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8권 – 15화 : 원수를 갚아도 한은 더욱 깊어가고
원수를 갚아도 한은 더욱 깊어가고
이때 선주는 무협, 건평을 지나 바로 이릉 가까운 곳까지 이르러 있었다. 칠십여 리에 걸쳐 마흔여 곳에 진채를 세우고 오를 노려보 고 있는 중에 장포, 관흥이 그처럼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여간 기 껍지 않았다.
“지난날 짐을 따라다니던 장수들은 이제 모두 늙어 쓸모없게 되 었다. 그런데 너희 두 조카가 다시 나와 이토록 용맹스러우니 손권 따위를 겁낼 게 무엇이랴!”
그렇게 감격하고 있는데 문득 사람이 들어와 알렸다.
“동오의 한당과 주태가 대군을 이끌고 나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선주는 곧 장수들을 불러 한당과 주태를 치러 보내려 했다. 그때 가까이서 모시던 신하 한 사람이 아뢰었다.
“노장군 황충이 군사 대여섯을 데리고 동오로 달아났습니다.”
그러자 선주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황충은 결코 나를 저버릴 사람이 아니다. 짐이 늙은 장수는 쓸모 없다는 말을 한 탓이다. 틀림없이 그는 자신이 늙었음을 인정치 않 고 오히려 더 힘을 자랑해 보이려 들 것이다.”
그러고는 관흥과 장포를 불러 말했다.
“황충이 이번에 그렇게 가서는 실수가 있을 것이다. 조카들은 수 고로움을 꺼려하지 말고 어서 가서 도우라. 그리하여 그가 작은 공 이라도 세우면 곧 돌아오라 이르고 행여라도 실수가 없게 하라.”
이에 관흥과 장포는 그날로 곧 황충을 찾아나섰다.
한편 늙은 장수는 쓸모없다는 선주의 실언에 격한 황충은 선주의 영채를 벗어나자 똑바로 오반을 찾아갔다. 황충이 군사 대여섯과 더 불어 몸소 칼을 빼들고 말을 몰아 달려오자 놀란 오반은 장남, 풍습 과 더불어 나가 그를 맞아들이고 물었다.
“노장군께서는 무슨 일로 이렇게 오셨습니까?”
“나는 장사에서 천자를 따라나서서부터 이제까지 숱한 싸움터를 누비며 있는 힘을 다 쏟았다. 비록 나이 일흔이 넘었으나 아직도 열 근 고기를 먹고, 두 섬을 들 힘이 있는 자만 당길 수 있는 활을 쓸 수 있으며 하루 천리를 달리는 말을 몰 수 있다. 그런데 어찌 나를 늙었다 할 수 있겠는가? 어제 주상께서는 우리들 늙은 장수들이 쓸 모없다 하시기로 이렇게 특히 싸움터를 찾아왔다. 동오와 싸워 그 장수를 목 벰으로써 늙어도 늙지 않았음을 보여주려 한다.”
황충이 격한 음성으로 그렇게 대꾸하는데 마침 군사 하나가 달려와 오병의 앞머리가 가까이 이르렀음을 알렸다. 황충은 그 말을 듣자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몸을 일으켜 말 위에 뛰어올랐다. 황충이 막 군막을 뛰쳐나가려 할 때 풍습이 그 말고삐를 잡으며 말했다.
“노장군께서 가볍게 나아가셔서는 아니 됩니다. 잠시 형세를 살피 신 뒤 나아가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황충은 들은 체도 않고 그대로 말을 박차 달려 나갔다. 오 반은 하는 수 없이 풍습에게 군사를 이끌고 뒤따라가 황충의 싸움을 돕게 했다.
황충은 오병 앞에 이르자 홀로 말을 몰고 나가 싸움을 걸었다. 이 때 오병의 선봉을 맡은 장수는 반장이었다. 황충이 싸움을 걸어오자 그 부장 가운데 사적(史蹟)이란 장수가 반장을 대신해 달려 나갔다. 황충이 늙은 걸 얕잡아본 것이었지만 결과로는 스스로 목숨을 재촉 한 꼴이 되고 말았다. 사적은 세 합을 넘기지 못하고 황충의 칼에 목 없는 귀신이 되었다.
부장 사적이 죽는 걸 보자 반장은 벌컥 성이 났다. 전에 공이 쓰 던 청룡도를 뽐내듯 휘두르며 스스로 나가 황충과 맞붙었다.
황충과 반장이 어울린 지 여러 합이 되었으나 승부는 좀체로 나 지 않았다. 그러나 황충이 싸울수록 힘이 솟는 데 비해 반장은 차차 기세가 수그러들더니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말을 돌려 달아나기 시 작했다.
황충은 이긴 기세를 타고 반장을 뒤쫓으며 한바탕 오병을 짓두들 겼다. 그리고 이긴 걸 기꺼워하며 돌아오는데 관흥과 장포가 이르 렀다.
“저희들은 성지(聖旨)를 받들어 장군님을 도우러 왔습니다. 이미 이처럼 큰 공을 세우셨으니 이만 돌아가시지요.”
