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9권 – 8화 : 꺾일 줄 모르는 저항의 넋
꺾일 줄 모르는 저항의 넋
마음 놓고 있던 만병들은 깜짝 놀랐다. 급히 활과 쇠뇌를 쏘려 했 으나 캄캄한 밤중이라 잘 보이지도 않거니와 그럴 겨를도 없었다. 잠깐 사이에 태반은 사로잡히고 나머지는 꽁지가 빠지게 성을 버리 고 달아났다. 맹획을 따라 거기까지 왔던 타사대왕이란 자도 그 어 지러운 통에 비참하게 목을 잃고 말았다.
순식간에 삼강성을 빼앗은 공명은 거기 있던 진기한 보물들을 모 두 거두어 공이 많은 장졸들에게 상을 내렸다. 싸움에 이긴 데다 상 까지 받자 촉군들은 신이 났다. 드높은 사기로 다음 싸움을 기다렸다. 한편 성을 버리고 달아난 만병들은 맹획에게 돌아가 울며 알렸다.
“타사대왕께서는 돌아가시고 삼강성은 촉군에게 빼앗겨버렸습니다.”
맹획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걱정으로 간이 오그라드는 판에 사람이 들어와 알렸다.
“병이 벌써 강을 건너 우리 동 앞에 진채를 내렸습니다.”
맹획은 더욱 놀라 어쩔 줄 몰랐다. 손발을 바로 가누지 못하고 오락가락하는데 병풍 뒤에서 한 사람이 깔깔 웃으며 나와 말했다.
“명색 남자가 되어 어찌 그리도 답답하게 구십니까? 제가 비록 한 낱 여자 몸이나 당신과 함께 나가 싸워보겠습니다.”
맹획이 그 사람을 보니 다름 아닌 아내 축융부인(祝融夫人)이었다. 부인은 대대로 남만에 살아온 집안의 딸인데 화신(神)인 축융씨 (祝融氏)의 후예로 알려져 있었다. 한 자루 비도(飛刀)를 잘 써, 그녀 가 칼을 날리면 백 번을 날려 백 번이 다 과녁에 꽂혔다.
축융부인의 격려로 힘을 얻은 맹획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내에게 감사하고 싸울 채비에 들어갔다. 축융부인은 큰소리 친 대로 앞장서 말에 오른 뒤 피붙이들 수백과 동병 오만을 이끌고 촉병과 싸우러 은갱동을 나갔다.
축융부인이 막 동구를 나서는데 한 떼의 촉병들이 길을 막았다. 앞선 대장은 장의였다. 장의는 축융부인이 만병들을 이끌고 달려오 는 걸 보자 군사들을 벌여 적을 맞을 채비를 하게 했다.
축융부인은 등에 다섯 자루의 비도를 꽂고 손에는 한 길 여덟 자 나 되는 막대를 든 채 털 붉은 적토마 위에 앉아 있었다. 그런 그녀 를 보자 장의는 속으로 은근히 찬탄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만난 곳 이 싸움터라 구경만 할 수 없어 달려 나가 맞섰다.
두 사람이 어울린 지 몇합되기도 전에 축융부인이 돌연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여자라고 은근히 깔보던 장의가 생각없이 그런 그녀를 뒤쫓았다. 달아나던 축융부인이 몸을 홱 틀며 어 느새 뽑아들고 있던 비도를 날렸다.
그제서야 놀란 장의가 얼른 손을 들어 비도를 쳐내려 했으나 날 아온 칼은 어김없이 장의의 왼팔에 꽂혔다. 아픔을 이기지 못한 장 의는 몸을 뒤집으며 말에서 떨어졌다. 보고 있던 만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몰려와 장의를 꽁꽁 묶어버렸다.
촉장 마충은 장의가 적에게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놀라 달려 나왔다. 급하게 장의를 구하러 가려는데 만병들이 쏟아져 나와 길을 막았다. 그 속에 축융부인이 긴 막대를 들고 말 위에 앉아 있는 걸 보자 마충은 벌컥 화가 났다. 한칼에 요절낼 양으로 말을 박찼다.
그런데 그 무슨 운수인지 마충이 미처 축융부인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타고 있던 말이 밧줄에 걸려 뒤집어졌다. 말이 뒤집히니 그 위 에 타고 있던 사람이 성할 리 없었다. 마충이 땅에 떨어져 뒹굴자 만 병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그 또한 묶어버리고 말았다.
