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1권 – 1화 하늘이 불타던 날 1 : 밀교(密敎)

퇴마록 국내편 1권 – 1화 하늘이 불타던 날 1 : 밀교(密敎)

밀교(密敎)

이미 해는 산속으로 저물어 밤이 깊은 시각이었다. 온통 안개 에 휩싸인 해동밀교(海東敎)의 내부는 열을 지어서 서 있는 승 려들이 손에 든 횃불 때문에 뿌옇게 밝았다. 침울한 표정의 승려 들이 서 있는 앞으로 문이 활짝 열린 큰 회당이 있었다. 회당 내 에는 기이한 모습으로 꾸민 화려한 제단이 있었는데, 그 앞에 발 이 묶인 송아지 한 마리가 버둥거리고 있었다. 제단 뒤로는 도대 체 절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특이한 모습의 다섯 사 람이 묵묵히 서 있었다. 늙어서 머리가 학처럼 센 도인도 있었고 소복을 입은 중년 여자와 외국인처럼 보이는 승려, 허리가 구부 정한 중년의 대머리 남자와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은 장한도 보 였다. 그들의 눈에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감과 슬픔 같은 것이 깃 들어 있었다.

안개를 뚫고 낮게 울려 퍼지는 독경의 합창 소리와 함께 울긋 불긋한 가사를 걸친 장년의 남자가 들어섰다. 마당에 도열해 있 던 승려들을 비롯하여 제단 뒤에 시립한 다섯 사람도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옷차림과 머리에 쓴 관이 방금 들어선 남자가 이 교단의 교주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남자의 등장과 함께 곧바로 의식이 시작되었다. 여러 가지 독 경과 기이한 의식의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제단 뒤에 도열한 다 섯 사람은 내내 안색이 편치 않아 보였다. 이윽고 두 명의 승려 가 몸을 덜덜 떨며 제단 앞으로 나와 묶여 있는 송아지를 끌어 제단 위로 올렸다. 두 승려는 주저했다. 그러나 매섭게 쏘아보는 교주의 눈과 마주치자 마지못해 칼을 집었다. 교주의 얼굴은 온 화해 보였으나 눈에는 새파란 기운이 번득였다.

한 승려가 마침내 결심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는 송 아지의 목을 칼로 그었다. 송아지가 내지른 단말마의 비명이 경 내에 메아리치자 도열해 있던 승려들은 끔찍한 듯 몸을 치떨었 다. 눈을 감고 외면하는 사람도 있었다. 얼굴이며 몸에 피를 뒤 집어쓴 두 승려는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는 송아지의 목을 제단 으로 끌어 올리려 했으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탓인지 꾸물대 고 있었다.

교주의 눈과 입이 일그러졌다. 그는 제단 앞으로 성큼 다가가 두 승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너희들! 그렇게 나약한 마음가짐으로 대자재천(大自在天)*에게 올리는 의식을 행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는 벌벌 떨고 있는 두 승려를 밀어내고는 양손으로 송아지 의 머리와 간헐적으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는 목을 움켜쥐었 다. 그러고는 범어(梵語)로 주문을 읊으면서 놀라운 힘으로 송아 지의 머리를 뜯어냈다.

뒤쪽에서 횃불을 들고 서 있던 승려 하나가 털썩 무릎을 꿇고 는 곧바로 토하기 시작했다. 제단의 바로 뒤에서 묵묵히 그 광경 을 보고 있던 다섯 사람의 눈초리도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교주 는 태연하게 한 손으로 송아지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 다른 손으 로 송아지의 온몸을 부욱 훑어 내려갔다. 우두둑우두둑 뼈가 으 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끊어진 멱에서 선지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제단에 흘러넘쳤다. 교주는 이윽고 피로 시뻘겋게 된 손을 높이 들고 잠시 주문을 외우다가 이내 불만스러운 듯 경내가 떠나갈 듯 고함을 질렀다.

“이런 것 따위로는 어림도 없다! 시바 신께서는 더 큰 제물을 원하신다! 의식을 중단한다!”

승려들은 의식이 끝났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고개를 숙이고

[*대천세계(世界)의 주(主). 눈은 셋, 팔은 여덟이며, 흰 소를 타고 흰 불자를 들고 있다.]

무릎을 꿇었다. 남자는 그런 승려들이 못마땅했던지 다시 욕설을 퍼부어댔다. 그때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제단의 뒤에 있던 허리가 구부정한 대머리의 남자가 외쳤다.

“교주님! 금단으로 정해진 피의 공양제(祭)까지 올렸는 데, 또 무엇을 더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이제 더 이상의 피와 살육이 넘치는 경배는…………….”

“닥쳐라! 장호법!”

서 교주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의 몸 주변에서 찬바 람이 몰아쳐 나왔다. 그저 느낌뿐이 아니었다.

“희생이 없으면 힘을 얻지 못한다! 대자재천이신 시바 신이야 말로 위대한 힘을 가지신 분이다! 그분은 생명을 희생함으로써 만 가까이 모실 수 있다!”

장호법도 지지 않고 외쳤다.

“도대체 무엇을, 누구를 위한 희생이란 말입니까! 면면히 이 어진 신성한 경내에서…………….”

장호법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뒤에서 머리가 하얗게 센 도 인 풍모의 노인이 어깨를 잡았기 때문이다. 장 호법은 성난 얼굴 로 한숨을 쉬고는 몸을 돌려 나가 버렸고, 서 교주는 씩씩거리다 가 살기를 띤 푸른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송아지의 멱을 따면서 피를 뒤집어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벌벌 떨고 있는 두 승려 가 보였다. 서 교주의 눈이 그들을 향하자 두 승려는 무엇에 홀린 듯 멍한 눈초리로 몸을 일으켰다.

“너희들, 나를 따라와라. 할 일이 있다. 나머지는 이곳을 정리하고 해산하라!”

서 교주의 눈은 이글이글 타올랐다. 제단 뒤에 서 있던 사람들 이 굳게 입을 다문 채 휘청거리고 있던 승려들을 재촉하여 주변 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경내는 비릿한 피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모두 잠이 든 듯, 교단의 경내는 쥐 한 마리 다니지 않고 고요 했다. 그러나 안개로 둘러싸인 산에 수없이 뚫려 있는 빈 토굴 중 굳게 문이 닫혀 있는 한 곳에서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가늘 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주 희미한 소리였으나, 문에 바짝 귀 를 붙이고 있던 사람은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 다. 바로 장호법이었다. 그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온몸을 부 들부들 떨었다. 길고 처참하게 이어지던 비명 소리는 귀에 익숙 한 열띤 주문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제물을 바꾸어 아까의 미흡 했던 의식을 다시 거행하고 있는 것이다. 서 교주를 따라갔던 두 승려의 모습은 이제 영영 볼 수 없을 것이다.

장호법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찡그리며 분노로 몸을 부들부 들 떨었다. 울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토굴 안으로 뛰어들어 가 려 했다. 그때 누가 조용히 어깨를 잡았다. 장호법은 뒤를 돌아 보았다.

“상, 상좌호법님!”

장호법을 다시 제지한 사람은 노(老)도인이었다. 노도인은 묵 묵히 장호법을 끌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 인한 노도인은 장호법에게 말했다.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네. 혈기만으로 교주를 이길 수 있을 것같은가?”

장호법은 오열을 터뜨리며 노도인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었다.

“상좌 호법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서 교주가 서교주가 어쩌다 저렇게 되었단 말입니까. 정의감 강하고 총명하 던 사람이……………..”

“힘에만 집착한 탓이라네. 진정하게. 자네와 동문수학했다지?”

