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8권 – 12화 : 한(漢)의 강산은 마침내 위(魏)에게로
한(漢)의 강산은 마침내 위(魏)에게로
한편 조비는 아비의 자리를 이어받아 나라를 다스리는데 법령을 모두 고치어 자신의 위엄을 높이니, 한제(漢帝)를 핍박함이 오히려 그 아비 조조보다 더했다.
허창에 풀어놓은 촉의 염탐꾼들은 곧 그 소식을 성도에 전했다. 한중왕 유비는 그 소식에 몹시 놀라 문무의 신하를 모두 불러들여 놓고 말했다.
“조조는 이미 죽고 그 아들 조비가 뒤를 이었다는데 천자를 핍박 하기가 오히려 아비보다 더하다는구려. 그런데도 동오의 손권은 두 손을 모아 스스로를 조비의 신하라 말한다니 그대로 보고 있을 수가 없소. 먼저 동오를 쳐서 운장의 원수를 갚고 다시 중원을 쳐 그 어린 역적 놈을 없애야겠소. 공들의 뜻은 어떠시오?”
그 글을 읽은 마초는 그 일을 한중왕에게 알리는 대신 스스로 팽양을 찾아갔다. 먼저 팽양의 속을 떠본 뒤에 처리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자기가 보낸 심부름꾼이 이미 사로잡힌 걸 알 리 없는 팽 양은 마초가 찾아가자 반갑게 맞아들이고 술을 내어 대접했다. 몇 순배 잔이 돈 뒤에 마초가 넌지시 팽양의 속을 떠보는 말을 했다.
“지난날 한중왕께서는 공을 몹시 두텁게 대접했는데, 요즈음은 점 차 야박해지니 도대체 무슨 까닭이오? 남의 일이지만 은근히 궁금 하구려.”
그때 양은 이미 술이 오른 참이었다. 마초의 속을 의심해보지도 않고 제 속부터 내보였다.
“그 늙은것이 벌써 정신이 흐트러져 함부로 사람을 대하고 있소. 내 반드시 그 갚음을 할 작정이외다.”
“실은 나도 마음속으로는 원망을 품은 지 오래되오. 하지만 무슨 수로 그와 맞설 수 있겠소?”
마초가 능청을 떨며 더 깊이 팽양의 속셈을 알아보았다. 팽양은 마초까지 제 편이 되었다 싶었던지 한층 엄청난 소리를 해댔다.
“그렇다면 길이 있소. 공은 거느린 군사들을 일으키시고 밖으로 맹달과 손을 잡으시오. 나는 서천 군사들을 달래 안에서 호응할 것 이니 그리되면 대사는 어렵잖게 이루어질 것이오.”
팽양이 거기까지 말하자 마초는 더 들을 것도 없다 싶었다. 그러 나 굳이 속셈은 감추어두고 좋은 말로 술자리를 마무리 지었다.
“선생의 말씀을 들으니 속이 후련하오. 내일 다시 의논해 일이 되도록 만들어봅시다.”
그러자 요화가 나서서 엎드려 울며 말했다.
“관공 부자분께서 죽음을 당하신 것은 모두가 유봉과 맹달의 죄입니다. 동오와 위를 치기에 앞서 그 두 역적 놈부터 죽여 관공의 한 을 풀어주십시오.”
그때까지도 용케 참았다 할 만큼 원한 서린 청이었다. 관공의 원 수를 갚는 일이라면 유비도 미룰 사람이 아니었다. 곧 영을 내려 유 봉과 맹달을 잡아오라 했다. 곁에 있던 공명이 그런 유비를 말렸다.
“아니 됩니다. 그 일은 천천히 꾀하셔야지 급히 서두르시면 반드 시 변고가 생길 것입니다. 그들을 높이시어 군수(郡守)로 삼고 서로 떼어놓은 뒤에 하나씩 사로잡는 게 좋겠습니다.”
듣고 보니 그도 그럴 법한 소리였다.
이에 한중왕은 공명의 말을 따라 먼저 유봉의 벼슬을 높이고 면 죽(竹)을 주어 지키게 했다. 상용을 지키는 맹달과 먼저 떼어놓고 본 셈이었다.
그런데 그때 유비의 신하 중에는 팽양(彭)이란 자가 있어 맹달 과 매우 친했다. 유비가 맹달과 유봉을 죽이기 위해 먼저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는 말을 듣자 곧 집으로 돌아가 맹달에게 그 일을 알리는 글을 썼다. 믿을 만한 사람을 골라 그 글을 주어 상용으로 보낼 작정 이었다.
그러나 운 나쁘게도 팽양의 심부름꾼은 남문을 벗어나지도 못하 고 마초의 졸개들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어딘가 수상쩍은 데가 있어 그 심부름꾼의 몸을 뒤진 졸개들은 곧 글 한 통을 찾아내고 그걸 마 초에게 갖다 바쳤다.
그리고 팽양의 집을 나온 마초는 똑바로 한중왕을 찾아가 그 일 을 상세히 들려주었다. 그 말을 들은 한중왕은 몹시 노했다. 곧 팽양 을 잡아 옥에 가두게 하고 모든 걸 털어놓도록 닥달하게 했다. 팽양 은 그제서야 자신의 입이 너무 가벼웠음을 뉘우쳤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한중왕은 팽양을 잡아 가둔 다음 공명을 불러 물었다.
“팽양이 모반할 뜻을 품고 있으니 어찌 다스리면 좋겠소?”
“팽양이 비록 미치광이 선비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 오래 두면 반드시 화가 생길 것입니다. 엄히 다스리는 게 좋겠습니다.”