관흥이 그렇게 청했으나 황충은 아직도 들은 체를 아니했다. 다음 날이 되었다. 어제 쫓겨간 반장이 다시 와서 싸움을 걸었다. 황충이 분연히 말 위에 뛰어오르는 걸 보고 관흥과 장포가 나섰다.
“저희들도 싸움을 돕겠습니다.”
그러나 황충은 들어주지 않았다. 오반이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아 무도 따라오지 못하게 하고 혼자서만 오천 군사를 이끌고 적을 맞으 러 나갔다.
반장은 황충을 보자마자 다시 전날처럼 덤벼들었다. 그러나 몇 합 싸우기도 전에 칼을 끌고 달아나니 황충이 뒤쫓으며 큰 소리로 꾸짖 었다.
“적장은 달아나지 말라! 내 오늘 반드시 관공의 원수를 갚으리라.”
하지만 기실 반장은 그때 황충에게 속임수를 쓰고 있었다. 황충이 한 삼십 리나 따라갔을까, 사방에서 문득 천지를 흔드는 듯한 함성 이 울리며 복병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왼편은 주태요, 오른 편은 한당이었으며, 뒤는 능통인 데다 앞에서는 또 달아나던 반장이 되돌아서서 덤비니 황충은 어느새 적병 한가운데 서 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거기다가 갑자기 미친 듯한 바람까지 일자 황충도 할 수 없이 군 사를 물리려 해보았다. 그때 다시 맞은편 산 언덕에 마충이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나타나더니 황충을 향해 화살 한 대를 날렸다.
화살은 바람을 가르고 날아 황충의 어깻죽지에 꽂혔다. 황충은 자칫하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으나 겨우 몸을 가누고 벗어날 길을 찾았
다. 오병들은 황충이 화살에 맞은 걸 보고 힘을 얻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문득 그런 오병들의 등 뒤에서 크게 함성이 일더니 두 갈래 군마 가 나타나 황충을 구해냈다. 바로 관흥과 장포가 이끄는 군마였다. 관흥과 장포는 구해낸 황충을 얼른 선주가 있는 본영(本營)으로 옮겨 상처를 치료하게 했다. 그러나 황충이 이미 늙고 혈기가 잦아 들어 화살 상처는 쉬 아물지 않고 점점 병세가 심해져갔다.
소문을 들은 선주는 몸소 황충이 누운 곳으로 찾아가 그 등을 어 루만지며 잘못을 빌었다.
“이번에 노장군께서 상처를 입은 것은 모두가 짐의 허물이외다.”
그러자 황충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신은 한낱 무부로서 다행스럽게도 폐하를 만나 무겁게 쓰였습니 다. 또 신의 나이는 일흔하고도 다섯이니 수(壽) 역시 이만하면 넉넉 합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용체(龍體)를 보증하시어 부디 중원까 지 얻으시도록 하시옵소서.”
그러고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날 밤 황충은 마침내 선주가 보 는 앞에서 숨을 거두니, 뒷사람이 시를 지어 그의 삶을 간추렸다.
늙은 장수라면 황충, 老將黃忠
서천을 뺏는 데 큰 공을 세웠네 川立功
금쇄 갑옷을 덧껴입고 重金鎖甲
쇠테 메운 활을 둘씩 당겼어라 雙挽胎弓
담력과 기운 하북을 놀라게 하고 膽氣驚河北
위엄 찬 이름 촉 땅을 진정시켰네 威名鎭蜀中
죽을 땐 머리 눈처럼 희었으되 臨亡頭似雪
오히려 영웅됨을 스스로 드러냈네 猶自顯英雄
선주는 황충이 죽는 걸 보고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눈물을 뿌리 며 영을 내려 관곽을 엄숙히 마련하게 하고 성도로 보내 장사 지내게 했다.
“오호대장 가운데 벌써 셋이 죽었다. 짐은 아직 원수도 갚지 못했 는데 장수들이 먼저 죽으니 더욱 슬프구나!”
황충의 시신을 성도로 보내며 그렇게 탄식한 선주는 똑바로 어림 군을 몰아 효정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거기서 모든 장수를 모은 뒤 군사를 여덟 길로 갈라 물과 뭍으로 함께 밀고 들게 했다. 물길은 황 권이 군사를 이끌고 뭍길은 선주 몸소 대군을 거느렸다. 때는 장무 이년 이월 중순이었다.
한당과 주태는 선주가 앞장서 대군을 이끌고 오고 있다는 걸 알 자 군사를 내어 선주를 맞았다. 양쪽 군사가 둥글게 진을 쳐 맞선 가 운데 한당과 주태가 먼저 말을 내었다. 가만히 촉진을 건너보니 깃 발이 걷히며 나는 길로 선주가 몸소 나오는 게 보였다.
선주는 누런 비단에 금칠한 일산을 받고 좌우에는 백모(白)와 황월(黄鉞)을 세워 천자의 위엄을 한껏 드러내보이고 있었다. 그밖 에도 앞뒤에 늘어 세운 금빛, 은빛 정기와 절(節)도 보는 이의 머리 를 절로 숙여지게 할 만했다.
