 드시 제위까지 찬탈했을까는 단언하기 어려울 것이다.

조조는 또 백성들의 움직임이나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민감했다. 그런 점에서 조조를 민중적이었다고 말하기도 하나, 그의 의식이 과 연 그렇게 규정지을 정도까지 갔는지는 의심스럽다. 그가 민중을 위했다면, 그것은 힘의 논리에 따른 한 방편으로서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말의 부패한 제도와 혼란된 사회 상황으로 보면 그만 큼이라도 나아간 것은 특기할 만하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무래도 조세와 부 역일 것이다. 그런데 조조를 헐뜯어 말하는 사람도 그가 백성들에게 무리한 세금을 거두었다거나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일으켜 무리하게 백성을 몰아댔다는 말은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세금을 면제해주었 다든지 곡식을 풀어 백성을 먹였다는 기록뿐이다.

거기다가 조조는 원호법(援護法)을 사실상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실시한 사람이었다. 큰 싸움이 끝났을 때마다 조조는 영을 내려 자 신을 위해 죽은 장병들의 가족에게 땅을 나누어주었다. 또 둔전법 (屯田法)의 도입도 아마 조조가 가장 먼저일 것이다. 원래 호족(胡) 들의 제도인 그 방식을 빌려 조조는 많은 군사를 먹여야 하는 부담 을 백성들에게서 덜어주었다.

조조의 인재를 등용하는 법도 뒷사람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조조는 오직 능력에 따라 사람을 쓰되, 한번 쓰면 과거의 잘못을 묻 지 않았다. 힘을 따라 이동하는 철새 같은 난세의 지식인들을 자신 의 손발로 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타협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결과는 그가 그 시대의 가장 많은 재사를 거느리도록 해주었다. 뒷날 제갈량은 자신이 촉한의 승상이 된 뒤에도 아직까지 위에서 주부니 사마니 하는 대단찮은 벼슬자리에 머물러 있는 동학(同學)의 수재(秀才)들에 대한 소문을 들을 때마다 탄식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아직도 그런 하찮은 벼슬자리에 있다니 도대체 위나라에는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있단 말인가!”

외교나 동맹 관계에 대해서도 조조의 신축성은 놀랍다. 어제의 수라도 실익만 있다면 가장 가까운 벗이 되고 어제까지의 벗이라도 이해에 거슬리면 칼끝을 들이댔다.

비정한 힘의 세계에서는 당연한 원리라고는 하지만, 실제 상황에 서 그대로 실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원수를 잊는 데는 너그러 움과 참을성이 필요하고, 벗을 버리는 데는 그 나름의 용기와 과단 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범인(凡人)들의 경우에는 용케 원수를 잊 기는 해도 벗을 버리지 못하거나, 벗은 어떻게 저버렸지만 지난날의 원수를 잊지 못해 일관성을 가지지 못한다.

거기다가 그나마 대단치도 못한 의리나 편협한 원한에 사로잡혀 어물거리다가 시기를 놓치기까지 한다. 정치와 윤리의 상관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는가, 또는 정치에서의 윤리란 개념을 어떻게 파악하 는가에 따라 사뭇 달라지겠지만, 벌거숭이 힘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난세의 정치가인 조조에게는 그런 신축성도 무시 못할 강점이 되었 을 것이다.

그밖에도 조조의 강점은 수없이 많아 그것만으로 따로 책 한 권 을 묶을 만하다. 한마디로 말해 조조는 현실적인 정치가로서는 거의 완벽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었다. 혹 어떤 이는 사상(思想) 또는 이상 주의의 결여를 말하기도 하나 그것도 온당한 지적은 못 된다. 그 바 탕이 되는 학문적인 소양이나 풍류적 기질에 있어도 조조는 어김없 이 당대의 군웅들 중 으뜸이었다.

