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9권 – 12화 : 오리새끼를 놓아주고 봉(鳳)을 얻다
오리새끼를 놓아주고 봉(鳳)을 얻다
장포가 최량을 찔러 죽일 무렵 관흥은 벌써 성문을 지키는 위병 들을 흩어버리고 성벽 위로 올라가 있었다. 거기서 다시 한바탕 적 병을 휩쓴 뒤에 불을 지르자 이미 성 근처까지 바싹 다가와 있던 촉 병들이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제 밤만 되면 제갈공명을 사로잡게 되었다고 김칫국부터 마시 고 있던 하후무는 그 갑작스런 변괴에 어찌할 줄 몰랐다. 장졸들을 수습해 싸워본다는 쪽으로는 엄두도 못 내보고, 남문을 열어 달아나 기 바빴다.
하지만 제갈공명의 손길은 이미 거기까지 뻗어 있었다. 하후무가 겨우 남문을 빠져나오자마자 한 떼의 군마가 길을 막았다. 앞선 장 수를 보니 촉의 왕평이었다.
왕평은 단 한 합에 하후무를 사로잡았다. 하후무를 대충 얽어 말 위에 싣고 대드는 졸개들은 모두 죽여버렸다. 하후무는 제갈공명을 사로잡기는커녕 제가 도리어 사로잡혀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한편 남안성으로 들어간 공명은 먼저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군사 들로 하여금 백성들의 것은 터럭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그사 이 길을 갈라 나갔던 장수들이 각기 돌아와 공명에게 세운 공을 알 려왔다. 아무래도 으뜸은 하후무를 잡아온 왕평이었다. 공명은 모든 장수에게 무거운 상을 내리고 하후무는 죄인을 싣는 수레에 가두어 두게 했다.
“승상께서는 어떻게 최량이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걸 아셨습니까?”
진중이 좀 가라앉은 뒤에 등지가 공명에게 물었다. 공명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나는 처음부터 그가 별로 항복할 마음이 없는 걸 알고 양릉이 지 키는 이 성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하면 그는 틀림없이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할 것이고, 그걸 전해 들은 하후무는 또 거꾸로 내 계책을 이용하려 들 것이라 본 것이다. 돌아온 그를 보니 과연 무언가 나를 속이는 듯한 데가 있었다. 이에 나는 관흥과 장포를 보내겠다는 것 으로 내가 그를 의심하고 있음을 감추었다.
그때 그의 속마음은 그 둘과 함께 가는 것이 아주 거북했을 것이 다. 그러면서도 기꺼이 함께 가겠다고 나선 것은 내 의심을 받게 되 는 게 두려워서였을 뿐이었다.
그는 속으로 관흥과 장포는 성안으로 들어간 뒤에 죽여도 늦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또 그 뒤에 우리를 속여 마음 놓고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걸 미리 헤아리고 두 장수에게 몰래 명을 내려 성문 아래에서 최량을 죽여버리게 했다. 그다음 틀림없이 마음 놓고 있을 적병을 들이쳐 성문을 뺏게 한다 음 우리 군사들을 재빨리 밀어닥치게 한 것이다. 바로 적이 뜻하지 아니한 곳으로 나아간다[出其不]는 계책이었다.”
공명의 그 같은 말을 들은 장수들은 모두 엎드려 절하며 감복했 다. 공명이 다시 묻지도 않은 걸 밝혔다.
“처음 안정에 엎드려 있는 최량을 속여 끌어낸 것은 배서(裵緖)란 위장(魏) 행세를 한 내 심복이다. 나는 또 그를 천수군으로 보내 그 태수도 속이게 하였는데 어찌 된 셈인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 다. 이제 이긴 기세를 타고 천수군도 마저 빼앗아야겠다.”
그러고는 천수군을 뺏으러 떠났다. 오의는 남안을 지키고 유담은 안정을 지키게 한 뒤 위연의 군마만 데리고 떠난 것인데, 거기에는 이긴 뒤의 방심도 좀 있었다.
그때 천수군의 태수는 마준(馬)이란 사람이었다. 하후무가 싸움 에져 남안성에 갇힌 채 괴로움을 겪고 있다는 말을 듣자 문무 관원 들을 모두 모아놓고 해야 할 일을 의논했다. 공조인 양서(梁緖)와 주 부 윤상, 주기 양건(梁)이 입을 모아 말했다.
“하후부마는 제실의 금지옥엽이십니다. 소홀히 해서 무슨 일이 난 다면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은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태수께서 는 어찌하여 여기 있는 군마를 모조리 이끌고 구하러 가지 않으십 니까?”
마준도 그 말을 들으니 적잖이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지켜야 할 성을 비워두고 가는 게 또한 켕겨 얼른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홀연 사람이 들어와 알렸다.
“하후부마께서 심복인 배서란 장수를 보내셨습니다.”
마준은 얼른 배서를 불러들이게 했다.
배서란 장수는 마준에게 하후무가 보낸 것이란 글 한 통을 바치며 말했다.
“도독께서는 안정과 천수의 군사를 바라고 계십니다. 오늘 밤이라도 군사를 내어 도독과 접응하도록 하십시오.”
