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력
사방은 한없이 푸르고 시원했다. 기분이 좋았다. 현암은 현아 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흥겹게 콧노래를 불렀다. 물속이었다. 예 쁜 꽃무늬, 아른아른 떨면서 지나가는 알록달록한 무늬들이 유 쾌했다. 현아도 흥겨워 보였다. 귀엽고 예쁜 현아. 하얀 고기 떼 가 눈앞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현암은 현아의 어깨를 놓고 고기 떼를 쫓아 달렸다. 열심히 달린다고 생각하는데도 슬로 모션처 럼 느릿느릿 스치는 풍경이 익살스럽게 느껴졌다. 현암은 웃으 며 계속 고기 떼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현암은 손을 뻗었다. 그 러나 물고기는 어느새 달아나 버렸다. 다시 한번. 하얀 고기가 현암의 손에 쥐어졌다. 그런데 묘하게도 싸늘하고 딱딱한 촉감 이 왔다. 현암은 손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흰 뼈다귀였다. 놀라서 주위를 돌아보니 헤엄쳐 다니는 것은 흰고 기 떼가 아닌, 산산이 부서진 뼈다귀들이었다. 울긋불긋한 꽃무 늬도 무늬가 아니었다. 일그러진 사람의 눈동자, 얼룩진 핏자국, 꿈틀거리는 심장이었다.
기겁을 하며 몸을 돌려 현아가 있던 곳으로 뛰어갔다. 미끈미 끈한 땅이 요동을 치며 물줄기가 발끝을 휘감았다. 끔찍한 무늬 들이 꿈틀꿈틀 움직이면서 확대되어 갔다. 먼발치에서 현아가 애처롭게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그 뒤에서 거센 물보라가 덮쳤다. 현아야, 어서, 어서 피해! 그러나 현아는 손만 흔들고 뭐라고 외치기만 할 뿐,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현아가 오빠를 목이 터져라 부르고 있었다.
현아가 왜 움직이지 못하는지 알 수 있었다. 현아의 발목을 웬 손이 붙들고 있었다. 물보라가 벼락같이 현아를 덮치는 순간, 현 암은 물줄기에 휩쓸리면서도 현아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현 이를 바짝 끌어당겼다. 안간힘을 다해……………. 물보라가 뒤로 밀려 가기 시작했다. 이젠 살았다.
현아가 괜찮은지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손목은 현아 것이 아니었다. 창백한 얼굴에 시커멓게 젖은 머리를 내려뜨린, 퀭한 눈구멍만 남은 여자가 히죽대고 있었다.
“으아악!”
현암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낮은 천장과 아무 것도 걸리지 않은 미색의 벽, 자그마한 등잔이 눈에 들어왔다. 현암은 식은땀을 흘리며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꿈 이었다. 너무나 싫은 꿈.
“이제 정신이 드시는가? 나무아미타불.”
나직한 목소리였다. 현암은 벌떡 일어났다. 몸은 예상외로 개 운하고 힘도 넘쳐흘렀다. 분명 주화입마에 빠졌을 텐데. 그러나 전보다 상태가 훨씬 좋았다. 앞에는 늙은 스님 한 분과 동자승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무척 초췌해 보이는 스님은 염주 알을 굴
리고 있었고, 동자승은 훌쩍거리다가 현암이 일어나자 잡아먹을 듯한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현암은 의아했지만, 곧 노스님이 자 신을 구했다고 생각하고 몸을 추슬러 무릎을 꿇고 절했다.
“스님께서 저를 구해 주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노스님은 입가에 온화한 미소만 보일락 말락 하게 띠고 계속 염주 알을 굴리면서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자네의 의지가 강해서 살아난 게야. 내가 한 게 뭐 있겠나?”
동자승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스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동자야.”
“저 알 수 없는 사람 때문에, 스님이 일생을 수련하신 내력을 죄다 잃어버리시지 않았어요!”
동자승의 말을 듣자 현암은 자신이 정신을 잃어 갈 때에 몸 안으로 밀려들던 엄청난 기운이 떠올랐다. 지금 가뿐해진 몸도………….
그렇다면 저 스님이 일생을 수련해서 얻은 내력을 모두 내 몸 에 넣어 주셨단 말인가? 일면식도 없는 나를 살리기 위해………… 현암은 시험 삼아 단전에 힘을 주고 기를 돌려 보았다. 혈도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막혀 소통되지 않았으나 이상하게도 내력은 곁길로 흘러 나름대로 주천을 돌았고, 위세도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막강해져 있었다. 전과 마찬가지로 오른팔에는 막힘이 없이 기가 흘러 들어갔다. 오른팔에 공력이 흘러 들어가자 놀랍게도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눈에 보일 정도로 엄청난 힘이 현암의 오른손에 맺혔다. 현암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이것은…… 이럴 수가…………….”