“폐하께서는 이제 촉의 주인이 되셨는데도 어찌 이렇게 가볍게 납시었습니까? 만일 조금이라도 잘못됨이 있으면 그때는 뉘우쳐도 이미 늦으실 것입니다.”
한당이 선주를 보고 빈정거림 섞어 그렇게 소리쳤다. 선주가 한당 을 손가락질하며 꾸짖었다.
“네놈들은 오나라의 개들로 감히 짐의 아우를 죽였다. 짐은 맹세 코 네놈들과는 같이 하늘을 이지 않고 함께 땅을 밟지 않으리라!” 그러자 한당은 대꾸 대신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누가 나가서 병을 깨뜨려보겠는가!”
“제가 한번 나가보겠습니다.”
부장 하순이 그렇게 대답하고 창을 휘두르며 말을 몰아 나갔다. 선주의 등 뒤에 있던 장포가 그걸 보자 역시 장팔사모를 끼고 말을 달려 나갔다.
장포가 벼락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덮치자 하순은 그 고함 소리 에 벌써 겁을 먹었다. 싸움도 제대로 해보지 않고 틈을 보아 꽁무니 를 뺄 궁리부터 먼저 했다. 하순의 마음가짐이 그러하니 싸움이 기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주태의 아우 주평이 그걸 보다 못해 칼을 휘두 르며 달려 나왔다.
주평이 달려 나오자 촉진에서는 관흥이 다시 말을 박차고 달려 나가 맞았다. 그때 한소리 큰 고함과 함께 장포가 하순을 찔러 말아 래로 떨어뜨렸다. 그걸 본 주평도 깜짝 놀랐다. 손발이 어지러워져 허둥대다가 그 또한 관흥의 한칼에 목이 달아났다.
두 적장을 죽인 장포와 관훙은 그 기세를 타고 곧바로 한당과 주태를 덮쳤다. 비록 싸움터에서 늙은 몸들이기는 하나, 젊은 두 적장의 기세가 얼마나 날카로운지 한당과 주태는 감히 맞설 엄두를 못 냈다. 황망히 진채 속으로 숨어버렸다.
“호랑이 같은 아비에 어찌 개 같은 아들이 있겠느냐!”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선주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의 소리를 냈다. 그리고 손에 든 채찍을 들어 한번 크게 휘두르자 촉병들이 다투어 달려 나갔다. 여덟 갈래의 군마가 한꺼번에 덤비는데 그 기세는 마 치 샘물이 콸콸 솟는 듯하니 그렇잖아도 움츠러들어 있던 오병이 당 해내지 못했다. 곧 싸움터는 쓰러진 오병들의 시체로 덮이고 흐르는 피는 냇물을 이루었다.
이때 아픈 몸으로 출전한 감녕은 배 위에서 병을 다스리고 있었 다. 그러나 병이 크게 몰려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대로 누워 있 을 수 없어 급히 말에 올랐다. 얼마 가지 않아 한 떼의 만병(兵)이 감녕을 가로막았다. 모두 풀어헤친 머리에 맨발인데, 활과 쇠뇌, 장 창과 도끼를 들고 방패로 앞을 가린 채였다.
앞선 장수는 바로 번왕 사마가였다. 얼굴은 피를 뒤집어쓴 듯 시 뻘겋고 푸른 눈알은 툭 튀어나왔는데, 병기는 두 개의 철질려(鐵 藜, 삼각형의 무쇠날을 끈으로 묶은 것으로 원래는 땅에 묻어 적의 기병을 막는 데 쓰던 병기)에다 허리에는 다시 두 개의 큰 활을 차고 있었다. 괴이 한 용모에다 병기까지 흔치 않은 것이라 그 위풍이 자못 대단했다. 감녕은 만병들과 그 장수의 기세가 엄청남을 보자 맞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쩌면 몸이 병들어 마음까지 약해졌는지도 모를 일이 었다. 창칼 한번 대보지 않고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다 사마가가 쏜 화살에 머리를 맞았다.
머리에 화살이 꽂힌 채 달아나던 감녕은 부지구에 이르러 어떤 큰 나무 아래 앉은 채 숨이 졌다. 그런 감녕을 슬퍼하듯 난데없는 까 치 떼가 그 나무에 몰려 시체 주위를 울며 날아다녔다.
감녕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오왕은 슬퍼해 마지않았다. 예를 극 진히 해 장사 지내고 묘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했다. 날래면서도 호탕하던 손권의 한 팔, 겨우 백 명의 장사를 데리고 수만 적진에 뛰 어들어가 조조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동오의 맹장치고는 너무도 허 망한 죽음이었다.
한편 다시 한바탕 싸움에 크게 이긴 선주는 오병을 뒤쫓으며 효 정을 온전히 차지했다. 그리고 오병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더 뒤쫓을 수 없자 거기서 일단 장졸들을 수습했는데 어찌 된 셈인지 관흥이 보이지 않았다. 놀란 선주는 장포를 비롯한 여러 장수들을 흩어 사방으로 관훙을 찾아보게 했다.
