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9권 – 1화 : 강남의 서생 칠백리 영(蜀營)을 불사르다
강남의 서생 칠백리 영(蜀營)을 불사르다
육손이 대도독이 되어 촉(蜀)과의 싸움을 총괄하게 되었다는 내 용을 알리는 도성의 글이 효정에 이르자 그곳에 있던 한당과 주태는 깜짝 놀랐다.
“주상께서는 어쩌시려고 한낱 서생에게 동오의 모든 군마를 맡기 셨는가?”
한당과 주태는 마주보고 그렇게 한탄하며 육손이 오기를 기다렸다. 우두머리 장수인 한당과 주태가 그러하니 그 아래 있는 다른 장 수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육손이 이르러도 도무지 그 명에 따 를 마음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육손이 대도독의 장막을 치 게 하고 의논을 시작하자 겨우 찾아보고 마음에도 없는 경하를 나타 낼 뿐이었다.
그래도 육손은 아무 내색이 없더니 여럿이 다 모이자 문득 입을 열었다.
“주상께서는 나를 대장으로 삼아 군사들을 맡기며 촉을 쳐부수라 하셨소. 군중에는 법이 있게 마련이니 공들은 마땅히 그 법을 지켜 야 할 것이오. 어기는 자는 왕법에 따라 멀고 가깝고가 없이 벌할 것 이니 부디 뒤늦게 뉘우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제법 위엄 서린 목소리였으나 장수들은 도무지 미덥지가 아니했다. 모두 씁쓸하게 입을 다물고 앉았는데, 주태가 문득 일어나 말했다.
“안동장군 손환(桓)은 주상의 조카로서 지금 이릉성에서 매우 고단한 처지에 빠져 있습니다. 안으로는 양식이 없고 밖으로는 도우 러 올 군사가 없으니, 그보다 더 큰 어려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 라건대 도독께서는 빨리 좋은 계책을 마련하시어 손환을 구하고 주 상의 마음을 편케 해드릴 수 있도록 하십시오.”
말은 공손해도 실은 육손이 어떻게 나오나를 떠보는 수작이었다. 육손은 조금도 서두는 기색 없이 주태의 말을 받았다.
“나는 진작부터 손환이 군사들의 마음을 잘 다독이는 사람인 걸 알고 있었소. 그들과 더불어 틀림없이 그 성을 지켜낼 것이니 구하 러 갈 것까지는 없소. 내가 촉병을 깨뜨리고 나면 그도 절로 성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장수들은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풋내기 서생의 허 풍이라고 여기고 속으로 가만히 비웃으며 그 자리를 물러났다. 한당 과 주태도 마찬가지였다.
“저런 어린아이를 장수로 삼다니 동오도 끝장인가 보오. 공은 어떻게 보셨소?”
한당이 주태를 보고 그렇게 걱정하자 주태도 어두운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아까 한 말은 한번 그를 떠본 것인데 정말로 아무런 계책이 없는 듯하오. 어떻게 촉을 쳐부순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소이다.”
장수들이 자신을 얕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육손은 다음 날 그 첫 번째 영을 내렸다.
“각처의 관과 험한 길목을 지키는 장수들은 모두 굳게 지킬 뿐가 벼이 나가 싸우지 말라.”
그러나 장수들은 모두 그의 겁 많음을 비웃을 뿐 굳게 지키려 들지 않았다.
다음 날 육손은 모든 장수들을 자신의 군막으로 불러모으고 꾸짖듯 물었다.
“나는 왕명을 받고 모든 군마를 거느리게 되었소. 거기 따라 어제 몇 차례나 그대들에게 각 처를 굳게 지키라 군령을 내렸는데, 가만 히 돌아보니 아무도 내 명을 지키지 않는 듯했소. 도대체 그게 어찌 된 까닭이오?”
“나는 손장군(손견)을 따라 강남을 평정하면서 수백 번의 싸움을 겪었소. 여기 있는 다른 장수들도 혹은 토역장군(손책)을 따라, 혹은 지금의 주상을 따라 모두 죽고사는 싸움터를 수없이 넘나든 사람들 이오. 주상께서 공을 대도독으로 삼아 촉병을 물리치라 하신 것은 하루 빨리 계책을 세우고 군마를 정돈해 밀고 나감으로써 큰일을 일 찍 매듭지으란 뜻일 것이오. 그런데도 다만 굳게 지키고 나가 싸우지 말라 하니 하늘이 적병을 죽여주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란 말이오? 또 우리는 살기만을 탐내고 죽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아니 오. 그런데 어찌하여 그런 영으로 우리의 날카로운 기세만 꺾어놓는 단 말씀이오?”
한당이 기다렸다는 듯 그렇게 육손의 말을 받았다. 다른 장수들도 덩달아 한당을 편들었다.
“한장군 말씀이 옳습니다. 저희들은 모두 한바탕 죽기로 싸워보기를 원합니다.”
그러자 육손이 문득 칼을 빼들고 그들을 노려보며 소리 높이 외쳤다.
“내 비록 한낱 서생이나 지금은 주상의 당부에 따라 무거운 책임 을 떠맡고 있다. 한 치의 땅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어떤 욕됨도 참을 수 있다. 그대들도 각기 맡은 바 길목을 잘 지키고 결코 함부로 움직 이지 말라. 만약 이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모두 목을 베리라!”
육손이 그렇게까지 나오니 다른 장수들도 더는 어찌하는 수가 없 었다. 말없이 그 앞을 물러나오기는 해도 속으로는 모두 분함을 이 기지 못했다.
한편 선주는 효정에서부터 군마를 벌여 세우며 천구에까지 이르 렀다. 그 칠백 리에 마흔이 넘는 영채를 세우니 낮에는 깃발이 해를 가리었고 밤에는 모닥불빛이 하늘을 훤히 밝히었다. 그런 선주에게 문득 세작이 달려와 알렸다.