“그가 어째서 저렇게…………….”

장호법은 북받치는 감정에 말을 잇지 못했다. 노도인은 반짝 이는 눈으로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알 수 없지. 수련이 깊을수록 욕심도 많아지 고 유혹도 깊어질 수 있는 게야.”

노도인은 말을 끊고 잠시 고개를 흔들다가 장호법을 일으켰다.

“이제 어찌할 방법이 없네. 우리 임무를 생각하게나. 종파야 다르지만, 우리는 어쨌거나 이 해동밀교를 수호하는 호법의 위 치가 아닌가.”

“그러면 이제 어떻게………….”

“자네가 해 주어야 할 일이 있네.”

장호법은 고개를 들었다. 마음을 다잡은 듯 눈빛이 이글거렸다. 노도인이 말을 이었다.

“교주가 알지 못하는 강한 힘을 가진 외부인의 도움이 필요하네.”

“외부인이라면…..”

“내 한 사람 들은 바 있지. 벌써 오랫동안 이적을 행하고 다닌 다는 신부가 있네. 파문당한…….”


현암은 기분이 이상했다. 같은 버스를 탄 사람들 가운데 이상 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운은 한 군데가 아니라 두군데에서 나오고 있었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어렸을 때 아픈 몸을 고치려고 기공을 배우며 얻었던 미약한 감지 능력마저도 거의 사라져 버렸다. 직감만 남았을 뿐이다. 현암은 고개를 젖히 고 탄식을 발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지난날은 너무도 파란만장했다.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일들의 연속이었다.

‘현아야…………….’

하나뿐인 여동생 현아는 이제 현암 곁에 없었다. 육 년 전의 일이다.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비참한 제물이 되어 버린 현아…………..

현암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눈물이 한 방울 현암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빠를 용서해 주렴, 현아야.’

실성하다시피 한 현암은 비참하게 죽은 동생의 복수를 결심했 으나, 요즘 세상에 귀신의 존재를 믿고 현암을 도와주려는 사람 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안됐다는 반응을 보일 따름이었다.

현암은 비밀로 전해지던 태극기공(太極氣)의 비급을 훔쳐 내면서부터 수련을 시작했다. 그러나 기공을 잘못 익히는 바람 에 전신이 마비되고 말았다. 그때 운명적으로 다가온 산중 이인 (異人) 한빈 거사. 그는 죽어 가던 현암을 살리고 파사신검, 사자후(獅子吼), 부동심결(不動心)이라는 태곳적의 무 예를 전해 주었다. 그러나 스승이 떠난 직후 무리하게 수련을 하 다가 온몸의 혈도가 뒤틀리고 말았다. 이때 다시 생명의 은인이 나타났으니, 도혜 스님은 칠십 년간 쌓아온 자신의 진원지기(眞 元氣)를 현암에게 불어넣어 그를 살리고 막강한 힘을 갖추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떠나 버렸다.

옛 기억 속을 헤매던 현암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차가 목적지 에 도달했는지 사람들이 수런거리며 짐을 챙기기 시작했기 때문 이다. 현암은 다시 이상한 영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현암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세세히 훑어보 기 시작했다. 대부분 평범한 관광객이었으나 맨 뒷자리에 앉은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서로 다른 두 갈래의 영력은 그들에게 서 흘러나왔다. 한 사람은 키가 크고 체구가 장대하며 쉰 살 정 도 되어 보이는, 희끗희끗한 머리에 안경을 쓴 모습이 부드럽고 독실한 인상을 주는 남자였다. 다른 한 사람은 나이는 비슷해 보 였지만 허리가 굽은 듯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눈빛이 매 섭고 머리가 반쯤 벗겨져 있었다. 두 사람의 행색은 유별난 점이 없었으나 심상치 않은 영력을 발산했다.

현암은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한빈 거사와 도혜 스님에게 배 움을 마치고 하산한 작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현암은 비틀 린 혈도를 바로잡기 위해 찾아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금은 예 로부터 비밀로 전수되어 내려오고 있다는 해동밀교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해동밀교는 중국이나 일본의 밀교와는 달리, 가야 시대에 바 로 인도에서 유입된 후 비밀리 전승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비밀 종교라고 들었다. 대승 불교가 삼국에서 정식으로 발을 붙이기 이전부터 전승되어 왔다는 해동밀교는 독특한 체계를 구축하여 오늘날까지 맥을 이어 오고 있었는데, 자세한 내막은 철저히 비 밀에 붙여져 있었다. 현암도 나중에 간신히 찾아가 만난 도혜 스 님에게 듣지 않았다면 해동밀교의 존재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도혜 스님 말씀에 따르면, 해동밀교는 인도나 티베트에서 전해 지는 밀교 이상으로 이적(異)이나 영능력이 뛰어나다고 했다. 고대부터 비전되어 왔다는 해동밀교를 통한다면 비틀린 혈도를 바로잡고 스승들이 물려준 엄청난 내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도혜 스님은 현암에게 은근히 내비쳤다. 버스가 터미널에 들어섰다. 현암은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현암이 힐끔힐 끔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도 그럴 것 이, 현암의 혈맥은 뒤틀려져 있어서 일반적인 대주천(大)이 나 소주천(小)*도 보통과 다르게 곁길로 행해지고 있었고, 상단전마저 일그러져 버렸기에 일반적인 영능력을 구사할 수 없 는 특이한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세히 관찰하기 전에는 영능력자들이 현암의 몸에 감추어진 내력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현암은 두 남자를 우연히 마주친 영능력자라고 생각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묵묵히 같은 길을 걸었다. 그들의 표정 은 착잡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체구가 장대한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를 전신에 순행시키며 새로운 에너지의 흐름을 일으키게 하는 일주 과정. 대 주천과 소주천은 혈의 운행 경로가 다르다.]


“무서운 일이군요. 교주가 힘을 얻기 위해 인신 공양(人身供養)까지 서슴지 않을 정도로 난폭해졌다니.”

머리가 벗겨지고 허리가 구부정한 남자가 대답했다. 눈빛이이글거리고 있었다.

“저희는 최후의 결단을 내리기로 했습니다. 교주를 제압하여 힘을 빼앗고 물러나게 하기로 말입니다.”

“그건 교내의 일이 아닙니까? 저는 밀교에 몸을 담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박 신부님은 종교나 교파를 가리지 않고, 다만 사람들 을 위하여 능력을 발휘하시는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 희도 박 신부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저 정도의 능력이야 호법님들도 갖고 계실 텐데요. 장호법님은 물론이고요.”

장호법이라 불린 남자가 대답했다.

“교주의 힘은 막강합니다. 그는 사람을 돕는다는 밀교의 본질 을 망각하고 옛 바라문교 때의 악의 힘들을 불러내 그 힘을 완전 히 얻어 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희 힘만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교주가 우리 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우리와 근본이 전혀 다른 분들의 도움이 필요한 겁니다.”

“밀교의 본질이 사람을 돕는 것이라면, 교주도 사람에 불과합 니다. 그를 예전의 상태로 개과천선시킬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을까요?”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미 악의 힘 자체에 도취되어 버렸답니다. 힘 이외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금지된 시바나 아수라(阿修羅)*에게까지 의식을 올리며, 밀교 자체의 근 본인 자비의 교리조차 거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크게 난 리를 일으켜 세력을 얻을 생각마저 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그는 인간들의 세상이 아닌, 신력(神)이 지배하는 악령들의 세 상을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요?”

“우리가 막지 않는다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가능해 질 겁니다. 문제는 교주가 노리는 시점이 지금이라는 데 있어요. 생명을 경시하고 정신과 영혼의 가치를 무시하는 지금의 세상과 교주의 능력이 결부한다면 서 교주의 사상은 엄청나게 확대될 겁니다.”

