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1권 – 10화 파문당한 신부 3 : 예루살렘 성전
예루살렘 성전
나희가 박 신부를 끌고 성당 안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몸 에 피가 돌기 시작해서인지 박 신부는 약간씩 절룩거리며 걸을 수 있었다. 들어선 방은 종루에서 내려가는 계단가에 있는 작은 방이었다. 며칠 전, 계단을 올라갔을 때에는 미처 보지 못했지만……
“여기가 어디지?”
나희가 씩 웃었다.
“우리 방이에요.”
아이들의 놀이방이나 성경 공부를 하는 방인 듯했다. 벽에는 아이들의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이 붙어 있었고, 예수님이 있는 조그마한 나무 십자가와 비슷한 크기의 성모상이 벽에 걸려 있 었다. 나희는 박 신부를 나무로 된 작은 의자에 앉혔다. 아이의 크기에 맞게 만든 의자여서인지 덩치가 큰 박 신부가 앉자 우스 꽝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신부님, 잠깐만요! 제가 더운 물 좀 떠 올게요.”
나희는 박 신부가 바라는 것을 용케 알고는 시원한 웃음을 남 기고문께로 갔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몸을 돌려 박 신부의 창백한 손에 서늘한 것을 쥐어 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박신부는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은 십자가였다.
박 신부는 뒤편의 벽을 보았다. ‘축 성탄! 메리 크리스마스!’ 벌써 성탄절이 되었던가? 박 신부는 달력을 보았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그러면 기도를 올리기 시작한 지구 일째 되는 날이구나.
박 신부는 고개를 돌렸다. 벽에 붙여 놓은 그림들, 아이들의 순진함이 묻어 있는 그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박 신부는 힘겹 게 몸을 일으켰다.
<예수님의 탄생. 백합반 미현>
크레용으로 서툴게 그린 그림에는 얼굴이 동그란 아기 예수가 신발 상자 같은 구유에 누워 있고, 그 옆에 수염 난 요셉과 만화 주인공 같은 마리아가 앉아 있었다. 대만 한 창문 밖으로 엄청나게 큰 별이 그려져 있었다. 박 신부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동방박사 세 사람. 튤립반 기숙>
낙타인지 공룡인지 모를 뭔가를 탄 수염 난 세 사람, 한 사람은 얼굴이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다른 두 사람은 각각 살구 색, 하얀색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 세계의 만인이 경배를 드렸지.”
박신부는 다음 그림으로 눈을 돌렸다.
<노아의 홍수, 백합반 진욱>
이 아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노아의 방주를 그려 놓았다. 상자 같은 배가 마구 그은 파란 크레용의 물결 속에 요동치고 있었고, 수염이 밤송이 같이 난 남자가 웃고 있었다.
“하느님의 노여움 속에서도 믿음을 지닌 자는 온화하여 평정을 잃지 않으며…..”
<모세, 장미반 승현>
인상을 잔뜩 쓰고 있는 남자가 지팡이를 들고 서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기 귀찮아서인지 뒤의 사람들은 그냥 동그라미로 그려져 있다) 뒤를 따르고 있었다. 하느님의 위엄, 그리고 말씀 에의 복종이라.
박 신부는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계속 살펴 갔다. 그 안 에 어려 있는 진리, 익히 알면서도 실행하고 깨닫지 못했던 생각, 그리고 가르침들……………
<물 위를 걷는 예수님. 장미반 영진>
“주님의 권능은 자연을 잠재우시다.”
<귀신 들린 자를 고치는 예수님, 백합반 병철>
“주님의 권능 앞에 악귀도 물러난다.”
그랬다. 모든 것은 평범한 속에 있었다. 아이들의 소박한 꿈속 에, 사람들의 걱정 어린 눈길 속에 애정 속에, 도움 속에, 꿈속 에, 마음속에, 보살핌 속에, 가르침 속에 박 신부의 몸 안을 뜨거 운 것이 훑고 지나가더니 타오르는 듯했다. 몸이 종잡을 수 없이 덜덜 떨렸다. 박 신부는 두 눈을 부릅뜨고 그림에서 그림으로 눈을 옮겼다. 한 장 한 장의 그림은 박 신부의 뇌리에 뚜렷한 자국 을 남기면서 가슴속에 불에 데는 아픔을 느끼게 했다. 박 신부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샘솟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의 눈 물이 아니었다. 앎의 과정에서 얻는 기쁨, 감격의 눈물이었다.
<홍해가 갈라지다. 백합반 세웅>
“하느님의 권능으로 모든 것을 이루신다.”
<여리고성이 무너지다. 튤립반 은경〉
“하느님의 힘 앞에 당할 것은 없도다.”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나시다. 장미반 진숙>
“사망도 권세도 주님을 이기지 못하도다.”