그때 관흥은 낯선 산골짜기를 헤매고 있었다. 장포와 함께 오병의 진채로 뛰어들었다가 관공을 해친 원수 반장을 만난 탓이었다. 반장 을 보고 눈이 뒤집힌 관흥이 말을 몰아 뒤쫓자 놀란 반장은 산속으 로 뛰어 달아났다. 관훙은 그런 반장을 뒤쫓아 산골짜기를 뒤지다가 반장은 놓쳐버리고 길만 잃어버렸던 것이다.
이리저리 길을 찾아 더듬는 사이에 어느덧 해는 지고 날이 저물 었다. 다행히 달과 별이 제법 밝아 산기슭을 따라 걷던 관흥은 이경 무렵하여 산발치에 있는 어떤 장원에 이르렀다.
관흥이 문을 두드리자 어떤 늙은이 하나가 나와 물었다.
“누구시오?”
“나는 근처에서 싸우던 장수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지금 매우 시장하니 밥 한 그릇 내어주신다면 그보 다 더 고마운 일이 없겠습니다.”
관흥이 그렇게 말하자 늙은이는 더 묻지 않고 그를 안으로 들게 했다. 들어가보니 방안에 촛불이 환히 밝혀져 있고 벽 한가운데는 관공의 화상(像)이 걸려 있었다. 아버지 관공의 화상을 보자 관흥 은 배고픔과 고단함도 잊고 그 앞에 엎드려 울며 절했다. 늙은이가 이상한 듯 물었다.
“장군은 무슨 까닭으로 거기에 울며 절하시오?”
“이분은 바로 돌아가신 제 아버님이십니다.”
관흥이 눈물을 씻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 늙은이는 얼른 관흥 곁에서 나란히 관공의 화상에 절을 했다.
“어르신께서는 어찌하여 제 아버님을 이토록 정성들여 모시고 계 “십니까?”
이번에는 관흥이 궁금해 그렇게 묻자 늙은이가 엄숙하게 말했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관공을 신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습니다. 살 아 계실 때도 집집마다 받들어 모셨는데, 하물며 신이 되신 이제겠 습니까? 이 늙은이는 다만 촉이 어서 빨리 관공의 원수를 갚아주기 를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관공의 아드님 되시는 장군께서 이 곳에 오신 것도 모두 이곳 백성들의 복이라 여겨집니다.”
그러고는 술과 밥을 내어 관흥을 정성껏 대접했다.
그런데 그날 밤 삼경이 좀 지났을 무렵이었다. 문득 또 한 사람이 찾아와 그 집 문을 두드렸다. 주인 늙은이가 나가보니 바로 관흥이 뒤쫓다 놓쳐버린 원수 반장이었다. 그 또한 밤길을 헤매다가 그 집 을 보고 하룻밤 쉬어 가려고 찾아온 길이었다.
맘씨 고운 늙은이는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반장을 방안으로 맞 아들였다. 그러나 관흥은 목소리로 벌써 반장을 알아보고 있었다. 늙은이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서는 반장에게 칼을 빼어 들고 큰 소리 로 외쳤다.
“이놈 반장아, 달아나지 말라!”
깜짝 놀란 반장은 얼른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달아나려 했다. 그런 데 이게 웬일인가. 문득 문 밖에 한 사람이 서서 반장의 길을 막았다. 잘 익은 대춧빛 얼굴에 봉의 눈이요, 누운 누에 같은 눈썹에 세 갈 래 아름다운 수염을 드리우고 있었다. 푸른 옷에 금투구를 쓰고 칼 을 빼든 채 방안으로 들어서는 게 틀림없이 관공이었다.
관공이 나타난 걸 보자 까무라칠 듯 놀란 반장은 한소리 큰 외침 과 함께 몸을 다시 돌리려 했다. 그때 관흥의 칼이 번쩍하니 반장의 목은 어느새 방바닥에 굴렀다.
관흥은 그런 반장의 목을 주워 부친 관공의 화상 앞에 놓고 제사 를 드렸다. 그런 다음 반장에게 되찾은 관공의 청룡언월도와 반장의 목을 수습한 뒤 주인 늙은이에게 작별을 했다. 자신의 말에는 청룡 언월도와 반장의 목을 달고 반장의 말은 자신이 탄 채 관흥이 본영 을 찾아 떠나자 집 주인 늙은이는 반장의 목 없는 시체를 끌어다 태 워버렸다.
벌써 희끗희끗 밝아오는 길을 몇 리 달리기도 전이었다. 문득 관흥의 귀에 사람들의 고함과 말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곧 한 떼의 인 마가 나타났다. 앞선 장수는 공교롭게도 반장의 부장 마충이었다.
마충은 관흥이 제 주장 반장을 죽여 그 목을 말 안장에 달고, 다시 반장의 말에다 청룡언월도까지 되찾아 돌아가는 걸 보자 두 눈이 뒤 집혔다. 앞뒤를 헤아리지도 않고 대뜸 말을 박차 관흥에게 덤볐다. 관흥도 아비 죽인 원수인 마충을 보자 눈이 뒤집히기는 마찬가지였 다. 쌓인 한을 한칼에 씻으려는 듯 청룡언월도를 움켜잡았다.