그러고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돌아가버렸다.
뿐만이 아니었다. 다음 날 또한 사람이 말을 달려와 마준에게 재촉했다.
“안정군의 군사들은 이미 하후도독을 구하러 떠났습니다. 태수께 서도 어서 군사를 내시어 힘을 합치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되었다면 마준도 그냥 성안에 엎드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군사를 내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이 들어와 말했다
“아니 됩니다. 태수께서 군사를 내시면 바로 제갈량의 계책에 떨 어지게 됩니다!”
그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돌아보니 그는 천수군 기(冀) 땅 사람 강유였다. 강유의 자는 백약(伯約)으로 그 부친 경(囧)은 일찍 이 천수군 공조(曹)로 있다가 강인의 난리 때 싸움터에서 죽었다. 그 때문에 아비 없이 자랐으나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읽었고, 병법 과 무예에도 막힌 데가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니 고 을 사람들 모두가 그를 우러러보았다. 뒤에 중랑장이 되어 참본부군사(參軍事)로 일했다. “어째서 그러한가?”
마준이 어리둥절해 강유에게 물었다. 강유가 그 까닭을 차근차근말했다.
“요사이 듣자니 제갈량은 하후도독을 들부수어 도독께서는 지금 남안성 안에 갇혀 있다 합니다. 제갈량은 그 남안성을 물샐 틈 없이 에워싸고 있다는 데 어찌 하후도독이 보낸 사람이 빠져나올 수 있겠 습니까? 그런데도 그곳을 빠져나왔다면 그 사람은 대단한 장수일 것입니다. 하지만 배서는 이름도 없는 장수에다 전에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또 안정군에서 왔다는 그 보마(馬)는 공문 (公)이 없습니다. 군사를 내라는 중요한 일에 어찌 공문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저런 걸로 미루어보건대 이곳으로 온 자들은 모두 촉의 장수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위의 장수인 것처럼 꾸 며 태수님을 속이려 든 것입니다. 만약 태수님께서 거기에 속아 성 을 나가신다면, 군사를 가까이에 숨겨두었다가 반드시 비어 있는 성 을 덮칠 것입니다. 제갈량이 우리 천수를 뺏으려고 꾸민 계책입니다.”
그제서야 마준도 깊이 깨달은 바 있었다. 젊은 강유의 놀라운 헤 아림에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백약의 깨우침이 아니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네! 하마터면 제갈량의 계책에 빠질 뻔하지 않았나?”
그러자 강유가 한바탕 시원스레 웃고 나서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 놓으십시오. 제게 단번에 제갈량을 사로잡고, 남안의 위태로움을 풀어줄 계책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마준이 펄쩍 뛰듯 강유에게 물었다. 강유가 그 계책을 서두름 없이 밝혔다.
“지금 제갈량은 틀림없이 우리 성 뒤쪽 가까운 곳에 한 떼의 군사 를 숨겨놓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속임수에 넘어가 성을 나가 면 그 빈틈을 타 우리를 덮치려는 수작이지요. 바라건대 제게 날랜 군사 삼천만 주십시오. 그러면 적이 올 만한 길목에 숨어 기다리겠 습니다. 또 태수님께서도 군사를 내시되 너무 멀리 가지 마시고 삼 십 리쯤 가서는 되돌아오도록 하십시오. 그러다가 불길이 오르거든 그걸 신호로 삼아 앞뒤에서 적을 들이치는 것입니다. 이번에 만약 제갈량이 스스로 온다면 반드시 제 손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마준이 들어보니 실로 멋진 계책이었다. 곧 그 계책을 쓰기로 하 고 먼저 강유에게 골라 뽑은 군사 삼천을 주어 보냈다. 다음은 그 자 신이었다. 마준은 양건과 함께 나머지 군사를 모두 이끌고 성을 나 가 알맞은 곳에서 군사를 돌리고 기다렸다. 성안에 남아 지키는 것 은 양서梁)와 윤상(賞)뿐이었다.
이때 공명은 조운에게 군사 한 갈래를 주어 성 근처 산속에 숨어 있게 했다. 천수군의 군마가 성을 나가면 빈 성을 들이치라는 명과 함께였다. 조운이 군사들과 함께 명을 받은 대로 한 곳 산속에 숨어 있는데 세작이 와서 알렸다.
“천수 태수 마준이 군사를 몽땅 이끌고 성을 나갔습니다. 성안에 남아 지키고 있는 것은 문관들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조운은 몹시 기뻤다. 모든 게 제갈공명이 헤아린 대로라 믿으며 장익과 고상(高)에게 전갈을 보냈다.
“마준이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갔으니 그 길을 끊고 들이치라.”
장익과 고상은 제갈량이 바로 그런 일을 시키기 위해 감추어두었 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전갈을 낸 뒤 조운은 곧 오천 병마를 이 끌고 천수성으로 달려갔다.
“나는 상산의 조자룡이다. 너희들은 이미 우리 계책에 빠졌으니 어서 성을 바치고 항복하라! 그리하면 목숨은 건질 수 있으리라.”