박 신부의 온몸에 참을 수 없는 열기와 아픔이, 그러나 결코 고통스럽지 않은 아픔이 해일처럼 몰려들었다. 알 수 없는 기운 이 요동치듯 몸 안을 회오리치면서 팔을, 다리를, 등을, 머리를 휘감았다.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폭포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 이것, 바로 이것이었다. 박 신부가 찾고 간구하고 기도하 고 소망하던 것은 모두 여기에 있었다.
“아아!”
미친 듯 그림들을 훑어보던 박 신부의 눈이 한 장의 그림에서 멎었다.
<마리아, 슬퍼하시다. 백합반 나희>
그 눈매! 생각처럼 그려지지 않았던 듯 크레용으로 솜씨 없게 수없이 문대어 거의 새까맣게 된 눈매! 마리아의 눈매! 어머니에 게도 있고, 나희라던 아이에게도 있고, 미라에게도, 아니 짐승에 게도 있는 눈매!
“아아!”
박 신부의 몸이 터져 나갈 듯했다. 몸 안에 휘몰아치는 기운은 이제 박 신부의 몸을 폭발시킬 것만 같았다. 박 신부는 몸 안에 휘몰아쳐 오는 강한 기운을 이겨 내지 못하고 활짝 뻗었다. 십자 가! 오른손에 들려 있던 박 신부의 십자가에 연녹색의 불빛이 맺 히면서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 신부의 몸 전체 에서 연녹색 광휘가 뻗기 시작했다.
물을 떠 오던 나희는 지진이라도 나듯 바닥이 흔들리자 깜짝 놀랐다. 공부방의 창문이 들썩거리면서 뜨거운 바람이 휘몰아 치고 유리창이 덜덜 떨었다. 나희는 불이 났다고 생각했다. 급했 다. 안에는 힘없는 신부님이 앉아 있지 않은가! 나희는 물그릇을 내동댕이친 채 공부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방 안에 신부가 우뚝 서 있었다. 하늘을 향해 얼굴을 우러르고 두 팔을 활짝 벌린 채로 몸에선 연녹색의 광휘가 뻗어 나오고, 손에 든 은 십자가에서 성스러운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 었다. 방 안에는 알 수 없는 따스한 기운이 소용돌이치면서 회오 리를 일으키고 있었고, 벽에 붙인 그림들이 뜯어진 채 펄럭거리 면서 신부의 주위를 맴돌았다.
나희는 멈춰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섭지는 않았다. 알 수 없는 기이한 광경에 놀랐지만, 신부가 저렇게 일어서 있는 것이 기뻤다. 박 신부의 말라비틀어진 얼굴에 눈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그러나 얼굴은 벅찰 정도로 환히 웃고 있었다. 나희 도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박 신부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몸에 들 어온 기운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자그마 한나희의 몸을 안아 어깨에 얹고 오른손으로 나희를 받치고, 왼 손에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십자가를 들고서 걸음을 옮겼다. 박 신부가 걸음을 옮기는 주변은 연녹색으로 빛났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정체 모를 느낌을 따라갔다. 그렇다. 그 것은 사악한 냄새였다. 박 신부는 정체 모를 적을 향해 가고 있 었다. 미라의 방에서 느꼈던 음습한 기운, 종루 위에서 금식 기 도를 올리던 때에 마음에서 울려오던 목소리, 모든 것이 한 군데 를 가리키고 있었다. 바로 이 성당, 이 지붕 아래였다. 이곳은 자 신이 잘 알지 못하는 교회였다. 그러나 분명 이곳 어딘가에 놈이 있었다. 이 신성한 건물 안에 박 신부는 눈을 부릅뜬 채 어깨 위 에 올려 놓은 소녀에게 말했다.
“미라야, 잘 보렴! 나를 똑똑히 지켜봐 줘!”
나희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왜 나를 보고 미라라고 하는 걸 까? 그러나 그런 건 상관없었다. 무섭지도 않았고 신기하게 느껴 지지도 않았다. 다만 자기를 올려놓고 있는 신부에게서 알 수 없 는 슬픔 같은 것이 전달될 뿐이었다.
“미라야, 저기다.”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박 신부도 알지 못했다. 앞에는 커 다란 문이 닫혀 있었다. 박 신부가 기합을 발하자 문이 폭파된 것처럼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막 성탄 미사를 집전하려 준비하고 있던 신부와 사제들이 소 스라치게 놀랐다. 청중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처음엔 멍하니 앉아 있다가 온몸에서 연녹색의 빛을 형형히 발하고 있는 웬 신 부가 어깨에 여자 아이를 얹고서 들어오자 놀라 입을 벌리고 멍하니 일어섰다.
박 신부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수백 명은 됨직한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놈은 분명 여기에 있다. 박 신부의 입에서 기도가 흘 러나왔다.