하지만 관흥은 혼자고 마충에게는 삼백의 졸개가 딸려 있었다. 관 흥과 마충이 어울리자 졸개들이 큰 함성과 함께 관흥을 에워쌌다. 그렇게 되자 적 한가운데 갇힌 관흥은 곧 위태로운 형세에 빠졌다. 선주의 명을 받고 관흥을 찾아다니던 장포가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관흥이 어려운 싸움을 겨우 버텨내고 있을 때 문득 서북쪽에서 한 떼의 인마가 나타나 마충의 졸개들을 쫓기 시작했다.
마충도 이미 구원병이 이른 걸 알자 얼른 군사를 거두어 달아나 버렸다.
장포가 온 걸 보고 힘을 얻은 관흥은 그와 힘을 합쳐 마충을 뒤쫓았다.
얼마쯤 뒤쫓다 보니 미방과 부사인이 나타나 마충을 구하려 들었 다. 관공의 위태로움을 못 본 체하고 동오에 항복해버린 두 역적이 다시 관공을 사로잡아 손권에게 바친 마충을 구하려 들자 장포와 관 흥은 이를 악물고 덤볐다.
거기서 다시 한바탕 어지러운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장포가 이끌고 온 군사는 미방과 부사인이 거느린 군사보다 훨씬 적었다.
관흥과 장포는 곧 힘에 밀려 뒤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꾸로 뒤쫓는 오병들을 겨우 떨쳐버리고 효정으로 돌아온 관흥 과 장포는 반장의 목을 바치며 선주에게 그간에 있었던 일을 모두 아뢰었다.
“아우가 너를 도와 반장을 잡게 해주었구나!”
듣고 난 선주는 놀란 얼굴로 그렇게 감탄하며 관흥을 위로하고 아울러 술과 고기로 삼군을 배불리 먹였다.
한편 자기편 진채로 돌아간 마충은 대장인 한당과 주태를 찾아갔 다. 그럭저럭 패군을 수습한 한당과 주태는 군사를 나누어 굳게 지 키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고 있었다. 그러나 죽고 다친 군사가 너무 많아 오병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마충은 미방, 부사인과 더불어 강물가의 한곳을 지키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 밤 삼경이 되었을 때였다.
군사들이 저마다 소리치며 울고 있어 미방이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한 군사가 나서서 여럿을 보고 말했다.
“우리들은 모두 형주 군사인데 여몽의 꾐에 빠져 주인인 관공의 목숨을 잃게 하고 말았다. 이제 유황숙께서 몸소 대군을 이끌고 오 셨으니 오래잖아 동오는 결딴나고 우리도 죽을 것이다. 실로 한스러 운 것은 미방과 부사인 그 두 놈이다. 차라리 우리가 그 두 놈을 죽 이고 촉으로 항복해 가는 게 어떻겠는가? 촉에서 본다면 결코 적지 않은 공일 것이다.”
그러자 다시 한 군사가 그 말을 받았다.
“그렇게 서두를 까닭은 없네. 틈이 나기를 기다렸다가 얼른 손을 쓰면 될걸세.”
그런 소리를 들은 미방은 깜짝 놀랐다. 급히 부사인을 찾아보고 가만히 의논했다.
“군사들의 마음이 변해 우리 두 사람의 목숨을 지키기조차 어렵 게 된 듯싶소. 그런데 지금 촉주(蜀主)가 한을 품고 있는 것은 바로 마충이오. 그를 죽이고 그 목을 잘라다 촉주에게 바치며 빌어보는 게 어떻겠소? 우리는 마지못해 동오에 항복했으나 이제 어가가 납 시었다는 말을 듣고 특히 찾아와 잘못을 빈다고 하면 될 것도 같소.”
“아니 되오. 그리로 갔다가는 틀림없이 죽음을 당할 것이오.”
부사인이 어림없는 소리라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러자 미방이 다시 말했다.
“주는 너그럽고 어진 사람이오. 거기다가 아두태자(阿斗)는 바로 나의 생질이니 국(國)의 정을 보아서라도 우리들을 차마 죽이지는 못할 것이오.”
이번에는 부사인도 귀가 솔깃했다. 이에 미방과 함께 움직이기로 하고 말부터 먼저 마련했다.
미방과 부사인이 말을 마련했을 때도 시각은 아직 삼경을 크게 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가만히 마충의 군막으로 들어가 곤하게 자 고 있는 마충을 찔러 죽이고 그 목을 잘랐다. 그리고 몇십 기만 거느 린 채 곧장 선주가 있는 효정으로 달려갔다.
길섶에 숨어서 지키던 병들이 그런 미방과 부사인을 먼저 장남 과 풍습에게로 데려갔다. 두 사람이 그간의 일을 말하자 장남과 풍습은 다음 날 그들을 선주가 있는 영채로 보냈다. 선주를 만난 그들은 마충의 목을 바치면서 울음 섞어 빌었다.
