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2권 15화 – 초치검의 비밀 5 : 혼전(混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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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국내편 2권 15화 – 초치검의 비밀 5 : 혼전(混戰)


혼전(混戰)

“저들이 노리는 것은 초치검뿐이 아냐! 특히 스기노방 저자가 노리는 것은 단군의 유물이야!”

승희가 더듬거리면서 말을 잇자 박 신부가 다그치듯 말했다.

“단군? 난데없이 어째서 단군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 승희 야, 틀림없니? 확실해?”

준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더니 자기도 눈을 감고 중얼중 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저쪽에서는 철기과 스기노이 멀리 떨어져 격돌하고 있었다. 김덕령의 혼을 업고 힘을 빌린 철 기옹이 어깨에 걸려 있던 활을 내려 빈 활을 퉁겨 내자, 스기노 방도 검은 흑단 나무로 만들어진 카트반가*와 흡사한 홀을 뒤에 서 뽑아 양손에 들고는 보이지 않는 기운을 펼쳤다. 보이지 않는 기운과 나무로 된 봉이 충돌을 하는데도 쨍! 쨍! 하면서 불꽃이 튀겼다. 철기옹의 주위로는 누런 기운이 스기노방의 주위로는 검은 기운이 몰려 엉기기 시작했다.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은 둘 의 격돌을 관전하느라 한눈을 팔 수 없었다. 그런 중에도 먼 곳 에 있는 안 기자와 손 기자, 자영만이 승희의 말에 놀라서 이쪽 저쪽을 번갈아 쳐다보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승 희가 말을 이었다.

“틀림없어요. 스기노방 저자의 마음이 잠시 열렸어요. 단군, 단 군의 유물을 찾아야 한다고……………. 초치검이 아녜요. 초치검도 중 요하지만 그건 단군의 유물을 얻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아요.”


* 티베트 등지의 마하칼라상에서 보이는 두개골이나 사람의 머리 형상이 새겨진 지팡이나 봉


놀란 안 기자가 엉겁결에 소리를 높였다.

“초치검이 그냥 수단? 그건 천황의 삼대 신기인데?”

박 신부는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승희의 말을 믿지 않을 수는 없었으나 초치검 같은 보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는, 그것도 생각지도 못했던 단군의 유물이 그들이 진정으로 노 리는 것이라는 말에는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손 기자가 도리 어 단정 짓듯이 말했다.

“그럴 수도 있어!”

“뭐라고요. 손 기자님?”

“김자영 씨, 생각해 봐요. 칠지도의 훼손 말이에요.”

칠지도(刀)는 일본의 국가적 유물로 알려져 있는, 신성시 되는 국보 중의 국보였다. 그러나 칼에 씌어 있는 문구를 일본인 들은 교묘하게 조작하여 마치 그 칼이 하사받은 것이 아니라 공 물로 바친 것인 양 꾸미고 선전하고 있다는 사실, 또 그 칠지도 가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입증하는 증거로 사용된다는 생각이 자영의 뇌리를 스쳤다. 그래, 그들은 그러고도 남지. 그 런 말을 듣자 자영의 몸에서 까닭 없이 후끈한 열기가 솟아올랐 다. 갑자기 준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라! 이 누나, 이 누나는 나랏자손……”

준후가 놀란 눈으로 자영을 쳐다보며 말했다. 자영과 안 기자, 손 기자도 무슨 일인가 하여 준후를 돌아보고 있는데 저쪽에서 요란한 외침이 들려왔다.


철기옹과 스기노방의 힘은 엇비슷했다. 어차피 신력(神)을 빌려 쓰는 것은 신 자체의 힘과는 관련이 없으며 시전자의 능력 여하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철기옹은 계속 공세를 취하고 있 었고 스기노방은 방어에 급급했다. 활을 쏘아 대던 철기옹이 결 국 비장의 무기인 화살을 꺼냈다.

“이놈! 삼천 부적을 모아 만든 화살이다! 네놈의 술수도 이젠 끝이다!”