다음은 군략가(軍略家)로서의 조조를 살펴보자. 왕침(王)이란 사람은 조조의 용병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조조가 군사를 부리는 법은 대개 손(孫), 오(吳)로부터 나왔다. 그 러나 조조는 거기다 기책과 허허실실을 조화시켜 그 천변만화 의 전략이 귀신 같았다. 스스로 병서를 지어 해석을 달아 장수들에 게 나눠주니 장수들은 거기 따라 싸워 매번 이겼다.

다른 사람들도 대개는 조조가 군사를 부리는 요체를 허허실실로 보고 있으나 좀더 정확히 말하면 임기응변의 재능인 것 같다. 조조 는 아무리 큰 싸움이라도 사전에 윤곽을 결정하는 법이 없었다. 질 풍같이 군사를 몰고 가서 부딪치고, 부딪치면서 그 국면 국면마다 거기에 알맞은 계책을 썼다.

특히 그는 승기를 잡는 데 누구보다 재빨랐고 패배의 조짐에도 예민했다. 그 바람에 그의 승리는 언제나 기발해서 화려해 보였고, 패배의 상처는 최소한에 머물렀다. 『연의』를 보면 곳곳에서 조조의 참담한 패배가 나온다. 그러나 그 패전으로 물러앉는 법은 없었고, 뒤따른 반격으로 싸움은 항상 뒤집어지고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해 그 패배가 조조에게 준 충격이 그만큼 적었다 는 뜻이다. 그런데도 조조의 패배가 참담하게 보이는 것은 다만 그 가 언제나 제일선에 있었던 것과 『연의』를 지은 이의 악의가 교묘하 게 엮여진 탓일 뿐이다.

그다음 병략가로서의 조조가 보여주는 특징은 소규모 전투에서 유달리 강했다는 점이다. 조조가 몸소 진두에 나서면서 가장 많은 군사를 동원한 것은 관도의 싸움 때와 적벽의 싸움 때일 것이다.

관도에서 원소와 싸울 때도 조조는 소규모의 전투에서는 거듭 이기고 있으나 대국적으로는 밀리다가, 창정에서 배수의 진세를 이루게 됨으로써 극적으로 원소를 격파했다. 그리고 두 번째 적벽의 싸 움은 여지없는 참패로 끝장을 보게 된다.

물론 적벽 싸움의 패인에 대해서는 달리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조조의 군사는 머릿수는 많아도 정예하지 못했고, 강을 끼고 싸우는 데도 수전(戰)에 익숙지 못했으며, 군사들 사이에 병이 돌아 싸우 기도 전에 전력이 크게 줄어 있었고, 형주 수군은 조조에게 항복한 지 오래잖아 충성심마저 없었다. 거기다가 조조를 맞아 싸운 상대는 제갈량, 방통, 주유, 노숙 등 당대 제일의 병법가들이 연합한 세력이 아닌가, 라는 반문이 그것이다. 그러나 두 번의 대규모 동원에서 한 번은 아슬아슬한 역전을 하고, 한 번은 그대로 참패해버렸다는 결과 는 아무래도 조조의 용병술 그 자체와 무슨 연관이 있는 듯하다. 조조 최후의 대규모 동원이라 볼 수도 있는 한중 출병도 하후연 의 원수를 갚기는커녕 끝내는 한중을 유비에게 내주고 빈손으로 돌 아오고 있다.

그러나 소규모 전투에 강했다는 특징이 군략가로서의 조조를 과 소평가할 이유는 못 된다. 큰 싸움도 결국은 작은 싸움들의 모임이 며, 더구나 소규모 전투도 조조를 중심으로 본 것이지 상대까지 소 규모라는 뜻은 아니었다.