축융부인이 마충과 장의를 사로잡아 은갱동으로 돌아가자 맹획은 기뻐 어찌할 줄 몰랐다. 크게 잔치를 열어 이기고 돌아온 아내와 군 사들의 기운을 돋워주었다.
“도부수들은 저 두 놈을 끌어내 목을 베라. 무고히 남의 땅을 침 범하는 촉병들에게 본보기를 삼으리라.”
흥이 오른 축융부인이 그렇게 영을 내렸다. 맹획이 그런 아내를 말렸다.
“제갈량은 나를 다섯 번이나 사로잡았으나 살려서 돌려보내주었소. 그런데 우리는 사로잡자마자 적장의 목을 벤다면 의롭지 못한 일이 되오. 우리 동에 가두어두었다가 제갈량까지 사로잡은 뒤에 죽 여도 늦지 않으리라.”
그러자 축융부인도 남편의 말을 따랐다. 마충과 장의를 끌고 나가 게 한 뒤 깔깔거리며 술을 마시고 풍악을 잡혔다.
한편 축융부인에게 장수 둘을 잃고 공명에게로 쫓겨간 촉병들은 숨넘어가는 소리로 그 소식을 알렸다. 공명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마대와 위연, 조운 세 사람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무언가 가만 히 계교를 주어 먼저 내보냈다.
다음 날이 되었다. 맹획과 축융부인이 느긋한 마음으로 저희 골짜 기에 들어앉아 있는데 졸개 하나가 달려와 알렸다.
“촉장 조운이 와서 싸움을 걸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축융부인은 맹획이 무어라고 말할 틈도 없이 말에 뛰어올랐다.
곧 조운과 축융부인의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조운은 몇 합 싸워보지도 않고 말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 다. 축융부인은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 감히 뒤쫓지 못하고 군사를 되돌렸다.
다음 날은 위연이 또 은갱동으로 와 싸움을 걸었다. 축융부인이 달려 나가 싸움이 시작됐지만 결과는 전날과 마찬가지였다. 위연이 거짓으로 패한 체 달아나며 축융부인을 꾀어내보려 했으나 그녀는 이번에도 위연을 뒤쫓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었다. 이번에는 조운이 다시 돌아와 싸움을 걸었다.
축융부인이 또 은갱동을 나가 조운을 맞았다. 조운의 계략은 전날과 다름없었다. 몇 합 싸우지 않고 거짓으로 패해 달아났다. 축융부인 도 여전히 매복이 두려워 그런 조운을 뒤쫓지 않았다.
그런데 축융부인이 막 군사를 돌리려 할 때였다. 어디선가 위연이 달려 나와 바가지 바가지 욕을 퍼부으며 덤벼들었다. 참고 참았던 축융부인도 그 상스런 욕질에는 발끈하고 말았다. 싸움막대를 휘두 르며 위연을 덮쳐갔다. 위연은 그런 축융부인을 놀려대듯 몇 번 맞 붙어 보지도 않고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성난 축융부인은 이것저것 생각도 없이 그대로 위연을 뒤쫓았다. 위연은 힐끗힐끗 돌아봐가며 산기슭 샛길로 달아났다. 한참을 달리 다가 큰 함성이 일어 위연이 돌아보니 축융부인이 안장을 안고 말에 서 떨어지는 중이었다.
그곳에서 매복해 기다리던 것은 마대였다. 여기저기 말을 쓰러뜨 리는 밧줄을 펼쳐놓고 기다리다가 축융부인이 걸리자 그 말을 쓰러 뜨리고 말에서 떨어진 축융부인을 사로잡아버렸다.
마대가 축융부인을 사로잡아 가는 걸 보고 만장蠻將)과 그 졸개 들이 구하러 달려갔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조운이 어디선가 되돌아 와 덤벼드는 만병들을 두드려 흩어버렸다.
축융부인이 병의 대채로 끌려가니 공명이 장막에 단정히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부인의 밧줄을 풀어주라.”
공명은 무사들에게 그렇게 영을 내린 다음 다른 장막으로 데려가 술을 내리게 했다. 축융부인의 놀란 가슴을 달래주려 함이었다.