그때 돌연 마하칼라의 힘을 빌고 있던 스기노이 카트반가의 사람 머리 형상을 한 뚜껑을 잡아뗐다. 그러자 거기에서 돌연 검 은 연기가 뿜어져 나와 스기노이 내뿜고 있는 기류를 타고 화살을 메기고 있던 철기에게 날아갔다. 철기옹은 순식간에 밀 어닥친 연기를 맡고는 뒤로 휘청거리며 물러서기 시작했다. 

“여전히 간사하구나. 이놈!”

철기옹이 분노하여 고함을 쳤다. 현암이 소리를 치면서 날듯 이 달려가 철기옹을 부축했다.

“비겁하오, 스기노방! 독을 사용하다니!”

스기노방은 씨익 냉소를 짓고는 신의 기운을 풀어 본래의 모 습으로 되돌아갔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병수와 현현파, 사천왕 이 달려가려 했으나 도운이 길을 가로막고 섰다. 성질이 어지간히 급한 병수가 철봉을 들어 도운을 향해 빙빙 돌리자 도운은 철 추를 병수에게 던졌다. 병수가 이를 막자 철추가 철봉에 감겼다. 둘은 서로 자신의 무기를 끌어당기기 시작했고, 그 틈을 타서 사 천왕은 스기노방에게 달려갔다. 앞을 막아서는 사람이 또 있었 다. 홍녀였다.

“여러분, 여러분! 싸우지 마십시다! 이건……………..”

“닥쳐라! 치사한 작자들! 정당한 무예의 대결에서 독을 사용 하다니!”

광목 화상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홍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뒤에서 스기노방이 소리를 치자 눈을 감 고 손을 앞으로 모아 막대기를 둘로 쪼갰다. 맑은 소리와 함께 쌍검인 구마열화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암이 소리쳤다.

“홍녀 님! 싸울 거요?”

홍녀는 대답 대신 날카롭게 기합을 넣으면서 혼자 사천왕을 향해 뛰어들었다. 사천왕의 승려들은 여자가 나선데다 손에 들 려 있는 칼에서 영기까지 뿜어져 나오자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 다. 그들은 무기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사천왕은 홍녀에게 직접 손을 쓰지 않고 사방에서 에워쌌다. 진법을 발휘하여 홍녀의 공격을 막아 보려는 것 같았다. 그 순 간, 현정이 뛰어들었다.

“이봐! 나는 어때? 칼대 칼로?”

현정이 소리치면서 청홍검을 꺼내자 스르릉 하고 사람의 가슴을 베는 듯한 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사천왕은 뒤로 물러섰 고, 홍녀는 이를 악물면서 기합성을 쏟았다.

“발(發)!”

홍녀가 기합성을 발하자 구마열화검에서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현암은 목청을 높여 소리치고 있었다.

“여러분, 그만들 둬요! 싸우지 마세요!”

그러나 현현파의 네 사람은 이미 스기노방에게 달려들고 있었 다. 스기노방은 순간적으로 신력을 끌어들여서 다시 마하칼라의 형태로 변해 갔다. 이번에는 그도 긴장한 듯, 카트반가의 홀을 허공에 던지고는 칼트리도(刀)*와 방울을 꺼냈다. 스기노방의 뒤 에서 거대한 검은 기운이 일어나면서 허공에 던져진 카트가가 마치 스기노방이 직접 휘두르는 것처럼 붕붕 돌았다. 현현파의 우두머리인 근호가 소리쳤다.

“마하칼라의 사비술(四術)이다! 사합술(四合術)을!”

윤섭이 기합을 넣자 위로 근호가 뛰어오르고 윤섭이 근호의 양다리를 잡았다. 양옆에서 태현과 경민이 윤섭의 옆구리에 팔 을 끼우자 근호는 길게 소리를 치면서 양손을 가슴 앞으로 교차시키고 재빠르게 돌렸다. 태현과 경민도 자유로운 왼손과 오른손을 휘두르면서 마치 네 명이 하나의 거인을 이룬 듯 스기노방을 향해 덮쳐 갔다.


*티베트의 칼, 고기를 써는 용도로 쓰인다.