공명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그렇게 대꾸했다. 이에 한중왕은 갇혀 있는 팽양에게 죽음을 내려 장차의 화근을 끊어버렸다.
팽양이 옥에서 죽자 어떤 사람이 그 소식을 맹달에게 알렸다. 눈 치 빠른 맹달은 뒷사정을 전혀 모르면서도 놀라 마지않았다. 무슨 일이 닥칠지 두려워 손발도 제대로 두지 못하고 있는데 문득 성도에 서 사자가 와서 알렸다.
“유봉을 면죽 태수로 삼으니 유봉은 어서 그리로 옮겨 다스리고 지키라.”
얼핏 보면 유봉의 벼슬을 올린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맹달은 얼 른 그게 자기들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는 뜻임을 알아차렸다. 관운장 의 일이 꺼림칙할 뿐만 아니라, 자신과 마찬가지로 유봉도 갑자기 벼슬이 오를 만큼 공을 세운 게 없었던 까닭이었다.
이에 잔뜩 놀라고 겁먹은 맹달은 신탐과 신의 형제를 불렀다. 전 에 상용 태수로 있다가 유비에게 항복해 가까운 방릉(房陵)의 도위(都尉)로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와 법정은 한중왕이 서천을 얻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이제 법정은 죽고, 한중왕은 지난 공을 잊은 채 나를 해치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맹달이 그렇게 묻자 맹달과 함께 벌을 받게 된 신탐이 얼른 말했다.
“제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그대로만 따르시면 한중왕은 결 코 공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게 어떤 계책인가?”
맹달이 기뻐하며 얼른 물었다. 신탐이 망설임 없이 속셈을 밝혔다. “우리 형제는 위에 투항할 뜻을 품은 지 오래였으나 아직 마땅한 계기가 없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공께서는 글 한 통을 써서 한중왕에게 올리고 벼슬을 내놓은 다음 위왕 조비에게로 가십시오. 조비는 틀림없이 공을 무겁게 써줄 것입니다. 우리 형제도 그 뒤 공 을 따라 위에 투항하겠습니다.”
그제서야 맹달도 문득 갈 길을 깨달았다. 곧 글 한 통을 써서 한중 왕에게 벼슬을 내놓을 뜻을 밝히고 자신은 믿을 만한 오십여 기만 거느린 채 위로 투항해버렸다.
맹달이 한중왕에게 올린 표문은 대략 이러했다.
‘신 맹달은 전하께 엎드려 아룁니다. 일찍이 신은 이윤여상 (呂尙)의 공업을 이루고자, 제환공(桓公), 진문공(晋文公)의 포부를 지니신 전하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왕조의 기틀이 잡히고 빼어난 인 재들이 구름같이 모인 지금 신을 돌아보니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신은 안으로도 전하를 돕고 보살필 만한 그릇이 못 되고 밖으로도 좋은 장수감이 되지 못하니 어디다 쓰시겠습니까.
또 듣기에 범여(范蠡)는 구천(句踐)을 도와 오(吳)를 멸한 뒤에 스 스로 야인이 되어 강호에 숨었고, 구범(舅犯)도 진문공(晋文公)의 장 인으로 패업을 도왔으나 마침내는 하상(河上)으로 물러나 살았다고 합니다. 신도 그같이 어진 이들의 자취를 따르고 싶되, 신하로서 세 운 공도 없거니와 아는 게 얕고 사람됨이 모자라 여지껏 머물러 있 었습니다.
하오나 지난날 신생(申生)과 같은 지극한 효성도 그 양친에게 의 심을 받았고, 자서(胥) 같은 지극한 충성도 그 군주로부터 죽음을 얻어냈을 뿐입니다. 몽염(蒙恬)은 나라의 땅을 넓히는 데 공이 컸음 에도 무거운 형벌을 면치 못했으며, 악의(樂)는 강한 제(齊)를 쳐 부수었으나 마침내는 참소를 입어 그 몸을 보존하지 못했습니다. 하 물며 저 같은 부류이겠습니까? 거기다가 지난번 형주가 무너졌을 때의 일도 감히 신이 죄 없다는 말은 못할 것입니다. 이에 처음과 끝 을 가지런히 잇지 못하고 물러나려 하오니 전하께서는 부디 신을 불 쌍히 여겨주옵소서. 듣기에, 사귐을 끊을 때는 나쁜 말이 나지 않게 하고, 떠나가는 신하는 원망을 하지 말라[交絶無惡聲 去臣無怨辭]고 했거니와 전하께서 너그러이 신을 풀어주시면 신은 그 위에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실로 비단결 같은 말만 골라 한 셈이었다.
읽기를 마친 한중왕은 분을 이기지 못해 표문을 팽개치며 소리쳤다.
“이 하찮은 놈이 나를 저버리고 떠나면서 어찌 글로 감히 놀리려 드는가!”
그러고는 곧 군사를 일으켜 맹달을 사로잡으러 떠나려 했다. 공명 이 다시 말리며 한 계책을 내놓았다.
“유봉에게 사람을 보내 맹달을 치라 하십시오. 유봉이 군사를 내 어 맹달을 치면 두 호랑이를 싸움시키는 셈이 됩니다. 유봉은 이기 든 지든 반드시 성도로 올 것인데 그때 일을 처결하십시오. 유봉이 맹달을 사로잡아 오면 둘을 한꺼번에 잡아 죽이고 싸움에 지고 쫓겨 오면 유봉 하나만이라도 죄를 주면 됩니다. 그러지 않고 맹달만 쫓 다가는 죄가 같은 유봉까지 놓쳐버릴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유비는 불덩이 같은 속을 억지로 눌러 참으며 그대로 했다.