“맹획에게도 사람을 보내라. 우리가 축융부인을 사로잡았음을 알리고 그녀와 장의, 마충을 바꾸자고 하여라.”
축융부인의 마음을 달래준 뒤 공명은 다시 그렇게 영을 내렸다. 공명의 전갈을 받은 맹획은 얼른 거기 응했다. 장의와 마충을 돌 려주고 축융부인을 되찾아갔다. 맹획은 아내가 돌아온 게 기쁘기는 했으나 한편으로는 걱정도 컸다. 은근히 믿었던 그녀도 공명에게는 한낱 어린애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머리를 싸매고 걱정 을 하는 중인데 졸개 하나가 달려와 알렸다.
“팔납동주(八洞)께서 오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맹획은 뛰듯이 달려 나가 팔납동주를 맞았다. 팔납 동주인 목록대왕이란 자는 흰 코끼리를 타고 왔는데, 몸에는 금과 보석 구슬을 꿴 줄을 감고 허리에는 두 자루 큰 칼을 차고 있었다. 그 뒤에는 전날 처남인 대래동주가 말한 대로 호랑이며 표범, 늑대 같은 짐승들이 떼를 지어 둘러싸듯 따라오고 있었다.
맹획은 그 앞에 엎드려 그간에 있었던 일을 말하고 도와주기를 간절히 빌었다.
“좋소. 내가 대왕의 원수를 갚아드리리다.”
맹획의 말을 듣고 난 목록대왕은 기꺼이 그 청을 들어주었다. 맹 획은 기뻐 어쩔 줄 모르며 크게 잔치를 벌여 그를 대접했다.
다음 날 목록대왕은 자기가 이끌고 온 군사들과 사나운 짐승들을 데리고 촉군과 싸우러 나갔다. 위연과 조운은 만병들이 나온다는 말 을 듣고 군마를 펼쳐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오래잖아 목록대왕이 이끄는 만병들이 이르렀다. 조운과 위연이 진 앞에서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바라보니 만병의 깃발과 병기부터 가 유별났다. 군사들은 거의가 옷을 입지 않았는데, 벌거숭이 몸은 한결같이 붉고 얼굴은 못생긴 데다 더럽기 짝이 없었다. 손에는 모 두 네 자루의 날카로운 칼을 들었고 신호는 북과 징 대신 사금篩金, 구멍이 많이 뚫린 징 같은 악기인듯)이란 저희 악기를 썼다.
목록대왕은 허리에 두 자루 보검을 차고 손에는 자루 달린 종을 든 채 흰 코끼리 위에 앉아 있었다. 그 뒤로는 큰 깃발이 수없이 뒤 따르고 있었다.
조운이 위연에게 놀란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싸움터에서 일생을 보냈으나 저런 인물을 보기는 실로 처음이다!”
위연도 목록대왕을 보니 예사롭지 않아 놀란 빛을 감추지 못했다. 두 사람이 넋 잃은 듯 보고 있는데 갑자기 목록대왕이 뭔가 중얼 중얼 외며 들고 있던 종을 흔들었다. 그러자 홀연 미친 듯한 바람이 일며 모래와 돌을 비뿌리듯 촉군에게 퍼부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뒤이어 한소리 뿔나팔 소리가 나자 목록대왕이 데리고 온 짐승들이 이를 드러내고 발톱을 휘저으며 바람을 타고 촉군을 덮쳐왔다.
조운과 위연이 아무리 맹장이고 촉병들이 아무리 단련된 군사라 해도 그런 적과 싸워보기는 처음이었다. 촉군은 제대로 맞서 보지도 못하고 뒤돌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만병들은 그런 촉군을 뒤쫓아오 며 죽이다가 삼강 어름에서야 돌아갔다.
조운과 위연은 싸움에 진 군사들을 수습해 대채로 돌아갔다. 그리 고 공명을 찾아가 싸움에 진 죄를 빌며, 아울러 자기들이 보고 들은 일을 자세히 일렀다. 공명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싸움에 진 건 그대들의 죄가 아니다. 나는 초려에서 나오기 전에 남만에는 호랑이와 표범을 부리는 술법이 있음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촉을 떠날 때 그런 적을 쳐부술 수 있는 물건들을 마 련해서 왔다. 군사들 뒤에 따라오는 수레 중에 따로 봉해진 스무 대 가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 우선 열 대를 풀어 쓰면 까짓 잡술쯤은 어 렵잖게 물리칠 수 있다. 나머지 열 대는 나중에 따로이 쓸 데가 있을 것이다.”
