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1권 – 3화 어머니의 자장가 1 : 악몽
악몽
윤영은 줄다리를 달리고 있었다.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어두 워서 사방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짙은 회색 같기도 하고 어쩌면 푸른 남색, 아니면 거의 검정에 가까운 핏빛 색깔이 주변을 에워 싸고 있었는데 그 분위기는 묘하게도 친숙한 느낌을 주었다. 그 러나 동시에 음울하고 답답한 기분이 조바심을 내게 하는 그런 곳이었다.
윤영은 빨리 그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알 수 없는 힘이 윤영을 재촉했다. 윤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속도를 줄이지 않고 내리 달렸다.
노랫소리………………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낮게 깔린 여자의 음성이다. 윤영은 노랫소리를 듣자 편안해지면서 기운이 났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얼마나 지쳐 있는지 깨달았다. 윤영은 콧노래라도 부를 듯이 흥겨워졌다. 발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는 흐르는 땀을 손으로 훔쳤다.
“이제 얼마 안 남았을 거야.”
노랫소리는 계속해서 잔잔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쩌면 노 래라기보다 기분 좋은 흥얼거림 같았다.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따스한 느낌이 드는 소리였다.
노랫소리가 뚝 그쳤다. 어디서 울려오는지 모를 날카로운 비 명 소리와 함께 주변이 온통 흔들리기 시작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지경이었다. 멀리 뒤쪽에서 폭풍이 몰아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거대한 해일이 다가오는 듯했다.
발밑의 줄다리가 요동을 치며 흔들렸다. 윤영은 넘어질 뻔하 다가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고서 달리기 시작했다.
출렁거리던 줄다리가 진저리를 치듯 흔들리더니 허물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격렬하게 달리는 말발굽처럼 윤영의 심장이 펄떡거렸다. 저 앞에서 갑자기 하얀빛이 번뜩였다. 강한 힘이 윤영의 전신을 감 싸며 그녀를 쥐어짜는 듯 비틀었다. 무서운 고통이었으나 윤 영은 이를 악물고 뛰었다. 그녀의 뒤에 놓였던 줄다리가 토막토 막 끊어지며 무너져 내렸다.
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왔다.
윤영은 환한 빛이 비추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발밑이 허전했다.
그곳은 끝없는 절벽이었다.
윤영은 떨어져 내렸다. 한없이 아득한 밑으로…………….
손에 무엇이 잡혔다. 윤영이 아슬아슬하게 거기에 매달리자 어떤 힘이 다리를 잡아당겼다. 버티기 힘들었다. 그러나 버텨야 했다. 윤영은 이를 악물며 몸을 끌어 올리려 했다.
그러나 윤영의 허리는 그 힘을 이겨 내지 못했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허리가 두 동강 나더니 아랫도리가 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찢어졌다기보다는 예리하 게 잘려 나간 것처럼 보였다. 고통은 없었다. 다시 아래를 내려 다보니 자신의 두 다리가 멀쩡하게 붙어 있었다. 윤영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기가 움켜쥔 것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혀를 빼물고 눈을 감은 채 허공에 떠 있는 윤영 자신의 머리였다. 그 머리의 두 눈이 스르르 열리기 시작했다.
“아아악!”
윤영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고 이불마저 축축해져 있었다.
‘또 그 꿈・・・・・・ . 아아, 이젠 너무 싫어!’
책상 위에서 시계가 울었다. 새벽 세시 삼십분…………… 어김없이 정해진 시간이다. 아니, 이젠 일주일에 삼십 분씩 빨라지고 있었다.
벌써 팔 년째 윤영은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금요일 밤마다 꾸는 꿈이었다.
팔 년 동안 그 꿈은 정확히 아침 여섯시에 윤영을 깨웠다. 그리고 오 주 전부터는 매주 삼십 분씩 시간이 앞당겨졌다.
“이젠 더 이상 싫어! 제발 그만 그만!”
잠을 자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금요일이면 의식이 몽롱해지면서 무서운 기억을 까마득하게 잊은 채 잠자리에 들고 말았다. 윤영은 그런 자신이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삼 켜버릴 것 같은 무서움을 견딜 수 없었다.
윤영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목 놓아 울었다. 꿈꾸는 시간이 점 점 앞당겨지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기분이 나빴다. 언제까지 앞 당겨질지는 알 수 없으나, 언젠가 정해진 시간에 도달하게 되면 상상할 수 없이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현암은 가벼운 마음으로 약속 장소를 향했다. 이번 일은 별것 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지 마음이 가벼웠다.
‘이름이 김윤영이라 했지? 스물한 살이고, 지긋지긋한 귀신에 서 벗어나 젊은 아가씨 일을 맡게 되다니 기분이 좋군. 예쁘기만 하면 금상첨화련만. 후훗!’
현암은 기껏해야 가위 눌리는 정도의 일이거나, 잘해 봐야 부유령*또는 몽마(夢)가 장난치는 일이리라 여겼다. 이번 기회에 멋있게 보이면 어쩌면……….
‘아이고, 내가 정신이 나갔나? 천벌 받을 생각만 골라서 하네. 이런 일을 사리사욕에 이용하면 천벌을 받는 법인데. 그래도 좋 아. 예쁘면 까짓것 천벌을 받지 뭐! 하하하!”