“참으로 저희들은 폐하를 저버릴 마음이 없었습니다. 여몽의 속임 수에 빠져 관공께서 이미 돌아가셨다 하기에 성문을 열고 어쩔 수 없이 항복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폐하께서 몸소 납시었다는 말을 듣고 이 역적을 죽여 폐하의 한을 조금이나마 씻어드리고자 했 습니다. 엎드려 빌건대 부디 저희들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러자 선주가 무섭게 화를 내며 꾸짖었다.
“그렇다면 짐이 성도를 떠난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건만 너희들 은 여지껏 어찌하여 항복하고 죄를 빌러 오지 않았느냐? 이제 형세 가 위태로운 걸 보고서야 겨우 찾아와 교묘한 말로 목숨을 빌려 드 는구나. 짐이 만약 너희들을 살려주었다가는 죽어서 무슨 낯으로 관 공을 보겠는가?”
그런 다음 관흥에게 영을 내려 진중에 관공의 영위(靈位)를 차리게 했다.
관공의 영위가 차려지자 선주는 몸소 마충의 목을 영전에 바치고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다시 미방, 부사인을 가리키며 엄하게 영을 내렸다.
“저 두 놈의 옷을 벗기고 영전에 꿇어 앉혀라!”
이에 군사들이 미방과 부사인을 발가벗겨 관공의 위패 앞에 무릎 을 꿇렸다. 선주는 몸소 칼을 들고 그들의 살점을 한 점 한 점 도려 내어 관공의 영전에 바쳤다.
그 제사를 보고 있던 장포가 갑자기 선주 앞에 달려 나와 엎드려 곡하며 말했다.
“둘째 아버님의 원수들은 이미 모조리 죽었습니다만 신의 아비를 해친 자들은 어찌됩니까? 어느 날에야 이 사무친 한을 풀겠습니까?”
그러자 선주 또한 울며 그를 달랬다.
“조카는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 짐은 반드시 강남을 쑥밭으로 만 들고 오를 섬긴 개들을 모조리 죽여 없앨 것이다. 그때 네 아비를 해 친 두 역적 놈도 사로잡아 네게 넘겨줄 것이니 너도 그놈들로 젓을 담가 아비의 영전에 제사 올리도록 하라.”
그 말에 장포도 조금 분이 풀리는지 선주에게 울며 감사하고 물 러났다.
그 무렵 강남은 초상집과 같았다. 선주가 잇달아 오병을 쳐부수고 밀려드니 그 위세는 천지를 뒤흔드는 듯했다. 강남 사람들은 모두 간이 얼어붙어 밤낮으로 울며 동오가 관공을 죽인 일을 원망했다. 그 같은 백성들의 동태에 깜짝 놀란 한당과 주태는 곧 오왕에게 그 사실을 고해 올렸다. 그리고 아울러 미방과 부사인이 마충을 죽 여 그 목을 들고 제蜀)에게 항복해 갔으나 그들 또한 모두 죽음 을 당했다는 것도 알렸다.
선주의 원한이 그토록 크고 깊은 걸 듣자 손권은 다시 마음속으 로 은근히 겁이 났다. 급히 문무의 벼슬아치들을 모아놓고 그 일을 의논했다.
보질이 나서서 손권에게 권했다.
“주가 한을 품은 이들은 여몽, 반장, 마충, 미방, 부사인 다섯이 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다섯은 모두 죽었고 남았다면 다만 범강과 장달 둘뿐입니다. 현재 그들이 강남에 있으니 그들을 잡아 장비 의 목과 함께 촉주에게 돌려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런 다음 형 주를 되돌려주고 손부인을 보내드리면서 글을 올려 화호를 청해보 도록 하십시오. 옛정을 되살리어 함께 위를 치자고 하면 병은 반 드시 물러갈 것입니다.”
손권도 들어보니 그럴듯했다. 이에 그 말을 따르기로 하고, 좋은 향나무로 짠 상자에 담은 장비의 목과 아울러 범강과 장달을 묶어 죄 인을 싣는 수레에 넣고 선주에게로 보내게 했다. 그 뒤는 사신으로 뽑힌 정병(秉)이 오왕의 국서를 받쳐들고 따랐다. 동오로서는 더 이 상 양보하려야 양보할 것이 없다 할 만큼 스스로를 굽힌 셈이었다. 그때 선주는 다시 군사를 움직여 강남으로 밀고 내려가려 하고 있 었다. 홀연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 하나가 들어와 선주에게 알렸다.
“동오에서 사신을 시켜 거기장군의 목과 범강, 장달 두 역적을 보 내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선주는 두 손으로 이마를 싸안으며 감격을 이기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은 하늘이 내려주신 것이요, 또한 끝엣아우의 영혼이 시킨 일임에 틀림없구나!”
그리고 얼른 장포를 불러 영을 내렸다.
“조카는 서둘러 선친의 영위를 차려놓도록 하라.”
이윽고 장비의 목이 든 나무상자가 이르자 선주는 떨리는 손으로 그 뚜껑을 열었다.
이미 죽은 지 여러 달이 지났건만 장비의 얼굴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선주는 그걸 보고 다시 목을 놓아 울었다.