그러고는 곁에 있는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후진에 가면 붉은 기름을 칠한 상자가 실린 수레 열 대와 검은 기름을 칠한 상자가 실린 열 대가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 붉은 것은 이리로 가져오고 검은 것은 따로 잘 갈무리해두어라.”
장수들은 그때까지도 공명이 무엇을 하려고 그러는지를 알지 못 했다. 군사들이 붉은 칠한 수레를 몰고 오자 공명은 그걸 뜯게 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나무로 깎아 칠을 한 큰 짐승들이었다. 겉에는 털가죽을 오색실로 바느질해 붙이고 강철로 된 이와 발톱을 단 것이 었는데, 크기는 한 마리에 열 사람이 올라탈 만했다.
공명은 날랜 군사 일천 명을 뽑아 그 나무로 깎은 짐승들을 몰게 하고 먼저 그 뱃속에다 백여 자루의 불이 잘 붙는 물건들을 집어넣 게 했다. 그리고 다시 수레 속에 감추게 한 뒤 다음 날이 되기를 기 다렸다.
다음 날 공명은 대군을 휘몰아 은갱동 앞으로 나아갔다. 촉군이 동구 앞에 진세를 벌이는 걸 만병들이 맹획에게 뛰어들어가 알렸다.
목록대왕이란 자는 전날의 승리로 간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스스로 적이 없음을 자랑하다가 그 소리를 듣자 얼른 맹획과 함께 은갱동을 나왔다.
공명은 윤건에 깃털 부채를 들고 검은 도복 차림으로 수레에 앉 아 있었다. 촉군 앞머리에서 그런 공명을 본 맹획은 공명을 손가락 질하며 목록대왕에게 말했다.
“저기 저 수레 위에 앉은 자가 바로 제갈량이오. 만약 이번에 저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큰일은 이미 다 풀린 것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목록대왕은 또 전날처럼 주문을 외며 종을 흔들기 시작했다. 금세 미친 듯한 바람이 일며 사나운 짐승들이 뛰어나왔다. 그걸 보고 있던 공명이 가만히 부채를 들어 한 번 휘저었다. 그러 자 그때껏 촉진을 향해 미친 듯 불어제치던 바람은 이내 방향을 바 꾸어 거꾸로 만병들을 휩쓸었다. 이에 촉진에서는 다시 나무로 깎아 만든 짐승들이 끌려나왔다. 모양이 크고 무시무시할 뿐만 아니라 입 과 코로는 불과 연기까지 내뿜고 있었다.
목록대왕이 풀어놓은 진짜 짐승들은 그런 촉진의 가짜 짐승들을 보자 깜짝 놀랐다. 입으로는 뻘건 불을 뿜고 코로는 시커먼 연기를 토하며 몸을 흔들어 구리 방울 소리를 내고 강철 이빨과 발톱을 휘 젓는 게 그것들에게 잡히기만 하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이에 짐 승들은 앞으로 내닫기는커녕 얼른 뒤돌아 꽁지가 빠지게 뛰었다.
갑자기 짐승들이 자기편을 향해 덮쳐오자 만병들은 금세 어지러워졌다. 놀라 쫓겨오는 짐승들에게 부딪치고 할퀴어 쓰러지는 자만
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공명은 그걸 보고 일제히 북과 징을 울리게 하고 대군을 몰아 적진으로 쓸어갔다.
그렇게 되니 싸움이고 뭐고 없었다. 그 기세 좋던 목록대왕의 군 사들은 풍비박산이 되고 목록대왕 자신은 어지럽게 부딪히는 군사 들 사이에서 어느 귀신에게 잡혀가는지도 모르는 채 죽고 말았다. 맹획은 급히 은갱동으로 달아났으나 병이 꼬리를 물고 따라 들 어오니 지켜낼 재간이 없었다. 마침내 맹획은 그 피붙이들과 더불어 궁궐을 버리고 산을 기어 넘어 달아나버렸다. 그 바람에 공명은 큰 힘들이지 않고 맹획의 본거지인 은갱동을 빼앗을 수 있었다.