“흠…박신부라 불린 큰 체구의 남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밀교의 교주는 수양이 깊은 사람이었을 텐데,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 고대 인도의 신. 후에 제석천과 싸우는 귀신으로 육도 팔부중)의하나가 되었다.]

“저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저와는 과거 동문수학하기도 했지요.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자비심이 깊은 사람이었는데 교주로 선출되고 난 후에 변했어요.’

“혹시 어떤 사악한 힘에 의해 조종되는 것은 아닐까요?”

“교주 정도의 영능력을 가진 사람이 다른 악귀나 악신의 조종 을 받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죠. 문제는 교주 자신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집착이 강한 사람이었기에 지나치게 힘에 몰두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장호법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저희 해동밀교 오대 호법의 의 견은 이미 일치했습니다.”

두 사람은 나직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현암이 앞서 간 곳과 같은 방향이었다.


현암은 한참이나 산길을 헤매고 있었다. 자기에게 해동밀교의 존재와 소재지를 일러 준 도혜 스님은 그 장소가 주악산이라는 것밖에는 말해 주지 않았다. 현암은 무턱대고 주악산에 들어서 긴 했으나 도무지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현암의 몸은 어렸을 적부터 기계 체조로 다져져 있었고 아픈 몸을 치료하기 위해 기공도 연마했다. 굳이 도혜 스님이 물려준기공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웬만한 일에는 보통 사람 이상의 힘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산길을 헤매고 다녀도 그다지 지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암의 기공력은 오른팔로만 발휘되는 지라 기해(海) 주위에 힘을 주어 몸을 단단히 보호하는 정 도가 고작이었다. 혈도가 온통 비틀려 있는데도 현암이 일반인 처럼 몸을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자신뿐 아니라 한번 거 사, 도혜 스님 같은 고인(人)조차 정확한 이유를 알아내지 못 한 수수께끼였다.

어쨌든 현암은 당혹해하고 있었다. 육 년 동안이나 산중에서 수련한 자신이 별로 크지도 않은 작은 산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다. 해동밀교의 본산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는 게 분명해.’

현암은 다시 정상으로 향했다. 아무리 세력이 작더라도 종교의 본산이라고 하면, 그래도 규모가 상당할 것이 틀림없다. 사찰 이 동굴 같은 곳에 숨어 있을 리는 없다.

현암은 빠른 걸음으로 산의 정상으로 올랐다. 규모가 그리 크 지 않았지만, 하루 종일 산속을 헤매다 보니 지치지 않을 수 없 었다. 오전부터 헤매고 다녔는데 벌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갔다. 현암은 몇 개 되지 않는 주악산의 봉우리를 헤아리며 산세를 더 듬어 살폈다.

‘뭐지, 저건?’

현암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오전에 정상에 올랐을 때 현암은 동쪽 봉우리 밑에 끼어 있는 짙은 안개를 보았다. 그때는 해가 동쪽에서 뜨고 있었으니 햇볕이 산에 가려서 안개가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지 않은가? 햇볕이 쨍쨍하게 내리쬐고 있는데도 안개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저쪽으로 가보자.’

현암은 필시 이 손바닥만 한 산중에 사찰이 있을 만한 곳이 저 안개 낀 장소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박 신부는 해동밀교의 본산에 도착했다. 다섯 호법이 한자리 에 모여 있었다. 박 신부를 인도한 장호법과, 그 옆으로 눈처럼 하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도사 차림의 노인, 인도인처 럼 보이는 매부리코의 중년 남자, 흰 소복을 입은 중년 여인, 누 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있는 젊은 남자도 있었다.

장호법이 도사 차림의 노인을 박 신부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도호를 벽공(空)이라 하는 분입니다. 제일 상좌의 호법을 맡고 계시며 중국 화산파(華山派)와 우리나라 도맥의 일 류를 계승하신 분입니다.”

상좌 호법인 벽공 도인은 선골(骨)의 풍모를 물씬 풍기면서 말없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무척이나 나이가 많아 보여서 몇 살인지 박 신부는 짐작도 할 수 없었고, 다른 호법들도 가장 연 장자인 그에게 매우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이쪽은 스스로를 마가磨架)라고 부르는 분이십니다. 제삼 좌의 호법을 맡고 계시며 인도에서 밀교 진전을 이으셨던 분입 니다.”

장호법은 유일한 외국인인 제삼 호법 마가를 가리켰다. 마가 호법은 떠듬떠듬 박 신부와 인사를 나누었다.

“이분은 제사좌 호법이신 을(乙) 님이십니다. 무가(巫) 의 일맥을 잇고 계시지요.”

소복을 입은 중년 여인이 꾸벅 인사를 했다. 젊었을 때는 꽤 미인이었을 것 같았다. 박 신부는 제사 호법인 무당 을련과 미소 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이쪽은 제오좌호법인 허허자(虛虛)입니다. 모산파 (山派)의 부적술에 능통한 재주꾼이지요.”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은 제오 호법 허허자는 나이가 가장 어 렸다. 서른쯤 되었을까? 퍽 솔직한 성격의 인물로 보이는 허허자 는 씩 웃으며 인사를 했고 박 신부도 응답했다. 올림픽까지 치른 지금, 우리나라에 아직까지 이런 고인들이 은거하고 있을 줄은 박 신부도 미처 알지 못했다. 다만 화산파나 모산파 같은 도맥 (道)이 왜 여기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중국의 문화 혁명 이후 도교나 불교 전승자들은 혹독한 탄압을 받아 맥이 끊기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외국인에게라도 비전을 전승하여 그 맥을 보존하고자 했다. 여기 두 사람의 호법도 그렇 게 중국의 도맥을 비전을 잇게 되었을 것이다.

박신부는 신분상 이교(異敎)의 인물이 분명한 이 사람들과 교 류를 하는 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분명한 사명이 있었다. 종교나 믿는 바에 구속되지 않고 초자연적인 현 상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꾸준히 활동해 온 퇴마행( 行)십사 년………. 박 신부는 퇴마행을 계속하여 사람들을 구 하는 것만이 자기 숙명이자 미라의 죽음에 얽힌 마음속의 짐을 더는 것으로 굳게 믿었다.

다섯 호법은 심각한 얼굴이었다. 원래 해동밀교는 사람을 돕 는다는 기본 이념에 교단 체제가 없는 종파였기에 다른 종교에 관대했다. 오히려 해동밀교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모아 특유의 기술을 전수받고 그들을 호법으로 삼는 전통이 있었으 며, 그래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의 기인(奇人)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오대 호법을 맡고 있었다. 그런 설명을 박 신부는 장호법에게 이미 들은 터였다. 그렇다고 박 신부가 제육 호법이 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은 아니다. 이들은 박 신부의 강한 기 도력을 빌리고자 바랄 뿐이었다. 너무나 사악해져서 엄청난 해 를 끼칠 교주를 막기 위해…

“박 신부님을 초빙한 이유는 사실 매우 복잡합니다만….”

장호법이 입을 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저희들의 모든 수법과 영력을 교주가 속속 들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힘을 합한들 힘을 뻔히 알고 있는 교주와 대적해서는 승산이 없습니다. 그리고 교주에게는 여러 명의 추종자들이 있습니다.”

“제가 힘이 되어 드릴 수 있을까요?”

“실례되는 말씀일지 몰라도 가톨릭에서 박 신부님만큼 강한 능 력을 가진 분은 찾기 힘듭니다. 교주도 그쪽의 대비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박 신부님을 모시게 된 가장 큰 이유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요?”