범강과 장달은 장포의 손에 넘겨졌다. 장포는 잘 드는 칼로 둘의 몸을 수없이 도리고 토막 내어 아비의 영전에 바쳤다.
그 끔찍한 제사를 끝으로 관공과 장비의 죽음에 직접으로 관여한 자들은 모두 죽었다.
그만하면 두 아우의 원수 갚음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선주 의 가슴속에 맺힌 한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맹렬하게 동오를 멸망시키는 일에 매달렸다. 마량이 보다 못해 아뢰었다.
“원수들이 모두 죽었으니 한을 씻었다 할 만합니다. 거기다가 지 금 오의 대부 정병이 와서 화친을 빌고 있습니다. 형주를 돌려주고 손부인도 보낼 것이니 함께 힘을 합쳐 위를 치자는 것입니다. 폐하 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바, 바라건대 밝고 어지신 헤아림으로 그 뜻을 받아주십시오.”
하지만 선주는 어림도 없었다. 새삼스런 노기로 수염을 올올이 곤 두세우며 소리쳤다.
“경은 그게 무슨 소린가? 짐이 이를 갈고 있는 원수는 바로 손권 이다. 그런데 이제 그를 용서하고 손을 잡는다면 그것은 바로 두 아 우와의 옛 맹세를 저버리는 짓이다. 짐은 먼저 오를 없애고 다시 위 를 치리라.”
그러고는 자신의 무서운 결의를 여럿에게 내보이려는 듯이나 오 의 사신 정병을 끌어내 목 베려 했다. 여러 벼슬아치들이 힘써 말려 준 덕분에 목숨은 건졌으나, 정병은 진땀으로 몸을 씻을 만큼 혼이 났다. 머리를 싸쥐고 달아나듯 동오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쯤에서 한번 살펴보고 싶은 것은 신비한 느낌이 들 만큼 시원스런 관장 복수극의 진상이다.
『연의에서와는 달리 여몽이 기실 병들어 죽은 것은 이미 말했거 니와, 반장, 마충, 미방, 부사인 등의 죽음도 정사로 살펴보면 너무 터무니없다.
첫째로 반장. 정사에서 그는 오의 손꼽는 맹장으로서 유비의 침입 을 육손과 협력해 잘 막아내고 오히려 그 공으로 평북장군(北將軍) 양양 태수에 오른다. 그가 죽은 것은 제갈량이 죽은 해인 가화嘉) 삼년으로 유비보다 훨씬 오래 살다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운 채臥 席죽었다.
그다음 마충, 부사인, 미방도 뚜렷한 기록은 없으나 적어도 『연의』 에서처럼 참혹하게 죽은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이 관우의 죽음에 관 련된 것은 이곳저곳 기록되어 있지만 유비의 손에 죽어 관우의 영전 에 바쳐졌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마지막이 범강과 장달. 역시 기록 은 없으나 오나라가 저를 찾아온 그들을 다시 유비에게 내주어가며 화친을 애걸한 것 같지는 않다.
결국 그들 다섯의 죽음은 어느 하나도 『연의』에서처럼 통쾌한 복 수극의 희생이 되지는 않은 듯하다. 읽는 이의 복수감을 만족시켜 주기 위한 문사의 허구거나 관우 숭배와 관련된 민간의 전설을 아무 런 근거 없이 받아들인 탓이리라.
그건 그렇고, 얘기는 『연의에서 시작됐으니 다시 『연의로 돌아가자. 하마터면 떨어질 뻔한 목을 어루만지며 동오로 돌아간 정병은 곧 오왕을 찾아보고 말했다.
“촉주는 화친을 받아들이지 않고 먼저 오를 쳐 없앤 뒤에 다시 위를 쳐 없애리라 맹세하고 있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힘써 말려도 듣 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한 가닥 기대를 걸었던 손권은 그 말에 더욱 두려워져 몸을 제대 로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걸 본 감택이 나서서 말했다.
“주상께서는 하늘을 떠받칠 만한 기둥감을 눈앞에 두고도 어찌 한번 써보지 않으십니까?”
“그런 인재가 누구요?”
손권이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감택이 자신 있게 대답 했다.
“지난날에는 동오의 큰일을 모두 주랑이 맡았고, 그 뒤에는 노자 경이 대신했으며, 다시 노자경이 죽은 뒤에는 여자명이 모든 걸 맡 아 치러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명이 죽은 지금은 또 형주의 육백 언(伯言, 육손의 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비록 더벅머리 선비로만 알려져 있으나 실은 큰 재주와 깊은 헤아림을 지닌 인재올시다.
신하로 쳐도 결코 주랑보다 못하지 않은 사람이지요. 전에 관공을 쳐부순 것도 모두 그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꾀입니다. 주상께서 그 사람을 쓰기만 하신다면 그는 반드시 촉병을 쳐부술 수 있을 것입니 다. 만약 그가 일을 그르친다면 신도 함께 벌을 받겠사오니 한번 써 보십시오.”
그러자 손권도 문득 깨달아지는 게 있는지 낯빛이 밝아지며 말했다.