실제로 조조는 작은 군사로 그 몇 배나 되는 적의 대군을 수없이 깨뜨려보였다. 병법의 원리가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치고 약한 것으 로 강함을 이기는 데에 있다면 조조는 삼국을 통틀어 으뜸가는 군략 가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밖에 조조의 군사적인 성공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오랑캐 정벌이다. 『연의』는 원소 토벌의 한 결과로 가볍게 다루고 있으나 특히 오환(烏丸)을 쳐부순 것은 좀 부풀리어 말한다면 한무제(漢武 帝)의 흉노 토벌에 견줄 만하다. 오환은 한때 요동(遼東), 요서(遼西), 우북평(平) 삼군(郡)을 차지하고 유주(幽州)의 태반을 다스릴 만 큼 강성하였다.

그러나 조조는 그들의 추장을 죽이고 이십만을 사로잡음으로써 동북을 평정했다. 또 강족(族)도 동탁, 마등, 마초 등 지방 군벌과 야합하여 북방에서 세력을 떨쳤으나 조조에 의해 조용해졌다. 어떤 이는 조조의 그 같은 토벌이 없었던들 오호(五胡) 십육국(國)의 시대가 훨씬 빨리 왔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중국사의 한 이변이라 할 만큼 인재가 쏟아진 시대여서 혼일사해 (混四海)의 위업은 이루지 못했으나 조조의 군사적 재능은 분명 뛰어났다. 당대뿐만 아니라 이십오사(史) 전체로 보아서도 몇 손가 락 안에 꼽힐 군략가였다.

마지막으로는 지금껏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일면 문장가로서의 조 조를 살펴보자. 원래 조조의 문집은 『위무제집(魏武帝集)』이라 하여 스무 권이나 되는 방대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세월 이 지남에 따라 흩어지고(거기에는 뒷사람의 왜곡으로 조조가 갈수록 인기 를 잃어버린 탓도 있었다) 지금 남은 것은 서른 편 남짓의 시와 백여 편 의 문장(주로 영이나 포고의 형태)뿐이다.

시(詩)는 대개 악부(樂府)인데, 실은 조조가 바로 민간의 소박한 노래이던 고악부(古樂府)를 악부시(樂府詩)란 형태로 정통 문학에 편입시키는 데 으뜸가는 공을 세운 시인이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적벽 싸움을 앞두고 불렀다는 「단가행(短歌行)」을 소개할 때 이미 말했거니와 조조의 시풍은 한마디로 통탈(洞脫)을 내세우는 것이었 다. 거리낌없고 숨김없이 감정을 토로하며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것 은 하찮은 신분에서 정상의 위치에까지 오른 조조 자신의 기개와도 연관이 있는 성싶다.

지금 전하고 있는 조조의 시는 「단가행」 외에 「도관산(度關山)」, 「대주(對酒)」, 「호리행(蒿里行)」, 「극동서문행(郤東西門行)」, 「고한행 (苦寒行)」, 「보출하문행(步出夏門行)」, 「맥상상(陌桑上)」, 「정렬(精列)」,

「추호행(行)」 등이 있다. 앞서 몇 편 보았거니와 이번에는 특히 「극동서문행」을 보기로 한다.