유비가 사자를 면죽으로 보내 유봉에게 맹달을 치라는 명을 내리 자유봉은 얼른 거기 따랐다. 관공에게 지은 죄를 이참에 벗겠다는 듯 크게 군사를 일으켜 맹달을 잡으러 갔다.
한편 상용을 버리고 떠난 맹달은 며칠 뒤 허창에 이르러 조비를 찾았다.
마침 문무 관원들을 모아놓고 나랏일을 의논하던 조비는 촉의 장 수 맹달이 항복해 왔다는 말을 듣자 얼른 불러들이게 했다.
“네가 이렇게 온 것은 혹 거짓 항복으로 나를 해치려 함이 아니냐?”
너무 뜻밖의 일이라 조비는 먼저 그런 말로 맹달의 속부터 떠보 았다. 맹달은 머리를 연신 조아리며 말했다.
“신이 전에 관공의 위태로움을 구해주지 않았다 하여 한중왕이 죽이려 하기에 두려워서 이곳으로 왔습니다. 다른 뜻은 결코 없으니 부디 너그러이 거두어주십시오.”
조비는 그래도 맹달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껏 유비가 중하게 쓰던 사람이 투항해 온 예는 거의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 바람에 다 시 이것저것 캐묻고 있는데 문득 급한 전갈이 들어왔다.
“유봉이 오만 군사를 이끌고 양양성을 치러 왔습니다. 그러나 싸 움을 걸며 하는 소리는 다만 맹달을 죽이러 왔다는 것뿐입니다.”
그제서야 조비도 맹달을 조금 믿는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아직도 다 믿을 수는 없다는 듯 맹달을 보고 말했다.
“정히 이 항복이 네 참뜻이라면 어서 양양으로 가서 유봉의 목을 가져오너라. 그래야만 네 말을 믿을 수 있겠다.”
맹달이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니올시다. 군사를 움직일 것도 유봉의 목을 벨 까닭도 없습니 다. 제가 가서 이로움과 해로움을 따져가며 그를 달래보겠습니다. 그의 죄 또한 나와 같으니 반드시 대왕께로 항복해 올 것입니다.”
그러자 비로소 조비도 기쁜 낯빛을 지으며 맹달을 받아들였다. 맹 달에게 산기상시(散騎常侍), 건무장군(建武將軍), 평양정후(平陽亭侯) 에 신성태수를 내리고 곧 양양으로 보냈다.
그 무렵 양양에는 하후상과 서황이 이미 대군을 거느리고 가 있 었다. 맹달이 오기 전부터 상용을 빼앗으려고 조비가 손을 써둔 것 이었다. 양양에 이른 맹달은 그 두 장수를 만나보고 물었다.
“유봉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성 밖 오십 리쯤 되는 곳에 진을 치고 있소이다.”
서황과 하후상이 아는 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맹달은 먼저 유봉에 게 글 한 통을 써 보냈다. 짐작 가는 대로 한중왕의 속셈을 유봉에게 밝혀줌과 아울러 조비에게 항복할 것을 권하는 글이었다.
사자가 가져온 편지를 읽은 유봉은 몹시 성난 소리로 외쳤다. “이 도적놈이 전에는 우리 숙질(叔)간의 의를 저버리게 하더니 이제는 또 우리 부자간의 의마저 끊어놓으려 하는구나. 그야말로 나 를 불효불충한 사람으로 만들려는 놈이다!”
그러고는 그 글을 북북 찢고 사자를 목 베 굳은 뜻을 알렸다. 그렇 도록 유봉은 아직 때묻지 않은 데가 있었다.
맹달도 유봉이 편지를 찢고 사자를 목 벴다는 말을 듣자 분이 머 리끝까지 올랐다. 다음 날 유봉이 군사를 이끌고 나와 싸움을 걸자 그 또한 지지 않고 나가 맞섰다. 양쪽 군사들이 둥글게 진을 쳐 맞선 가운데 유봉이 문기 아래 나가 칼끝으로 맹달을 가리키며 꾸짖었다.
“나라를 저버린 이 역적 놈아, 네 어찌 그따위 어지러운 말로 나 를 꾀려 했느냐?”
맹달도 지지 않고 유봉에게 맞서 꾸짖었다.
“이 가엾은 것아, 너는 죽음이 이미 네 머리 위에 와 있는데도 아 직 그걸 깨닫지 못하는구나. 네 어찌 그리도 머리가 어둡고 무디냐?”
그러자 유봉은 더 성을 참지 못하고 말을 박차 달려 나갔다. 단칼 로 맹달을 쪼개놓겠다는 듯한 기세였다. 맹달도 물러나지 않고 맞섰 으나 유봉의 그 엄청난 기세를 당해내지 못한 듯했다. 세 합을 넘기 지 못하고 쫓겨 달아났다.
유봉은 이긴 기세를 타고 군사를 몰아 맹달을 뒤쫓았다. 그런데 한 이십리 남짓 뒤따랐을까, 문득 한군데서 크게 함성이 일며 숨어 있던 위병(魏)들이 쏟아져 나왔다. 왼쪽은 하후상이 이끄는 군사요, 오른편은 서황이 이끄는 군사였다. 거기다가 그때껏 쫓기던 맹달까 지 되돌아서서 덤비니 유봉은 한꺼번에 세 갈래의 적을 맞게 되었다. 유봉은 그제서야 자신이 맹달에게 속았음을 깨달았으나 이미 때 는 늦어 있었다. 싸움이고 뭐고 그대로 뭉그러져 상용으로 달아났다.
“문 열어라. 내가 왔다.”