현암은 그만두라고 소리를 쳤다. 이런 것이 아니었다. 힘이나 주술은 사람과 사람이 맞붙어서 싸우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힘자랑을 하기 위하여 있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병수가 철봉을 도운에게 빼앗겼다. 도운이 미친 듯 소리를 지 르며 병수를 덮쳐 가는데 사천왕이 앞을 막았다. 도운이 철추를 휘둘렀으나 사천왕 가운데 지국 화상과 증장 화상이 철추를 붙 들었다. 도운은 철추를 한 손에 몰아 쥐면서 갑자기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냈다. 광목 화상이 소리쳤다.

“슈리켄(표창)이다! 화상이면서 그런 지독한 것을!”

도운은 들은 척도 않고 놀라운 속도로 슈리켄을 무더기로 뿌 렸다. 다섯은 재빨리 몸을 피했으나 병수의 옆구리에 슈리켄 두 개가 박혔고, 철추를 잡고 있어서 몸을 피하지 못한 지국과 증장 도 슈리켄을 한방씩 맞았다. 광목과 다문은 재빨리 몸을 피했으 나 몸의 자세를 가다듬고는 소리를 질렀다. 그들의 눈에 분노가 이글거렸다.

“이 고약한 놈!”

현정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청홍검을 날렵하게 놀려 홍 녀를 밀어붙였다. 홍녀는 활활 타오르는 구마열화검을 휘두르며

불꽃을 뿌리고 있었으나, 달빛처럼 싸늘하게 흰빛을 번득이는 청홍검에 칼을 맞부딪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현정의 검 법은 그야말로 물샐 틈 하나 없었다. 여인에게만 전해져 천 년을 내려왔다는 아미파의 비전을 터득한 듯싶었다. 현정은 대련을 하는듯한 무표정한 얼굴로 인정사정없이 홍녀를 몰아붙였다. 지연보살이 달려와서는 현암 대신 철기옹을 부축했다. 철기옹 이 숨이 막히는지 기침을 했다. 독이 지독한 모양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어르신?”

현암의 말에 철기옹은 찡그리던 얼굴을 애써 가다듬더니 불쑥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냥 그렇지 뭐!”

그러나 철기옹은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신음을 흘렸다. 지연 보살이 철기옹의 얼굴을 손으로 덮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는 모습을 보면서 현암은 몸을 일으켰다.

현현파의 네 도인은 마하칼라의 힘을 업은 스기노방의 무기 에 맞서 혈전을 치르고 있었다. 스기노방은 오른손의 칼트리 와 방울을 요란하게 흔들면서 사진(四合)의 양쪽인 태현, 경 민과 대적하고 있었고, 근호는 허공에서 날뛰는 카트반가를 맨 손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순간 스기노방이 입을 벌리며 훅 하고 녹색 연기를 뿜어 가운데를 받치던 윤섭을 공격했다. 급작스레 공격을 받은 윤섭이 비명을 지르자 사합진은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윤섭이 중독된 듯했기 때문이었다. 윤섭의 무등을 타고 있던 근호가 노호성을 지르면서 단봉 두 개를 빼들고 그대로 몸을 날리자, 양쪽의 태현과 경민도 삼재검(三才劍)*을 빼들고는 스기 노방을 덮쳐 갔다.

“죽일 놈의 늙은이!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박 신부와 준후는 미친 듯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 쪽으로 달려 내려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지 않으면 자칫 여러 명이 죽거 나 다칠지도 모르는 판이었다. 박 신부는 도운에게, 준후는 스기 노방에게 달려갔다. 사천왕을 따라왔던 승현 사미도 준후쪽으 로 달려오고 있었다.

현암은 홍녀에게 달려갔다. 현정의 청홍검 앞에 금세라도 홍 녀의 목이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현암이 월향을 꺼내자 길게 끄는 귀곡성이 울려 나왔다.

지연보살은 땀을 줄줄 흘리며 철기옹의 몸에서 독을 빼냈다. 지연보살의 손이 검게 물들어 가고, 의식을 잃고 있던 철기옹은 정신이 드는지 입에서 조금씩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승희는 말 없이 가부좌를 틀고 현암과 박 신부, 준후에게 힘을 보내기 위해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 작은 단검 끝에 쇠줄이 붙어서 휘두르거나 던졌다가 회수하는 등의 용법으로 사용하는 무기.


자영은 부상당한 철기옹에게 달려갔다. 안 기자와 손 기자도 뒤를 따랐다.