“동오는 육손을 대도독으로 세워 모든 군마를 거느리게 하였습니 다. 육손은 지금 제장들에게 영을 내려 길목을 지키도록 하고 있을뿐, 나와 싸우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육손은 어떤 사람인가?”
듣고 있던 선주가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마량(馬)이 나서서 아는 대로 아뢰었다.
“육손은 동오의 한낱 서생으로 나이는 어리나 재주가 많고 꾀가 깊습니다. 전에 우리에게서 형주를 뺏은 것도 모두 그의 꾀에서 나 온 것이라 합니다.”
그 말에 선주가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 더벅머리놈이 속임수로 내 큰아우를 죽게 한 바로 그놈이로 구나! 이제 마땅히 사로잡아 하늘 같은 이 한을 씻으리라.”
그러고는 급히 영을 내려 군사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마량이 그런 선주를 말렸다.
“육손의 재주는 결코 주유에 뒤지지 않습니다. 가볍게 맞서서는 아니 됩니다.”
“짐은 한평생 군사를 부리며 늙었다. 어찌 주둥이 노란 더벅머리 놈보다 못하겠느냐!”
선주는 그렇게 소리쳐 마량을 물리치고 몸소 앞장서서 군사를 몰아갔다.
선주가 각처의 관애를 들이치자한당은 얼른 사람을 뽑아 육손에 게 알렸다. 한당이 함부로 나가 싸울까 걱정이 된 육손은 나는 듯 말 을 달려 스스로 보러 갔다.
육손이 한당의 진채에 이르렀을 무렵, 한당은 말을 타고 산에 올 라 병들이 쏟아져 나오는 형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산과 들을 덮으며 다가오는 촉병들 가운데 누른 비단 해가리개가 희뜩희뜩 보였다.
한당이 그 해가리개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군사 하나가 달려와 육손이 온 걸 알렸다. 한당은 얼른 육손을 맞아들이고 그와 나란히 서서 보다가 문득 한 곳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저 군사들 가운데 틀림없이 유비가 있는 듯하오. 군사를 몰고 가 들이쳤으면 싶소이다.”
그러나 육손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비는 군사를 일으켜 내려온 이래 여남은 바탕이나 잇달아 이 겨 지금 한창 그 기세가 날카롭소이다. 우리는 다만 높고 험한 곳에 의지해 굳게 지킬 뿐 가볍게 나가서는 아니 되오. 나가면 반드시 불 리할 것이니, 장수들의 기운을 북돋워 가만히 지키면서 그 변화를 살펴야 할 것이외다. 지금 저쪽은 평평하고 너른 들판을 내달으면서 모든 게 저희 뜻대로 된 듯 거들먹대고 있소. 그러나 우리가 굳게 지 킬 뿐 나가 싸우지 않으면, 저희도 싸울래야 싸울 수가 없으니 반드 시 산 숲속으로 옮겨 앉게 될 것이오. 나는 그때 기계(奇)를 내어 저들을 쳐부수겠소.”
한당은 육손의 그 같은 말에 입으로는 예예 했으나 마음속으로는 아무래도 미덥지가 않았다. 가만히 물러나 육손의 하는 양만 살폈다. 이때 선주는 앞선 군사를 시켜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싸움을 걸 어왔다. 육손은 귀를 막고 못 들은 체하며 나가 싸우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몸소 이곳저곳 진채를 돌며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면서도 굳게 지키기를 명할 뿐이었다.
선주는 아무리 싸움을 걸어도 오군이 나오지 않자 조바심이 일었다. 마량이 다시 그런 선주를 일깨웠다.
“육손은 헤아림이 깊은 사람입니다. 폐하께서 먼 길을 오셔서 싸 움을 시작한 게 봄인데 이제 어느새 여름이 되었으니 아마도 육손은 그런 우리 편에 어떤 변고가 있기를 기다리는 듯싶습니다. 부디 다 시 한번 살펴주십시오.”
그러나 선주에게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역정을 내며 마량의 말을 받았다.
“제놈에게 꾀가 있으면 무슨 꾀가 있겠는가? 다만 우리에게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을 뿐이다. 앞서 몇 번이나 싸움에 져놓고 어찌 감 히 나올 수 있겠는가?”
그때 선봉을 맡고 있던 풍습이 찾아와 선주에게 아뢰었다. “지금 날씨가 매우 더워 군사들은 마치 불 속에 진을 치고 있는 듯합니다. 또 물을 얻기도 힘이 드니 아무래도 들판에서 진채를 옮 기는 게 좋겠습니다.”
바로 육손이 예측한 대로였다. 그러나 선주는 풍습의 말대로 따랐 다. 군사들을 숲이 무성한 그늘이면서도 물을 얻기 쉬운 골짜기 가 까운 곳으로 옮겨 거기서 가을이 오기를 기다리게 했다. 가을이 오 면 한꺼번에 밀고나가 결판을 내려는 속셈이었다. 마량이 걱정스러 운 듯 물었다.
“만약 우리가 진채를 옮기느라고 움직이는데 갑작스레 오병이 밀 려들면 어쩔 작정이십니까?”
선주도 그만 생각은 할 줄 알았다.
“짐은 오반에게 늙고 힘없는 군사 만여 명을 주어 들판으로 나아 가게 하고, 스스로는 팔천의 날랜 군사와 더불어 산골짜기에 숨어 기다릴 것이다. 육손은 우리가 진채를 옮기는 줄 알면 반드시 그 틈 을 타 쳐들어올 것인 바, 그때는 오반에게 거짓으로 져서 쫓겨오도 록 한다. 만약 육손이 뒤쫓아오면 짐이 갑자기 뛰쳐나가 돌아갈 길 을 끊고 그 어린 놈을 사로잡아버릴 것이다.”
과연 싸움터에서 늙은 영웅다웠다. 그 같은 선주의 빈틈없는 헤아 림에 문무 관원들은 모두 감탄해 마지않았다.