겨우 상용에 이른 유봉이 성 위를 쳐다보고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질렀을 때였다. 갑자기 성 위에서 화살이 비오듯 쏟아지며, 한 장 수가 우뚝 서서 소리쳤다.
“다른 데 가서 알아보아라. 우리는 이미 위에 항복했다!”
유봉이 바라보니 바로 신탐이었다. 그 뜻 아니한 배신에 유봉은 왈칵 성이 났다. 성을 들이쳐 신탐을 박살내려 했으나 뜻 같지가 못 했다. 뒤쫓던 위병들이 어느새 등 뒤에 이른 까닭이었다.
하는 수 없이 유봉은 상용을 버려두고 가까운 방릉으로 말 머리 를 돌렸다. 그러나 방릉도 상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성 위에 가득 꽂힌 것은 모두 위의 깃발인 데다, 성벽 위에 서 있던 신의가 다시 한기를 세우자 한 떼의 위병들이 성 뒤쪽에서 쏟아져 나왔다. 유봉 이 놀라 쳐다보니 그들이 앞세운 깃발에는 ‘우장군(將軍) 서황’이 라 크게 씌어 있었다.
그 깃발을 보자 유봉은 감히 맞붙어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급히 말 머리를 돌려 이번에는 서천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서황이 승세를 타고 그런 유봉을 뒤쫓으며 마구 죽이니 무사히 빠져나온 것은 겨우 유봉을 비롯한 백여기에 지나지 않았다.
성도에 이른 유봉은 한중왕을 찾아보고 땅에 엎드려 울며 그간의 일을 자세히 아뢰었다. 유비가 몇 마디 듣지도 않고 성난 소리로 꾸 짖었다.
“욕된 아들이 무슨 낯으로 다시 나를 보러 왔는가?”
“숙부의 일은 제가 구하려 하지 않은 게 아니고 맹달이 중간에서 훼방을 놓은 까닭입니다.”
유봉이 그렇게 변명해보았으나 한중왕 유비는 더욱 노할 뿐이 었다.
“너도 사람의 밥을 먹고 사람의 옷을 꿰고 있는 놈이 아니더냐? 나무나 흙으로 만든 허수아비가 아닌 담에야 어찌 간사한 역적 놈의 말을 들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단 말이더냐!”
그리고 좌우를 돌아보며 서릿발 같은 영을 내렸다.
“저 짐승만도 못한 놈을 어서 끌어내 목 베어라!”
유봉으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죽음이었다. 관공의 곤경을 외면한 것은 큰 죄가 될 만했으나 그 죄를 씻기 위한 그의 노력 또한 적지 않았다.
유봉이 자신을 달래려는 맹달의 글을 찢고 그 사자를 목 벤 일을 나중에야 들은 유비도 그를 죽인 걸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사 람을 되살릴 길이 없어 마음 아파하다 보니 관공을 잃은 슬픔과 더 불어 그대로 병이 되었다.
한중왕이 자리에 눕자 군사를 들어 동오를 치려던 일은 뒤로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바람에 촉의 대군이 묶여 있게 되어 천하는 잠시 긴장한 가운데나마 싸움 먼지가 가라앉았다.
사방이 조용해지자 위왕 조비는 다시 내치(內)에 힘을 쏟았다. 모든 문무 관원들의 벼슬을 높여 흠뻑 그들의 마음을 거두어들인 뒤 갑병 삼십만을 거느리고 남쪽에 있는 고향을 찾아보았다. 선영이 있는 패국 초현을 찾아 옛적 한고조를 흉내낸 듯싶다.
조비가 찾아가자 고향 늙은이들이 길을 메우며 잔을 올렸다. 바로 한고조가 제위에 오른 뒤 고향인 패에 돌아갔을 때 마을 늙은이들이 한 대로였다. 조비는 흐뭇하기 그지없어 일일이 잔을 받아 마시며 그들과 즐기는데 사람이 와서 알렸다.
“대장군 하후돈이 병들어 매우 위태롭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조비는 곧 업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하후돈이 끝 내 죽자 스스로 상복을 입고 후하게 장사 지내주니, 장수를 아끼는 마음은 그 아비 조조에 못지않았다.
그해 팔월이 되자 나라 안에서는 여러 가지 상서로운 조짐이 있 었다. 석읍현이라는 곳에서는 봉황이 날고 임치성에서는 기린이 나 왔으며 업군에서는 황룡이 나타났다.
이에 중랑장 이복(李伏)과 태사승 허지가 가만히 만나 의논했다.
“이런 여러 가지 징조는 위가 한을 갈음해 천하를 다스리게 되리 라는 걸 말하려는 듯하오. 마땅히 제위를 선양(禪)받을 예를 마련 하고 한의 천자로 하여금 위왕에게 천하를 넘기도록 권해야 할 것이오.”
그러고는 화흠, 왕랑, 가후, 신비, 유이, 유엽, 진교, 진군, 환해를 비롯한 마흔여 명의 문무 관원들에게 자기들의 뜻을 알렸다. 조조가 살아 있을 때는 그 자신이 하도 완강히 마다하는 바람에 그 일을 미 루어오던 그들이었으나, 이제 거리낌이 없었다. 말이 나오기 바쁘게 내전으로 떼지어 달려가 헌제를 찾아보고 권했다.