새북에서 날아오른 기러기 鴻雁出塞北

아무도 없는 이 땅으로 왔구나 乃在無人鄉

날개 저어 만리 길 擧翅萬餘里 

가나 서나 절로 줄을 짓네 行止自成行 

겨울에는 남쪽의 벼를 먹고 冬節食南稻 

봄이 오면 북쪽으로 되날아간다 春日復北翔

밭 속을 구르는 다쑥 田中有轉蓬

바람에 쏠리어 멀리 날아오르네 隨風遠飄揚

뿌리에서 잘린 지 이미 오래거니 長與故根絶

세월이 지난다손 다시 만날까 萬世不相當

싸움터에 나온 이 몸 또한 그러하구나 奈何此征夫

어찌하여 이곳저곳 헤매는가 安得去四方

말은 안장 풀릴 틈이 없고 我馬不解鞍

나는 갑옷 투구 벗을 겨를이 없네 鎧甲不離傍

늙음은 시름시름 찾아들건만 冉冉老將至

언제 다시 고향에 돌아가려나 何時反故鄕

신룡은 깊은 못에 몸을 감추고 神龍臧深淵

사나운 범은 높은 언덕을 걷는다 猛虎步高岡

여우도 죽을 때는 태어난 언덕으로 머리 두거니 狐死歸首丘

이 몸인들 어찌 고향을 잊을 것인가 故鄉安可忘

조조의 문장은 구현령(賢), 명본지령(明本)등의 포고령과 상소문, 표문 등이 남아 있는데, 대개는 일부만 전하거나 요약된 형 태이다. 그러나 그의 호방함이나 조리를 엿보기에는 넉넉하여 그를 문장가로 불러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명본지령(本令) 또는 술지령(述志令)이라 불리는 긴 포고령은 문장이 뛰어날 뿐 아 니라 그의 삶을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조의 그러한 문학적 재능은 그 아들에게도 이어졌다. 충沖)이 란 막내는 어려서 죽어 일화밖에 전해지지 않으나, 맏아들 비는 『위 문제집(魏文帝集)』스물세 권을 남겨 그 일부가 전하고, 셋째 식은 저 유명한 「칠애시(七哀詩)」와 「낙신부(洛神賦)」를 남겨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특히 조식은 시품(詩品)을 지은 종 영(鍾嶸)으로부터 당대 제일의 문장가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였다.

돌연변이가 아니라면 그들의 재능은 그 아버지인 조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임에 틀림이 없다.

글은 곧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데, 만약 그게 진실이라면 조조는 그가 남긴 글만으로도 그에게 덮씌워진 역사의 악역을 벗어던질 만 하다. 그러나 그 말이 그저 한 비유거나 문사를 향한 당부일 뿐이고, 특히 조조에게는 글이 다만 자신의 잘못과 거짓됨을 감추거나 치장 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말과 글의 죄 많음 에 섬뜩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치가로서 군략가로서, 그리고 문장가로서 그처럼 뛰어 난 조조가 오늘날 민간의 의식 속에서 간웅으로만 남게 된 까 닭은 무엇일까. 더 자주 있었던 볼만한 시책이나 미덕보다는 드물었 던 실책이나 악덕이 그에 대한 기억의 전면에 나서고, 화려한 승리 보다는 참담한 패배가 훨씬 그답게 여겨지며, 풍부한 인간성과 학문 적, 예술적 소양 대신 비정과 잔혹, 간교함만이 그의 정신적 초상(肖 像)으로 남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무엇보다도 조조를 그렇게 몰아간 데 으뜸가는 공을 세운 것은 『연의를 지은 나관중(羅貫中)의 사관일 것이다. 나관중은 명(明)의 건국에 관여했다고 알려진 사람으로 이민족의 왕조인 원(元)을 축출 하는 과정에서 엄격한 한민족(漢民族)의 정통사관을 정립해야 할 필 요를 느꼈을 것이고, 그 지나친 적용은 혈통을 근거로 유비에게 정 통성을 부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한번 유비를 정통으로 내세우자 조조에게는 그 대역(對 役)이 절로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손권이 있었지만 그는 수성(守成)의 인간형. 소설적으로도 매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유비를 높이는 악역을 맡기에는 조조보다 무게가 모자랐다. 거기다가 성격의 극명한 대비를 중요한 요소로 삼는 장회(소설의 특질은 조조 를 더욱 왜곡시켜 지금처럼 인상지어지도록 만들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한 작가가 의도적으로 어떤 인물을 깎아내리려 한 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독자의 감정적인 호응이 없어서는 안 된 다. 오히려 나관중의 『연의』가 그토록 성공적이었던 것은 대중의 정과 그의 관점이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하며, 그런 점에서 조조는 이미 『연의』 이전에도 악역을 맡아왔을 것이다. 실제로 나관 중의 『연의』 전에 나온 평화(平니 평설식의 삼국지나 민간 의 전설도 조조에게 그리 우호적이 못 되었다.