“잘 알겠소. 덕윤(德潤, 감택의 자)의 말이 아니었더라면 큰일을 그르칠 뻔하였소.”
당장 육손을 부르려 사람을 보내기라도 할 듯한 말투였다. 그때 장소가 일어나 감택과는 전혀 다른 소리를 했다.
“육손은 한낱 서생에 지나지 않으니 유비의 적수가 결코 못 됩니 다. 함부로 쓰시지 않으시는 게 옳을 듯합니다.”
“육손은 아직 나이가 어리고, 사람들의 우러름도 받지 못하고 있 습니다. 그를 높이 세우신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따라주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따라주지 않으면 어렵고 어지러운 일이 생기고, 그리되면 또 반드시 큰일을 그르치고 말 것입니다.”
고옹도 곁에서 그렇게 장소를 거들었다. 보질도 장소, 고옹과 뜻 이 같았다.
“육손의 재주는 그저 한 군이나 다스릴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그토록 큰일을 맡기는 것은 마땅치 못합니다.”
그러자 감택이 격해 소리쳤다.
“만약 육손을 쓰지 않으면 우리 동오는 끝장이오. 나는 우리 온 집안을 걸어 그의 재주를 보증하겠소!”
손권도 그런 감택을 편들었다.
“나도 진작부터 육손이 기재임을 알고 있었소. 내 뜻은 이미 정해졌으니 경들은 여러 소리 마시오.”
그렇게 잘라 말하고 육손을 불러오게 했다.
육손의 원래 이름은 육의(陸議)요, 자는 백언으로 오군(吳郡) 오 (吳) 땅 사람이었다. 한(漢)의 성문교위 육우(陸)의 손자요, 구강도 위 육준(陸駿)의 아들인데, 키가 여덟 자에 얼굴이 고운 옥 같았다.
진서장군으로 형주에 나가 있다가 손권의 부름을 받자 바람같이 달려왔다. 육손이 예를 마치기 바쁘게 손권이 말했다.
“지금 병이 우리 경계로 밀려들고 있소. 특히 경에게 군마를 도 맡아 다스릴 것을 명하니 경은 꼭 유비를 쳐부수도록 하시오.”
육손이 조용히 사양했다.
“강동의 문무 관원들은 모두가 대왕께서 예부터 알고 지내던 분 들이십니다. 이 육손은 나이 어린 데다 재주까지 없어 그분들을 거 느려낼 것 같지 않습니다.”
말 속에 뼈가 들어 있었으나 그걸 겸양으로만 받아들인 손권이 다시 한번 육손을 권했다.
“감덕윤(闞德潤)은 온 집안을 들어 경을 보증했고 나도 진작부터 경이 기재임을 알고 있었소. 이에 특히 대도독으로 삼고자 하니 부 디 마다하지 마시오.”
그러자 육손은 앞말 속에 감춰져 있던 뜻을 더욱 뚜렷이 했다. “만약 문무의 관원들이 따라주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제서야 육손의 참뜻을 알아차린 손권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끌러 육손에게 주며 말했다.
“만약 그대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이 칼로 먼저 벤 다음 그 까닭 을 내게 밝히도록[先斬後奏]하라!”
마음속으로 바라던 바였을 것이나 육손은 그대로 그 칼을 선뜻 받지 않았다.
“무거운 믿음을 입고 어찌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만 자 리가 맞지 않은 듯합니다. 내일 모든 벼슬아치들을 모아놓고 그 칼을 제게 내려주시옵소서.”
그렇게 말하며 약간 물러섰다. 실로 야심만만한 사나이였다. 거들어 감택이 한술 더 떴다.
“예부터 장수를 세울 때는 제단을 쌓고 사람들을 모아 예를 치르 는 법입니다. 여럿 앞에서 백모와 황월을 내리고 병부와 인수를 주 어야 장수의 위엄이 서고 그 군령이 힘을 가지게 됩니다. 이제 대왕 께서는 그 예에 따라 좋은 날을 고르고 제단을 쌓은 뒤에 백언에게 대도독의 절월을 내리도록 하십시오. 그리되면 누구도 그 명에 따르 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손권이 그런 그들의 뜻을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날 밤 안으로 제단을 쌓게 한 뒤 모든 벼슬아치를 불러모았다.
모든 게 갖춰지자 손권은 육손을 단 위로 오르게 하고 대도독 우 호군(右護軍) 진서장군에 다시 누후(婁侯)로 봉했다. 그리고 자신이 차고 있던 보검과 대도독의 인수를 내리며 강동 여섯 군 여든한 주 와 형(), 초(楚)의 모든 군마를 거느리게 했다.
“대궐 안의 일은 내가 으뜸이 되어 다스릴 것이나, 대궐 밖의 일 (以外, 또는 군사에 관한 일)은 장군이 모두 맡아 다스리라.”
그 같은 손권의 명을 받은 육손은 단 위에서 내려오기 바쁘게 움 직였다. 서성과 정봉을 호위로 삼고 그날로 군사를 내는 한편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군마들도 물과 뭍으로 함께 나아가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