“엎드려 살피건대 위왕께서 왕위에 오르신 뒤로 덕은 사방에 미 치고 어젊은 만물을 감싸, 예와 이제를 뛰어넘습니다. 비록 당우(唐 虞)의 시대라 해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거기다가 여러 신하들이 모여 의논한 바 한결같이 한의 운세는 이미 다했다는 말들 을 했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요순(舜)의 도(道)를 본받아 산 천과 사직을 위왕 전하께 넘겨주도록 하십시오. 이는 위로 하늘의 뜻 에 따르고 아래로 사람의 마음에 맞추는 일일 뿐만 아니라, 폐하께 서도 깨끗하고 고요한 복을 누리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들은 조 종(祖宗)에 대해서도, 천하의 뭇 목숨붙이에게도 이보다 더한 다행 이 없다고 여겨 의논을 정하고 특히 찾아와 주청을 올립니다.”
그 말을 들은 헌제는 깜짝 놀랐다. 한참을 넋 빠진 사람처럼 말없 이 앉았다가, 문득 백관을 돌아보고 흐느끼며 말했다.
“짐이 헤아려보니 우리 고조께서 석 자 칼로 큰 뱀을 베시고 의로 운 군사를 일으키시어, 진(秦)을 평정하고 초(楚)를 없애 제업을 이 루신 지 벌써 사백 년이 되었소. 짐이 비록 재주 없으나 아직 이렇다 할 잘못이 없는데 어찌 조종께서 물려주신 대업을 함부로 버릴 수 있단 말이오? 그대들 모든 관원들은 다시 한번 공의(公義)로 의논해보시오.”
그러자 화흠이 이복과 허지를 데리고 헌제 앞으로 우적우적 다가와 을러대듯 말했다.
“한의 운세가 다했다는데도 믿지 않으시니 그렇다면 이 두 사람 에게 물어보십시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실 것입니다.”
그 말에 헌제가 그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니 이복이 제 스스 로 나서서 말했다.
“위왕께서 즉위하신 뒤로 기린이 내려오고 봉황이 날았으며 황룡 이 보였습니다. 거기다가 또 가화(禾, 이삭이 많이 붙은 상서로운 벼) 가 패고, 감로(甘露)가 내렸으니 이는 곧 하늘이 위로 하여금 한을 대신케 하라는 뜻을 보인 것이라 여겨집니다.”
허지가 다시 그런 이복을 거들어 말했다.
“저희들은 천문을 살피는 일을 맡은 벼슬아치들로 밤에 건상 象)을 보니, 한의 기수(氣數)는 이미 다했고, 폐하의 별도 어디론가 숨어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거기 비해 위의 건상은 하늘에 이르고 땅을 덮어 그 빛남이 말로 다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 참(圖讖)에도 그런 뜻을 나타내는 글이 뚜렷이 나와 있습니다.”
“그게 어떤 글인가?”
그제서야 헌제도 마지못한 듯 허지에게 물었다. 허지가 더욱 힘을 주어 말했다.
“참문(文)에 씌어 있기를, 귀(鬼)자 곁에 위委자가 연이어 한 (漢)을 갈음하니 할 말 없구나. 언(言)자는 동이요, 오(午)자는 서라, 두 해가 나란히 빛나며 아래위로 있는 곳이네[鬼在邊 委相連, 當代漢 無可言,言在東 午在西, 兩日並光 上下]라 했습니다. 귀자가 변이 되 고 위자가 곁에 이어지면 바로 위(魏)자가 되어 위(魏)가 한(漢)을 갈음하게 된다는 뜻이며, 언자가 동쪽에 있고 오자가 서쪽에 있으면 합쳐 허(許)요, 두 해(日)가 아래위로 나란히 빛나면 창(昌)이 되니 곧 허창(昌)에서 위가 한으로부터 천하를 물려받게 될 것이란 뜻 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이 같은 하늘의 뜻을 깊이 헤아려주십시오.”
하지만 헌제는 그래도 얼른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애써 위엄을 되찾으며 나무라듯 말했다.
“상서로운 조짐이니 도참 따위는 모두 허망한 것들이다. 그대들은 어찌 그 허망한 것을 믿어 짐에게 조종이 물려주신 기업을 버리라고 하는가?”
그러자 이번에는 왕랑이 나섰다.
“예부터 일어남이 있으면 반드시 스러짐이 있고, 성하면 쇠함이 따르는 법입니다. 망하지 않는 나라가 어디 있고, 기울지 않는 집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실은 사백 년을 이어 오다가 폐하에 이르러 이 제 운세가 다했습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천하를 내어주고 물러가 피하실 일이지, 쓸데없이 늑장을 부리시며 끌어가셔서는 아니 됩니 다. 더 끌다가는 반드시 변란이 일 것이니 부디 그걸 살피시어 나아 감과 물러남을 정하십시오.”
이제는 주청이라기보다는 드러내놓고 하는 협박이었다. 일이 거 기 이르자 헌제도 말로 뻗대봐야 쓸데없다는 걸 알았다. 다만 큰 소 리로 흐느끼며 후전으로 들어가는데 백관들은 모두 그걸 비웃으며 흩어졌다.
다음 날이 되었다. 뭇 벼슬아치들이 다시 대전에 모여 환관들로 하여금 헌제를 불러내게 했다. 헌제는 두렵고도 걱정이 되어 감히 대전으로 나오지 못했다. 조황후(曹皇后)가 그런 헌제에게 물었다.
“백관들이 모두 모여 폐하를 뵙고자 청한다는데 폐하께서는 어찌 하여 핑계만 대고 나가지 않으십니까?”
“그대의 오라버니가 제위를 빼앗으려고 백관을 시켜 나를 윽박지 르려는 까닭에 나가지 못하고 있소.”
헌제가 울며 그렇게 대꾸했다. 조황후는 조조의 딸이요, 조비의 누이동생이었다. 발끈 성을 내며 소리쳤다.