“폐하의 귀신 같은 헤아림에는 실로 저희가 미칠 길이 없습니다.”
그렇게 치하를 했으나, 그 무슨 예감에서인지 마량만은 종내 얼굴 이 밝아지지 않았다. 한참 있다가 다시 불쑥 말했다.
“듣자니 요사이 승상은 동천으로 나와 각처의 관애를 살피며 위 병(魏)이 쳐들어올 것에 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폐하께서는 지 금 군사를 벌여두려는 모든 곳을 그림으로 그려 승상에게 보내시고 좋은지 나쁜지를 한번 물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선주의 얼굴이 성가신 듯 굳어졌다.
“짐도 또한 병법을 알 만큼은 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승상에게 다시 물어야 한단 말인가?”
“옛말에 이르기를, 이쪽 저쪽 다 들어두면 밝게 알 수 있지만, 한 쪽만 들어서는 막히는 구석이 있게 마련이라 했습니다. 바라건대 폐 하께서는 그 점을 살펴주십시오.”
마량이 부드럽게 선주의 역정 섞인 말을 받았다. 그제서야 선주도 마지못한 듯 허락했다.
“그렇다면 그 일은 경이 하도록 하라. 각 영채를 돌며 자리 잡은 땅 모양과 길목을 모두 그림으로 그린 뒤 동천으로 가서 승상에게 보여주며 물어보라. 그리고 만약 그릇된 곳이 있으면 되도록 빨리 돌아와 알려주도록 하라.”
이에 마량은 모든 영채를 그림으로 그려 동천으로 가고, 선주는 군 사들을 모두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숲 그늘로 옮기는 일에 들어갔다. 이 같은 촉의 움직임은 곧 세작에 의해 오군의 귀에도 들어갔다. 먼저 그 소식을 들은 한당과 주태는 크게 기뻐하며 육손을 찾아보고 말했다.
“지금 촉병은 마흔 곳 영채를 모두 숲이 짙고 개울을 낀 골짜기로 옮기고 있소. 더위를 피하고 물을 쉽게 얻으려는 뜻에서인 듯하외 다. 도독께서는 이 어지러운 틈을 타 적을 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오.”
그러자 이번에는 몸을 사리기만 하던 육손도 기쁜 얼굴로 그들의 말을 따랐다. 자신이 바라던 변화가 온 것이라 믿은 때문이었다. 육손은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촉병들이 진치고 있던 곳으로 달려 갔다. 그러나 바로 싸움에 들어가지 않고 잠시 멈춰 서서 살피는데,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들판에 아직 한 곳 병이 머물러 있기는 한 데 그 수는 잘해야 만 명이 되지 않았다. 거기다가 그나마 태반은 늙 고 약한 군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만 ‘선봉 오반(吳班)’이라 크게 쓴 깃발만이 위세 좋게 바람에 펄럭일 뿐이었다.
“내가 보기에 저까짓 군사는 아이들이 모여 장난하는 것이나 다름없소. 한장군과 길을 나누어 적을 치도록 해주시오. 만약 이기지 못하면 어떤 군령이라도 달게 받겠소.”
보고 있던 주태가 한달음에 달려 나갈 듯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 나 한참을 이곳저곳 가만히 살피던 육손은 이윽고 무겁게 고개를 으며 채찍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저 앞 산골짜기에 은은히 살기가 뻗치는 걸 보니 틀림없이 거기 복병이 있는 듯하오. 그 때문에 들판에는 일부러 늙고 약한 군사를 풀어놓아 우리를 꾀고 있는 것이오. 공들은 결코 함부로 나아가서는 아니 되오.”
그제서야 다른 장수들의 얼굴에도 은근히 두려워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다음 날이 되었다. 오병이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이번에는 촉 병들 쪽에서 움직였다. 오반이 군사를 이끌고 오병들이 지키는 관 앞에 이르러 싸움을 걸었다. 세력을 뽐내는가 하면 온갖 욕설을 퍼 부어대다가 마침내는 갑옷을 벗어던지고 벌거숭이가 되어 드러눕기 도 했다.
참다 못한 서성과 정봉이 주르르 육손에게 달려가 말했다.
“병들이 우리를 깔보기가 너무 심합니다. 바라건대 저희들을 내 보내 주십시오. 나가서 혼쭐을 내고 돌아오겠습니다.”
“공들은 혈기만 믿고 나섰지 손자, 오자의 병법은 모르시는 듯하 오. 저것은 바로 우리를 꾀어내려는 계책이오. 사흘 뒤면 반드시 저 게 속임수라는 걸 알게 될 것이외다.”
육손이 빙긋 웃으며 서성과 정봉의 말을 받았다.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지 서성이 따지듯 물었다.
“사흘 뒤 적의 영채가 모두 자리를 잡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쳐부수겠습니까?”
“나는 바로 적이 그렇게 영채를 옮기기를 바라고 있소이다.”
육손이 긴 풀이 없이 대꾸했다. 육손의 속셈을 알 리 없는 장수들 은 모두 그 겁많음을 비웃으며 물러갔다.
사흘 뒤 오반은 정말로 육손이 말한 것처럼 군사를 물리기 시작 했다. 관 위에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그걸 보고 있던 육손이 한 곳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저곳에 살기가 일어나고 있소. 틀림없이 그 산골짜기에서 유비가 뛰어나올 것이오.”
과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옷 투구를 단단히 갖춘 촉병들이 선주를 에워싸듯 하고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그걸 본 오병들은 모두 간담이 서늘했다.
“내가 오반을 치자고 하는 공들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은 실로 이 때문이었소. 그러나 이제 복병이 이미 모습을 드러냈으니 적도 계 략이 다한 셈이오. 열흘 안으로 틀림없이 촉을 쳐부술 수 있을 것이 외다.”