성문 앞에 이른 조운이 기세 좋게 소리쳤다. 그러자 양서가 성벽 위에 있다가 껄껄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너희들이야말로 우리 강백약의 계책에 떨어졌다. 그래 놓고 아직 도 모른단 말이냐?”
그러나 조운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궁하니 끌어댄 거짓말 로 여기고 성을 칠 채비를 했다. 그때 홀연 함성이 크게 일며 사방에 서 불길이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다.
그 불길을 뒤로 하고 한 젊은 장수가 창을 휘두르며 말을 몰아나왔다.
“너는 천수 땅의 강유를 알아보겠느냐?”
그 장수가 대뜸 조운을 덮치며 소리쳤다. 조운은 노기를 참지 못 해 대꾸도 없이 그런 강유와 맞붙었다. 풋내기 장수 같아 얕보았으 나 싸워보니 그게 아니었다. 몇 합 부딪는 중에도 강유는 싸울수록 힘이 더해가는 듯했다.
조운은 깜짝 놀랐다.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의 말을 중얼거렸다.
‘누가 이런 곳에 저런 인물이 있을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러면서 힘든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데, 다시 두 갈래 군마가 양쪽에서 덤벼들었다. 어느새 되돌아온 마준과 양건이 이끄는 군사들 이었다.
조운은 이내 머리와 꼬리가 서로 돌볼 수 없는 처지에 빠지고 말 았다. 겨우 한 갈래 길을 뚫어 군사를 이끌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강 유가 그런 조운을 뒤쫓았으나 다행히 장익과 고상이 나타나 그런 조 운을 구해냈다.
진채로 돌아간 조운은 자기들이 도리어 적의 계책에 빠졌던 일을 모두 공명에게 말했다. 공명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어떤 사람이 내 깊이 숨긴 계책을 알아차렸단 말인가? 그게 누구였소?”
그러자 조운을 대신해 남안 사람 하나가 답했다.
“그 사람은 천수군 기 땅의 강유올시다.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 로 모시며, 문무를 갖추었고, 지용(智勇)을 함께 지녔습니다. 이 시대 의 영걸이라 할 만하지요.”
그 말을 받아 조운이 다시 강유를 추켜세웠다.
“그의 창 쓰는 솜씨가 실로 놀라웠습니다.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한참 만에야 공명이 무슨 뜻에서인지 한마디 나직이 말했다.
“내 이제 천수를 뺏으려 하면서도 그런 인물이 그곳에 있는 줄은 몰랐구나!”
그리고 대군을 몰아 천수로 나아갔다.
한편 조운을 쫓아 보내고 돌아간 강유는 마준을 보고 권했다.
“조운이 싸움에 지고 돌아갔으니 이번에는 반드시 공명이 몸소 올 것입니다. 이대로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적은 다시 우리가 성안 으로 들어가 있을 줄 알고 올 것인데, 그걸 노려보는 게 어떻겠습니 까? 우리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한 갈래는 제가 이끌고 성 동쪽에 숨어 있다가 적이 오면 그 길을 끊어버리겠습니다. 태수님과 양건, 윤상은 그 나머지를 이끌고 성 밖에 숨어 있고, 양서는 전처럼 백성 들과 더불어 성을 지킨다면 이번에는 공명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 니다.”
강유의 말대로 했다가 톡톡히 재미를 본 마준이었다. 이번에도 그 가 시키는 대로 장을 나누어 각기 가야 할 곳으로 보냈다.
이때 공명은 강유가 신경 쓰인 나머지 몸소 앞장서서 천수로 달 려오고 있었다. 성 부근에 이른 공명이 장졸들에게 영을 내렸다.
“무릇 성을 공격할 때는 처음 도착한 날에 끝장을 봐야 한다. 크 게 삼군을 격려하고 북소리와 함성도 드높게 바로 성을 기어오르도 록 하라. 만약 날짜를 끌게 되면 우리 편 군사들의 예기가 떨어질 뿐 만 아니라 쉽게 깨뜨리기 어려워진다.”
강유를 비롯해 천수의 병력이 모두 성안에 있는 줄 알고 내린 명 이었다. 그러나 공명을 하늘같이 믿고 있는 장졸들은 그대로 따랐 다. 물밀듯이 성 아래로 짓쳐들었다.
하지만 성 아래 이르러 보니 깃발이 가지런하고 적병들도 허둥거 리지 않는 게 채비가 되어도 단단히 되어 있는 듯했다. 그 바람에 가 볍게 공격하지 못하고 어물거리는 사이 밤이 되었다.
밤도 제법 깊어 병들이 이제 한번 성을 들이쳐볼까 하는 때였다. 홀연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함성이 땅을 뒤흔들었다. 어디 서 온 군사들인지 모르나 성벽 위에서도 북을 치고 함성을 질러 거 기 호응하는 것으로 보아 촉 편은 아닌 듯했다.
이에 놀란 촉병들은 그때까지의 기세도 잊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 나기 시작했다. 공명도 장졸들을 수습해볼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 위급이라도 피해볼 양으로 얼른 수레에 올랐다.