“아닙니다. 제 오라버니가 어찌 그런 역적질을 하려 들 리 있겠습니까?”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그런 황후를 비웃듯 조홍과 조휴가 칼을 찬 채 들어와 헌제에게 나갈 것을 졸랐다. 성난 황후가 그런 둘을 소 리쳐 꾸짖었다.
“바로 네놈들이 부귀에 눈이 어두워 함께 역적질을 꾸민 놈들이 로구나. 아버님께서는 공이 온 세상을 덮고 위엄이 천하를 떨쳐 울 렸건만 그래도 나라의 신기(神器)만은 감히 넘보지 않으셨다. 그런 데 이제 오라버니는 왕위를 이은 지도 얼마 되지 않으면서 벌써 한 으로부터 천하를 뺏을 생각을 한단 말이냐? 도대체 너희는 하늘이 두렵지도 않느냐?”
그러고는 통곡하며 내전으로 들어가버렸다. 한쪽은 지아비요, 한 쪽은 오라버니라, 아무리 펄펄 뛰어봐도 그 길밖에 없었다. 그런 황후를 보는 시녀들도 한결같이 눈물을 쏟았다.
그 소동을 겪고도 조홍과 조휴는 기어이 헌제를 대전으로 끌어내 려 했다. 마침내 헌제도 그들의 청을 물리치지 못해 옷을 갈아입고 대전으로 나갔다.
화흠이 기다렸다는 듯 나서더니 아예 으름장으로 나왔다.
“폐하께서는 아무래도 어제 저희들이 의논해서 정한 일을 따르심 이 좋을 듯합니다. 그래야만 큰 화를 입지 않게 되실 것입니다.”
“그대들은 모두 한의 봉록을 먹은 사람들이요, 개중에는 공신의 자손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차마 이런 신하답지 못한 일을 꾸 미는가?”
헌제가 마지막 안간힘을 썼다. 화흠이 한층 불측한 어조로 그런 헌제를 을러댔다.
“폐하께서 기어이 저희들의 뜻을 따르지 않으시다가 오래잖아 소 장지변, 안에서 일어난 변고)을 당할까 두렵습니다. 저희가 불 충해서 이러는 게 결코 아닙니다.”
“누가 감히 천자인 이 몸을 죽인단 말인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던가, 헌제도 마침내 목소리를 높였다. 화흠도 지지 않고 맞받아 꾸짖듯 말했다.
“폐하가 임금으로서 복이 없어 천하가 이같이 어지러운 것은 세 상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일입니다. 만약 위왕께서 조정에 계시지 않았다면 폐하를 죽이려는 자가 어찌 하나뿐이겠습니까? 폐하께서 은혜를 알아 갚지 않으심은 곧 천하의 모든 이들로 하여금 함께 폐 하를 치라고 하는 소리나 같다는 걸 모르십니까?”
끝내 천자의 자리를 내놓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당신을 죽이겠소,
라는 것과 같은 소리였다. 그제서야 헌제도 크게 놀랐다. 우선 시간 이라도 벌어볼 셈으로 소매를 떨치고 일어났다.
왕랑이 그런 헌제를 보고 화흠에게 눈짓을 보냈다. 화흠이 달려나가 헌제의 옷자락을 잡아끌며 낯성을 내 소리쳤다.
“허락하는 것이오? 않는 것이오? 어서 한마디만 말하시오.”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거리의 무뢰배가 양인을 잡고 위협하는 것에 가까웠다. 헌제는 떨며 답을 하지 못했다. 조홍 과 조휴가 칼을 빼들고 그런 화흠을 도와 소리쳤다.
“부보랑(符寶郞)은 어디 있는가? 부보랑은 어서 나오라!”
부보랑은 옥새를 맡아 간수하는 벼슬아치다. 그 일을 보고 있던(조필)이 그들의 부름에 답하며 나섰다.
“부보랑은 여기 있소.”
“부보랑은 어서 옥새를 가져오너라!”
조홍이 험한 낯빛으로 조필을 쏘아보며 다시 소리쳤다. 그러자 조필이 조홍을 꾸짖었다.
“옥새는 천자의 보배다. 어찌 그대가 함부로 내오라고 하는가!”
하지만 조홍이 그만 일에 물러설 사람은 아니었다. 대꾸할 것도 없다는 듯 무사들을 불러 조필을 가리키며 명했다.
“무엇들 하는가? 저놈을 끌어내 목 베어라!”
이에 조필은 무사들에게 끌려나갔으나 목이 떨어질 때까지 꾸짖기를 멈추지 않았다.
조필이 죽는 걸 본 헌제는 더욱 겁이 났다.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계하를 살펴보니 갑옷 입고 창을 든 수백 군사가 모두 위병이었다. 헌제도 마침내는 더 버틸 수 없음을 알았다. 눈물을 흘리며 거기 모인 신하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이 바라는 대로 천하를 위왕에게 넘겨주겠소. 다행히 남은 목숨을 붙여주어 하늘이 정한 때에 눈감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오.”
뒤엣말은 금세라도 조홍, 조휴가 칼로 찍을 것 같아 덧붙인 소리 였다. 가후가 보기 딱했던지 좋은 말로 헌제의 두려움을 덜어주었다.
“위왕께서는 결코 폐하를 저버리시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되도록이면 빨리 선양의 조서를 내리시어 여럿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십시오.”
이에 헌제는 그 자리에서 진군에게 영을 내려 나라를 넘겨준다는 조서를 짓게 했다. 그리고 그 조서가 다되자 화흠에게 옥새를 받쳐 들고 백관들과 더불어 위 왕궁으로 찾아가 바치게 했다.