은갱동을 차지해도 맹획이 보이지 않자 공명은 또 맹획이 달아난 걸 알았다. 다음 날 날이 밝는 대로 맹획을 잡으러 사람을 내보내려 하는데 문득 한 소식이 들어왔다.
“맹획의 처남인 대래동주가 맹획에게 항복할 것을 권하다가, 맹획 이 기어이 듣지 않자, 맹획과 축융부인 및 그 피붙이 백여 명을 사로 잡아 승상께 바치러 왔습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공명이었다.
당연히 기뻐할 소식인데도 기뻐하기는커녕 얼른 장의와 마충을 불러 귓속말로 무슨 영을 내렸다.
두 장수는 그 길로 나가더니 날래고 힘센 군사 이천을 뽑아 공명 의 장막으로 들어오는 길 양편에 숨겼다. 공명은 또 진문을 지키는 장수에게도 영을 내려 대래동주가 오는 대로 그냥 들여보내라고 시켰다.
얼마 후 대래동주는 수백 명의 도부수를 이끌고, 맹획과 그 피붙 이 백여 명을 잡아 묶어 공명의 진채에 이르렀다. 진문을 지키는 장 수가 그대로 들여보내니 대래동주는 오래잖아 공명 앞에 이를 수 있 었다. 그러나 저만치 앉아 있는 공명을 향해 무슨 수작을 붙여보기 도 전에 공명의 불호령이 먼저 떨어졌다.
“네놈들이 다시 내게 사로잡히러 왔구나! 여봐라, 어서 이놈들을 묶어라.”
그러자 양쪽 장막 뒤에서 장의와 마충이 이끈 이천 군사가 뛰쳐 나와 두 명이 만병 하나씩을 잡아 묶었다. 그들이 모두 묶인 뒤에야 공명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내 진작에 너희들의 잔꾀를 알아보았더니라. 그따위 어린애 같은 수작으로 어찌 나를 죽일 수 있겠느냐? 네 두 번째로 사로잡혔을 때 도 너는 너희 동 사람들과 짜고 거짓 항복을 해온 적이 있다. 그 때 문에 네가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하지 않을 줄로 내가 믿을 줄 알고 이번에 또 거짓 항복으로 나를 죽이려 하다니!”
그러고는 무사들을 시켜 맹획과 그 피붙이들의 몸을 뒤지게 했다. 정말로 그들의 몸에는 날카로운 칼이 감춰져 있었다. 거짓으로 사로 잡힌 체 왔다가 때를 보아 줄을 끊고 대래동주가 이끌고 온 도부수 들과 힘을 합쳐 공명을 죽이려 했음에 틀림없었다.
비록 공명의 밝은 눈을 속이지는 못했지만, 여기서 한번 살펴보고 싶은 것은 그 계략을 통해 엿볼 수 있는 맹획의 굽힐 줄 모르는 정 신이다. 수십만 촉군의 진채 한가운데 겨우 수백 명으로 뛰어들었으 니 설령 계략이 성공해서 공명을 죽인다 해도 그들이 살아날 수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맹획과 그 일족들은 그런 비장 한 계책을 쓰고 있다.
그 얼마 뒤 위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밀우(密友)가 항복을 가장해 위장 관구검을 찔러 죽이고 몰리던 동천왕(東川王)을 위기에 서 구해낸 일이 연상된다. 그런데 맹획은 왕인 그 자신의 목숨을 던 져서라도 병을 물리치려 하고 있는 셈이다. 요샛말로 그 무엇에도 꺾일 줄 모르는 자유의 넋이라고나 할까.
공명은 여섯 번째로 사로잡힌 맹획에게 물었다.
“너는 전에 말하기를 너의 근거지인 은갱동에서 사로잡히면 그때 는 내게 마음으로 항복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사로잡 혔으니 어떻게 하겠느냐?”
맹획이 이를 갈며 한스러워했다.
“이번 일은 우리가 제발로 죽으러 걸어 들어온 것이지 당신이 재 주가 좋아 나를 사로잡은 것은 아니오. 나는 마음으로 항복할 수 없 소이다.”
“나는 너를 여섯 번째 사로잡았다. 그런데도 아직 항복하지 않겠 다니,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이냐?”