그러나 장수들은 모두 육손의 말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입을 모아 물었다.
“촉을 쳐부수려면 마땅히 처음부터 서둘러야 했습니다. 이제 촉군 의 영채는 칠백 리에 이르고 서로 도와가며 지킨 지도 일여덟 달이 지났습니다. 요해(要害)마다 자리 잡고 굳게 지키는데 어떻게 쳐부술 수 있단 말씀입니까?”
“장군들은 모두 병법을 알지 못하시는 듯하오. 유비는 세상이 알아주는 영웅이요, 지모가 많은 사람이외다. 그런 그의 군사가 처음 움직일 때는 반드시 법도가 있고 규율이 잘 서 있게 마련이오. 그러 나 지금은 달라졌소. 여러 달이 되어도 우리를 이기지 못했으니 그 군사들은 지치고 사기도 떨어져 있을 것이오. 적을 칠 때는 바로 지 금이외다.”
육손이 아이를 타이르듯 그렇게 말했다. 그제서야 장수들도 모두 그의 밝은 헤아림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육손은 또 손권에게도 사자를 보내 며칠 안으로 촉을 깨뜨릴 수 있으리라는 글을 전해 올리게 했다. 육손의 글을 읽은 손권은 기뻐 어찌할 줄 몰랐다.
“강동에 이렇듯 뛰어난 인재가 있으니 내가 걱정할 게 무엇이 있 겠는가? 다른 장수들이 모두 글을 올려 육손이 겁많음을 일러바쳤 으나 나는 믿지 않았는데, 이제 그의 글을 보니 실로 그는 겁많은 사 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감탄하고, 곧 크게 군사를 일으켜 육손의 뒤를 받쳐주러갔다.
이때 효정의 선주는 모든 수군을 휘몰아 강물을 타고 아래로 내 려갔다. 물가 곳곳에 수채를 세우고 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오나라 땅 깊숙이 들어서게 되었다. 황권이 걱정스러운 듯 그런 선주에게 아뢰었다.
“물을 따라 내려가는 것은 나아가기는 쉬워도 물러나기는 어렵습니다. 바라건대 신이 앞장을 서게 해주시고 폐하께서는 뒤를 따르도록 하십시오. 그래야만 만에 하나라도 일을 그르치게 되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오나라 역적 놈들은 모두 겁을 먹어 간담이 오그라붙어버렸다. 짐이 군사를 몰고 이제껏 나아갔건만 아무 일도 없었는데 새삼 무슨 걱정인가?”
선주가 그렇게 황권의 말을 받았다. 황권의 말을 옳게 여긴 다른 장수들도 모두 선주를 말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여전히 고집스레 고 개를 내젓다가 다시 황권에게 말했다.
“굳이 그렇다면 경이 강 북쪽에 남아 위나라 도적들에 대비하라. 짐은 강의 남쪽에 있는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리라. 강을 끼고 양길 을 나아간다면 달리 걱정할 게 무엇 있겠는가?”
그렇게 되니 다른 사람들도 더는 말리지 못했다.
촉과 오의 싸움을 가만히 살펴보고 있던 위의 세작이 밤낮을 가 리지 않고 돌아가 위주) 조비에게 알렸다.
“오를 치는 촉은 나무 진채를 얽어 그 길이가 칠백리에 뻗쳐 있 고, 그 군사는 마흔 몇 곳에 나누어져 자리 잡고 있는데 모두 숲속입 니다. 또 강북의 군사는 황권이 도맡아 거느리고 있으면서 매일 백 리가 넘는 곳까지 보초를 보내는데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조비는 하늘을 쳐다보고 껄껄 웃으며 말했다.
“유비가 오래잖아 싸움에 지겠구나!”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여러 신하들이 까닭을 몰라 물었다. 조비가 서슴없이 말했다.
“유비는 병법을 잘 알지 못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칠백리에 이르는 영채로 적과 맞설 수가 있겠는가? 물을 낀 들판이나 거칠고 험한 땅에 군대를 머무르게 하는 것은 병법에서 매우 꺼리는 일이 다. 그런데 바로 그런 짓을 해놓았으니 유비는 반드시 육손의 손에 패하고 말 것이다. 열흘 안으로 틀림없이 그런 소식이 올 테니 두고 보라.”
그러나 신하들은 그 말을 믿지 못했다. 모두 군사를 일으켜 유비 가 동오를 이기고 위로 덤벼들 때에 대비하기를 권했다.
“육손이 만약 이 싸움에서 이기면 오는 틀림없이 모든 군사를 몰 아 서천을 뺏으러 갈 것이다. 그리고 오병이 멀리 서천으로 몰려가 면 그 나라는 텅 비고 말 것이다. 짐은 그때 군사를 보내 도와준다는 거짓 구실로 세 갈래 군마를 한꺼번에 내려보낼 작정이다. 그렇게 되면 동오는 손바닥에 침 한번 뱉는 정도의 수고로도 넉넉히 뺏을 수 있으리라.”
조비가 그같이 대답했다. 그제서야 모든 벼슬아치들이 엎드려 절 하며 조비의 빈틈없는 머리씀에 감탄을 드러냈다.
조비는 조홍에게 한 갈래 군사를 주어 유수로 나가게 하고, 조휴 는 동구로, 조진은 남군으로 나가게 했다.
“그대들 세 갈래 군마는 미리 정한 날짜에 맞추어 몰래 동오로 짓쳐들라. 짐도 그 뒤를 따라 내려가 그대들을 거들리라.”
그게 그들 세 장수에게 가만히 일러준 조비의 명이었다.
한편 그때 마량은 서천에 이르러 공명을 찾아보고 그려 간 영채의 도본을 받쳐올리며 말했다.