천자로부터 옥새와 함께 조서가 왔다는 말을 듣자 조비는 뛸 듯 이 기뻤다. 곧 조서를 뜯어보니 그 대략은 이러했다.
‘짐이 제위에 오른 지 서른다섯 해 천하가 들끓고 뒤집힐 듯하였 으되 다행히 조종의 혼령이 도와 위태로움을 면하고 이렇듯 다시 제 위를 이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우러러 하늘을 살피고 굽어 백 성들의 마음을 헤아려보니 한의 천수(天)는 이미 끝나고 모든 것 은 조씨에게로 옮겨진 듯하다. 이것은 전왕(王)의 신무한 업 적에다 다시 금왕(王)의 밝은 덕이 더해 때에 응함이니, 역수(曆 數)의 뚜렷하고 밝음을 믿고 알 만하다. 무릇 대도(大道)를 행함에 있어 천하는 공의(公義)를 따라 주고받아야 하는 법, 당요(唐堯)는 사사로이 그 아들에게 천하를 넘기지 않아 길이 이름을 남길 수 있 었다. 짐은 그 일을 홀로 사모하다 이제 요를 본받아 승상인 위왕에 게 천하를 넘겨주고자 한다. 왕이여, 행여라도 사양하지 말진저.’
읽기를 마친 조비는 곧 거기 쓰인 대로 조서를 받아들이려 했다. 그때 사마의가 가만히 말했다.
“아니 됩니다. 비록 조서와 옥새가 이르렀다 해도 전하께서는 마 땅히 표를 올려 겸양을 보이심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나무람을 없이 해야 합니다.”
조비도 금세 그 말을 알아들었다. 왕랑에게 표문을 짓게 하고, 스 스로 덕이 엷음을 내세우면서 따로이 어진 이를 찾아 제위를 물려주 기를 청했다. 비록 사양은 했지만 헌제가 천자 자리를 내놓아야 한 다는 것만은 움직일 수 없게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조비가 올린 표문을 읽어본 헌제는 놀랍고도 의심스러웠다. 그의 사람을 시켜 억지로 옥새를 뺏아가다시피 해놓고 이제 마다하니 그 속셈을 알 수가 없었다. 이에 다시 여러 신하들을 보고 물었다.
“위왕이 겸손하여 받지 않으니 어쨌으면 좋겠는가?”
속으로는 그게 조비의 진심이기를 바라며 해본 소리였다. 그러나 그 물음이 떨어지기 바쁘게 화흠이 나와 말했다.
“지난날 무왕(武王)은 왕호를 받을 때 세 번 그 조서를 사양한 뒤 에야 받아들였습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다시 조서를 내리시어 권 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그때는 위왕께서도 그 뜻을 따르실 것입니다.”
그 바람에 헌제는 하는 수 없이 이번에는 환해桓楷)를 시켜 다시 조서를 짓게 했다. 그리고 고묘사(高廟) 장(張)에게 절(節)을 갖추고 옥새를 받들어 위왕궁으로 가게 했다.
조비가 두 번째 조서를 받아 읽어보니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대 위왕이여, 글을 올려 겸양하는구나. 그러하되 짐이 한을 맡 은 뒤로 성하던 것이 점점 쇠하여 오늘처럼 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다행히 무왕 조조가 나서 덕과 운을 어우르고 크게 무위를 떨쳐 사 납고 흉측한 무리를 쳐 없애니 겨우 이 땅이 깨끗해지고 안정을 얻 었다. 거기다가 금왕비(조)는 그 실마리를 이어 지극한 덕을 널리 비추니, 가르침은 사해를 덮고 어진 풍속은 온 땅에 퍼졌다. 실로 하 늘과 땅이 정한 운수가 그대에게 있음을 알 만하다. 옛적 우순(虞舜) 은 큰 공 스물이 있어 방훈, 요임금을 높여 부르는 말)이 천하를 넘 겨주었고, 대우(大禹)는 물을 다스린 업적이 있어 중화(重華, 순임금을 높여 부르는 말)가 제위를 물려주었다. 우리 한은 요의 운을 이어받았 으니 이제 마땅히 그 거룩함을 다시 전해야 할 의가 있으리라. 신령 스런 땅귀신의 뜻을 따르고 하늘의 밝은 명을 받들어, 어사대부 장 음으로 하여금 지절(持節)과 더불어 황제의 옥새를 바치게 하니 왕 이여 부디 거둘지어다.’
조비는 다시 온 그 조서를 읽고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첫번째 조서를 받았을 때 사마의에게 들은 말이 있어, 이번에도 얼른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가후에게 말했다.
“비록 두 차례에 걸친 조서를 받기는 하였으나 마침내는 천하와 뒷사람들에게 내가 역적질했다는 소리를 듣게 될까 두렵소. 어떻게 하면 그런 더러운 이름을 얻지 않을 수 있겠소?”
“그야 매우 쉬운 일입니다. 다시 장음에게 명해 옥새를 가지고 돌 아가라 이르신 다음 가만히 화흠을 불러 시키십시오. 한제(漢帝)로 하여금 수선대(禪臺)란 축대 하나를 쌓게 하고, 길일을 골라 높고 낮은 벼슬아치를 모두 그대 아래 모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제로 하여금 몸소 옥새를 받들어 대왕께 바침으로써 천하 를 넘겨주게 한다면, 여럿의 의심을 풀어줄 뿐만 아니라 되잖은 쑥 덕거림도 막을 수 있습니다.”