“두 번째로, 교주에게는 무서운 비밀 무기가 있습니다.”

“무기요?”

“물론 흔히 말하는 무기는 아닙니다. 사람이지요.”

“사람이라고요?”

“아이입니다. 아홉 살밖에 안 되는 아이.”

“아이라고요? 아니, 아이가 어떻게 무기가 될 수 있습니까?”

“그게……….””

장호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그 아이는 바로 제 친아들입니다. 준후라고 하지요.”

수심으로 가득 찬 장 호법의 고개가 아래로 숙여지는 것을, 박

신부는 놀란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현암은 다섯 번이나 길을 잃었다. 눈앞에 깔린 자욱한 안개를 뚫고 지나갈 수가 없었다. 분명 똑바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덧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안개는 밤이 되어 도 걷히질 않았다. 걷히기는커녕 더욱 짙어져서 몇 미터 앞도 보 이지 않을 정도였다. 안개가 끼었다고 해서 길이 없어진 것도, 길의 자취를 잃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산중 생활을 육 년이나 한 현암이 산길을 헤매는 것은 이상했다. 현암은 자신의 방향 감 각에 따라 안개의 중심으로 가려 했다. 허나 막상 안개를 벗어나 고 보면 안개의 중심부에서 비켜나 있었다. 현암은 길이 이상하 게 난 것은 아닐까 하여 세 번째부터는 아예 길을 무시하고 걸어 들어갔다. 그래도 역시 나온 곳은 똑같았다. 네 번째에는 걸음 수 를 세면서 나온 곳과 출발한 곳의 거리를 비교해 보았다. 현암의 발걸음 수는 예상한 거리보다 훨씬 많았다. 즉, 그것은 현암이 안개 속에서 빙글빙글 헤매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무엇에 홀렸나? 혹시…? 현암은 기문둔갑(奇門遁甲法)의 일종인 진법(法)을 펴놓

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현암은 기공력, 그것도 주로 공 격에 해당하는 수법만을 연마하느라고 다른 것을 배울 기회가 없었지만, 그런 술수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있었다. 주위 사물을 진법을 사용하여 배치해 놓으면 알 수 없는 힘이 생겨서. 진 내에 들어간 사람의 감각을 흩뜨리거나, 심한 경우에는 물리 력까지 가할 수 있다고 했다. 『삼국지』에서 제갈공명이 유비를 추격하던 오나라의 육손을 가두어 추격을 멈추게 한 어복포(魚 腹浦)의 진이 그 예였다.

‘해동밀교・・・・・・그 정도의 연륜과 이적을 행하는 단체라면, 진법을 펴서 본산을 은폐할 수도 있겠군.’

현암은 생각에 잠겼다. 성질이 급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현암이었지만, 수련을 한 뒤로 성질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분석하는 면모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진을 뚫고 본산에 들어가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진법이란 것은 주변 사물로 구성된다. 그렇다면 아예 진을 이 루는 사물을 초입부터 모조리 망가뜨리면서 들어가면 진이 깨지 지 않을까? 진을 깨면 본산 사람들이 먼저 나올지도 모르지. 도 움을 받으려고 찾아가면서 그들의 진을 부수는 것은 실례가 되 겠지만 허탕치고 돌아가는 것보다야 낫겠지!’

현암은 자리에 앉아 기공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진을 구성하 는 것들을 망가뜨리거나 위치를 옮기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 귀신을 부려 변신하거나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술법을 총칭하 는 말, 주문이나 부적 등을 이용하여 사신역귀 귀신을 부림)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장 호법님,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장호법은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듯 얼굴이 많이 평온해져 있었다.

“그 아이는 제가 아버지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저로서 는 어쩔 수 없었지요.”

장호법은 침착하게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많은 수련 을 거쳐 속세의 번뇌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하지 만 은연중에 눈꺼풀이 떨리는 것을 보니 그도 솟아오르는 감정 은 막을 수 없는 듯했다.

“저는 서 교주와 함께 밀교에 입문한 동기였습니다. 그러나 도 중에 밀교를 떠나서 어떤 여인을 만나게 되었고, 부부의 예를 올 렸습니다.”

“그랬군요.”

아멘이라는 말을 덧붙이려다가 박 신부는 입을 다물었다. 상 좌호법인 벽공 도인과 마가 호법이 미소를 짓는 듯했다.

“그러다가 준후가 태어나게 되었는데 속세의 제 아낙은 산고 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 와중에 밀교의 호법 을 맡으라는 옛 스승의 유언이 도착했습니다. 밀교를 등지고 세 상으로 뛰쳐나간 저였지만, 은혜를 입은 스승의 유언을 저버릴

수 없어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겁니다. 막 태어난 준후를 달리 맡길 곳이 없어 품에 안은 채 돌아왔지요. 그때 이미 그는 교주가 돼 있더군요.”

장호법의 입에서 과거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정통 수련을 저버리고 외도(外道)를 걸었던 장호법은 밀교로 돌아온 후 외부 인 취급을 받아 제이 호법의 직을 받았다. 그러나 장 호법이 안 고 온 준후가 문제였다. 교단 내에 호법의 직위까지 맡은 사람 이 자식을 데리고 돌아왔으니 밀교 전체에 좋게 소문날 리가 없 었다. 서 교주는 아이를 외부에서 데리고 온 것으로 하여 자신의 양아들로 삼았다. 원래 밀교에서는 의탁할 곳 없는 고아나 버림 받은 아이들을 데려다 교인으로 삼는 일이 자주 있었으므로, 그 로써 외관상 만사가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장 호법은 아쉽기는 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수련에 전념해야 할 그로서는 아이를 키울 수가 없었다. 바로 옆에서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버지로서 말 한마디 건넬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으나 어쩔 수 없었다. 장호법은 영력의 수련에 집중을 하여 번뇌를 잊어 갔 고, 아이와 닮아 보일까 걱정한 나머지 머리를 밀고 허리까지 구 부정하게 만들어 남들의 이목을 가렸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서 교주는 아이를 끔찍이 예뻐했고, 그 아이 또한 보통 아이가 아니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태몽이 남달 랐을뿐더러, 출생시에 천괴성(天星)*의 빛을 보인 것이다. 이는 범상한 일이 아니었다. 서 교주는 아이에게 밀교의 힘을 모두 심어 줄 생각을 했다. 보약이나 비전의 수련은 물론, 다섯 호법 의 주술을 모두 심어 힘을 한데 모으는 데 성공한 것이다.

박신부가 멍하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아이인데……………..”

“물론 아직은 아홉 살짜리 어린애에 불과합니다. 아직은 힘도 깊지 않고 펼칠 수 있는 수법도 몇 되지 않죠. 그러나 그 아이는 우리가 가진 주술의 근본까지 깊이 알고 있습니다. 아는 것만으 로도 큰 위력이 될 수 있죠. 특히 부적이나 주문에 의해 신을 불 러내고 신의 힘을 빌리는 데는 우리 중에도 그 아이만큼 능통한 사람이 없습니다.”

“저런…….”

준후 이야기가 나오자 침묵을 지키던 노도인이 입을 열었다. 무척 준후를 아끼고 있는 듯했다.

“날 때부터 총기를 타고 났을 뿐 아니라, 서로 다른 각파의 비 전 심법(秘傳心法)을 배워서 놀이 친구 대신 신과 영들과 놀며 자란 아이입니다. 그 아이는 밀교의 모든 신들의 힘을 쓸 수 있 습니다. 고작해야 신 한둘, 명왕(王)**이나 보살의 힘을 빌리는 보통 밀교도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박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이가서 교주만을 따르게 교육받았다면………..”

