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8권 – 13화 : 한스럽다, 익덕도 관공을 따라가고
한스럽다, 익덕도 관공을 따라가고
만세가 끝난 뒤 백관은 조비에게 하늘과 땅에 감사드리기를 권했 다. 조비가 일어나 막 하늘과 땅에 절을 올리려 할 때였다. 문득 대 앞에서 한 줄기 괴이한 바람이 일어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렸다. 모래와 돌이 비 오듯 쏟아지니 모두 얼굴을 들 수 없는데, 대위의 촛불까지 남김 없이 꺼져버려 불길한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거기에 놀란 조비가 외마디 비명과 더불어 대 위에 쓰러졌다. 여 럿이 달려가 부축해 내렸으나 반나절이 지나서야 겨우 깨어났다. 모시는 사람들은 그런 조비를 급히 궁궐로 옮겨갔다. 조비의 증세 는 생각보다 심해 그로부터 며칠이나 조회를 열지 못하다가 얼마 뒤 에야 겨우 대전으로 나가 신하들의 하례를 받을 수 있었다.
조비는 자신이 제위에 오르는 데 공이 많은 화흠을 사도(司徒)로 세우고 왕랑으로 사공(司)을 삼았다. 뿐만 아니라 다른 벼슬아치들도 모두 벼슬을 높이고 상을 내려 기세를 돋워주었다.
그러나 수선대에서 놀라 얻은 조비의 병은 쉬 낫지 않았다. 조비 는 그게 허창의 궁궐에 요사한 일이 많은 탓이라 여겨 낙양에다 크 게 행궁을 짓게 했다.
이와 같은 위의 움직임은 유비가 풀어놓은 염탐꾼들에 의해 성도 에도 전해졌다. 그러나 말이 전해지는 도중에 부풀어나 한제帝) 가 조비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말이 곁들여지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유비는 하루 종일 통곡하고, 모든 벼슬아치들에게 상복을 입게 한 뒤 멀리 허창을 바라보며 제례를 올렸다. 그리고 죽 었다는 헌제에게는 효민황제(孝愍皇帝)란 시호를 올려 그 넋을 위로 했다.
유비의 슬픔이 진정으로 망해버린 한실(漢室)과 죽은 헌제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충성의 대상을 잃어버린 스스로를 향한 것인지는 누 구도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어느 편이든 울적해하고 상심할 일인 것 만은 분명했다.
관공의 죽음, 미방과 부사인의 배신, 유봉의 죽음 따위로 그러지 않아도 성치 못하던 유비의 몸과 마음은 그 일로 다시 병이 들었다. 유비가 병들어 일을 보지 못하자 정사는 모두 공명에게 맡겨졌다. 공명은 태부 허정과 광록대부 초주(周)를 불러 가만히 의논했다. “천하에는 하루도 임금이 없어서는 아니 되오. 조비가 비록 스스 로 대위황제(魏皇帝)에 올랐다 하나 이는 이성(異姓)의 찬탈일 뿐 이외다. 한실의 종친이신 우리 한중왕을 받들어 제위에 오르시게 함이 좋겠소.”
그러자 초주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요사이 여러 가지 상서로운 조짐이 많이 있었습 니다. 성도 서북쪽에는 누른 기운이 수십 길이나 구름을 찌르며 치 뻗었고, 제성(星)이 필(畢, 이십팔 수에 드는 별의 이름), 위(胃), 묘(昴) 세별 어름에서 달처럼 환히 빛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한 중왕께서 제위에 오르셔서 한의 대통을 이으리라는 걸 나타내 보이 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다시 의심할 게 무엇 있겠습니까?”
이에 힘을 얻은 공명은 허정과 더불어 모든 벼슬아치들을 이끌고 한중왕에게 표문을 올렸다. 제위에 올라 끊어진 한의 대통을 다시 이으라는 내용이었다. 표문을 읽어본 유비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대들은 나를 불충하고도 불의한 사람을 만들려는가?”
“아닙니다. 조비가 한의 제위를 뺏어 자립했으니, 한실의 후예이 신 주상께서 대위에 올라 종사를 잇는 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공명이 나가 조용히 아뢰었다. 한중왕 유비는 낯빛까지 바꾸며 그 런 공명을 꾸짖듯 말했다.
“그것은 역적질을 하라는 소리나 다름없소. 내가 어찌 역적질을 할 수 있단 말이오!”
그리고 소매를 떨쳐 일어나 후궁으로 들어가버렸다. 한중왕이 워 낙 매섭게 잘라 말하니 다른 벼슬아치들은 말을 붙여볼 틈도 없었 다. 서로 쳐다보기만 하다가 하릴없이 흩어졌다.
사흘 뒤 공명은 다시 여러 벼슬아치들을 데리고 조정에 들어가 한중왕에게 뵙기를 청했다. 한중왕이 나오자 엎드려 있던 여러 벼슬아치들 가운데서 이번에는 허정이 나서서 아뢰었다.
“지금 한의 천자께서는 이미 조비에게 해를 입으셨습니다. 주상께 서 대위에 오르시고 크게 군사를 일으켜 역적을 치시지 않으시면 그 게 오히려 충의롭지 못한 일이 됩니다. 천하가 바라는 것은 돌아가 신 효민황제의 한을 풀어드리는 것이지 주상께서 임금이 되시는 게 아닙니다. 만약 저희들이 의논한 바를 받아들이시지 않으시면 모든 백성들의 바람을 크게 저버리시는 셈이 되고 말 것입니다.”