그렇다면 출신에서도 자기들과 멀지 않았고, 세력에서는 천하의 태반을 잡고 있었으며, 다스림에서도 가장 많은 것을 베푼 조조에게 대중들이 반감을 가진 까닭은 또 무엇일까.

이제 와서 그 까닭을 더듬는 것은 자칫 터무니없는 공론이 될지 모르지만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치자(者)의 인간형에 대한 중국인들의 기호(嗜好)다. 그들이 이상형으로 보는 군주 가운데 으 뜸으로 치는 것은 한고조 유방인데 그의 능력은 한마디로 무위(無 의 능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도 특별히 두드러진 사람이 아니었다. 학문을 깊이 하지도 않았고, 예술적인 소양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번득이는 재치가 있던 것도, 도덕적인 절제가 남달리 철저하지도 않았다. 그의 강점은 단 하나 사람들을 잘 부리는 것뿐이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에 비해 조조는 정반대 편에 선 인간형이라 할 수 있다. 조조는 그 한 몸에 너무 많은 재능을 갖추고 있었고, 그것이 다스림을 받는 쪽에서 보면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적절한 비유가 될는지 모르 지만, 그는 곧 존경은 받아도 사랑을 받기는 어려운, 정(情)보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그런 부류의 윗사람이었던 셈이다. 그게 그가 세운 왕조가 단명했음과 아울러 그에 대한 대중의 감정 또한 단순한 불만 이상의 반감으로 변질되어간 것이나 아니었는지.

그다음으로 조조가 대중적인 인기를 모으지 못한 데는 목적이 따 로 있는 정의와 선에 대한 불신도 한몫한 듯싶다. 그는 말끝마다 국 가와 백성들을 앞세웠지만 그가 품고 있었던 원대한 야심은 일찍부 터 그의 적들 때문에 대중의 의심을 받아왔다. 그리하여 그 자신은 죽을 때까지 끝내 한에 대한 충의를 지켰으나, 그 아들 조비의 대에 이르러 마침내 제위를 찬탈함으로써, 일생에 걸친 그의 노력은 결국 충의가 아니라 자제 또는 원대한 계략으로 단정되어버렸다.

그밖에 조조에 대한 대중적인 반감의 원인으로 추측되는 것으로 는 비범한 인간에 대한 범인들의 시기이다. 조조가 가진 재능들 가 운데 하나만 가져도 그 분야에서는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 는 범인들에게는 그가 부럽다 못해 밉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런 모든 감정의 바탕에다 구체적이고도 명백한 조조 개인의 악행 이 겹치면 대중적인 인기와 가까워질래야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조조의 개인적인 악행은 과장의 혐의는 가지만 『연의』 구석구석 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섬뜩한 것은 사람의 목숨을 너무 쉽게, 그리고 함부로 수단 삼아 이용하는 점이다.

원소와 싸울 때 모자라는 군량 때문에 생긴 불만을 군량관(軍糧官)에게 뒤집어씌워 죽인 일이나, 암살의 방지를 위해 꿈결을 가장 해 근시를 베어 죽인 일 따위가 바로 그것이다. 『연의에는 용케 빠 져 있지만 또 이런 일도 있다.

조조는 평소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나는 누가 칼을 감추고(나를 해치려고) 내 곁으로 다가오면 이상하 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자 조조는 다시 꾀를 내었다. 자신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무사 하나를 불러 가만히 말했다. “너는 여럿이 모였을 때 칼을 품고 내게로 다가오너라. 그러면 내 가 가슴이 뛴다며 너를 잡아 문초하게 할 것이다. 그때 너는 겁내지 말고 나를 죽이려 했다고 실토하여라. 네 목숨을 보장할 뿐만 아니 라 나중에 높은 벼슬을 주고 네 가족들에게도 후한 재물을 내리겠다.” 그 말을 믿은 그 불쌍한 무사는 조조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러 나 조조는 그의 실토가 있기 무섭게 그를 끌어내 목 베게 했다. 끌려 나가면서도 조조가 어떻게 해주겠거니 믿었던 그 무사는 결국 칼이 목에 떨어지고서야 속은 줄 알았으나 속절없는 일이었다.