조비는 그 말이 꼭 됐다 싶었다. 장음에게 명해 옥새를 가지고 돌 아가게 하는 한편 다시 사양하는 표문을 지어 올렸다. 그사이 화흠 에게 사람을 보내 가후가 말한 대로 시켰음은 더욱 말할 나위도 없 었다.
한편 헌제는 두 번째로 내린 조서가 또 돌아오자 이번에도 군신 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위왕이 또다시 사양하니 알 수 없구려. 그대들은 그 뜻이 무엇인듯싶소?”
그러자 화흠이 다시 나서서 미리 준비하고 있던 말을 했다.
“폐하께서는 높은 대 하나를 쌓아 그걸 수선대라 이름하십시오. 그런 다음 여러 공경(卿)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제위를 물려주는 뜻을 뚜렷하게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폐하께서는 자 자손손에 이르기까지 위의 두터운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화흠의 그 같은 말은 참람되다 못해 끔찍하기까지 했으나 힘없는 천자라 그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곧 태상원(太常院)의 벼슬아 치를 보내 번양에서도 좋은 땅을 고른 뒤 삼층의 높은 대를 쌓게 했 다. 그리고 따로이 날을 가려 시월 경오(庚午)날 인시(寅時)에 선양 의 예식을 갖기로 했다.
정한 날이 되자 헌제는 위왕 조비를 청하여 수선대 위에 오르게 했다. 대 아래에는 높고 낮은 벼슬아치 사백여 명과 어림(御林), 호 분(虎賁)의 금군(禁軍) 삼십만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서 헌제는 몸소 옥새를 조비에게 바쳐 올렸다. 그제서야 조비도 마다않 고 옥새를 거두어들였다. 뒤이어 군신들이 대 아래 꿇어앉은 가운데 조비에게 천하를 선양한다는 책 읽는 소리가 낭랑히 들렸다.
‘그대 위왕이여, 들으라. 지난날 당요(唐堯)는 우순(虞舜)에게 천하 를 물려주었고, 순 또한 우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었다. 이와 같이 천 명은 언제나 한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덕 있는 이에게로 돌아가 는 법이다. 한의 운세가 갈수록 쇠하더니 짐에 이르러서는 크게 어 지럽고 어두워져 흉한 무리가 역적질을 일삼고 나라는 뒤집어질 것 같았다.
그때 무왕(조조)이 나와 그 신무함으로 사방을 어려움에서 건지고 화하를 깨끗이 함으로써 나의 종묘를 지켜주었다. 그 덕이 어찌 짐 한 사람만의 얻음일 것인가. 실은 천하의 모든 곳[九服]에 미쳤다.
금왕은 그와 같은 앞선 실마리를 이어 덕을 빛내고 문무의 대업을 되살려 그대 아비의 홍렬(弘烈)함을 더욱 드러냈다. 이에 황령(皇靈) 은 상서로운 기운을 드러내고, 사람과 귀신은 아울러 징조를 보여, 백성들을 보살핌이 큰일임을 알려주고 모든 것을 그대에게 내주기 를 짐에게 명했다. 모두 말하기를 그대는 우순에 견줄 만하다 하니, 나는 이제 당요를 본받아 그대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하노라.
오호라, 하늘의 역수(曆)는 그대 한 몸에 있으니 그대는 사양 말 고 만국을 받아 천명을 이으라’
읽기가 끝나자 위왕 조비는 수선(受禪)의 대례(大禮)를 치르고 제 위에 올랐다. 가후가 높고 낮은 벼슬아치들을 모두 이끌고 대 아래 로 가서 조례를 드렸다.
조비는 다시 연호를 고쳐 연강延) 원년을 황초(初) 원년으로 삼고 천하에 대사령을 내리는 한편 죽은 아비 조조에게 태조(太祖) 무황제(皇帝)란 시호를 올렸다.
그다음이 헌제 차례였다. 화흠이 조비 앞으로 나가 아뢰었다.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들에게는 두 왕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한제는 이미 천하를 폐하께 넘겨주었으니 마땅히 변두리 땅으 로 물러나야 할 것입니다. 조서를 내리시어 유씨(劉氏)를 어느 땅에 둘 것인지를 밝혀주옵소서.”
그러고는 헌제를 대 위에서 끌어내려 다른 신하들과 마찬가지로 조비 앞에 무릎 꿇게 했다. 조비는 헌제를 산양공(山陽公)으로 봉하 고 그날로 봉지(地)를 찾아 떠나가게 했다. 하도 기가 막혀 머뭇거리는 헌제를 화흠이 소리 높여 꾸짖었다.
“한 천자가 세워졌으면 한 천자는 없어지는 것이 예부터 있어온 일이오. 지금 천자께서 인자하셔서 차마 그대를 해치지 못하고 산양 공에 봉하셨으니, 그대는 오늘로 떠나가되 부름이 없으면 결코 조정 으로 들어오지 마시오.”
그제서야 헌제는 비 오듯 눈물을 흘리며 조비에게 절하고 말에 올라 갈 곳으로 떠났다. 그걸 보는 대 아래의 군사와 백성들은 모두 슬픔과 원통함을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조비는 흐뭇하기 그지없었 다.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선위한 일이 어땠는지를 이제 짐도 알 것같소.”
하지만 그가 알았다는 게 비정한 힘의 논리인지 아니면 스스로 취한 아름다운 선양의 미덕인지는 아무도 짐작할 길이 없었다.
대 아래의 뭇 벼슬아치들은 다만 기꺼워하는 조비에게 만세를 외 쳐 화답할 뿐이었다. 그로부터 몇십 년도 안 돼 바로 그와 같은 일이 이번에는 거꾸로 조조의 자손에게 일어날 줄 어느 누가 알았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