허정이 교묘하게 말을 돌려 전한 것이었으나 한중왕 유비는 조금 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가 비록 경제 폐하의 후손이라고는 해도 아직 이렇다 할 은혜 와 덕을 백성들에게 베푼 적이 없소. 그러면서 하루아침에 스스로 천자의 자리에 오른다면, 그게 역적질과 다를 게 무엇이겠소?”
이에 공명이 다시 나서서 여러 가지 말로 한중왕을 권했으나 소 용없었다.
한중왕은 끝내 고집을 버리지 않고 그 권유를 따라주지 않았다. 공명은 하는 수 없이 계책을 써보기로 했다. 여러 벼슬아치들에게 이러저러하라고 시켜놓고 스스로는 병을 핑계로 집 밖을 나오지 않 았다.
한중왕 유비는 공명이 병들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크게 걱정이 되었다. 몸소 공명의 집으로 찾아가 병상을 돌아보고 공명에게 물 었다.
“군사께서는 어디가 어떻게 아프시오?”
“가슴이 타는 듯한 게 아무래도 오래는 못 살 성싶습니다.”
공명이 짐짓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힘없이 대꾸했다.
“가슴이 타는 듯하다니 무슨 걱정이 있으신 게로구려. 그래, 군사께 무슨 그리 큰 걱정이 있으시오?”
더욱 놀란 한중왕이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공명은 병이 무거워 말도 못하겠다는 듯 눈을 감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중왕이 두 번 세 번 거듭 묻자 문득 탄식과 함께 입을 열었다.
“신이 저 남양의 띠집[廬]을 나온 뒤로 대왕을 만나 오늘에 이 르도록, 말을 하면 들어주지 않으심이 없었고 계책을 내면 따라주지 않으심이 없었습니다. 이제 다행히도 대왕께서는 동천과 서천의 땅 을 모두 얻으시어 신이 밤낮으로 바라던 바를 저버리지 않으셨으나 한 가지 한스러운 것은 눈앞의 일입니다. 조비가 천자의 자리를 뺏 어 한의 종사가 끊어지게 되었기에, 문무의 관원들은 모두 대왕을 제위에 받들어 올려, 위를 쳐 없애고 유씨(劉氏)를 다시 일으키려 했 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대왕께서 굳이 마다하시고 따르지 않으시 니, 관원들은 모두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 오래잖아 모조리 흩어져 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문무의 관원들이 모두 흩어지면 위와 오가 쳐들어올 때 양천(兩川)을 지켜내기 어려우니, 신이 어찌 걱정이 되 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명이 그렇게까지 나오자 한중왕도 달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 다. 그러나 아무래도 제위에 오르는 일만은 꺼림칙한지 감추고 있던 마음속까지 털어놓았다.
“나도 헤아려보지 않은 바 아니나 내가 그걸 받아들이면 천하 사 람들의 말이 있을까 두렵소.”
“성인(聖人)께서 말씀하시기를,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따라 주지 아니한다[名不正則言不順]했으니, 이제 대왕께서는 명분도 바 르고 말도 거기에 따를 만한데 달리 따지고 들게 어디 있겠습니까? 대왕께서는,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오히려 그 미워함을 받 게 된다[與取 反其咎]란 말도 들어보지 못하셨습니까?”
공명이 아픈 사람 같지 않게 한중왕의 말끝을 잡고 늘어졌다. 한 중왕도 마지못해 말끝을 흐렸다.
“그 일이라면 군사의 병이 다 나은 뒤에 의논해도 늦지 않소. 부 디 몸조리 잘하시오.”
그러자 공명이 뛰듯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손으로 병풍을 한번 쳤다.
그게 무슨 신호인지 갑자기 방 밖에서 문무 관원들이 쏟아져 들 어와 한중왕 앞에 엎드렸다.
“주상께서 이미 윤허하셨으니 하루 빨리 좋은 날을 잡아 대례( 禮)를 올리도록 하시옵소서.”
여럿이 입을 모아 그렇게 말하는 소리를 듣고 한중왕이 그리로 눈길을 돌렸다.
모인 사람은 태부 허정, 안한장군 미축, 청의후 상거, 양천후 유표, 별가 조조(趙), 치중 양홍, 의조 두경, 종사랑 장상, 태상경 뇌충, 광록경 황권, 좨주 하증, 학사 윤묵, 사업 초주, 대사마 은순, 편장군 장예, 소부 왕모, 소문박사 이적, 종사랑 진복 등의 무리였다.
그제서야 한중왕은 모든 게 공명과 그들이 꾸민 일임을 알았다.
“나를 불의에 빠뜨린 것은 모두 그대들이다!”
한중왕이 그렇게 탄식했으나 공명은 못 들은 체제 할 말만 했다.
“주상께서 이미 허락이 계셨으니 어서 대를 쌓고 날을 잡아 대례 를 올리도록 하시오.”
그렇게 백관들을 재촉하는 한편 한중왕을 궁궐로 모셔가게 했다. 박사 허자(慈)와 간의랑 맹광(光)이 일을 맡아 성도의 무담 남 쪽에 대를 쌓고, 즉위에 필요한 모든 채비가 끝나자 관원들은 천자 가 타는 가마를 갖추어 한중왕을 대위로 모시고 하늘에 제사를 드리 게 했다. 초주가 소리 높여 제문을 읽었다.