‘이런 걸 찍어야 하는데…………. 하지만 아무리 특종이라도 사람의 목숨이 더 중하지!’

안 기자 일행이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오의파의 두 사람이 튀어나오더니 길을 막았다.

“못 간다! 흐흐흐!”

안 기자 일행은 놀라서 우뚝 멈추어 섰다. 이 사람들이 왜 그 러는 걸까? 보기에는 점잖은 사람들 같았는데……. 그들의 얼굴 을 본 자영이 길게 비명을 질렀다. 안 기자와 손 기자도 그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의 눈은 희게 뒤집혀 있었고 입에는 흉측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초치검을 찾으러 온 자 아무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다!”

셋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두 사람 은 뭔가에 띈 것이 분명했다. 도력이 높은 것 같았는데 저렇게 되다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저마다 혼전을 벌이고 있거 나 상처를 입고 있었고, 세 기자를 도와줄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 속에서 오의파의 두 사람, 아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쐰 두 사람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그들에게 다가왔다.

“인술(*을? 화상의 탈만 썼지 살인자로군!”

도운의 슈리켄에 맞은 지국 화상이 소리쳤다. 증장 화상은 독 이 벌써 몸에 많이 번진 듯 신음 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었다. 광 목화상이 두 화상과 차력사인 병수를 돌보는 동안 다문화상이 분노의 눈을 불태우며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화상의 흉내를 내며 부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 내 혼을 내 주마!”

다문이 기합을 넣으며 휙휙 허공에 손질을 하면서 기를 모으 자 가사 속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다문은 기합을 넣으 면서 가사를 단숨에 벗어 뒤로 던졌다. 온몸에 강철같이 꿈틀거 리는 근육이 보였다. 육체를 단련하는 외공 수행이 놀라운 경지 에 이른 듯했다. 긴장한 도운은 이를 악물며 몸을 회전시켜 세 개의 슈리켄을 던졌다. 다문이 기합을 발하면서 한 손으로 그것 을 휘어잡았다. 도운이 흠칫하는 사이, 다문이 기합을 넣자 손 안에 든 슈리켄이 살을 뚫지도 못하고 종잇장처럼 찌그러져 버렸다.

“내 승려의 몸으로 목숨을 빼앗을 수는 없지만, 요 정도 망가 뜨리는건 부처님도 허락하실 거다.”


*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비밀 청부 살인 조직의 구성원을 닌자(忍 者)라고 불렀는데 닌자들이 사용하는 독특한 살인, 침투 등에 쓰이는 괴이한 기 술들을 인술이라고 부른다.


도운은 무언가 결심한 듯 양미간을 찡그렸다.

홍녀는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용감하게 구마열화검을 휘둘러 서 청홍검을 맞받아쳤다. 챙! 하는 청명한 소리가 울리고 구마 화검의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현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계속 칼을 휘둘렀다. 구마열화검도 영력을 지닌 보물급이라 청 홍검의 격돌에도 어느 정도는 견뎠으나, 한 번 부딪히고 난 후에 는 칼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현정이 청홍검을 잠시 거두어 자세를 취한 다음 외쳤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다만 자비심은 있다. 목숨은 빼앗지 않을 것이 계속 반항하면 팔 하나를 가져갈 것이고 항복한다면 칼 만 접수하겠다. 어떠냐?”

홍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분명 검술의 조예로 본다면 아 미파의 정수를 이어받은 현정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임은 자명 한 일, 그렇다고 밀교의 보물인 구마열화검을 내놓을 수도 없었 다. 홍녀는 입술을 깨물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홍녀의 뒤 에서 기다란 모래먼지가 일어났다. 달려오던 현암이 소리를 질 렀다.

“물러나요! 백귀야행진(百鬼夜行陣)이오!”

현암의 놀라는 소리에 현정이 문득 뒤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이미 누런 기운이 현정을 에워싸고 있었다. 현암은 월향검을 뽑아 들었다.

현현파의 우두머리 격인 근호는 스기노방에게 단봉을 휘두르 며 악을 쓰고 있었다.

“더러운 늙은이! 해독제를 내놓아라!”

