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1권 – 13화 유혹의 검은 장미 3 : 검은 장미
검은 장미
“검은 장미라.”
“신부님, 흑장미는 원래 있는 거 아닌가요?”
준후가 물었다.
“그래, 흑장미가 있긴 있지. 허나 그건 진한 붉은빛을 띤 장미 를 일컫는 말이고, 정말로 검은색 장미가 있는 건 아니야. 게다 가 잎이 검은 식물들은 더러 있지만, 장미 중에 잎이 검은 건 하나도 없단다.’
“준후야, 이 이파리로 영사를 해 봐라.”
현암이 핸들을 돌리며, 아까 주웠던 검은 이파리를 준후에게 내밀었다. 준후는 그것을 조심스레 손바닥에 올려놓고 양손을 닫은 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음? 어!”
준후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또 무슨 일인가 하여 박 신부 와 현암은 준후에게 눈을 돌렸다. 그 바람에 차는 자칫 난간을 뚫고 떨어질 뻔했다. 현암은 차를 급정거하여 길가에 세우고 다시 준후를 보았다.
“이건, 생명이 없는 거예요.”
“당연하지. 죽었으니까.”
“아뇨,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서늘한 기운이 박 신부와 현암의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애당초 살아 있던 적이 없는 거란 말예요.”
“그러면, 천 따위로 만들어진 인조물이란 말이냐?”
“아뇨, 아뇨……. 분명히 세포로 이루어지고 생장도 하지만, 살아 있지 않는……”
준후는 말을 더듬었다.
공연이 끝난 여의도 오페라 하우스에는 특별히 다른 일정이 잡혀 있진 않았다. 뒤숭숭한 사고가 수습된 다음이라 단원과 대부분의 직원들은 일찌감치 퇴근하고 난 다음이었다. 수위로 근 무하고 있는 노성곤은 사고로 사람이 죽은 다음 날 당직 근무를 서야 한다는 사실이 영 꺼림칙했다.
‘이런 염병할……………. 하필 이런 날 당직일 게 뭐야…. 젠장.’ 막 해가 질 무렵으로 아직 밝았으나, 조명이 꺼진 오페라 무대 는 어둡고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리골레토>의 무대 장치로 쓰인 석고상들이 노 씨의 랜턴 빛을 받아 흉하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나저나 참 이상했어. 한껏 노래를 잘하더니, 앙코르를 받아 나오다가 쓰러져 무대 아래로 처박히다니………. 그런 덩치가 빈 혈이었다니. 원’
그러고 보니 노 씨는 가수가 쓰러졌던 위치에 와 있었다. 가수의 덩치가 얼마나 컸던지 나무로 된 바닥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난 그때 무대 뒤에서 정리를 하고 있었지. 근데 그 가수가 나 올 때………… 옳거니, 그때 좀 이상하긴 했어. 비틀거리는 것 같았 는데, 얼굴은 웃고 있었지.’
노 씨는 랜턴으로 여기저기를 비춰 보았다.
‘헌데, 예쁜 아가씨가 가수에게 줬던 까만 장미꽃은 어딜 갔 지? 분명 그가 앙코르로 나올 때 들고 나오는 걸 봤는데, 청소할 땐 없더란 말야? 누가 집어 갔나?’
무대 밑 어두운 구석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음? 뭐지? 쥐인가?’
노 씨는 전등을 비추며 무대 아래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냄새가 냄새가 났어요! 이 앞에서!”
“냄새라고?”
운전에 신경을 쓰며 현암이 물었다. 어느덧 시간이 여덟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피・・・・・・ 피 냄새 같은 게………….”
“뭐라고?”
박신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준후야, 너…………. 손!”
“예?”
엉겁결에 준후는 손에 들고 있는 이파리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색을 띠고 있던 이파리가 꿈틀거리는 듯했다. 이파리는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으나, 색은 점점 선명한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오페라 하우스의 높은 붙박이 창문 하나가 요란한 소리를 내 며 터져 나가고, 누런 모래 먼지가 회오리를 일으키며 날아들어 왔다. 모래바람 사이로 붉은 옷을 입은 한 사람이 번득이며 바닥 에서 몸을 세웠다. 홍녀였다.
홍녀의 긴 그림자가 드리워진 끝에 한 사람이 길게 누워 있었다. 조금 전에 번을 돌던 노성곤 씨였다. 그의 얼굴엔 웃음이 감돌고 있었지만 안색은 파리하다 못해 밀랍 빛이었다.
“에잇, 요망한 것! 사크라데바남 인드라의 이름으로 소멸되어랏!”
준후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 나오자 손에서 불꽃이 바작거리며 일어나 핏빛으로 변한 이파리를 태우기 시작했다.
“잠깐, 준후야! 더 알아볼 것이 있어!”
현암이 준후를 제지했으나 이파리는 불에 구운 오징어처럼 구 부러지며 재로 변해 버린 뒤였다.
“그렇게 서두르면 어떻게 해! 그놈이 살아난다면 이파리의 조종자를 찾을 수도 있을 것 아냐!”
“그럴 필요 없네, 현암 군.”
박신부의 침중한 목소리가 현암을 제지했다.
“저길 보게.”
박신부가 가리키는 쪽 하늘에서 여러 가닥의 붉은 기운과 검 은 기운이 서로 엉키며 어느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 기운들 이 지향하는 곳에서는 또 하나의 누런 기운이 엉키며 회오리치 고 있었다. 오페라 하우스가 있는 곳이었다.
“서두르자!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어!”
현암이 액셀러레이터를 질끈 밟자, 차는 끼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으, 저 붉은 기운들・・・・・・ 피야, 모두 피야.”
준후의 중얼거림이 탄식처럼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