‘건안 이십육년 사월 열이틀 황제 비는 황천후토께 감히 고합니 다. 한의 천하는 그 역년(曆)이 다함 없으니, 지난날 왕망이 도적 질한 적이 있으나 광무황제께서 진노하여 죽이고 사직을 다시 보존 한 바 있습니다. 이제 조조가 잔인하여 황후를 죽이고 임금을 능멸 한 죄가 하늘을 찌르더니 다시 조조의 아들 비가 흉악하여 역적질로 신기(神器)를 빼앗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장졸과 신하들이 한의 종사가 땅에 떨어져 끊어짐을 안타까 이 여기고, 이 비로 하여금 고조와 광무제의 뒤를 이어 역적에게 하 늘을 대신해 벌을 내리기를 빌었습니다. 비는 제위로 나갈 만한 덕 이 없는 게 두려우나, 백성들이며 멀리 변방의 군장(君長)들에게 물 은 바 모두 말하기를 천명은 마다할 수 없고, 조상들의 기업은 오래 남의 손에 붙여둘 수 없으며, 사해에는 주인이 없을 수 없다 하였습 니다. 가히 천하의 모든 바람과 믿음이 이 비 한 몸에 쏠리었다 할 것입니다. 비는 천명이 두렵고, 또 고조 광무제 두 분께서 이루신 바가 땅에 떨어지려 함을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이에 길일을 잡아 단
에 올라 제사 드려 하늘에 고하고 황제의 옥새를 받아들이고자 합니 다. 천지신명은 한가漢)의 제물을 흠향하시고 길이 평안함을 내 리소서.’
초주가 그렇게 읽기를 마치자 공명은 모든 벼슬아치들을 이끌고 나와 옥새를 바쳤다. 한중왕은 옥새를 받아 단 위에 올려놓고 세번 사양하며 말했다.
“이 유비는 재주와 덕이 아울러 모자라니 부디 재주와 덕이 있는 사람을 골라 이 옥새를 받게 하시오.”
그러자 공명이 소리쳐 권했다.
“주상께서는 사해를 평정하시어 공덕이 천하를 밝게 비치고 있습 니다. 거기다가 몸은 또 한실의 피를 이으셨으니 마땅히 제위로 나 가실 만합니다. 이미 제사 드려 하늘에 고한 일을 어찌 다시 마다하 려 하십니까?”
거기 이어 문무백관들은 소리 높여 만세를 외쳤다. 유비도 더는 어쩔 수 없어 옥새를 거두었다.
제위에 오른 한중왕 유비는 연호를 고쳐 장무(武) 원년으로 하 고 왕후 오씨(吳氏)를 황후(皇后)로 높였다. 또 맏아들 유선(禪)을 태자로 삼고, 둘째 유영(劉)을 노왕(王), 셋째 유리(理)를 양왕 (梁)에 봉했다.
왕부(府)가 제실(帝室)로 바뀌자 관제며 벼슬 이름도 달라졌다. 제갈량은 승상이 되고 허정은 사도(司徒)가 되었으며 다른 벼슬아치들도 모두 벼슬이 오르거나 상을 받았다.
거기다가 크게 사면령을 내리니 양천의 백성들은 모두 기뻐 뛰며 춤추었다.
다음 날이 되었다. 조회가 열려 문무의 신하들이 두 줄로 나누어 선 가운데 유비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짐은 도원에서 관우, 장비와 형제의 의를 맺을 적에 함께 살고 함께 죽기를 다짐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큰 아우 운장이 동오 손권 에게 해를 입어 먼저 죽었다. 만약 그 원수를 갚아주지 않으면 옛 맹 세를 저버리는 게 될 것이다. 짐은 온 나라를 기울여 군사를 일으키 고, 동오를 쳐 역적을 사로잡은 뒤에 그 한을 풀리라!”
제위에 오르고 나니 가장 먼저 관공이 생각난 듯했다. 그런데 선 주(主)가 된 유비의 그 같은 조서가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한 사 람이 줄에서 빠져나와 계하에 엎드리며 말했다.
“아니 됩니다. 나라를 뺏은 역적은 조조이지 손권이 아닙니다. 이 제 조조의 아들 조비가 제위를 찬탈하여 귀신과 사람이 함께 성내고 있으니 폐하께서는 먼저 관중부터 꾀해보도록 하십시오. 위하 상류 에 군사를 내어 흉악한 역적을 치면, 관동의 의사들은 틀림없이 모 두 양식을 싸들고 말을 채찍질해 왕사를 맞이할 것입니다.
만약 위를 두고 오를 치게 되면 싸움은 한번으로 얼른 결판이 나 지 않을 것이니 폐하께서는 부디 살펴주십시오.”
그렇게 말한 것은 바로 조운이었다. 선주는 얼굴이 문득 굳어지며 그 말을 받았다.
“손권은 내 아우를 죽였고, 미방, 부사인, 반장, 마충은 하나같이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원수들이다. 모두 그 고기를 씹고 구족(九 族)을 죽여야 내 가슴속의 한을 씻을 것인데 어찌하여 말리는가?”
“한나라를 도적질한 원수는 공의(公義)로운 것이고 형제를 죽인 원수는 사사로운 것입니다. 바라건대 천하를 무겁게 여겨주십시오.”
조운이 다시 그렇게 말해보았으나 선주는 마음을 굳힌 듯했다.