공명이 성나기보다는 딱하다는 듯 그렇게 물었다. 맹획이 한 번 더 어거지를 썼다.
“승상께서 나를 일곱 번째로 사로잡는다면 그때는 딴말 않고 항 복하겠소. 그리고 맹세코 두 번 다시 배신하지 않으리다!”
“그건 어렵지 않다. 이미 네 둥지와 굴이 모두 부서졌는데 내가 걱정할 게 무어 있겠느냐?”
공명은 선뜻 그렇게 말하고 무사들에게 맹획을 얽은 밧줄을 풀어주게 했다. 그러면서도 다짐만은 이번에도 잊지 않았다.
“이번에 사로잡혀서도 또다시 버틴다면 그때는 결코 가볍게 용서 하지 않겠다. 새겨듣고 뒷날 뉘우침이 없게 하라!”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왔는데 공명이 다시 살려서 보내주니 아 무리 맹획이라도 더 들고 떠들 낮이 없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 듯 해 공명 앞을 물러났다.
그때 맹획의 졸개로 남은 것은 겨우 천 명 남짓했다. 그것도 절반 은 다친 채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뒤따라온 맹획과 만났다. 맹획이 그들을 달래 다시 한번 싸워볼 것을 말하자, 그들은 그때껏 맹획을 따르다가 당한 고초도 잊고 거기 따랐다.
여기서 간접적으로나마 또다시 엿볼 수 있는 것은 맹획이 그 피 붙이와 아랫사람들로부터 얻고 있는 신망이다. 웬만한 인물이라도 두 번 세 번 실패가 겹치면 모두 떠나가게 마련이건만, 그는 여섯 번 을, 그것도 두말할 여지없이 참담한 실패를 거듭했건만, 그의 피붙 이와 졸개들은 여전히 그를 따르고 있다. 설령 그것이 신망이 아니 고 교묘한 언변이나 그밖에 또 다른 어떤 속임수에 의한 것이라 하 더라도, 맹획이 비범한 인물인 것만은 부정할 수가 없다.
다시 부릴 수 있는 사람을 얼마간 얻게 되자 맹획은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처남인 대래동주와 머리를 맞대고 앞일을 궁리했다.
“이제 우리의 근거지인 은갱동을 촉병에게 빼앗겼으니 막막하구나. 어디로 가서 누구에게 의지해 다시 한번 공명과 싸워본단 말인가?”
그러자 대래동주가 귀가 번쩍 트일 소리를 했다.
“제가 아는 나라들 가운데 병을 쳐부술 수 있는 나라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리로 가서 힘을 빌려보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게 어느 나라인가?”
맹획이 지옥에서 부처라도 만난 듯한 얼굴로 성급히 물었다. 대래 동주가 자신있게 말했다.
“오과국(國)입니다.”
“오과국은 어디로 가면 있으며 어떠한 나라인가?”
맹획이 한층 급해서 물었다. 대래동주가 차근차근 말해주었다.
“여기서 동남으로 칠백 리를 가면 그 오과이 있습니다. 그 나라 의 임금 올돌골(骨)은 키가 두 길이나 되는데 다섯 가지 곡식 대 신에 살아 있는 뱀과 온갖 모진 짐승을 밥 삼아 먹습니다. 그래서인 지 몸에 비늘이 돋아 갑옷처럼 칼과 화살을 막아낸다고 합니다.
또 그 아래 있는 군사들은 모두 등갑(藤甲)을 입고 있는데, 그 갑 옷이 매우 특이하다고 합니다. 그 갑옷을 만드는 등나무는 그 나라 의 산간 바위 절벽에 자라는 것으로 그 나라 사람들은 그걸 베어다 반년 동안 기름에 담가두었다가 꺼내 말리고 다시 담그는 식으로 여 남은 번을 되풀이합니다. 그런 다음 그 등으로 갑옷을 짜면 몸에 입 은 채 강물에 뛰어들어도 가라앉지 않고, 물에 젖지 않으며 칼과 화 살이 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갑옷을 입은 군사들을 무서워해 특히 등갑군(藤甲軍)이라 부르지요.
이제 대왕께서 그 오과국에 가서 구해주기를 청해보십시오. 만약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제갈량을 사로잡는 일은 잘 드는 칼로 대나무를 쪼개는 것보다 더 쉬울 것입니다.”