“이번에 영채를 옮기면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그 길이는 강을 끼 고 옆으로 칠백리, 군사가 머문 곳은 마흔이 넘습니다. 모두 개울가 의 수풀이 무성한 곳이지요. 주상께서는 이 마량에게 그곳의 형세를 그림으로 그려 승상께 보여드리라 하셨습니다. 한번 보시고 옳고 그 름을 일러주십시오.”
그림을 받아 살펴본 공명이 문득 손뼉을 치며 괴롭게 소리쳤다.
“도대체 누가 주상께 이따위 진채를 치도록 말씀드렸는가? 목을 베어 마땅한 자다.”
“주상께서 몸소 하신 일입니다. 어느 누구도 권하지 않았습니다.”
마량이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공명이 탄식했다.
“한조의 기수(數)도 이제 다했구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마량이 놀라 물었다. 공명이 한층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숲이 짙고 험한 땅을 껴안고 영채를 얽는 것은 병가에서 몹시 꺼 리는 바다. 만약 적이 불로 공격하면 무슨 수로 벗어나겠는가? 또 영채를 칠백 리나 되도록 늘어 세웠으니 무슨 군사로 그 긴 전선에 서 적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 화가 머지않았구나! 육손이 굳게 지키 며 나와 싸우지 않은 것은 바로 이것을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그대 는 빨리 돌아가 주상을 뵙고 어서 영채를 고치라 아뢰라. 그대로 계 셔서는 결코 아니 된다!”
“만약 오병이 이미 싸움에 이긴 뒤면 어찌해야 합니까?”
“육손은 함부로 우리 군사를 뒤쫓지 못할 것이다. 성도를 지키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자 마량이 놀란 중에도 한 번 더 물었다.
“육손이 왜 뒤쫓지 못합니까?”
“위병(魏)이 자기들의 뒤를 들이치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만약 일이 잘못됐으면 주상께서는 백제성(城)으로 피하시도록 말씀 을 드려라. 나는 서천으로 돌아오자마자 어복포(魚腹浦)에 이미 십 만의 군사를 보내놓았다.”
그러자 마량이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여러 차례 어복포에 가봤습니다만 군사 한 명도 보지 못했 습니다. 그런데 승상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런 거짓말을 하십니까?”
“뒤에 가면 반드시 군사를 보게 될 것이다. 쓸데없이 묻지 말라.”
공명은 그렇게 마량의 말허리를 자른 뒤 선주에게 올리는 표문을 썼다. 영채를 세운 곳이 그릇되었음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공명의 글을 받아든 마량은 말 엉덩이에 불이 일도록 채찍질을 하며 선주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공명도 얼른 군마를 끌어모아 선주를 도우러 갈 채비를 했다.
하지만 그때는 벌써 육손이 움직이기 시작한 뒤였다. 육손은 병 들이 마음이 풀어지고 게을러져 제대로 방비하고 있지 않음을 보자 곧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영을 내렸다.
“나는 명을 받고 온 이래 한 번도 싸우러 나가지 않았으나 이제 촉병들을 살펴보니 모든 걸 알 만하오. 그러므로 먼저 강 남쪽의 촉 영(蜀營) 하나를 빼앗아보려 하는데, 누가 가보겠소?”
그 같은 육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당, 주태, 능통 같은 장수들이 일제히 나서며 소리쳤다.
“이 몸이 가보겠소!”
그러나 육손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쓰지 않고 끝자리에 앉은 순 우단이란 이름없는 장수를 불러 말했다.
“나는 그대에게 오천 군사를 줄 것이니 강 남쪽으로 가서 촉의 네 번째 영채를 뺏으라. 그 영채를 지키는 촉의 장수는 부동(傅)이다. 오늘 밤 꼭 큰 공을 이루기 바란다. 나도 군사를 이끌고 가서 그대의 뒤를 받쳐주겠다.”
순우단은 육손이 자기 같은 아랫장수를 써준 데 감격하며 곧 받 은 군사를 이끌고 떠났다.
육손은 다시 서성과 정봉을 불러 영을 내렸다.
“장군들은 각기 삼천을 이끌고 촉군의 영채 밖 오 리쯤 되는 곳에 매복해 있으시오. 만약 순우단이 싸움에 져서 쫓겨오면 나가 구해 주되, 형세가 좋더라도 촉군을 뒤쫓아서는 아니 되오.”
이에 서성과 정봉도 각기 군사를 이끌고 시킨 대로 갔다.
해 질 무렵 떠난 순우단이 촉군의 진채에 이른 것은 삼경 무렵이 었다. 순우단은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북치고 고함지르며 진채로 짓 쳐들어갔다.
하지만 영은 생각처럼 허술하지는 않았다. 촉장 부동이 재빨리 군사를 이끌고 뛰어나와 순우단을 맞았다. 순우단은 부동과 맞섰으 나 아무래도 당해내기 어려웠다. 곧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는데 다 시 한 떼의 군마가 길을 막았다. 장 조이 이끄는 군마였다.
순우단은 가까스로 길을 앗아 달아났으나 군사는 거기서 태반이 꺾이고 말았다.
순우단의 낭패는 그뿐이 아니었다. 한참 정신없이 달아나는데 다시 한군데 산 그늘에 한 떼의 만병(兵)이 나타났다.
앞선 장수는 번장사마가(沙摩柯)였다. 순우단은 죽도록 싸 워 겨우 길은 열었으나 형세는 여전히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부동, 조융, 사마가의 세 갈래 군마가 악착스레 뒤쫓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럭저럭 오리쯤 쫓겼을 때였다. 문득 서성과 정봉이 이 끈 오군이 양쪽에서 나타나 뒤쫓는 촉병을 물리치고 순우단을 구해 냈다.
영채로 돌아간 순우단은 여기저기 화살이 꽂힌 채 육손을 찾아보 고 죄를 빌었다. 자신을 믿고 써준 육손이라 더욱 죄스러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실은 내가 그대를 써서 병의 허실을 알 아보았을 뿐이다. 이제 적을 깨뜨릴 계획은 이미 섰으니, 그대의 공 이 없다 할 수 없다.”