장호법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무리 속세와의 연을 끊기로 했다지만 어찌 친아들을 나 몰 라라 하겠습니까? 그 아이도 이유 없이 저를 잘 따릅니다. 혈연 이란 무섭지요. 그러나 서 교주와 저 가운데 선택해야 한다면, 그 아이는 서 교주를 택할 겁니다. 서 교주를 아버지로 믿고 있 으니까요. 저는 제 자식과 대적을 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 다. 제 자식 놈이 싸움에 말려들지 않도록 보호해 주십사 하는 것이 신부님을 모시게 된 두 번째 이유입니다. 그 아이는 술수를 많이 알고는 있지만 실제 능력은 크지 않습니다. 박 신부님이 가 진 영력을 그 아이는 파악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사실을 알려 주면…….”

“그럴 순 없습니다. 고작 아홉 살입니다. 어찌 그 어린것에게 사실을 납득시킬 수 있겠습니까? 저는 아이를 버린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어찌 친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 까? 그 아이에게 충격을 줄 수는 없습니다. 절대로요.”

박 신부는 생각에 잠겼다. 미묘한 문제였으나 장 호법의 말이 모두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일에는 순리가 있는 법이 고, 아무리 은폐하려 해도 언젠가는 사실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 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로 동양 천문에서 사용되는 말이다.

** 악마를 굴복시키는 무서운 얼굴을 한 신장(神將).]

달리 방도가 없는 장 호법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박신부는 일단 그 일은 접어 두기로 했다. 장 호법도 그런 박 신부의 생각을 눈치챈 듯 화제를 돌렸다.

“신부님을 모시게 된 중요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밀교에서 내 려오는 예언 때문입니다. 서 교주가 힘에 탐닉하게 된 이유의 하 나도 바로 그 예언일지 모릅니다.”

“예언이라고요?”


주변에 일렁이던 안개가 많이 엷어졌다. 현암은 이마에 흐르 는 땀을 씻으면서 지나온 자취를 돌아보았다. 벌써 오십여 미터 에 걸쳐서 현암은 나무며 돌이며 이상한 모양의 문자가 쓰인 나 무 등을 닥치는 대로 부수며 나아가고 있었다. 자연을 해치는 것 이 아니라 진법을 부수는 것일 뿐이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어 지간한 나무는 기공력을 실은 일격으로 꺾어 버릴 수 있었다. 굵 은 나무는 가지를 분지르든가 주술이 실린 글자가 속에 숨겨 있 을지 몰라 아예 껍질까지 벗겨 내기도 했다. 돌들은 보이는 대로 사방에 팽개치고, 큰 바위도 멀찌감치 밀어 버렸다. 가장 수상해 보이는 것은 드문드문 땅에 박혀 있는 나무 막대들이었는데, 그 막대들의 겉면에는 붉은 주사(朱砂)로 쓰인 알아볼 수 없는 글 자 자국이 남아 있었다. 퍽 오래된 것 같은데도 썩지 않고 단단했다. 이렇듯 주변을 초토화시키면서 전진하다 보니 시간이 오래 흘렀다. 하지만 정말 진법이 파괴되고 있기라도 하듯이 엷어 지는 안개를 보면서 현암은 ‘단순무식한 방법이 가장 빠른 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철골(骨)을 자처하는 현암이라도 내공의 소모가 극 심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현암은 자리에 앉아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소모된 내공을 보충하려는 생각에서였다.

얼마 쉬지 않았는데 현암의 얼굴에 스산한 바람이 스쳐 지나 갔다. 예사 찬바람이 아니었다. 훨씬 더 음습했다. 현암은 곧바 로 눈을 떴다. 현암의 눈앞에 흐물흐물한 두 개의 반투명한 물체 가 보였다. 생김새가 흉악한 두 놈은 각각 삼지창과 가시 돋친 방망이인 낭아곤(狼牙昆)을 들고 있었다.

“야차(夜叉)*?”

현암은 코웃음을 치며 앉은 자세 그대로 몸을 뒤로 날렸다. 야 차의 창이 앉았던 자리에 푹 박혔다. 현암은 뒤로 재주를 넘어 공격을 피했다. 아무리 기공력을 익히고 동생을 앗아간 물귀신 과 싸워 이긴 경험이 있는 현암이었지만, 이렇게 물리력을 직접 행사하여 무기를 휘두르는 귀신이 있을 줄은 몰랐던지라 약간

은 당황했다. 허나 그에 못지않게 호승심도 일었다. 현암은 아무것도 겁내지 않았다. 슬픈 과거와 함께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있는 두려움까지 없애 버렸으니까…………….

“흥! 인간계와 영계의 경계가 엄연한데 산 사람에게 행패를 부려?”

현암은 소리를 지르며 기공력을 오른손에 모았다. 두 야차는 현암의 말을 들은 척 만 척하며 공격해 들어왔다. 현암은 공격을 재빠르게 피하면서 이것 또한 진법에서 나오는 허상이 아닐까 의심해 보았다. 그러나 현암의 허리께를 스친 창이 뒤편의 바위 에 맞으며 튀어 오르는 불똥을 보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야차 들은 허상이 아니었다.

[* 민간에서는 두억시니로 불리기도 한다. 추한 용모에 사람을 해하는 귀신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의 신들 가운데는 야차를 수하로 거느리고 있는 신이 많다.]


“저희 해동밀교의 19대 교주 법명(明) 선사께서 풀이하신 예언서가 비전되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아주 고대에 쓰인 것을 그분이 부분적으로 해독하신 『해동감결(海東鑑訣)』이라는 작은 책인데, 해동밀교가 어떻게 이어져 나갈 것이며 어떤 일들이 생 길 것인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 책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과, 그때 밀교의 교리를 배운 화상이 큰 역할을 할 것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명 대사를 일컫는 것이죠. 그밖에도 많 은 예언들이 있었습니다만 다 들어맞았습니다. 특히 요즈음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장차 혼돈에 빠질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는 네 명의 큰 손님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동방 명인(東方明人), 서방 진인(西方眞人), 남방 신인(神人), 북방 도인(北方道人) 이 그들입니다. 그중 남방 신인은 저희 본산에는 오지 않지만, 넷은 후에 만나게 되어 많은 선행을 행한다 하였지요.”

박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능력과 초자연적인 힘들을 가 까이해 온 박 신부의 입장에서는, 천 년 후를 예지해서 투시한다 는 것이 아주 믿지 못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문제가 되는 구절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의 서 교주는 145 대입니다. 그런데 『해동감결」에는 네 명의 큰 손님 이야기 다음 에 ‘삼백이 반으로 나뉘어 다섯이 모자랄 때 절의 주춧돌이 지붕 위로 올라가리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물론 파자로 된 구 절을 해석한 내용입니다만……………..”

“삼백이 반으로, 그리고 다섯이 모자라면 145가 되는군요.”

“그렇습니다. 절의 주춧돌이라는 것은 해동밀교를 상징한다고 서 교주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법명 선사께서는 본교에 항상 깊 은 자부심을 가지고 계셨던 분입니다. 주춧돌은 보이지 않는 곳 에서 전체를 떠받치는 역할을 합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사 람들을 구하는 역할을 하며 풍(風)을 이어 가는 본교와 의미 가 통한다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서 교주는 본교가 세상에 나가서 흐트러진 교맥을 일통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러나 규모도 작고 알려진 바도 별로 없는 해동밀교가 145대 교 주인서 교주의 임기 내에 예언을 달성하려면 소수 신봉자의 힘 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알려지지 않은 힘을 끌어내어 세상을 복속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박신부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런 이유로 서 교주는 고대에나 있었던 인신공양을 비롯한 악한 행동까지 하게 되었군요.”