관흥과 장포가 그런 공명을 보호하며 그사이 사방에서 에워싸기 시작한 적을 뚫고 나갔다. 공명이 얼핏 머리를 돌려서 보니 성 동쪽 에서 한 떼의 군마가 쏟아져 나오는데 그 기세가 꼭 긴 뱀이 밀고 나오는 듯했다.
“저 군마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보아라.”
공명이 관흥에게 그렇게 영을 내렸다. 가까이서 살피고 돌아온 군사가 공명에게 알렸다.
“저기 오는 것은 강유의 군사들입니다.”
그러자 공명이 감탄했다.
“군사는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사람이 쓰기에 달렸을 뿐이니 저 군사가 바로 그러하구나. 강유는 정말로 훌륭한 장수감이다!” 그러고는 군사를 거두어 진채로 돌아갔다.
잇따른 패배에 조심이 되었던지 그로부터 한동안 공명은 깊은 생 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이윽고 강유를 잡을 계책을 생각해냈는지 먼 저 안정 사람 하나를 불러 물었다.
“강유는 지극한 효자라 했는데, 그 어머니는 지금 어디 있느냐?”
“기현에 있습니다.”
물음을 받은 사람이 아는 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공명은 위연을 불러 가만히 일렀다.
“그대는 한 갈래 인마를 이끌고 가서, 겉으로만 기세를 올려 기성 을 뺏으려 드는 척하라. 그러다가 강유가 오거든 못 이긴 척 그가 성 안으로 들어가게 길을 내어주라.”
그래 놓고 공명은 다시 불려온 안정 사람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가장 긴요한 땅은 어디인가?”
그 사람이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천수의 곡식과 돈은 모두 상규(上)에 있습니다. 만약 상규를 들부술 수만 있다면 천수의 양식은 절로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공명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보가 아닐 수 없었다. 공명은 크게 기 뻐하며 이번에는 조운을 불러 영을 내렸다.
“장군은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상규를 치도록 하시오. 꼭 우리 손에 넣어야 하오.”
그리고 자신은 진채를 천수성에서 삼십 리나 되는 곳으로 물려 앉았다.
얼마 안 있어 급한 전갈이 천수성 안으로 날아들었다.
“공명은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하나는 이곳 천수성을 치고, 다른 하나는 상규를, 그리고 나머지는 기성을 치게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 누구보다 놀란 것은 강유였다. 한달음에 마준에게 달려가 울며 졸랐다.
“제 어머님께서 지금 기성에 계십니다. 혹시라도 어머님께 무슨 일이 있을까 두려우니 부디 제게 한 갈래 군사를 떼어주십시오. 가서 기성도 구하고 늙으신 어머님도 지키겠습니다.”
강유의 지극한 효성을 알고 있는 마준은 그 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곧 강유에 삼천의 군마를 떼어주며 기성을 구원하게 하 고 아울러 양건에게도 삼천을 주어 상규를 지키게 했다.
강유가 기성으로 가니 성 앞에 위연이 군마를 벌이고 섰다가 길 을 막았다. 강유는 창을 꼬나들고 여러 소리 나눌 것도 없이 위연을 덮쳐갔다. 위연도 지지 않고 맞섰다. 그러나 올 때 공명에게 들은 말 이 있는지라 힘대로 싸우지 않았다. 서너 번 창칼을 부딪다 힘에 부 치는 체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강유는 그 틈을 타 길을 얻어 기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굳게 성문을 닫아 건 뒤 군사들을 다잡아 지킬 태세를 단단히 하게 했다. 늙은 어머니를 찾아보고 안심시켜드렸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위 연은 강유가 성안으로 들어간 뒤에야 성을 에워싸고 다시 싸움을 걸 었다. 그러나 강유는 굳게 지킬 뿐 나와 싸우지 않았다.
그런 상태는 상규성도 마찬가지였다. 조운은 양건이 삼천 군마와 함께 성안으로 들어가는 걸 모른 체 보아 넘긴 뒤에야 다시 성을 에 워쌌다.
모든 일이 자기가 뜻한 대로 되자 공명은 사람을 남안으로 보내 갇혀 있는 하후무를 데려오게 했다. 하후무가 공명의 장막에 이르자 공명이 알 듯 말듯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너는 죽는 게 두려우냐?”
“그저 살려만 주십시오.”
하후무는 한 나라의 부마로서, 그리고 수십만 군의 대도독(都督)으로서는 어울리지 않게 땅바닥에 엎드려 목숨을 빌었다. 공명이 그런 하후무를 한동안 가만히 내려보다가 말했다.
“지금 강유는 기성을 지키고 있는데 사람을 보내 특히 글을 보내 왔다. 부마인 너를 넘겨주면 자신은 스스로 와서 항복하겠다고 하는 내용이었다. 내 이제 네 목숨을 붙여줄 터이니 가서 강유를 항복하 도록 달래보겠느냐?”
“그러겠습니다. 제가 가서 강유를 항복하도록 만들겠습니다.”