육손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오히려 순우단을 위로했다. 육손 이 너무도 촉병을 쉽게 아는 것 같은지 서성과 정봉이 입을 모아 말 했다.
“병의 세력이 대단해 쉽게 쳐부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쓸데없이 군사를 잃고 장수만 꺾일까 걱정됩니다.”
육손은 빙긋 웃으며 그들마저 안심시켰다.
“걱정 마시오. 이번에 내가 순우단을 보낸 것은 다만 제갈량을 속 이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오. 다행히 그 사람이 여기 없어 나로 하여 금 큰공을 이룰 수 있게 해줄 것이오.”
그리고 높고 낮은 장수들을 모조리 모아놓고 영을 내리기 시작했다. 맨 첫 번째 불려나온 것은 주연(朱然)이었다.
“장군은 물길을 따라 군사를 몰고 나가시오. 배에 마른 풀과 갈대를 잔뜩 싣고 가다가 내일 동남풍이 일면 내가 일러주는 계책에 따 라 움직이시오.”
육손은 그렇게 영을 내리고 다시 한당을 불렀다.
“장군은 군사 한 갈래를 이끌고 강 북쪽을 들이쳐주시오.”
다음은 주태였다. 그에게는 강 남쪽을 들이치게 하고 아울러 말 했다.
“두 분 장군이 이끄는 군사들은 모두 속에 유황과 염초가 든 마른 풀단 한 단과 불씨를 마련해 지니게 하시오. 그런 다음 창칼을 들고 한꺼번에 쳐 올라가다가 영에 이르거든 바람에 맞춰 불을 지르시 오. 단 마흔 군데의 둔영(營) 가운데서 스무 개만 태우면 되니 하 나 건너 하나씩만 불지르면 될 것이오. 또 각군은 모두 마른 양식을 미리 마련해서 잠깐이라도 물러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오. 밤낮을 가리지 말고 뒤쫓되 유비를 사로잡은 뒤에는 멈추어도 될 것이외다.”
모든 것을 훤히 바라보며 내리는 듯한 군령이었다. 장수들은 그제 서야 육손을 믿고 각기 정해진 곳으로 떠났다.
그때 선주는 선주대로 오(吳)를 쳐부술 계책을 골똘히 생각하고있었다.
이래저래 마땅한 계책이 없어 망연히 밖을 내다보고 있는 중에 문득 장막 앞에 세워둔 기치가 바람도 없는데 쓰러졌다.
“이게 무슨 징조인가?”
선주가 불길한 느낌이 들어 곁에 있는 정기(畿)에게 물었다. 정기가 대답했다.
“오늘 밤 틀림없이 오병이 우리 진채를 급습할 것입니다.”
“어젯밤에 온 것들을 거지반 다 잡아죽이다시피 했는데 어찌 감히 또 오겠는가?”
선주는 턱없는 소리라는 듯 그렇게 말했다. 바로 육손이 노린 대 로였다. 정기가 그걸 깨우쳐 주었다.
“만약 어젯밤의 일이 육손이 우리를 한번 떠본 것이라면 어쩌시겠습니까?”
그 말에 선주도 섬뜩했다. 다시 곰곰 전날 밤 싸움을 떠올리고 있 는데 사람이 와서 알렸다.
“산 위에서 보니 멀리 오병들이 줄을 지어 동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얼른 이해 안 되는 오병의 움직임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다 선주가 말했다.
“그것은 틀림없이 의병(兵)일 것이다. 우리를 꼬여내려는 것이 니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
그리고 관흥과 장포를 불러 오백기를 거느리고 순찰을 돌게 했 다. 그 바람에 오병들은 대군의 방해를 받음 없이 각기 정해진 자리로 갈 수가 있었다.
관흥이 순찰을 마치고 돌아온 것은 해질 무렵이었다.
“강 북쪽에 있는 영채에서 불길이 일고 있습니다.”
관흥이 보고 온 대로 알렸다. 선주는 갑자기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급히 영을 내려 관흥은 강북을, 장포는 강남을 가보게 했다.
관흥과 장포는 시키는 대로 했다. 서로 길을 나누어 가는데 초경 무렵하여 홀연 동남풍이 세게 일었다. 그리고 그 바람을 기다렸다는 듯이나 선주가 있는 어영(營) 오른쪽에서 불길이 솟았다. 두 장수 는 놀랐다. 급히 선주를 구하려 돌아가려는데 이번에는 왼편에서 다 시 불길이 올랐다.
바람은 더욱 거세게 불어 불은 금세 무성한 수풀에 옮아 붙었다. 거기다가 다시 함성이 크게 일자, 어영 좌우에 있던 촉군들이 어영 으로 뛰어들었다. 그 바람에 촉군은 어영 안에 서로 엉켜 자기편에 게 밟혀 죽은 자만도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때 갑자기 오병들이 뒤에서 밀고 나왔다. 촉군은 엉겨 어지럽다 보니 덤벼드는 오병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해볼 겨를조차 없었다. 그 대로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기 바빴다.
급하기는 선주도 마찬가지였다. 얼른 말에 올라 풍습(馮)의 진 중으로 달아나려는데 다시 풍습의 진채에서도 불길이 이는 게 보였 다. 뿐만 아니었다. 강남, 강북의 모든 촉영에서 불길이 일어 사방을 대낮처럼 훤히 비추었다.
그때는 풍습도 놀라 말에 올라 겨우 수십 기만 이끌고 달아나는 중이었다. 얼마 안 가 오의 장수 서성이 이끄는 군사와 정면으로 부 딪쳤다. 서성은 그대로 풍습을 덮치려다가 때마침 그리로 오는 선주 를 보고 선주를 뒤쫓았다.