호법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눈을 감고 있던 상좌호법 벽 공도인이 장호법을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예언이라는 것은 하늘의 비기(秘記요. 지나고 나서야 정확 한 뜻을 알 수 있는 법이지요. 『해동감』의 예언은 다른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오.”

“다른 뜻으로요?”

“주춧돌이라는 것은 근본이고 토대를 뜻하오. 즉, 절의 주춧돌 이라는 것은 절이라는 말의 의미를 우리 땅에 있는 불교계 전체 로 해석한다면 앞서 장 호법이 말씀하신 해석대로겠지만, 절을 저희 해동밀교로 한정 지어 생각해 본다면 주춧돌은 무엇을 나 타내겠소?”

“그렇다면………… 바로 여러분을?”

“그렇소이다. 해동밀교는 교주와 그 밑에 집법원(法院)이

있고 거기에 장로들이 있으나 실제의 일과는 무관하게 경전 해석과 고증을 주로 담당하고 있지요. 그 아래 저희 호법들이 소속된 내밀원)이 있어 대소사의 처결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거 법명 선사께서 적으신 감결의 내용이 호법 여러 분에 대한 예언이라 여기고 계신다는 것입니까? 하면, 지붕에 올 라간다는 구절은 여러분이 교세를 장악한다는 뜻이 아닙니까?”

“허허헛!”

벽공 도인은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마치 박 신부의 생각의 모자람을 탓하는 듯 어수룩하게 보는 행동이었으나, 늙은 도인 의 행동은 순진한 면이 있어서 크게 반감이 일어나지 않았다.

“허허허…… 그렇다고 합시다. 그러나 서 교주가 그 정도를 생각하지 못할 것 같소?”

“무슨 말씀이시죠?”

“자, 여기 두 가지의 해석이 나왔소. 하나는 서 교주의 대에 교 계가 일통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 호법들이 밀교의 체계 를 뒤엎고 혁명을 일으킨다는 말이지요. 두 가지가 다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 그렇다면 서 교주 같은 사람의 행동은 어떻겠소? 교세를 확장하기 위하여 힘을 쌓고, 아울러 혹시나 있을지 모를 호법들의 반란에 대비하는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할 생각 을 하지 않겠소? 그래야 만약 두 번째의 해석이 맞다고 해도 발 버둥 칠 기회가 있지 않겠소?”

[*내용을 쉽게 알아차릴 수 없도록 글자를 나누거나 합쳐서 기록한 글자.]

“문제의 근원이 애매하군요. 서 교주는 호법님들을 경계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을 키웠고, 호법님들은 그런 교 주의 행동에 제동을 걸기 위하여 생각지 않았던 결의를 했다고 하시니. 도대체 시작은 어디서부터입니까? 결국 그 감결』 때문 에 일이 생기게 된 것 아닙니까? 『감』은 믿을 수 있는 예언서 “입니까?”

“우리는 믿소. 왜냐하면 감결의 내용이 지금의 형세에 계기 가 되었을지언정, 앞으로의 일에 실질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하 기 때문이오.”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요? 『감결』 때문에 서 교주가 야망을 갖기 시작한 게 아닙니까?”

장호법이 말을 받았다.

“감결이 진정 사실로 인정되려면 두 가지 해석 중 어느 하나 로 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박 신부님, 저희는 이 두 가지 해석 대로 일이 풀릴 것으로는 생각지 않습니다.”

“뭐라고요?”

“천기를 기록한다는 것은 으레 그렇습니다. 운명은 결코 예측 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겝니다. 오히려 전혀 다른, 엉뚱한 방향 에서 튀어나오고 맙니다. 저희도 천기를 예측할 수 있고 앞날을 희미하게나마 읽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런 힘을 쓰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앞날을 알 수 있다면 그것을 통해 미래를 바꿀 수는 없습니까?”

“운명은 우리가 미래를 읽을 것까지 계산에 넣고 있습니다. 니 르바나(열반)의 경지에 들어가기 이전의 몸을 지니고 태어난 인 간이라면 아무도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입니다. 미래를 읽는 따위의 방법이 아니고…….”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요?”

“그건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 덕과 도를 쌓고, 자비심을 품 어남을 가련히 여기는 선한 마음과 용기를 갖는 것만이 작지만 가장 큰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커다란 운명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박신부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장호법의 말에서 느끼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 그러나 마음은 인간에게서 나오 는 것이다. 누구라도, 아무리 하찮은 사람일지라도 마음을 가지 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한 사람 한 사람 의 인간은 운명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역으로 큰 줄기를 변화시 킬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 동시에 소중 하고 고귀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니던가.

침묵이 한동안 흐른 다음, 박 신부의 마음속을 들여다본 듯 노도인이 입을 떼었다.

“오래전부터 많은 선인들이 인간에 대해 의문을 가졌지만 완 전히 만족할 만한 답을 찾은 이는 없소. 지금은 그것보다도 당장 벌어질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저희 호법들은 예 언이야 어떻든 교주의 악행을 막기 위해 어쨌든 힘을 모을 것이 오. 박 신부님에게 바라는 것은……………..”

“예, 말씀하십시오.”

“다른 가르침을 받아 다른 길에 몸담고 계시면서도 사람들의 작은 불행조차 외면하지 않으시는 박 신부님이라면, 저희도 안 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드리는 부탁입니다. 박 신부님에게 바라 는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드디어 본론이 나오는구나, 하고 박 신부는 생각했다. 사실, 알지도 못하는 장호법이 느닷없이 찾아와 도움을 청할 때는 막 연한 마음으로 응낙했다. 처음에는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행동을 같이 해야 한다는 사실에 잠시 주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박 신부는 호법들의 생각과 자신이 오래 전부터 가져 왔던 생각 사이에 일맥상통하는 바가 많음을 알고 결심을 굳혔다. 스스로 믿고 행동한 바 때문에 교단에서 파문됨 을 감수한 박 신부나, 서로 다른 신을 섬기면서도 해동밀교에 몸 을 담고 사람들을 위해 일을 한다는 호법은 어쩌면 같은 길을 걸 어가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사람이 믿는 바가 사람을 위하지 못한다면 그 믿음을 무엇에 쓸 것인가!’

박 신부는 전부터 가져 왔던 많은 생각과 의문이 장 호법의 말 을 계기로 하나로 응집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기색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노도인은 눈을 반쯤 감은 채 이야기를 이어 갔다. 나머지 네 호법도 긴장하는 기색이었다.


현암은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산속이라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야차와 같은,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귀신들이 나와 서 병기(兵器)를 휘두르는 것은 어지간히 경험이 있다고 자부하 던 현암에게도 의외의 일이었다. 애써 예전에 한번 거사에게서 배운 수법을 급히 응용하고 기계 체조로 단련한 몸놀림으로 공 격을 피하고 있었으나, 그러는 사이에 힘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 다. 주먹과 발을 휘둘러 보았지만 영력을 싣지 않은 주먹은 야차 의 몸을 통과해 허공을 가를 따름이었다. 불공평한 싸움이었다. 야는 현암을 마음대로 공격할 수 있지만 현암은 야차를 공격 할 수가 없었다. 보통 사람들이 잡귀가 아닌, 진짜 귀신의 상대 가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무슨 수를 써야겠는데………….’