하후무는 공명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응낙하고 나섰다. 어떻게 든 범의 굴 같은 병의 진채에서 놓여나고 싶은 마음에서 한 소리 지만 공명은 그대로 믿어주는 체했다. 새 옷과 안장 얹은 말을 내주 고 하후무를 놓아 보냈다. 아무도 딸려주지 않고 홀로 길을 찾아가 게 한데 공명의 덫이 있었지만 하후무가 그걸 알 리 없었다.
하후무는 놓여나기는 했으나 돌아가는 길을 알 수가 없었다. 이리 저리 길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문득 허겁지겁 달아나고 있는 백성 몇 을 만났다.
“그대들은 어디 사는 사람들이며 왜 이리 허둥대는가?”
하후무가 그렇게 묻자 그들이 대답했다.
“저희들은 기성의 백성들입니다. 강유가 성을 들어 제갈량에게 항 복하는 바람에 지금 위연이 성안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백성들을 노 략질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그걸 피하기 위해 집과 재산을 버리고 달아나는 중입니다. 상규에나 가볼까 합니다.”
“그럼 지금 천수군을 지키는 것은 누구인가?”
하후무가 다시 물었다. 피난 가던 백성들이 이번에도 아는 대로 답해주었다.
“천수성 안에는 마(馬) 태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하후무는 천수군으로 가는 길을 물어 그리로 말을 달렸다. 한참 가는데 다시 한 떼의 백성들을 만났다. 남자아이는 업 고 여자아이는 안은 채 황망히 가는 그들을 보고 하후무가 또 전처 럼 물어보았다. 그들 역시 강유가 항복한 일을 말했다.
그럭저럭 천수군에 이른 하후무는 성문 앞에 이르러 크게 소리
쳤다.
“문을 열어라. 나는 하후무다.”
그 소리에 성벽 위로 몰려나온 사람들은 그가 정말로 부마 하후 무임을 알아보았다. 황망히 성문을 열고 달려 나와 하후무를 맞아들 였다.
“도독께서 어떻게 이리 오실 수 있게 되었습니까?”
절을 올린 태수 마준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물었다. 하후무는 제갈량이 강유를 달래라고 자기를 놓아준 일이며, 도중에 백성들에 게서 들은 말을 모두 늘어놓았다.
마준이 어이없다는 듯 탄식했다.
“강유가 촉에 항복할 줄은 정말로 몰랐구나!”
그러자 강유와 친한 양서가 강유를 발명해주려 들었다.
“그럴 리 없습니다. 도독을 구해내기 위해 거짓으로 항복하겠다 말한 것일 겁니다.”
하후무가 그를 면박주었다.
“강유가 이미 항복한 증거가 뚜렷한데 거짓은 무슨 거짓인가?”
말은 그러해도 하후무 또한 제 눈으로 본 것은 아니어서 잘라 말 하지는 못했다. 강유가 정말로 항복했는지 아닌지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이에 벌써 날은 저물어 초경이 되었다.
“촉군이 또 성을 공격해옵니다.”
갑자기 군사들이 달려와 다급하게 말했다. 하후무는 마준과 더불 어 성벽 위로 올라가 형세를 살폈다. 앞장을 서서 성을 공격하러 온 적장은 놀랍게도 강유였다.
강유가 창을 끼고 말 등에 앉아 성벽 위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하후 도독은 나오시오! 나와서 내가 묻는 말에 답해주시오!”
그 소리에 하후무와 마준이 성벽 위로 몸을 드러냈다. 강유는 위 엄과 무예를 뽐내듯 나서서 하후무를 손가락질하며 꾸짖었다. “나는 도독을 위해 항복했는데 도독께서는 어찌하여 제 입으로 한 말을 어기시오?”
하후무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강유는 들어라. 너는 위나라의 은혜를 입은 몸으로 어찌하여 촉 에 항복했느냐? 그리고 전에 내가 한 말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냐?”
하후무가 그렇게 따져 묻자 강유는 더욱 소리를 높였다.
“당신은 내게 글을 보내 촉에 항복하라 하지 않았소? 그래 놓고 이 제 와서 무슨 소리요? 당신은 당신 자신을 빼내기 위해 나를 구덩이 에 빠뜨렸소. 이제 나는 이미 촉에 항복하여 상장이 되었으니 어떻 게 위(魏)로 다시 돌아간단 말이오?”
그러고는 군사를 몰아 성을 짓두들기더니 날이 샌 뒤에야 물러갔다. 실은 그 강유는 하후무가 길가에서 만난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공명의 꾀에서 만들어진 가짜였다. 군사들 중에서 강유와 닮은 자를 뽑아 강유로 가장하게 하여 성을 공격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하후무는 말할 것도 없고 오랫동안 강유를 데리고 있던 마준도 깜박 속고 말았다. 불빛이 있다고는 해도 밤중인 데다, 성벽 위에서 멀찌감치 내려다본 것이라 강유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하후무와 마준을 속인 공명은 몸소 기성으로 달려갔다. 그리 고 마지막으로 강유를 잡아낼 계책에 들어갔다. 처음 며칠은 그저 성을 에워싸고 마구잡이로 들이치는 것으로 날을 보냈다.