“주여 보게 하소서!”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박 신부의 눈으로 몰려들면서 눈이 화 끈해졌다. 순간 박 신부의 시야에 나타난 것은,
“이, 이, 이럴 수가……………”
수백 명이나 모여 있는 청중들, 몸의 일부와 머리 위에 떠도 는 수많은 악귀가 보였다. 어떤 놈은 사람들의 몸으로 비집고 들 어가려는 중이었고, 깔깔거리며 저희끼리 엉켜 대는 것들도 보 였다. 어찌 이렇게 많은 악귀들이 하느님의 성전 아래에 있단 말 인가. 차라리 허상이라 믿고 싶었다. 자기가 헛것을 본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타이르고 싶었다.
박 신부는 눈을 돌려 사제들을 보았다. 오, 하느님! 사제 중에 도 악귀가 보였다. 아니, 오히려 더 큰 악의 소산이었다. 한 사람. 그렇다. 한 사제의 몸에 두목으로 보이는 놈이 숨어 있었다. 그 놈이 분명 지금 청중에게 씌인 악귀를 불러낸 것이 분명했다. 놈 은 예수 그리스도가 몸으로 갚으신 죄를 쪼개어 사람들에게 팔 아먹고 있었다. 마음을 비게 만들고, 죄가 사해졌다고 거짓으로 증거하면서, 그사이 자신의 부하를 끼워 넣어 사람들을 악하게 만들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을 저버리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더 큰 악행을 범하게 하도 록 부추기고 있었다. 그놈이었다. 미라를 죽게 만든 그놈. 아니, 그놈이 아닐지도 몰랐다. 마찬가지였다. 놈들은 이제 성전 안에 까지 침범하여 인간과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팔아먹고 있었다. 박신부는 나희를 내려놓고는 분노에 찬 소리를 질렀다.
“예루살렘 성전!”
사람들이 쩡쩡하게 울리는 박 신부의 외침을 듣고 잠시 조용 해졌다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박 신부의 머리에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뒤엎었다는 기록이 교차되어 지나갔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 들은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박 신부의 몸에서 연녹색 빛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며 폭풍 같은 기운이 용솟음쳐 나왔다. 가까이에 있던 의자며 집기들이 부서지고 떨어져 있는 것들은 허공을 날았다. 사람들이 아우성 치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성호를 긋는 사람도 있었고 악마니 사 탄이니 외치는사람들도 있었다. 박 신부의 눈에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는 수많은 악귀들이 보였다. 박 신부는 십자가를 치켜들 었다. 십자가에서 연녹색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자 공중에 떠 있는 악귀들 중 몇몇이 몸부림을 치면서 찌그러지고 사라져 갔다. 박 신부는 입을 다문 채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그럴 때마 다 몸에서 퍼져 나오는 기운은 근처에 있는 모든 것을 부서지고 튀어 나가게 만들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바위덩어 리가 굴러가는 듯했다.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면서 입구로 몰려 갔다. 몇몇은 자리에 주저앉아 기절해 버렸고, 열심히 기도를 드 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박 신부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제단 쪽에 서 주춤대는 한 사제, 아니 악귀의 두목인 듯한 자를 향해 걸어 갔다. 영문을 모르는 사제들은 파랗게 질렸다. 그들은 성호를 그 으며 아멘을 외쳐댔다. 한 할머니가 기절해서 박 신부의 발 앞에 쓰러졌다. 박 신부는 할머니를 부축하여 의자에 눕혔다. 그러 는 사이에 사제, 아니 악귀가 잽싸게 도망치고 있었다.
* 『마태오복음」 21장 13절.
“거기서!”
박 신부는 몸에서 노기를 터뜨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놀 랍게도 달려가던 사제는 발이 땅에 붙은 듯, 덜컥 제자리에 멈추 며 달려가던 힘을 이기지 못해 쓰러져 버렸다. 아직 단상에 있던 사제며 신자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를 질러 댔다. 우는 사 람도 있었다. 그러나 감히 박 신부의 앞을 막아서는 사람은 없었 다. 박 신부를 사탄이라고 믿었다면 뛰어나와 막는 성직자들도 있을 법한데, 경황이 없어서인지 그러는 사람도 없었다. 한 사제 가성호를 긋고 있었다.
박 신부는 뚜벅뚜벅 그 자리에서 꼼짝을 못하고 엎드려 있는
사제, 아니 악귀에게로 다가갔다.
“너, 너・・・・・・ 그, 그 힘은・・・・・・ 어, 어디서…………….”
“악의 피조물이여! 다시 만나는구나. 종루에서 나를 유혹했던 것이 정녕 네놈이었구나!”
“으으……. 너, 너는…………… 별것 아닌 신부 놈이………… 하찮은 존재가………… 어찌……”
“모든 인간은 위대하다. 적어도 너희보다는 저주받을 악의 피조물들아!”