“아우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만리의 강산을 얻은들 귀할 게 무엇 이겠는가?”
그러고는 조운의 말을 더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선주는 크게 군사를 일으키라는 영과 사신을 오계로 보내 번병(番 兵) 오만을 불러들이는 한편, 장비가 있는 낭중에도 사신을 보냈다. 거기장군, 영사예교위, 서향후(西)겸 낭중목閬中牧)이란 긴벼 슬을 내린다는 조서와 함께였다.
이때 낭중의 장비는 관공이 동오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는 소문을 들은 뒤로 하루 종일 울며 지내고 있었다. 한동안은 얼마나 슬피 울 었던지 피눈물이 흘러 옷소매가 붉게 젖을 정도였다.
여러 장수들이 술로 그 분노와 슬픔을 달래보게 했으나 술이 취 할수록 장비의 분노와 슬픔은 더 커질 뿐이었다.
그 바람에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장졸들을 마구 채찍질해대니, 채찍에 맞아 죽은 장졸이 이미 여럿이 었다.
장비는 그래도 속이 안 풀리는지 매일 동오가 있는 남쪽을 이를 갈며 노려보다가 다시 목을 놓아 울곤 했다. 그렇게 미친 듯한 나날 을 보내고 있는데, 문득 성도에서 사신이 왔다는 전갈이 왔다. 장비가 달려 나가 맞아들이자 사신은 선주 유비가 내린 조서를 읽었다.
장비는 선주가 있는 북쪽으로 엎드려 절하고 새로 내린 벼슬을 받은 뒤 술자리를 벌여 사신을 대접했다.
몇 순배 술이 돈 뒤에 장비가 못마땅한 듯 물었다.
“형님 관공이 해를 입으신 한은 깊기가 바다보다 더할 것이오. 그 런데 조정의 신하들은 어찌하여 빨리 군사를 일으켜 동오를 치라고 주청하지 않으시오?”
“신하들은 대개 먼저 위를 쳐 없앤 뒤에 오를 치라고 권하고 있습 니다.”
사신이 본 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장비가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지난날 우리 삼형제가 도원에서 의를 맺을 때 죽고 사는 걸 함께하기로 맹세했소이다. 이제 불행히도 둘째 형 이 먼저 돌아가셨는데 어찌 나 혼자 살아남아 부귀를 누릴 수 있겠 소? 내 마땅히 천자를 찾아뵙고 오를 칠 군사를 일으키시도록 졸라 보겠소. 스스로 전부 선봉이 되어 상복을 입고 오를 쳐부수겠소. 그 리하여 형님이 돌아가시도록 한 역적 놈들을 모조리 사로잡아 형님 의 영전에 제물로 바침으로써 옛 맹세를 지켜보이겠소!”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사신과 함께 성도로 달려갔다. 한편 선주 유비는 매일 몸소 교련장으로 나가 군마를 조련시키면 서 군사를 일으키면 스스로 이끌고 나가 오를 치리라 벼르고 있었 다. 신하들은 모두 걱정이 되었다. 여럿이 떼를 지어 승상의 부중을 찾아보고 공명에게 말했다.
“지금 천자께서는 아직 대위에 오르신 지 오래되지 않으신 터에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가시겠다 하니, 이는 사직을 무겁게 여기는 처사가 못 됩니다. 승상께서는 나라의 가장 큰일을 맡으신 분으로서 어찌 말리시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공명도 답답한 듯 대꾸했다.
“나도 여러 번 힘들여 말렸으나 도무지 들어주시지 않는구려. 오 늘 마침 러분께서 오셨으니 나와 함께 교련장으로 가서 주상을 뵙 고 다시 말씀드려봅시다.”
그런 다음 백관들을 데리고 교련장으로 찾아갔다.
“폐하께서는 보위에 오르신 지 아직 오래되지 않으신 바, 만약 북 으로 위를 쳐 한의 역적을 없애고 대의를 널리 천하에 펴고자 하신 다면 몸소 육사(師)를 이끌고 나가셔도 거리낄 게 없겠습니다. 그 러나 오를 쳐서 형제의 원수를 갚는 일이라면 이는 다릅니다. 한 사 람 상장을 뽑아 군사를 이끌고 가게 하면 될 것을 무엇 때문에 몸소 움직이려 하십니까?”
공명이 교련장까지 백관을 데리고 나와 말리자 선주 유비도 마음 이 약간 달라졌다.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나가는 일을 한 번 더 생각 해보려 하는데 갑자기 근신이 달려와 알렸다.
“거기장군께서 오셨습니다.”
선주는 장비가 왔다는 말에 얼른 장비를 불러들였다. 연무청(武 廳)으로 달려온 장비는 땅에 몸을 던지며 선주의 발을 안고 통곡하 기 시작했다. 선주 또한 목을 놓고 울었다.
“폐하께서는 천자가 되셨다고 저 도원에서의 맹세를 벌써 잊으셨습니까? 어째서 둘째 형의 원수를 갚아주지 않으십니까?”
장비가 문득 울음을 그치고 선주에게 따지듯 물었다. 선주가 좋은 말로 대꾸했다.
“모든 관원들이 말려 가볍게 움직이지 못했다. 어찌 옛 맹세를 잊을 리 있겠느냐?”