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조조의 그 신통한 능력에 감탄했고, 소문이 나자 속으로 은근히 조조를 엿보던 사람들도 겁을 집어먹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설명으로도 조조가 시대를 바꾸어가며 역사의 악 역을 맡아야 하는 이유로는 모자란다.

누군가 영향력 있는 계층의 끊임없는 상기와 첨가 없이는 그에 대한 비하(下)가 그토록 확대되고 영속적으로 이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삼국지연의』가 누리는 지속적인 인기와도 연관이 있을 것인데 여기서 다시 한 가지 두드러진 조조의 실책을 찾아볼 수 있다.

어찌 된 셈인지 조조는 신상필벌이라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무장 들에게는 관대했던 반면 문신들의 실수에는 가혹했다. 『삼국지』 전 편을 통틀어 조조가 무장을 패전이나 그밖의 책임을 물어 처형한 예 는 거의 없고, 어쩌다 있어도 이름 없는 장수거나 처음부터 탐탁잖 게 여겼던 항장(將)의 경우뿐이다.

그러나 문신에 이르면, 조조는 당대 제일급의 학자나 문사를 가리 지 않고 가차 없이 처형하고 있다. 첫째가 공융, 공자의 이십대 손이 요,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으로 당대 문단의 기린아였다. 그 러나 조조는 대단찮은 말 몇 마디를 빌미로 일가를 몰살시키고 만 다. 그다음이 예형, 역시 당대의 이름난 재사였으나 황조의 칼을 빌 려 죽인다.

다시 당대의 문장 양수, 남의 집안 상속 싸움에 끼어든 흠은 있으 나 역시 말 몇 마디의 죄로 죽여 없애기에는 아까운 재주였다. 또 최 염이 있다. 그도 학덕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으나 몇 구절 글귀 때 문에 조조에게 죽었다. 뿐만 아니었다. 순욱, 순유, 숙질(叔姪)도 일 생을 조조를 위해 힘을 다했지만 한번 노여움을 사자 죽음으로 겨우 용서받았다. 학자나 문사로는 그리 높이 치는 축에 들지는 못해도, 조조가 문신의 실수에 가혹했다는 예는 될 수 있으리라.

역사가 폭군으로 기록하는 제왕들의 공통된 특징 중의 하나는 학자나 문사를 박해하는 짓이다. 그 전형적인 예가 진시황으로 그는 여러 가지로 뛰어난 군주였으나, 책을 불사르고[焚書] 선비를 묻어[坑儒] 그 빛나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폭군으로 더 잘 알려졌다.

써서 남기는 이들을 해친 데 대한 당연한 보복인 셈이나 당하는 쪽으로 보면 꽤나 억울할 것이다.

조조의 경우도 혹 그런 탓은 아니었을까. 뒷날 써서 남기는 일을 맡은 사람들의 동료 의식이 한 방향으로 모아져서 조조를 격하시키 고 마침내는 역사극의 고정 악역 배우로 만들어버린 것이나 아닐까. 시대는 달라도 자신과 같은 일을 했던 동류(同類)를 조조가 함부 로 죽인 일이 음험한 원한으로 뒷시대의 학자와 문사들을 자극해 그 나쁜 쪽으로의 과장은 몰론 왜곡까지 서슴지 않게 만든 것은 아닐 까. 탁류(濁流)인 환관 출신, 군벌(軍閥), 정통성의 결여, 그밖에 그 어떤 조조의 단점보다도 그런 원한이 은연중에 대중들에게까지 옮 아 오늘날의 조조상이 만들어진 것이나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