영력을 몸이나 물건에 깃들이지 않는 한, 영이나 귀신에게 타 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드물었다. 영기가 어린 물건이나 부적, 또는 강한 정신력을 사용하면 가능할 수도 있으나 지금은 정신력을 발할 시간이 없었다. 무기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그가 소중히 간직하던 월향검은 해동밀교에서 이상하게 볼까 봐 가지 고오지 않았다. 그나마 무기가 될 만한 것은 배낭 속에 있는 태 극패뿐이었는데 꺼낼 겨를이 없었다. 기공력을 응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현암은 요리조리 몸을 피하면서 단전에 힘을 주어 기공력을 끌어모았다. 도혜 선사가 현암에게 심어 준 엄청난 내공이 기공 력으로 바뀌어, 한빈 거사에게 배운 구결과 심법의 조종을 받아 현암의 오른손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현암의 오른손이 희미하게 푸른빛을 발했다.

“타핫!”

현암은 동시에 찔러 들어오는 창과 낭아곤을 피하며 기공력을 실은 주먹을 야차의 옆구리를 향해 날렸다. 한빈 거사에게 배운 파사검법 가운데 한 수법이었다. 제대로 펼치면 칼날에 검기가 솟아 나오게 되어 있었으나, 칼이 없는 현암은 그냥 주먹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펑!

기공력이 실린 주먹이 야차의 옆구리에 적중하자 커다란 충격 이 현암의 손목으로 짜릿하게 전해져 왔다. 정통으로 얻어맞은 야는 소리를 지르듯 입을 크게 벌리고 아곤을 떨어뜨렸다. 아곤이 땅에 떨어지면서 쨍그랑 소리를 냈다. 귀신들이 다루는 무기는 허상이 아니었다.

현암의 주먹에 맞은 야차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했다. 다 른 야차도 창을 앞에 세운 채 겁먹은 듯 뒤로 한두 걸음 물러섰 다. 현암은 급한 김에 야차가 떨어뜨린 아곤을 집어 들었다. 알고 보니 낭아곤은 사기로 만든 것이었다. 근처 사당에 세워져 있던 것을 들고 온 게 틀림없었다. 아무리 사기로 만든 것이라도 영력을 받으면 위력은 쇠나 다름없었으므로, 다른 야차가 들고 있는 창을 피하지 못했다가는 큰 코 다칠 판이었다. 현암은 낭아 곤에 기공력을 모았다. 그러나 낭아곤은 허무하게도 현암의 기 공력을 이겨 내지 못하고 퍽 하면서 터져 버렸다. 기공력이 담긴 낭아곤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나가면서 비틀거리던 야차가 눈 에 파편을 맞은 듯 낮을 감싸 쥐었다. 그를 보고 창을 든 야차도 황급히 물러섰다. 현암은 내친김에 몸을 날려 앞을 보지 못하는 야차에게 덤벼들었다. 그러고는 손잡이만 남은 낭아곤 자루에 약한 기공력을 넣어 머리통을 찍어 버렸다.

야는 비명과 같은 진동을 울리면서 서서히 사라져 갔다. 세 상에 불멸은 없는 법, 귀신도 소멸당할 수 있다. 남아 있는 야차 는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었다. 현암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급히 배낭을 끌어당겨 손을 넣었다. 태극패를 꺼내 오른손에 들고 기 공력을 집중했다. 중앙에 박힌 구리거울에서 푸른빛이 쏘아져 나와서 남은 야차를 덮쳤다.

태극패를 통해 빛으로 바뀐 기공력을 몸으로 받은 야차는 날 카로운 귀곡성을 내며 짜부라져 녹아내려 갔다. 현암은 비위가 상했지만 계속 기공력을 발했다. 한동안 빛을 내보내고 있으려 니까 야차의 몸은 완전히 찌부러져서 녹은 아이스크림같이 변하 더니 사라져 갔다.

현암은 야차가 남긴 창을 집어 들었다. 창 역시 진짜 무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루가 나무로 되어 있고 쇠 날도 박혀 있었 다. 나무는 한때나마 생명이 있던 재료이고 쇠는 강한 재료니까 현암이 기공력을 넣는다고 낭아처럼 쉽사리 부서지지는 않을 듯싶었다. 현암은 창의 중간을 꺾어 칼 정도의 길이로 만들고 기 공력을 주입해 보았다. 끝에 맺히는 기운이 아슬아슬해서 강한 힘을 가하지는 못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맨주먹보다는 훨씬 나 았다.

야차는 물리쳤지만 또 어떤 놈들이 불쑥 튀어나올지 알 수 없 었다. 방금 나타난 야차는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배치해 놓 은 두 번째 관문 같았다.

‘자비를 내세우는 불가 계열인 밀교에서 이런 험악하고 사람 을 해칠지도 모르는 놈을 배치했단 말인가? 겁만주어도 보통 사 람들은 그냥 달아나 버릴 텐데, 심하군.’

현암은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태극패와 짧은 창을 들고걸음을 옮겼다.

노도인을 비롯한 다섯 호법은 박 신부에게 준후라는 아이를 책임져 달라고 부탁했다. 박 신부는 그들의 말을 차분히 정리해 보았다. 어차피 교주와 호법들이 맞닥뜨리게 되면 영력과 도력 에 의한 싸움이 불가피해질 것이다. 그 싸움에서 호법들이 이겨 교주의 능력을 빼앗고 제압하려면 교주의 힘을 줄여야 한다. 교 주 혼자 다섯 호법을 이길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피를 보면서 싸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노도인은 오래 전부터 서 교주가 눈치채지 못하게 약을 사용하여 힘을 줄여 왔 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 교주 역시 수양이 깊은 사람이라 힘을 모두 없애기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위험은 항상 각오해야 한다. 또한 준후라는 아이를 서 교주의 옆에서 떼어 놓아야 한다. 준후 는 다섯 호법이 심혈을 기울여 그들의 모든 것을 가르친 아이니 만큼 그 아이가 교주의 옆에 있으면 다섯 호법의 수법을 낱낱이 폭로할 것이 분명했다. 준후는 장호법의 자식이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므로 서 교주의 편을 들게 뻔하다. 또 한 가지의 문 제는 장호법을 비롯한 다섯 호법이 준후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최악의 사태에도 장 호법은 자기 자식을 공격할 수는 없을 테고, 서 교주가 준후를 인질로 삼을 가능성마저 있었다. 그래서 박 신부가 필요했다. 물론 허허자가 준후를 타이르겠지 만, 만에 하나 저항하더라도 박 신부는 준후가 알지 못하는 기도력을 이용하여 준후를 제압해서 밖으로 빼돌려야 한다. 다행히 목적을 달성하면 다시 준후를 데리고 와 주고, 혹시나 다섯 호 법이 패하더라도 서 교주가 장래 최대의 무기로 삼으려 하는 준 후를 그의 손에서 빼앗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호법들의 설명이 었다.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마가 호법이 외국 억양이 섞인 말투 로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어리지만 총기가 있어서 우리 다섯의 힘을 모두 배 웠습네다. 혹 우리가 잘못된다면 그 아이를 우리 다섯의 공동 후 계자로 삼을 것입네다. 그러할 때에는 그 아이가 능력을 키우고 우리의 주술과 비법을 다 깨우칠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가 평생 을 바친 일맥이 끊기지 않도록 부탁드립네다.”

을련 호법의 표정은 아직도 변함이 없었지만 그녀의 눈자위엔 물기가 깃들어 있었다. 허허자도 눈을 감고 말했다.