“그 사람들이 어찌 우리 옛 맹세를 안답디까? 만약 폐하께서 가지 않으시겠다면 저 혼자라도 가겠습니다. 이 한 몸을 던지더라도 둘째 형의 원수는 꼭 갚고야 말겠습니다! 만약 그 원수를 갚지 못하면 죽 는 한이 있더라도 두 번 다시 폐하를 뵙지 않겠습니다!”
장비는 그러면서 다시 비 오듯 눈물을 쏟았다. 모처럼 마음을 돌 려먹었던 선주도 그런 장비를 보자 다시 생각이 달라졌다. 드디어 뜻을 굳힌 듯 결연히 말했다.
“그럴 것 없다. 나도 너와 함께 가겠다. 너는 낭중으로 돌아가 네 가 거느린 군마를 모두 이끌고 나오너라. 나도 정병을 이끌고 나갈 것이니 우리 강주(江州)에서 만나도록 하자. 거기서 함께 만나 동오 를 치고 뼈에 사무치는 이 한을 씻자!”
그렇게 되니 공명이 그토록 애써 선주의 마음을 돌려놓은 것은 온전히 허사가 되고 말았다.
선주의 그 같은 말을 들은 장비는 기가 났다. 당장 되돌아서서 낭 중으로 돌아가려는데 선주가 그를 불러 세우고 당부했다.
“나는 네가 평소 술을 마시면 거칠어져 성을 참지 못함을 잘 안 다. 장졸들을 채찍질해놓고 또 그들을 곁에 두는 것은 화를 부르는 길이 된다. 이제부터는 부디 부드럽고 너그럽게 장졸들을 대하고 전 같이 심하게 매질하지 말아라.”
“그리하겠습니다.”
장비는 시원스레 대답한 뒤 유비에게 절을 하고 낭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이 되었다. 선주는 장비와 약속한 대로 군사를 정돈하고 떠날 채비를 했다. 학사 진복(秦)이 그대로 볼 수 없다는 듯 나아 가 아뢰었다.
“폐하, 이리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만승의 귀한 몸을 돌보지 않으 시고 이렇듯 작은 의에 얽매이시는 것은 일찍이 옛사람에게 그 예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폐하, 다시 한번 헤아려주옵소서.”
“운장과 나는 한 몸이나 다름없다. 아직 그 대의가 살아 있는데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선주가 처음부터 굳은 얼굴로 그렇게 진복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진복은 그만 소리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대로 선주 앞에 엎드린 채 뻗대었다.
“폐하께서 신의 말을 따르시지 않다가 일을 그르침이 있을까 두 렵습니다. 부디 흘려듣지 마시옵소서.”
그러자 유비가 벌컥 화를 냈다.
“짐이 이제 크게 군사를 일으키려 하는데 네가 어찌 그리 불길한 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이냐?”
그렇게 소리치고는 무사들을 불러 진복을 끌어내 목 베게 했다. 진 복은 그래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선주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신이 죽는 것은 한스러울 것도 없지만, 새로 연 기업이 곧 뒤집 힐 게 실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 같은 진복의 빈정거림에 선주는 더욱 노기가 솟구쳤다. 그러나 여러 관원들이 말려 진복은 겨우 죽음을 면했다.
“잠시 저자를 옥에 가두어두어라. 짐이 원수를 갚고 돌아오는 날 처결하리라!”
선주는 그렇게 말하고 진복을 끌어내게 했다.
공명이 그 일을 알고 표문을 올려 진복을 구하러 나섰다.
‘신양 등은 오적(吳賊)이 간사하고 교활한 꾀로 형주를 뒤엎어, 장성(將星)을 두우(牛)에서 떨어지게 하고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초(楚) 땅에서 꺾어지게 한 일을 생각하니, 애통하기 그지없을 뿐더 러 그 간악함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하되 한을 세 조각으 로 낸 죄는 조조에게 있고, 유씨에게서 천명을 앗아간 것도 손권은 아닙니다.
굳이 이르자면, 위(魏)만 없애면 오는 곧 제 발로 찾아와 머리 를 숙일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진복의 옳고 귀한 말을 받 아들이시어, 사졸을 기른 뒤에 따로이 일을 꾀해보도록 하십시오. 사 직을 위해서도 천하를 위해서도 그보다 더 큰 다행은 없을 것입니다.’
공명의 표문은 대략 그러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공명의 그처럼 간곡한 권유도 아무 소용이 없었 다. 읽기를 마친 선주는 그 표문을 땅에 내던지며 자르듯 말했다.
“짐의 뜻은 이미 정해졌다. 새삼 말려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그러고는 곧 출병을 서둘렀다.
먼저 승상 제갈량은 태자를 돌보며 서천을 지키게 하고, 표기장군 마초는 아우 마대와 더불어 진북장군 위연을 도와 한중을 지키게 했다. 오를 치러 나간 사이에 위가 군사를 낼 때에 대비해서였다.
다음은 오를 치러 갈 진용의 짜임이었다. 그 출병을 말린 조운은 뒤로 빼돌려져 후위가 됨과 아울러 군량과 마초를 맡아 대게 하고, 황권(權)과 정기(程畿)는 참모로 삼았다.
마량과 진진(陳)은 문서를 맡아보게 했으며, 황충은 전부 선봉 으로 세우고, 풍습(馮)과 장남(張南)을 부장으로 따르게 했다. 부동 (傳彤), 장익(張翼)은 중군호위를 맡게 했고 조(趙融), 요순(寥淳)은 합후(後)를 보게 했다.