거기까지 설명을 듣자 맹획은 크게 기뻐했다. 곧 모든 졸개들을 이끌고 오과국으로 달려갔다.
동남쪽으로 칠백 리를 밤낮없이 달려가니 과연 오과국이 나왔다. 아직도 집을 짓지 않고 동굴에 사는 족속들의 나라였다. 맹획은 그 임금 올돌골을 찾아보고 엎드려 절하며 그때껏 있었던 일을 낱낱이 알리며 도움을 빌었다. 같은 종족끼리의 정인지 자신의 강대함에 대 한 자부심 때문인지 올돌골은 맹획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선뜻 말 했다.
“알겠소. 내가 이 나라의 군사를 일으켜 당신의 원수를 갚아드리겠소.”
맹획은 그런 올돌골이 고맙기 그지없었다. 다시 한번 엎드려 절하 며 그 고마움을 나타냈다.
올돌골은 지체 않고 저희 장수[俘長]둘을 불렀다. 한 사람은 이름 이 토안(安)이요, 다른 한 사람은 해니(奚泥)였다.
“이제 우리는 등갑군 삼만을 이끌고 동북으로 가서 촉인지 뭔지 하는 나라의 군사를 쳐부수고 그 우두머리 제갈량을 사로잡으려 한 다. 어서 군사를 일으킬 채비를 하라.”
이에 맹획은 올돌골과 토안, 해니가 이끈 등갑군 삼만을 얻어 다 시 공명과 싸우러 떠났다. 오과국을 떠나 동북쪽으로 한참 올라가니 도화수(桃花水)란 강이 하나 나왔다. 양쪽 강 언덕에 복숭아 나무가 빽빽이 자라는데, 해마다 그 잎이 물에 떨어져 독이 되어 만약 딴나 라 사람이 그 물을 먹으면 모두 죽었다. 그러나 오과국 사람들이 그 물을 먹으면 정신이 배나 맑아졌다.
오과국 군사들은 그 도화수 나루에다 진을 치고 촉군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한편 여섯 번째로 맹획을 놓아 보낸 공명은 맹획이 한동안 보이지 않자 만인들을 풀어 그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 얼마 안 돼 회보가 들어왔다.
“맹획은 오과국 임금에게 도움을 청해 삼만 등갑군을 얻어왔습니 다. 지금 도화수 나루에 진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맹획은 각지 방의 만병들을 다시 긁어모아 그들과 힘을 합쳐 우리에게 맞서려 하 는 바, 그 세력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공명은 조금도 걱정하는 빛 없이 대군을 몰아 남으로 내려갔다.
곧바로 도화수 가에 이른 뒤 강 건너 만병들을 바라보니 사람의 형상 같지가 않았다. 더럽고 못생기기가 목록대왕의 졸개들에게 비 할 바가 아니었다.
복숭아 잎이 떠 흐르는 강물도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지난번 독 룡동에서 독 있는 샘물에 애를 먹은 적이 있는 공명은 그곳 토박이 주민 하나를 찾아오게 해 물었다.
“이 물이 어째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아는 대로 말하라.”
“지금 한창 복숭아 잎이 강물에 떨어지는 때입니다. 오과국 사람 이 아니면 이 물을 마셔서는 아니 됩니다.”
불려온 토박이 주민 하나가 그렇게 알려주었다. 공명은 비로소 만 병들이 왜 그 물가에 진을 쳤는지 알 만했다.
“군사들을 물가에서 오 리쯤 뒤로 물려라. 거기다가 진채를 내리고 싸울 채비를 하라.”
공명은 그렇게 영을 내리고 위연으로 하여금 그 진채를 맡아지키게 했다.
다음 날이 되었다. 오과국 임금은 한 떼의 등갑군을 이끌고 강물 을 건너 촉군에게 덤볐다.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듯한 북소리, 징소 리에 적이 온 줄 안 위연도 군사를 이끌고 진채를 나가 그들을 맞았 다. 오래잖아 만병들이 땅을 발로 구르며 촉병 앞에 이르렀다.