박 신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미라를 해친 놈은 아닌 듯했다. 그러나 적어도 종루에서 그를 희롱하던 녀석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런데 왜 녀석을 미라의 원수로 착각했을까? 세상에 이미 너무 많이 퍼진 죄악, 그 악의 피조물들은 어쩌면 거의가 비슷비슷한지도 몰랐다. 그리고 너무나 많을지도 모른다.
“어서 그 사람에게서 떠나 지옥으로 가거라!”
박신부가 힘을 발하자 놈은 미친 듯이 몸을 비틀어 댔다. 연 녹색 기운이 놈의 주위를 둘러싸고 주위를 둘러싸고 놈을 사정 없이 찌그러뜨렸다. 놈은 비명을 지르면서 박 신부에게 떠들어 댔다.
“너, 너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섰다. 세상에 퍼져 있 는 어둠의 힘은 나 말고도 수없이 많다. 어둠을 잡으려면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너는 이제, 이제 영원히 평생동안 편치 못하리라. 흐흐흐…… 으아악!”
박 신부는 눈을 지그시 감고 힘을 가중시켰다. 놈의 형체가 완 전히 찌그러지면서 사그라지자 박 신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바로 내가 원하는 바다.”
박 신부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알 수 없는 힘은 그대로였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박 신부의 뇌리에 문득 자신이 아흐레째 추위 속에서 금식 기도를 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어쨌거나 그 의 염원은 이루어졌다. 박 신부는 몸에서 연녹색 광채를 거두었 다. 이제 힘은 자신의 몸 안에 있었고, 원하는 대로 쓸 수 있었다. 박 신부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이후의 일 은 아무래도 좋았다. 아무래도 나희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분노한 신자들도 몸에 쏟아지는 무지한 신자들의 성난 매질과 저주의 함성, 그것을 말리는 사제들의 외침. 저들의 눈엔 아무것 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박 신부는 그들 에게 변명하고 싶지도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나희의 울음소리 가 들려오더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의식을 잃는 것이 벌써 몇 번 째인가.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박 신부는 쓸쓸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했던 행동은 사람들에 게 설명할 수도, 또 설명해 봐야 믿어 줄 사람도 없을 터였다. 본 분을 망각하고 사탄의 유혹에 몸을 맡겨 사악한 힘으로 성전을 파괴하고 하느님을 모독한 자. 동료 사제를 공격한 자. 그 가엾 은 친구는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어리둥절 한 얼굴로 이렇게 증언했다. 병원에서 몸조리를 하고 나오자마 자 높은 분들에게 불려 갔다. 박 신부는 아무 변명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분노에 찬 큰 비판과 작은 옹호의 소리를 들었고, 결 국 파문이라는 결정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그가 한 말은 단 한마 디. 주교가 회개하라고 했을 때 회개할 것이 없다고 한 그 말뿐이었다.
박 신부는 씁쓸히 웃으며 자신이 속했던 교구를 둘러보았다. 사제복을 벗을 생각은 없었다. 파문을 당했을망정 하느님을 버 린 것은 아니었으니까. 앞으로 자신이 배운 바대로는 하느님을 섬기지 못할 것 같았다. 기도는 가능하겠지만, 미사는 올리지 못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앞으로 싸워 나가야 할 일이 많았다. 세상에 퍼져 있는 악과 마에 대항하려면 혼자 힘으로는 부족했다. 자신이 얻게 된 힘이 비록 강하다고는 해도, 그것만으로 날카로 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수많은 악들과 수없는 초자연체와 싸 우기는 힘들었다.
일단 그가 바라던 것은 얻었다. 선전 포고는 떨어졌다. 그러나 당장은 스스로를 수련해야 했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찾 아서 힘을 모아야 한다. 이 세상을 하느님의 세상으로 만들기 위 해, 고통 없는 사람들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할 사람을 찾아야 한다. 돈도 필요하겠지? 관심조차 없었지만 과거 의사 시절에 사 두었던 과수원의 값이 많이 올랐다고 했다. 그걸 팔면 어느 정도 운신이야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일을 해 나가기에 적당한 장소도 물색해야 하고, 얻은 힘을 다듬고 키워서 아무도 모르게 좋은 일 에 써야 한다. 할 일이 많다. 그러나 무엇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세상에 누가 알아주고 도움을 줄 것인가.
억지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좋게 생각하려 해도, 아쉬움 때 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외롭게 싸워 가야 할 자신의 신 세가 처량해져서인지 눈시울이 자꾸 시큰해졌다. 이제 새해가 되었고, 한 살을 더 먹었는데…………. 나잇살이나 먹어 가지고 참 많이도 운다고 박 신부는 씁쓸히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