병세는 서천의 장수에다 오계에서 온 번장까지 합쳐 장수가 수백이요, 군사는 칠십오만이나 되었다. 날을 골라 군사를 내니 때 는 장무 원년 칠월 병인(丙寅) 날이었다.
한편 낭중으로 돌아간 장비는 장비대로 한 맺힌 동오를 치기 위 한 채비에 들어갔다. 관공의 원수 갚음을 앞세우기 위해 모든 군사 에게 입힐 흰 갑옷과 흰 군복에 흰 깃발을 마련하되 사흘 안으로 마 련해 올리게 했다.
장비가 그런 영을 내린 다음 날이었다.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 은 장수 두 사람이 장비의 군막을 찾아왔다.
갑옷과 깃발을 만들어 댈 일을 맡은 범강范疆)과 장달(張)이라 는 말장(末將)들이었다.
“수만 군사가 쓸 흰 깃발과 흰 갑주를 한꺼번에는 마련할 길이 없 습니다. 기한을 좀 넉넉히 주셔야 되겠습니다.”
그들로서는 당연한 소리였다. 그러나 장비는 대뜸 화부터 먼저냈다.
“나는 원수 갚는 일이 급해 내일 당장이라도 그 역적 놈들 땅에 이르지 못하는 게 한이 될 지경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감히 내 장령(將 令)을 어기려 드느냐?”
그러고는 둘을 나무에 매달아 등허리에 쉰 대씩이나 채찍질을 했다.
“내일까지 모든 걸 갖추어라! 만약 어길 때는 너희 둘을 여럿 앞 에서 목 베겠다.”
매질이 끝난 뒤에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둘의 입을 때려 피탈까 지내면서 그렇게 으름장을 놓아 돌려보냈다.
기한을 늘리려 갔다가 죽도록 매질만 당하고 돌아온 범강과 장달 은 분하고도 기가 막혔다. 가만히 만나 의논하는데 범강이 먼저 말 했다.
“오늘이야 이미 받을 벌을 다 받았지만, 내일은 또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 성미가 급하기 불과 같으니, 내일까지 모든 걸 갖춰놓지 못하면 우리 두 사람은 어김없이 죽음을 당하고 말 것이네.”
그 말에 장달이 부드득 이를 갈며 내뱉었다.
“저가 우리를 죽이는 것보다는 우리가 저를 죽이는 편이 나을 것 같네!”
“그렇지만 그자 가까이 갈 수가 없지 않나?”
범강 또한 이미 악에 받친 탓인지, 그런 엄청난 말에도 놀라는 기색 없이 되물었다. 장달이 어쨌든 해보기나 하자는 투로 말했다.
“우리 둘이 죽지 않게 되어 있으면 그자가 취해 자빠져 잘 것이고, 우리 둘이 모두 죽어야 할 팔자라면 그자가 취해 있지 않겠지.”
그리고 둘은 한번 뻗대보기나 하다 죽자는 심경으로 의논을 끝냈다.
한편 장비는 그날 밤따라 정신이 어지럽고 까닭 없이 어쩔어찔해 몸놀림이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전에 없던 일이라 부장을 잡고 물 었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가슴이 까닭 없이 놀라 뛰고 살이 떨려 서나 앉으나 편치가 않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군후께서 관공을 너무 생각하시어 그럴 것입니다. 잠시 잊고 술 이나 드시지요.”
부장은 별 생각 없이 그렇게 말하고 술을 가져왔다. 장비도 그럴 듯이 여겨져 부장과 함께 술을 마셨다. 일이 꼬이려고 그랬는지 한 잔 두 잔 하다 보니 장비는 자신도 모르게 몹시 취했다. 그대로 장막 안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초저녁부터 장비의 움직임만 살피고 있던 범강과 장달이 그걸 안 것은 초경 무렵이었다. 하늘이 자기들을 도운 것이라 믿은 둘은 각 기 몸에 짧은 칼을 한 자루씩 감추고 장비의 군막 안으로 들어갔다. 지키던 군사가 가로막았으나, 장비에게 알릴 중한 기밀이 있다는 거 짓말로 둘은 일 없이 장비 곁에 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장비 곁에 이른 둘은 깜짝 놀랐다. 장비가 두 눈을 뜨고 수 염을 곤두세운 채 누워 있지 않은가.
원래 장비가 눈을 뜨고 자는 버릇이 있음을 모르는 둘은 감히 손 을 쓰지 못하고 한동안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러나 우레 같은 코고는 소리에 곧 장비가 잠들었음을 알아차린 둘은 칼을 뽑아 한꺼번에 장비를 찔렀다. 장비가 한소리 큰 비명과 함께 숨이 끊어지니 그때 그의 나이 쉰다섯이었다. 뒷사람이 시를 지어 그를 노래했다.
안희에서 일찍이 독우를 매질했고 安喜會聞鞭督郵
황건을 쳐 없애 유비를 도왔다 黃巾掃盡佐炎劉
호로관에서 먼저 그 이름 천지를 울렸고 虎牢關上聲先震
장판교에서는 물마저 거꾸로 흘렀다 長坂橋邊水逆流
의로 엄안을 놓아주어 촉을 안정시켰고 義釋嚴顏安蜀境
꾀로 장합을 속여 중주를 차지했네 智張定中州
오를 쳐 이기기 전에 몸이 먼저 죽으니 伐吳走克身先死
가을풀만 오래오래 낭중의 서글픔을 전하는구나 秋草長遺閬地愁
그날 밤 장비를 죽인 범강과 장달은 곧 그 목을 베어 따르는 수십 기와 더불어 동오로 달아나버렸다. 다음 날 아침에야 겨우 그 일을 안 장비의 아랫장수들이 군사를 내어 뒤쫓았으나 소용없었다. 밤새 껏 달아난 둘은 어느새 오로 들어가고 만 뒤였다.