현암은 장난기 어린 생각을 하면서 약속했던 카페의 문을 열 었다. 실내에서는 그윽한 커피 향이 풍겨 나왔고 코렐리가 부르 는 <별은 빛나건만>이 나직이 울리고 있었다. 웨이터의 안내를 받은 현암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뒤돌아 앉은 여자에게 다 가갔다.
실망스러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기대가 커서 그랬는지 얼른 볼 때는 썩 예뻐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심히 쳐다보니 독특한 개성을 풍기는 미인이었다. 안색이 창백해서 눈에 확 띄지 않았 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얼굴엔 온통 우울한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어서 웃는 얼굴로 마주 대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김윤영 씨?”
“아, 네. 제가 바로………….”
“이현암이라 합니다.”
현암은 쭈뼛했다. 윤영의 얼굴 복판에서 푸른 기운이 뻗쳐 이마 위로 거슬러 가는 듯했다. 죽음이 임박한 사람들에게 흔히 보이는 징표였다.
현암의 뇌리에서 잡념이 싹 지워지고 입가의 웃음도 가셨다.
“부모님은 안 계세요. 아버지는 제가 배 속에 있을 때 돌아가 셨고, 어머니는 제가 열세 살 때 돌아가셨어요. 그 후론 내내 할 머니와 함께 살고 있답니다.”
“형제분은요?”
“없어요. 외동딸이죠.”
“혹시 돌아가신 분은? 그러니까 어릴 때나 옛날에 돌아가 신・・・・・・ “
“제 기억으론 없어요. 그리고 어머니는 그런 얘기를 하신 적이 없어요. 언젠가 장난삼아 난 왜 오빠나 언니가 없냐고 물어본 적 이 있었죠. 어머니는 그냥 없다는 말씀만 하시고는 눈물을 흘리 셨어요. 그래서 다시는 물어보지도 않았고요. 근데 그걸 왜 물으 시죠?”
“아, 아뇨. 별건 아닙니다. 그런데 할머님과는 원래부터 같이 사셨나요?”
윤영은 잠시 주저하더니 말을 이어 갔다. 그녀의 얼굴에 부끄 러워하는 표정이 서렸다.
“아뇨. 할머니는 어머니를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어요.
분가하고 나서는 거의 의절하고 사셨죠. 그러다 아버지가 급환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저를 낳은 후에는 가엾게 여기셨는지 잘 대해 주셨어요.”
“자꾸 집안 얘기를 물어서 죄송합니다만, 원래 꿈은 그 사람이 자란 환경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답니다. 그래서 묻는 것이니 용서하세요.”
“예, 괜찮습니다.”
“꿈에 대한 얘기를 해 주시겠습니까?”
윤영은 가끔씩 몸서리를 치며 저주받을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 다. 묘사가 상당히 세세해서 현암은 자기가 직접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긴, 팔 년이면 사백 번은 같은 꿈을 꾼 셈이니 사소한 부분 까지 외우고도 남겠지…………
현암은 가볍게 들어 넘겼다. 꿈 자체가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 은 아니다. 무서운 꿈을 꾼다고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 문제는 무서운 꿈을 꾸게 만드는 요인이고, 그것이 사람을 죽게 만들 수 는 있다.
현암은 마지막으로 윤영의 손금을 보고 생년월일을 헤아려 보았다.
‘잘은 몰라도 단명할 운이나 쇠잔한 기운은 없는데……. 마가 낀 것이 틀림없군.’
[* 승천하지 못하고 특정한 목적도 없이 여기저기를 떠돌며 방황하는 영]
준후가 있었다면 단번에 영사)*하여 알아보았겠지만 불행히도 준후는 공력을 키우기 위해 어느 산에 처박혀 수련을 하 는 중이었고, 박 신부는 종교 관계 일인가 뭣인가로 연락도 되질 않았다. 할 수 없이 이번 일은 현암 혼자 처리해야 했다.
“매번 꿈을 꾸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면 일은 쉽습니다. 제가 말하는 대로 다음 주 금요일에 준비를 해 놓으세요. 괜찮으시다 면 그럼 이만…”
“와주실 수 있으세요? 제발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간은요?”
“밤에 와 주실 수 있겠어요? 어려운 부탁일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정말 잠들고 싶지 않아요.”
멀쩡한 여자가 밤에 집으로 찾아와 달라니. 현암은 금방 그런 생각을 지워 버렸다. 쓸데없는 상상을 하기엔 윤영의 눈빛이 너 무나 애처로웠다. 커다란 눈망울이, 마치 사냥꾼 앞에서 오들오 들 떨고 있는 산토끼를 보는 것 같았다. 얼마나 두려웠으면 이런 부탁까지 할까?
지금 내가 돕지 않으면 이 여자는 죽는다!’
금요일 밤에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터였다. 단순한 꿈인지 아니면 귀신의 장난인지……. 어쩐지 단순한 악몽이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 죽은 자나 시전자 자신의 영혼을 통해 어떤 현상이나 사실 등을 알아내는 일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