강유는 이끌고 있는 군사들과 백성들을 격려해 촉군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그러나 성안에는 양식이 넉넉하지 못해 군사들은 끼니를 제대로 때울 수 없었다. 아무리 용맹스럽다 해도 먹지 않고는 싸울 수 없는 법이라 강유는 군량이 큰 걱정거리였다.
그런 강유에게 공명은 때맞추어 미끼를 던졌다. 하루는 강유가 성 위에서 보니 촉병들이 크고 작은 수레에 군량과 말먹이 풀을 나르고 있었다. 모두 위연의 진채로 가는데 여간 탐나는 게 아니었다. 끝내 참지 못한 강유는 삼천 군마를 이끌고 그 군량과 말먹이 풀을 뺏으 러 성을 나왔다. 이상한 것은 병들이었다. 강유가 덮치자 제대로 맞서 보지도 않고 제각기 길을 찾아 달아나버렸다.
쉽게 군량을 뺏은 강유는 이제 됐다 싶었다. 그 군량을 가지고 성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때 이미 그는 공명의 덫에 걸린 뒤였다. 군량이 든 수레를 끌고 가자니 아무래도 더뎌져 마음만 급해있는데 갑자기 한 떼의 군마가 나타나 길을 막았다. 앞선 장수는 촉의 장익이었다.
강유가 장익과 어울렸다. 한 서너 번이나 부딪쳤다 떨어졌을까, 다 시 한 떼의 병이 그곳에 이르렀다. 왕평이 이끄는 군사들이었다. 장익과 왕평은 양쪽에서 번갈아 강유를 몰아댔다. 그렇게 되면 군 량이고 뭐고 없었다. 겨우 길만 뚫어 성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강유가 성 앞에 이르러 보니 성벽 위 에는 벌써 촉병의 기치가 펄럭이고 있었다. 강유가 성을 나가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위연이 그새 재빨리 점령해버린 것이었다.
갈 곳이 없어진 강유는 다시 죽기로 싸워 한 가닥 길을 열고 천수 성으로 달려갔다. 그때 그를 뒤따른 것은 겨우 여남은 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도중에 또 장포를 만나 한바탕 두들겨 맞는 바람에 천수성에 이르렀을때는 그 혼자뿐이었다.
“문을 열어라. 내가 왔다.”
강유는 그래도 이제는 살았다 싶어 마음 놓고 성안을 향해 소리 쳤다. 그런데 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성벽 위에 나타난 것은 자기 편 군사임에 틀림없었지만, 반겨 문을 열기는커녕 왠지 움찔 놀라며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유가 촉에 항복했다는 사실은 이미 천수성 안 에 두루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강유가 달려와 문을 열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강유가 와서 성문을 열라고 합니다.”
그 군사가 안으로 달려가 태수 마준에게 알렸다. 마준은 더 생각해볼 것도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그것은 강유가 우리를 속여 성문을 열게 하려는 수작이다. 거기 넘어가서는 아니 된다.”
그러고는 영문도 모르는 채 기다리고 있는 강유에게 어지러이 활을 쏘게 했다.
강유는 기가 막혔다. 어떻게 까닭을 물어보려 해도 성안에서는 그 틈조차 주지 않았다. 거기다가 뒤쫓는 병이 어느새 가까이 이르니 더 배겨낼 도리가 없었다. 이에 강유는 말 머리를 돌려 이번에는 상 규로 향했다.
그곳도 천수성과 마찬가지였다. 문을 열라고 소리치자 성벽 위에 나온 것은 함께 벼슬살이하던 양건(梁)이었으나, 그를 보는 눈은 전과 달랐다. 성문을 열어주기는커녕 소리 높여 꾸짖기부터 했다.
“나라를 등진 역적 놈아. 네 어찌 감히 나를 속여 성을 뺏으려 드 느냐? 나는 이미 네가 병에게 항복한 걸 알고 있다!”
그러고는 강유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화살비만 퍼부어댔다. 강유는 말도 붙여보지 못하고 하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했다. 그런 그의 눈에는 피눈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도리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죄없음을 밝히는 것은 뒤로 미루고 장안으로 향했다. 어쨌든 뒤쫓는 촉병이나 떨쳐버리고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공명의 촘촘한 그물은 거기까지 쳐져 있었다. 강유가 채 몇 리도 가기 전이었다. 저만치 보이는 나무와 숲이 무성한 곳에서 갑자기 함성이 일며 수천의 병이 뛰쳐나왔다. 앞선 장수는 관흥이었다.
관흥이 길을 가로막고 선 걸 보자 강유는 눈앞이 아뜩했다. 사람 과 말이 함께 지칠 대로 지쳐 있어 싸울래야 싸울 수가 없었다. 이에 강유는 재빨리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끝내 공명의 손길을 벗어날 팔자는 못 되었다. 얼마 가기 도 전에 앞쪽에서 문득 한 대의 작은 수레가 작은 산 언덕을 돌아 나왔다. 그 위에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윤건에 학창의 입고 깃털부 채를 든 것이 틀림없이 공명이었다.
“백약은 이참에 이르러서도 어찌 빨리 항복하지 않는가?”
공명이 강유를 부르며 타이르듯 말했다.