서성이 대군을 이끌고 뒤쫓자 선주는 놀랐다. 급히 달아나는데 다 시한 떼의 오병이 나타나 앞길을 가로막았다. 바로 정봉이 이끄는 군사들이었다.
서성과 정봉이 앞뒤에서 들이치니 선주는 놀라 반 넋이 나갔다. 사방을 돌아봐도 빠져나갈 길이 없어 이리저리 허둥대고 있는데 문 득 함성이 크게 일며 한 떼의 군마가 겹겹이 둘러싼 오병을 뚫고 들 어왔다. 앞선 장수는 장포였다.
장포는 선주를 구한 뒤 어림군을 이끌고 경황 없이 달렸다. 한참 을 달리는데 다시 앞에서 한 떼의 군마가 나타났다. 촉장 부동이 이 끄는 군마였다. 장포는 부동과 군사를 아울러 선주를 보호하며 계속 달아났다. 오병이 끈덕지게 그들 뒤를 쫓았다.
얼마 안 가 그들 앞에 산 하나가 나타났다. 마안산(馬鞍山)이라 불 리는 산이었다. 장포와 부동은 선주를 권해 그 산 위로 오르게 했다. 얼결에 산 위로 오른 선주가 아래를 내려보니 다시 함성이 크게 일며 육손의 대군이 이르고 있었다. 육손은 인마를 풀어 마안산을 둘러싸고 급하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장포와 부동이 죽기로 싸워 산 어귀를 지키고 있었으나 형세는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선주는 암담한 눈길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산과 들이 온통 불길에 휩싸여 있고 나뒹구는 시체는 흐르는 강물을 막을 지경이었다. 실로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럭저럭 밤이 지나고 다음 날이 되었다. 오병이 다시 산 주위에 불을 지르고 밀려들었다. 놀란 촉의 군사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달아 나기 시작했다. 선주 또한 두렵고 황망해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데, 문득 한 장수가 수십 기를 이끌고 산 위로 치달아 올라왔다. 두꺼운 오병의 에움을 뚫고 달려온 것은 다름 아닌 관흥이었다.
관흥이 선주 앞에 엎드리며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방의 불길이 점점 가까이 죄어와 이곳에 오래 머물 수가 없습 니다. 폐하께서는 어서 백제성(白帝城)으로 피하십시오. 그곳에 새로 군마를 수습해 오병을 물리치시는 게 옳을 듯합니다.”
선주도 달리 수가 없었다. 한참을 생각하다 씁쓸하게 물었다.
“누가 뒤쫓는 적을 막아주겠는가?”
“제가 목숨을 걸고 막아보겠습니다.”
부동이 얼른 나섰다. 이에 선주는 해질 무렵 하여 마안산을 내려 가기 시작했다. 관훙이 앞장을 서고, 장포는 가운데를 맡고 부동은 뒤에 처져 선주를 보호하며 힘을 다해 오병을 뚫고 나갔다.
오병들은 선주가 달아나려는 걸 보자 공을 세우려 다투며 그 뒤 를 쫓았다. 산 아래 있던 대군이 모두 있는 힘을 다해 뒤쫓으니 그 기세는 하늘을 가리고 땅을 덮는 듯했다.
선주는 급했다.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모두 옷과 갑주를 벗게 한 뒤 길 한가운데 쌓고 불을 지르게 했다. 그 불길로나마 뒤쫓는 오병 을 막아보려 함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얼마 가지 않아 함 성이 크게 오르며 한 떼의 군마가 강을 따라 달려왔다. 오(吳)의 주 연이 이끄는 군사들로 선주의 앞길을 끊으려는 듯했다.
“짐이 이곳에서 죽어야 한단 말인가!”
지친 선주가 그렇게 한탄했다. 그 소리에 격한 장포와 관흥이 제 몸을 돌아보지 않고 오병과 부딪쳐보았으나 어지러이 쏘는 화살에 무거운 상처만 입었을 뿐, 뚫고 나갈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등 뒤에 서는 육손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산골짜기 가운데로 쏟아져 나오니 선주의 형세는 더욱 위태로워졌다.
그사이 날은 저물어 어느새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선주가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고 괴로운 탄식만 거듭하고 있을 때 홀 연 앞쪽에서 함성이 크게 일며 한 떼의 군마가 나타났다. 앞을 가로 막고 있던 주연의 오병을 짓두들겨 개골창과 바위 언덕 아래로 던져 버리고 선주의 어가를 구하러 오는 것은 반갑게도 촉군이었다.
선주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그쪽을 보니 앞선 장수는 다름 아 닌 상산 조자룡이었다. 조운은 원래 서천 강주에 있었는데, 오와 촉 이 군사를 내어 싸운다는 소리를 듣자 군사를 이끌고 그리로 달려갔 다. 가다가 보니 동남쪽에 크게 불길이 일어 마음속으로 걱정하며 사람을 놓아 살피게 하였던바, 뜻밖에도 선주가 오병에게 에워싸여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위태로움을 돌보지 않고 힘을 다해 선주를 구하러 달려오는 중이었다.
육손은 조운이 나타났다는 소리를 듣자 얼른 군사를 뒤로 물리었 다. 조운은 그 기세를 타고 물러나는 오병을 들이치다 문득 적의 장 수 주연을 만났다. 주연이 겁내지 않고 맞섰으나 그는 조운의 적수 가 못 되었다. 조운은 한 합에 주연을 찔러 말 아래로 떨어뜨리고 그 졸개들을 흩어버린 다음 선주를 구해냈다.
“짐은 비록 적의 에움에서 벗어났으나 다른 장수들은 어찌한단 말인가?”
조운의 구함을 받아 백제성으로 달아나면서 선주가 괴롭게 물었 다. 조운이 좋은 말로 위로했다.
“당장은 적이 뒤쫓고 있으니 여기서 오래 머뭇거릴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우선 백제성으로 들어가 쉬고 계십시오. 신이 군사를 이끌고 다시 가서 다른 장수들을 구해보겠습니다.”