그때 장비가 거느리고 있던 장수 중에 오반(吳班)이란 사람이 있었다.
형주에서 선주를 찾아오자 선주는 그를 아문장(門將)으로 삼아 장비를 돕게 했는데, 그가 장비 없는 낭중을 그럭저럭 수습했다. 먼저 선주에게 그 일을 알리는 한편, 장비의 맏아들 장포(張苞)는 관곽 을 갖추어 장비의 시신을 들이게 하고 그의 아우 장소(張紹)는 형을 대신해 낭중을 지키게 했다.
그때 선주는 받아둔 날이 되어 장졸들과 더불어 성도를 떠난 뒤 였다. 대소의 관원들은 공명을 따라 출전하는 선주를 십 리나 배웅 하고 성도로 돌아갔다. 공명은 선주가 기어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 고 동오로 군사를 내자 마음이 즐겁지 않았다. 문득 백관들을 돌아 보고 탄식했다.
“법정이 살았다면 반드시 이걸 막았을 것을.”
한편 성도를 떠난 선주는 그날 밤 이상하게 가슴이 뛰고 몸이 떨 려자리에 들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가만히 군막을 나와 하늘을 쳐다보니 서북쪽에 별 하나가 있는데, 크기가 말[4] 만하게 빛나다 가 갑자기 땅으로 떨어졌다. 깜짝 놀란 선주는 그날 밤으로 공명에 게 사람을 보내 물어보았다.
“상장 한 사람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사흘 안에 놀라운 소식이 올 것입니다.”
공명이 사자에게 알려온 것은 그런 내용이었다. 선주는 그 말에 더 나아가지 못하고 군사를 묶어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오래잖아 시중드는 신하가 와서 알렸다.
“낭중에 계신 거기장군의 부장 오반이 사람을 보내 표문을 올려 왔습니다.”
그 말을 듣자 무슨 짐작이 갔던지 선주가 문득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아아, 아우 익덕도 죽었구나!”
그리고 얼른 표문을 뜯어보니 정말로 장비가 죽었다는 끔찍한 소식이었다.
읽기를 마친 선주는 목을 놓아 울다가 끝내 정신을 잃고 쓰러졌 다. 신하들이 그런 선주를 침상으로 모셔 겨우 정신을 차리게 했다. 다음 날이었다. 아직도 넋 나간 사람처럼 누워 있는 선주에게 다 시 사람이 와 알렸다.
“한 떼의 군마가 바람을 일으키며 다가오고 있습니다.”
선주가 나가보니 한 젊은 장수가 흰 갑옷 흰 투구 차림으로 달려 왔다. 선주 앞에 이르자 말에서 내려 땅에 엎드리며 우는 그는 다름 아닌 장포였다.
“범강과 장달이 신의 아버님을 죽이고 그 목을 베어 동오로 달아났습니다.”
장포가 울며 장비가 죽은 일을 자세히 알렸다. 선주는 슬픔을 이 기지 못해 먹고 마시는 것조차 되지 않았다. 걱정이 된 여러 신하들 이 선주를 찾아보고 힘써 권했다.
“폐하께서 이제 두 분 아우님의 원수를 갚으려 하시면서 몸부터 상케 하십니까? 이럴수록 더 뜻을 다잡으셔서 수라를 드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선주도 깨달은 게 있는지 다시 음식을 입에 대기 시작했 다. 그리고 장포를 불러 말했다.
“너와 오반은 거느린 군마로 선봉이 되어 네 아비의 원수를 갚아 보지 않겠느냐?”
“나라를 위하고 돌아가신 아버님을 위한 길인데 만 번 죽는다 한들 마다하겠습니까?”
장포가 그렇게 굳은 뜻을 나타냈다. 선주가 마음 든든히 여기며 막장포를 보내려 하는데 다시 한 갈래 군마가 벌 떼같이 달려왔다. 선주가 알아보게 하자 신하 한 사람이 나가더니 오래잖아 역시 흰 갑옷 흰 투구의 젊은 장수 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선주의 발 아래 엎드려 우는 걸 보니 관흥이었다. 선주는 관흥을 보자 다시 관공이 생각나 관흥을 붙들고 목을 놓아 울었다. 여러 신 하들이 번갈아 말린 뒤에야 울음을 그친 선주가 말했다.
“짐은 벼슬살이에 나오기 전 관우, 장비와 의를 맺고 함께 죽고 살 기를 맹세하였다. 그런데 이제 짐은 천자가 되었으되 두 아우는 모 두 비명에 갔구나. 이 두 조카를 보니 실로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다!”
그러고는 다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보다 못한 신하들이 관훙 과장에게 넌지시 말했다.
“두 분 장군께서는 잠시 물러나 계시오. 우선 성상(聖上)께서 좀 쉬시도록 해드려야겠소.”
두 사람이 그 뜻을 알아듣고 물러나자 신하들이 다시 선주에게 아뢰었다.