강유는 한동안 깊이 생각해보았다. 앞에는 공명이 가로막고 뒤에 는 관흥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그를 맥빠지게 하는 것은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일이 어찌 된 까닭인지는 알 길 없 지만, 이미 천수와 상규 두 성에서 자기편에게 쫓긴 처지가 아닌가. 장안으로 가고 있기는 해도 과연 거기서는 자신이 받아들여질지 걱 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유는 마침내 말에서 내려 수레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걸 본 공명이 황망히 수레에서 내려 강유를 일으킨 뒤 그 손을 어루만 지며 말했다.
“나는 저 남양의 오두막을 나온 이래로 널리 어진 이를 얻어 내가 평생 배운 바를 전하려 했소. 그러나 한스럽게도 아직껏 그 사람을 얻지 못해 애를 태웠더니, 이제 백약을 만나 그 원을 풀게 되었소.”
마디마디 진정이 밴 소리였다. 강유는 그 말에 감격했다. 이제는 항복이 부끄러움이나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 되어 강유로 하여금 그대로 땅에 엎드려 절하게 했다.
공명도 기쁘기는 매한가지였다. 강유를 일으켜 수레에 태워 함께 진채로 돌아갔다. 적장을 사로잡은 군사(軍師)라기보다는 쓸 만한 제자감을 얻은 스승의 표정 그대로였다.
공명이 강유를 얻게 된 경위를 『연의에서 읽고 있노라면 우리는 다시 한번 그 지은이의 비범한 재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엄밀히 말한다면 우리들이 감탄해온 삼국지의 기계와 묘책들은 역 사가 우리에게 남겨준 것이라기보다는 『연의』를 지은 이의 개인적 인 천재에 힘입은 부분이 더 많다. 『연의』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 대개 그러한데, 공명이 강유에게서 항복을 받는 과정도 그중에 하나 이다.
정사의 본문(文)은 강유가 제갈량에게로 가게 된 경위를 태수의 의심 때문인 것으로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고, 주)에도 강유가 공 명을 골탕먹인 일이나 공명이 강유를 사로잡기 위해 펼친 계책 같은 것은 한 구절도 없다. 어느 쪽으로든 거의 틀림없어 보이는 것은, 공 명과 강유의 만남이 꾀와 꾀의 치열한 싸움을 거친 것은 아니었으 며, 어떤 이유로 위(魏)에게서 버림받은 강유가 공명을 찾아간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연의』를 지은 이의 탁월한 상상력과 재능은 그토록 생생하고도 재미있는 갈등 구조와 기계 묘책으로 우리를 매 료시키고 있다.
강유가 공명에게로 간 경위가 어떠하건 공명이 강유를 남달리 보아준 것만은 틀림이 없다. 진채로 돌아온 공명은 장막을 걷고 강유와 마주앉아 천수성과 상규성을 마저 빼앗을 의논으로 들어갔다. 강 유가 스스로 나서서 말했다.
“천수성 안에는 양서梁)와 윤상(尹)이 있는데 둘 다 저와 몹 시 가깝게 지낸 사람들입니다. 제가 두 통 밀서를 써서 성안으로 쏘 아 보내 저희끼리 난리를 일으키도록 해보겠습니다. 제 뜻대로만 된 다면 어렵지 않게 성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공명도 손해날 게 없는 계략이라 강유가 하는 대로 지켜보기로 했다.
강유는 밀서 두통을 써서 화살에 묶은 다음, 말을 달려 똑바로 성 을 향해 달려가 성안으로 그 화살들을 쏘아 붙였다. 꼭 그 밀서들이 양서나 윤상에게 전해지기를 바란 것만은 아니었다. 그 편지가 마준 이나 하후무에게 전해져도 바랄 만한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강유의 밀서를 손에 넣은 것은 어떤 하급 장교였다. 내용이 하도 엄청나 태수 마준에게 갖다 바쳤다. 그 글을 읽어본 마준은 양서와 윤상에게 더럭 의심이 갔다. 가만히 하후무를 불러 의논했다.
“양서와 윤상이 강유와 한 끈으로 이어져 안에서 호응하려 하고 있습니다. 도독께서는 어서 결단을 내리시어 그들을 없애도록 하십 시오.”
그 같은 마준의 말에 하후무도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그 두 사람을 죽여버려야겠소.”
하지만 그때 이미 밀서가 온 일은 윤상의 귀에도 들어간 뒤였다.
마준과 하후무가 의논한 내용까지는 듣지 못해도 그런 강유의 편지가 그들 손에 들어갔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이에 다급해진 윤상은 양서를 찾아가 말했다.
“아무래도 성을 바치고 촉에 항복하는 편이 낫겠네. 그래서 촉으 로 가서나 출세해보도록 하세.”
양서 또한 윤상과 같은 마음이었다. 두말 없이 그대로 따르기로 하고 알맞은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그날 밤이었다. 하후무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윤상과 양서를 불렀다. 할 말이 있다는 핑계였으나 그 속셈은 뻔했다.