그때 선주 곁에 남은 것은 겨우 백여 명의 장졸에 지나지 않았다.
패배라도 너무 참혹한 패배였다. 뒷사람이 선주를 그 꼴로 만든 육 손의 재주를 기려 시를 지었다.
풀단으로 불을 질러 잇댄 영채 쳐부수니, 持茅擧火破連營
현덕은 힘이 다해 백제성으로 달아났네 德窮奔白帝城
하루아침에 위세로운 이름 위와 촉을 놀라게 하니, -旦威名驚蜀魏
오왕이 어찌 서생을 높이지 않으리. 吳王寧不敬書生
한편, 선주가 달아나는 뒤를 막아주고 있던 촉장 부동은 점차 늘 어난 오병들에게 열 겹 스무 겹으로 에워싸이고 말았다. 정봉이 그 런 부동을 보고 큰 소리로 을러댔다.
“서천의 군사들은 수없이 죽고, 항복한 자도 매우 많다. 네 주인 유비도 이미 사로잡혔는데 너는 어찌 빨리 항복하지 않느냐?” 그 말을 들은 부동이 꾸짖듯 소리쳤다.
“나는 한(漢)의 장수다. 어찌 오나라의 개들에게 항복하겠느냐?” 그리고 창을 끼고 말을 박차 오병 속으로 뛰어들었다. 군사들은 그를 따라 죽기로 싸웠으나 여기저기 내달으며 백여 차례나 부딪쳐 도 두꺼운 포위를 뚫지는 못했다. 마침내 힘이 다한 부동은,
“오늘로 나도 끝이로구나!”
그 한마디 탄식과 함께 입으로 피를 토하며 오병들 속에서 죽었다. 선주를 곁에서 모시던 좨주(祭酒)정기도 그 죽음이 씩씩하고 맵 기는 부동에 못지않았다. 뭍의 영채들이 불타는 걸 보고 홀로 강가 로 달려간 정기는 수군을 불러 적을 막게 하려 했다. 그러나 오병이 뒤따라와 덮치자 놀란 촉의 수군은 싸워보지도 않고 사방으로 흩어 져 달아났다. 정기의 부장도 함께 달아나려다 문득 정기를 보고 권 했다.
“오병이 옵니다. 좨주께서도 어서 달아나도록 하십시오.”
정기가 성나 소리쳤다.
“나는 주상을 따라 싸움터로 나온 이래 한번도 적을 보고 달아난 적이 없다!”
그리고 버텨 섰는데 곧 오병이 몰려와 사방을 에워쌌다. 정기는 마 침내 빠져나갈 길이 없음을 보고 칼로 스스로의 목을 찔러 죽었다. 그때 오반과 장남은 이릉성을 에워싸고 있었다. 문득 풍습이 달려 와 촉병이 몰리고 있는 소식을 전했다. 놀란 장남과 오반은 곧 이릉 성을 버려두고 선주를 구하러 달려갔다. 그 바람에 성안에 갇혀 오 랫동안 어려움을 겪던 손환도 비로소 풀려났다.
풍습과 더불어 선주를 구하러 달려가던 장남은 오래잖아 오병과 마주쳤다. 한바탕 싸움이 어우러지는데 다시 등 뒤에서 이릉성을 빠 져나온 손환이 덮쳐왔다. 앞뒤에서 적을 맞게 된 장남과 풍습은 죽 을 힘을 다해 싸웠으나 벗어날 길이 없었다. 끝내 어지럽게 싸우는 군사들 틈에서 죽었다. 부동, 정기, 장남, 풍습 현대인의 눈으로 보 아서는 어리석어 오히려 아름다운 죽음이었다.
한편, 장남, 풍습과 함께 오병에게 에워싸였다가 간신히 빠져나온 오반은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오병을 만났다. 거기서 오반은 또 한번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빠졌으나 선주를 백제성에 모셔놓고 되돌아온 조운의 구함을 받아 겨우 백제성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번장으로 유비를 도와 싸움터에 나왔던 만왕 사마가도 이때 죽었 다. 홀로 쫓기다가 오의 장수 주태를 만난 사마가는 그와 스무남은 합을 싸웠으나 마침내는 목을 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촉의 장수인 두로와 유녕은 오히려 오에 항복하니 촉의 영채에 있던 군량 과 마초, 병기 등은 모조리 오의 것이 되고 말았다.
얼핏 보면 이 싸움은 오직 육손의 계략에만 의지한 것처럼 보인 다. 그러나 조금만 살피면 이 싸움이야말로 오와 촉의 실세(實勢)대 로였다. 유비는 제갈량과 마초, 조운 같은 맹장들을 촉에 두고 여력 을 모아 나선 데 비해 손권은 유비에게 강화를 청하고 조비에 칭신 하는 등 위기 의식을 내비친 끝에 오(吳)의 정예를 모두 모아 내보 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록은 없지만 군사에서도 육손이 유비보다 적었던 것 같지는 않고, 장수는 육손 쪽이 오히려 훨씬 우세했다. 한 당, 주태, 서성, 정봉 같은 역전의 노장들이 모두 나서고 있는 까닭 이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꾸민 것은 좋지만, 별뜻도 없이 육손을 지나치 게 높이고 유비를 지나치게 낮춘 데서 『연의의 일관성에 흠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연의』의 저자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정사로 보아서는 가능성이 거의 없는 애절한 망부사(望詞)까지 곁들이고 있다. 유비가 효정에서 패해 죽었다는 잘못된 소문을 들은 손부인 (孫夫人)이 강변으로 달려가 서쪽을 보고 통곡하다가 강물에 뛰어들 었다는 얘기가 그것이다. 뒷사람이 그런 손부인을 기려 효희사姬 祠)란 사당까지 지었다는 후일담을 곁들이고 있으나, 아무래도 그런 일이 있었던 듯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