“폐하께서는 이미 예순을 넘기셨습니다. 지나치게 슬퍼하시다가는 옥체를 상하실 것입니다. 부디 눈물을 거두십시오.”
그래도 선주는 눈물을 거두지 못했다.
“두 아우가 모두 죽었는데 어찌 나 혼자 산단 말이냐?”
그런 소리와 함께 이마로 땅을 짓찧어가며 울었다.
걱정이 된 신하들이 모여 어떻게 선주의 슬픔을 풀어줄까 의논했다.
“주상께서 몸소 대군을 이끌고 나오신 터에 저토록 하루 종일 울 기만 하시면 싸움에 이롭지 못할 것이오. 어떻게 해야 되겠소!”
마량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 진진이 가만히 그 말을 받았다.
“내가 들으니 성도의 청성산(靑城山) 서쪽에 이의(意)란 이가 숨 어 산다 합니다. 들리는 말로는 나이 삼백 살이 넘는데, 사람의 생사 길흉(生死吉凶)을 잘 알아 지금 세상의 신선이라 할 만하다는 것입 니다. 주상께 말씀드려 그 늙은이를 불러오도록 하지요. 그에게 길 흉을 물어보는 게 우리들이 권하는 말보다 나을 것입니다.”
이에 사람들은 모두 선주에게로 가서 이의를 불러보라 권했다. 선 주도 마음이 움직여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고 진진에게 조서를 주어 청성산으로 보냈다.
밤길을 달려 청성산에 이른 진진은 동네 사람에게 물어 산속 깊 은 골짜기에 있는 이의의 거처를 찾아갔다. 멀리서 보아도 신선이 살 만한 곳으로 보이는 그 집 위에는 푸른 구름이 걸리고 예사롭지 않은 서기가 감도는 듯했다.
진진이 은근히 위압되어 그 집으로 다가드는데 문득 어린 동자 하나가 나와 맞으며 물었다.
“오시는 분은 진선생이 아니십니까?”
“그대가 어찌 내 이름을 아는가?”
진진이 깜짝 놀라 그 동자에게 물었다. 동자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어젯밤 스승님께서 제게 이르시기를 오늘 천자의 조서가 이를것인데 그 조서를 가지고 올 사자는 진효기 (陳孝起)일 것이라 했습니다.”
효기(孝)는 진진의 자였다. 진진은 그 말을 듣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참으로 신선이라 할 만하구나! 사람들의 말이 거짓되지 않음을 알겠다.”
그러고는 동자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진진이 선주의 조서를 내놓고 함께 가기를 청했으나 이의는 늙음 을 핑계로 산을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 진진은 더욱 간곡히 청했다.
“천자께서 급히 신선 같으신 선생을 뵙고자 하십니다. 부디 학가 (鶴駕)를 움직여 함께 내려가주시기를 엎드려 빕니다.”
이의는 진진이 두 번 세 번 그렇게 졸라서야 겨우 따라나섰다. 산을 내려간 이의는 선주가 있는 영채로 들어가 선주를 만났다. 선주가 보니 이의는 하얗게 센 머리에도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했는 데, 눈은 푸르고 눈동자는 모가 져 있었다.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는 빛을 쏘아내는 그 눈길에다 늙은 잣나무 등걸 같은 모습은 한눈에 봐도 이인(異人)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선주가 두터운 예로 이의를 맞아들이자 이의는 송구스런 듯 말했다.
“이 늙은이는 거친 산기슭에 사는 한낱 촌뜨기에 지나지 않습니 다. 배운 것도 없고 아는 것 또한 많지 않사온데 폐하께서 조서를 내 려 부르시니 그저 두렵고 부끄러울 뿐입니다.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짐은 관우, 장비 두 아우와 의를 맺어 삶과 죽음을 함께하기로 한 지 삼십 년이 되었소. 그런데 이제 그 두 아우가 모두 죽음을 당 해, 몸소 대군을 이끌고 그 원수를 갚아주려 하나 앞일이 어떤지 알 길이 없소. 듣기로 선생은 깊고 아득한 하늘의 이치를 꿰뚫어볼 수 있다 하니, 바라건대 그걸 한번 알아봐주시오.”
선주가 그렇게 이의를 부른 뜻을 밝혔다.
“그것은 하늘의 기밀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 늙은이가 어찌 알겠습니까?”
이의는 그렇게 발뺌을 했으나 선주가 두 번 세 번 간곡히 묻자 마침내 말했다.
“그렇다면 종이와 붓을 가져오게 하십시오. 아는 대로 그려 보이
도록 하겠습니다.”
선주가 종이와 붓을 내어주자 이의는 먼저 병마와 싸움에 쓰이는 기구들로 마흔 장이 넘는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것들을 한 장 한 장 찢어버린 다음 다시 그림 한 장을 그렸다. 커다란 사람 하나가 땅에 쓰러져 있고, 여럿이 그 곁에서 땅 을 파고 있는 그림이었다.
이의는 그 그림 위쪽에다 ‘백(白)’ 자 한 자를 크게 쓴 다음 선주에 게 머리 숙여 절하고 떠나버렸다. 그림을 받아본 선주는 즐겁지 아 니했다. 자기의 앞일을 죽은 사람을 땅에 묻는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까닭이었다.
“미치광이 늙은이로군. 이따위 늙은이를 어떻게 믿겠는가? 이걸 모두 태워버려라!”
선주는 그렇게 영을 내리고 다시 진군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