동자승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얼굴로 소리를 쳤다. “도혜 스님이 칠십 년 내력을 희생하신 결과요! 죽었다 깨어 나도 얻지 못할 은혜를 입어 놓고 뻣뻣이 앉아만 있을 거요?” 현암은 가슴에서 뜨거움이 뭉클 솟아올랐다. 칠십 년의 내력 이라니………… 도혜 스님이라는 분은 바로 여기 앉아 있는 노스님 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칠십 년 내력! 분명히 지금 현암의 몸에 돌고 있는 힘은 그 정도로 막강한 것이었다. 약한 몸을 보하려고 어릴 때부터 조금씩 수련해 왔던 현암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도혜 스님은 그 힘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현암의 뒤틀린 상태를 바로잡아 생명을 건져 준 것이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렇게까 지 힘을 쏟아붓지 않고 활공 정도만 해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 나 이미 두 번째 주화입마를 겪어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현암의 몸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 나 무인으로서 자신이 평생 닦은 내력을 어찌 이름도 모르는 타 인에게 아낌없이 불어넣을 수 있단 말인가!
현암은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했다. 무슨 말을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노스님은 그런 현암을 보고 고개를 흔들며 제지하려 했지만,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엄청난 내력을 가지고 있던 고수였을 터인데, 이제는 몸마저 잘 움직이지 못하게 되다니…………. 동자승이 그런 노스님을 보고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고, 현암도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노스님 은 다정한 손길로 동자승의 등을 두드리며 현암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만하시게. 다 인연이 있어서 그리 된 것이니. 선재라, 선재……”
현암이 계속 고두백배하자, 노스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에게 물어볼 것이 있네. 자네는 태극기공의 수련인이지?”
현암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입도 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노스님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무아미타불. 어쩌다가 그런 험한 것을 익힐 생각을 했는 가? 내 자네의 잠꼬대는 들었네만, 동생을 잃었던가?”
눈물이 왈칵솟구쳤다. 현암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복수를 하려고 하는가?”
현암은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불가에서는 자비를 근본으로 삼는다. 나는 한빈 거사라는 이인에게서 구명의 은혜를 입었고, 또다시 도혜 스님에게서 하늘 같은 은혜를 입었다. 이분들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면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아깝지 않다. 그러나 가련한 현아의 넋은 어쩐단 말인가. 정말로 그것만은 대답하 기가 어려웠다.
노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전히 따스한 눈길로 현암을 쳐다보았다. 현암은 그 눈빛을 도저히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노 스님이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업보로다. 뜻대로 하시게나. 깨달을 날이 올 것이 네. 선재로다. 선재로다…………….”
노스님은 현암에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복수심을 버리 라거나, 물려준 공력을 잘 이용하라는 당부도 하지 않았다. 설혹 그런 말을 들었다고 마음을 바꾸었을지는 현암 자신도 의문이었 다. 한빈 거사의 노여움을 사서 버림을 받게 된 것도 바로 그런 현암의 성격 때문이었다. 현암은 한빈 거사의 가르침에 무언으 로 일관하여 끝내는 수없는 매를 맞고 피를 토하면서도 복수를 포기하려 들지 않았고, 결국 한빈 거사는 노기가 치밀어 현암을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 버렸다. 그 이후 무리하게 공력을 끌어모 아 파사신검을 수련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만 하다가 종국에는 주화입마까지 겪게 되었다.
“자네의 혈도는 혹 해동밀교의 힘을 빌리면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이 부적도 거기서 얻은 것인데, 아마 자네에게 필요한 듯허이 자, 받게나.”
도혜 스님은 품에서 부적 한 장을 꺼내 현암에게 주었다. 현암은 떨리는 손으로 부적을 받았다.
“복수라는 말에 얽매이지 말고 진정으로 무엇에 대해 복수하 려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보시게. 그 부적에 기를 주입하면 저절 로 타들어 가네 부적에서 나온 기운을 마시면 영의 목소리를 들 을 수 있다고 하니, 복수를 할 때 부디 내 말을 잊지 말고 손을 쓰 기 전에 먼저 그것을 이용해 보시게나.”
영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부적이라니 현암은 믿기가 어려웠다.
현암의 마음속을 꿰뚫어 본 듯 도혜 스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잊지 마시게. 이 늙은이의 부탁일세.”
“예,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현암은 도혜 스님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도혜 스님은 온 화한 표정으로 성의껏 답변을 해 주었으나, 자신의 거처나 신상 에 대해서는 통 알려 주지 않았다.
“인연이라 생각하시게나. 한빈이라는 친구와 나는 좀 아는 사 이지. 그래서 태극기공을 알아볼 수 있었고, 다행히 자네에게 도 움을 약간 줄 수 있었을 뿐이니 더 이상은 신경 쓸 것이 없네. 그 리고 얻은 힘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리 된 것이니 알아서 사용하시고……………”
감복한 현암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자 도혜 스님은 잠자리에 들 테니 쉬라며 방을 나섰다.
다음 날 도혜 스님과 동자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쪽지 하 나 남아 있지 않았다. 현암은 근방을 돌아다니며 찾아보았지만, 도혜 스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현암은 눈물을 머금고 방 향도 없이 먼 산을 향해 절을 올렸다. 해가 질 때까지 한없이 절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