“벽공 도인님의 도력, 장 호법님과 마가 호법님의 밀법, 을련 호법님의 무가의 신통력, 그리고 부족하나마 제 부적술의 정수 (精髓)를 한 몸에 지닌 준후는 뒷날 크게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 다. 아마 우리 중 누구도 이르지 못했던 경지에까지 갈 수 있을 테지요.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아이를 꼭 선하게 자라도 록 이끌어 주십시오. 우리의 간절한 부탁입니다. 서 교주의 야망 의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박 신부는 당황했다. 쟁쟁한 고인들이 자신에게 부탁하는 내용은 같이 싸워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어 려운 부탁이었다.

장호법이 입을 열었다.

“박 신부님은 아마도 『감결에 나와 있던 서방 진인이실 겁니 다. 아직 북방 도인이나 남방 신인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감결」 에 따라 준후 그 아이가 후에 만날 북방 도인, 남방 신인과 함께, 네 분은 앞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하실 겁니다.”

“아니, 제가 어떻게 그런…………….”

“아닙니다. 사람의 영력은 드러내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요. 박 신부님의 기도력은 독보적인 경지입니다. 나중에 혹시 가 능하다면 제 자식 놈이 그것까지 배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제 욕심이겠지만, 장차 큰일이 일어나더라도 한 사람의 힘으로 가 능한 일은 전부 할 수 있었으면…….”

장호법의 날카로운 얼굴에 처음으로, 준후라는 아이를 향한 아버지의 뜨거운 애정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표정을 본 박 신부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이들 다섯 호법은 무사할 수 있을까? 박 신부도 상당한 영적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이들의 미래를 꿰뚫어 볼 수는 없었다. 다만 교주의 악행을 방치하지 않 겠다는 비장한 결의와 후계자에 대한 깊은 배려가 스며 있는 말 에서, 이들이 앞으로 할 행동에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다시 노도인의 주재하에 작전 회의가 열렸다. 교주를 제압하 여 힘을 빼앗는 작전은 하극상이나 마찬가지인지라 비밀리에 수 행되어야 했다. 우선 박 신부는 대웅전(大雄殿) 뒤쪽 토굴에서 수련중인 준후를 데리고 탈출해야 한다. 그 일은 허허자가 도울 것이며, 나머지 네 호법은 교주 측근의 인물과 장로들을 제압한 다. 허허자가 준후를 설득하겠지만, 만약의 경우에는 박 신부가 나서서 준후를 제압해야 했다. 일단 준후를 데리고 나가는 데 성 공하면, 다섯 호법은 교주에게 가서 담판을 짓고 필요에 따라서 는 실력대결도 불사한다는 것이 내용의 전부였다. 작전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교주와 무작정 상대한다는 부분이 좀 설득력이 떨어졌으나, 손님으로 온 박 신부가 상좌에 있는 노도인이 말하 는 내용에 감놓아라 배 놓아라 할 처지가 아니었다.

장호법은 노도인이 작전을 다 말하기를 기다렸다가 박 신부 가 해야 할 행동을 일러 주었다.

“서 교주는 악의 의식을 행하기 시작한 이래 외부의 출입을 극 도로 통제해 왔습니다. 그래서 이 본산에 갖가지 술수를 부려 놓 았지요. 원래는 찾기 힘들도록 운무진(霧)만 펼쳐 두었는데, 그곳에 악귀들을 소환해 풀어 놓았습니다. 물론 아까 우리가 올 라온 길은 그런 것들이 범접하지 못하게 막아 놓은 곳이지만요. 나가실 때에는 그 길 또한 봉쇄될 겁니다. 그러니 진들을 돌파해 서 내려가셔야 합니다.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껏해야 잡귀니까요. 여차할 경우에는 준후의 도움을 받으십시오. 그 아이는 잡귀를 다루는 술법에는 통달해 있으니…………….”

“알겠습니다.”

박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행동만 남아 있었다.

현암은 상당히 화가 나 있었다. 벌써 몇 차례나 악귀들의 공격 을 받고 그들을 물리쳤는지 모른다. 진을 때려 부수는 등 방법이 거칠기는 했지만, 해동밀교에 도움을 얻고자 방문하려는 사람에 게 악귀들이 다짜고짜 공격을 하게 만든 것은 무슨 이유인가? 현 암은 악귀들을 막느라 전신의 기운이 빠져 노곤해졌다. 덤벼든 녀석들은 말단 하급 악귀여서 대적하기 그리 힘들지는 않았지만 난폭하게 덤벼드는 모습이 경계를 하고 있다기보다는 피에 굶주린 것 같았다.


‘쳇! 이거 손님 대접이 엉망이로군. 귀신들을 이렇게 자유자재 로 부리는 것을 보니 확실히 능력은 있는 모양이야. 하지만 이렇 게 해 놓으면 웬만한 사람은 죽으라는 얘기 아닌가? 교주가 어떤 자인지는 몰라도 단단히 따져야겠군!’

이백여 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나무며 돌, 수상 해 보이는 말뚝 따위를 뽑고, 악귀들과 다섯 차례나 싸움을 하며 지나온지라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드디어 큼지막한 사찰의 모습이 안개를 뚫고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길도 넓어져서 걸리는 것도 없고 악귀의 기척 도 느껴지지 않았다. 현암은 다행이라는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좌우로 사천왕상이 버티고 서 있는 사찰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 앞으로 ‘자비도량(慈悲道場)’이라 새긴 석비가 보였다. 현암 은 부아가 치밀었다. 현암은 정말 화가 나면 머릿속이 끓는 피로 꽉 차는 것처럼 아득해졌다가 정신이 맑아지고 냉정해진다. 하 지만 그럴 때의 행동은 거칠 것 없이 난폭해진다.

“자비? 흥!”

현암은 화가 치밀어 기공력을 끌어모아 비석을 후려갈겼다. 쩡하는 굉음과 함께 비석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안쪽에서 수 런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현암은 배짱 좋게 문 앞에 버 티고 서서 소리를 질렀다. 한빈 거사에게 배운 사자후의 수법을 쓴다면 화상들이 기겁을 할 테지만, 아쉽게도 그 수법을 쓰기에 는 현암의 수련이 부족했다.

“나와 보시오!”

현암의 목소리는 안개 속을 뚫고 여기저기로 메아리쳤다.

“앗! 이게 무슨……?”

박신부와 같이 대웅전 뒤로 향하던 허허자가 산문 밖에서 들 려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놀란 것은 박 신부도 마찬가지 였다. 이제까지 해동밀교의 본산을 알고 찾아온 사람은 극히 적 었다. 하물며 주위에 운무진을 펼치고 야차까지 풀어 경계하는 마당에 누가 찾아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동안 외부 방문자나 침입자가 없었기에 해동밀교의 승려들은 경계를 설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박 신부 같은 사람이 경내에 들어와도 발각될 염려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난데없이 들려온 소리는 경내에 있던 모든 승려들의 선잠을 깨우기 충분했다.

“서둘러야겠습니다. 신부님!”

허허자가 등을 치며 발걸음을 재촉하자 박 신부도 달리기 시 작했다. 대웅전 뒤로 돌다가 늙은 승려 한 사람과 마주쳤다. 집 법원 장로였다. 장로가 합장하며 의아한 듯이 물었다.

“아니, 오호법? 여기서 뭘 하는게요? 그리고 뒤에 있는 사람은?”

“칠장로(老)님, 실례!”

허허자는 부적 한 장을 재빨리 꺼내 다짜고짜 장로의 이마에 붙였다. 장로는 그 자세 그대로 스르르 고꾸라지면서 의식을 잃 었다. 대단한 수법이라고 박 신부는 생각했다. 뒤에서 술렁거리 는 소리가 더 커지고 있었다. 박 신부를 데리고 달리던 허허자는 계획이 틀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허허자와 박 신부는 대웅 전 뒤쪽의 작은 토굴 안으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