일이 급해진 걸 알아차린 두 사람은 드디어 마음을 정했다. 얼른 갑옷 입고 말에 오른 뒤 자기들을 따르는 졸개들을 데리고 성문께로 가서 성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런 일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렸다는 듯 촉병들이 열린 성문으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양서와 윤상에게 선수를 뺏긴 격이 된 하후무와 마준은 놀라고 당황했다. 어떻게 버텨볼 엄두도 못 내보고, 겨우 수백 기만 건져 서 문으로 달아났다. 성을 버린 그들이 내몰리듯 간 곳은 강인(人)들 의 땅이었다.
양서와 윤상은 공명을 성안으로 맞아들였다. 성안으로 들어간 공 명은 놀란 백성들의 마음을 진정시킨 뒤 여럿에게 상규를 마저 뺏을 계책을 물었다.
이제는 촉의 사람이 된 양서가 말했다.
“그 성은 제 친아우인 양건)이 지키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제 게 항복을 권하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성을 나와 항복할 것입니다.”
그 말에 공명은 몹시 기뻐했다. 양서는 그날로 상규로 달려가 아우양건을 불러내고 항복을 권했다. 형의 권유에 양건은 군소리 없 이 성을 나와 공명에게 항복했다.
공명은 천수를 얻는 데 공을 세운 모든 사람에게 무겁게 상을 내 리고 벼슬을 주었다. 양서는 천수 태수로 삼고, 윤상은 기성령(冀城 令), 양건은 상규령(上邽令)으로 삼아 제 땅에 눌러 앉혔다. 그리고 다른 장수들은 모두 공명과 함께 위와의 싸움에 나서게 했다.
세 군을 점령한 데 따르는 일을 대강 마무리짓고, 군사들을 정돈 해 다시 나아가려 할 즈음 장수들이 아무래도 알 수 없다는 듯 물 었다.
“승상께서는 어찌하여 하후무를 잡으러 가지 않으십니까?”
공명이 향하려는 곳이 하후무가 달아난 강인들의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공명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하후무를 놓아준 것은 오리새끼 한 마리를 놓아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제 강유를 얻은 것은 봉황새 한 마리를 얻은 것 과 같다. 구태여 놓아준 오리새끼를 뒤쫓을 게 무어 있겠는가?”
그러고는 여전히 병마만 정돈할 뿐이었다.
새로이 천수, 상규, 기세 성을 얻은 뒤로 공명의 위엄과 명성은 세상을 크게 떨쳐 울렸다. 거기 겁을 먹은 위의 주군(州郡)들은 공명 이 이르는 곳마다 바람에 쓸리듯 귀순해왔다.
군마를 정돈한 공명은 한중의 군사를 모두 이끌고 기산(山)으로 나아갔다. 첫 번째의 기산 진출이었다.
공명이 기산으로 나와 위수 서쪽에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은 나는듯 낙양에 전해졌다. 때는 위주 조예의 태화(和) 원년 어느 날이었다.
그날 조예가 조회를 받고 있는데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 하나가
아뢰었다.
“하후부마는 세 군을 잃고 강중(中)으로 달아났다 합니다. 이제 촉병은 기산으로 나왔으며 그 앞머리는 위수 서쪽에 이르렀습니다. 바라건대 크게 군사를 내시어 적을 쳐부수도록 하옵소서.”
그 말을 들은 조예는 깜짝 놀랐다. 황망히 군신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누가 짐을 위해 촉병을 물리쳐주겠소?”
사도 왕랑이 나와 말했다.
“신이 보니 선제께서는 언제나 대장군 조진을 쓰셨는데, 그는 가 는 곳마다 반드시 적을 이기고 돌아왔습니다. 폐하께서도 그를 대도 독으로 삼아 촉병을 물리치게 하십시오.”
위주 조예는 그런 왕랑의 말을 옳게 받아들였다. 그 자리에서 조 진을 불러 말했다.
“선제께서는 경에게 붕어하신 뒤의 일을 부탁하셨소. 이제 촉병이 중원으로 침입해 들어오고 있는데 경이 가만히 앉아 보고만 있을 수 는 없지 않소?”
그러자 조진이 사양했다.
“신은 재주 없고 아는 게 얕습니다. 그런 큰일을 해내지 못할 듯 합니다.”
왕랑이 곁에서 위주를 거들어 조진에게 권했다.
“장군은 나라를 받드는 신하로 이 일을 마다하셔서는 아니 되오. 이 늙은 몸이 비록 둔하고 어리석으나 장군을 따라나설 것이니 부디 폐하의 뜻을 거스르지 마시오.”
그러자 조진도 드디어 생각을 바꾼 듯 조예에게 청했다.
“신이 나라의 큰 은혜를 입고 어찌 핑계를 대어 마다할 리 있겠습 니까? 다만 혼자서는 힘에 부칠 듯하니 좋은 부장 한 사람을 딸려주 십시오.”
“그건 경의 뜻대로 골라 쓰시오.”
조예가 선뜻 조진의 청을 받아들였다. 이에 조진은 태원군 양곡현 사람 곽회(郭)를 천거했다. 곽회는 자를 백제(伯濟)라 하며 벼슬은 사정후(射亭侯)에 영(領) 옹주자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