병들은 활과 쇠뇌에 살을 먹이고 만병들에게 쏘아 붙였다. 그러 나 놀랍게도 화살은 하나도 그들의 갑옷을 뚫지 못하고 퉁겨져 나와 땅에 떨어졌다. 놀라운 일은 그뿐이 아니었다. 이윽고 적이 다가와 칼로 베고 창으로 찔렀지만 도무지 그 괴상한 갑옷을 뚫을 길이 없 었다.
놀라고 겁먹은 촉병들이 갈팡질팡하자 만병들은 더욱 기세가 올 랐다. 날카로운 칼과 쇠작살로 베고 찌르며 덮쳐오니 병들이 어떻 게 당해낼 수가 없었다. 곧 이리저리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다행스런 것은 만병들이 악착스레 뒤쫓아오지 않는 점이었다. 그 바람에 위연은 곧 군사를 수습해 되돌아올 수 있었다. 위연이 다시 도화수가에 이르러 보니 오과국 군사들은 강물을 건너 저희 진채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위연은 또 한번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화살도 창 칼도 들어가지 않아 단단하기 그지없는 갑옷이었는데도 오과국 군 사들은 그 갑옷을 입은 채 강물을 헤엄쳐 건넜다. 개중에 지친 군사 들은 숫제 갑옷을 벗어 물 위에 띄우고 그 위에 올라앉아 강을 건너기도 했다. 단단할수록 무겁다는 게 위연이 아는 이치였으나 만병들에게는 그것도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급히 대채로 돌아간 위연은 공명을 찾아보고 자기가 본 놀라운 광경을 얘기해 주었다. 듣고 난 공명은 여개와 그곳 토박이들을 불 러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어째서 갑옷이 물에 뜰 수가 있소?”
여개가 가만히 기억을 더듬다가 대답했다.
“내가 듣기로 오과국이란 나라는 사람의 도리를 모르는 곳이라 합니다. 또 그 나라 사람들은 등갑이란 갑옷을 입는데, 그 갑옷 입은 자를 쉽게 다치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나라에 있다는 복숭아 잎이 섞인 독한 물도 유별난 데가 있습니다. 그 나라 사람이 마시면 정신이 갑절이나 맑아지지만 딴 나라 사람이 마시면 바로 죽는다고 합니다. 그 같은 오랑캐 땅을 구태여 싸워 얻어본들 무엇에 쓰겠습 니까? 이쯤에서 그만 군사를 돌리는 게 나을 듯합니다.”
남만의 지리에 밝다는 여개도 어지간히 겁먹은 얼굴이었다. 그러 나 공명은 조금도 어두운 기색 없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내가 여기까지 오기를 쉽게 하지 못했는데 어찌 돌아가는 것만 그리 쉽게 할 수 있겠소? 내일은 내가 한번 나가보리다. 내게는 오 랑캐들을 평정할 계책이 이미 섰소.”
그런 다음 조운과 위연을 불러 영을 내렸다.
“그대들은 진채를 굳게 지키기만 하고 결코 가볍게 나가 맞서지 말라.”
정말로 무슨 계책이 있는 듯한 태도였다.
다음 날이 되었다. 공명은 그곳 토박이를 길잡이로 삼아 몸소 작은 수레를 타고 진채를 나왔다. 도화수 나루 북쪽 산기슭에 올라 지 세를 살펴보려는데 산마루가 험해 수레가 오를 수 없었다. 공명은 하는 수 없이 수레에서 내려 걸어 올라갔다.
한 산꼭대기에 이르니 그 아래 골짜기 하나가 보이는데 꼭 긴 뱀 같았다. 양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섰고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그 골짜기 가운데로 한 줄기 큰길이 나 있었다.
“저 골짜기는 이름이 무엇인가?”
공명이 길잡이로 데려간 토박이에게 물었다. 그 토박이가 아는 대로 대답했다.
“반사곡이라고 합니다. 골짜기를 빠져나가면 삼강성(三城)으로 가는 큰길이 되고, 골짜기 앞은 탑랑전(塔郞甸)이란 곳입니다.”
그 말을 듣자 공명은 무엇이 기쁜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저곳은 하늘이 내게 공을 이루게 하려고 마련해놓은 땅이다!”
드디어 오과국 군사들을 두들겨 부술 계책을 얻은 듯했다.
공명은 올라온 길로 되내려가 수레에 오른 뒤 급히 진채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