태현과 경민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줄로 조종하는 단검인 삼 재검을 날려서 스기노방을 무섭게 공격하고 있었다. 준후는 이 상한 생각이 들었다. 마하칼라의 힘을 업을 정도의 고수인 스기 노방이 공격도 하지 않고 물러서기만 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 았다. 현현파의 세 명의 공격도 예사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공격 은 주술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니었다. 몇 가지 주술이면 쉽게 세 명을 제압할 수 있을 텐데 오히려 물러서고 있다니? 갑자기 누가 준후의 앞을 막아섰다. 준후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동자승인 사미 승현이었다.

“가지 마! 저. 저자는……………..”

승현 사미는 숨이 차는지 헐떡거리면서 준후의 앞을 막아섰 다. 준후는 놀라서 재빨리 걸음을 멈추었다. 승현이 소리쳤다. 

“나는 힘은 없지만 저자가 무얼 하는지는 알아! 저자는 여기 잠든 오백 혼령을 깨우고 있어!”

준후는 놀란 눈으로 스기노방이 물러서고 있는 발자국들을 짚 어 보았다. 방위에 맞춘 발걸음이었다. 발자국이 깊게 새겨지는 것으로 보아 걸음을 옮기는 발에 힘을 가해 지기(地氣)를 일시적 으로나마 파괴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놀란 준후가 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뒤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으아악!”

자영이었다. 준후가 뒤를 돌아보니 오의파의 두 사람이 세기 자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었다. 손 기자는 대들다가 이미 한방 얻어맞았는지 안 기자만 그의 팔에 매달려 있었고, 자영은 계속 소리를 질러 댔다. 영안(眼)이 트여 있는 준후의 눈에 두 사람의 몸에 씐 사무라이 복장을 한 무사의 영이 투사되었다. 스 기노방의 주술이 효과를 발휘하는지 영들이 하나둘 깨어나고 있 었다. 그들이 물러서고 있는 뒤편에는 아무 잡념도 갖지 않고 오 로지 힘을 보내는 데에만 집중하고 앉아 있는 승희의 모습도 보 였다. 저런 무방비 상태에서 기습을 당한다면……………

“이를 어쩌지?”

준후가 어쩔 줄을 모르고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리면서 붉은 깃발 두 개가 날아와 스기노방의 뒤 편에 꽂혔다. 주기 선생 상준의 것이 분명했다. 날아와 꽂힌 붉 은 깃발 중 하나에서는 꿈틀대는 불기둥이, 또 다른 하나에서는 울부짖는 맹수의 형상이 어리기 시작했다.

“하하하! 이 늙은이야! 네가 왜놈들 중에 제일 센 놈이냐?”

숲 속에서 주기 선생 상준이 힐기보법으로 날듯이 모습을 나 타냈다. 손에는 해묵은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스기노방이 눈을 부릅떴고 스기노방에게 거세게 달려들던 근호도 놀라 신음성을 냈다. 스기노방이 뒤로 돌아 노한 소리를 지르며 불기둥이 솟는 기 하나를 밟아 버리자 불길은 금세 사그라져 버렸다. 그 광경을 본 상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홍녀가 불러낸 백귀야행의 기운은 막 대결하려던 다문과 도운 까지 에워쌌다. 도운은 여유 있게 웃음을 지었고 다문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뒤로 물러섰다. 백제암의 사천왕은 주로 육 체를 단련하는 외공 수련을 해 왔기 때문에 주술은 잘 알지 못했 다. 백귀의 기운 중에 한 놈의 기운이 뻗쳐 나가 다문화상의 뒤 를 덮치려다가 부르르 떨며 튕겨져 나갔다. 박 신부가 뛰어들면 서 오라를 발한 때문이었다. 박 신부가 기합처럼 기도성을 올리 자 오라가 둥글게 뻗어 나가면서 쓰러져 있던 세 사람과 광목 화 상까지 에워쌌다. 문득 독 기운으로 신음하던 병수가 고통도 잊 은 듯 놀란 함성을 질렀다.

“초치검!”

정신없이 뒤엉켜 싸우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울려 퍼진 병수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주기 선생 상준의 손에 들려 있는 낡은 칼 검집에는 분명 ‘천총운검(天)’의 네 글 자가 씌어 있었다.


명검은 과연 명검이었다. 선명하고 맑은 기운이 어린 청홍검 을 휘두르자 백귀들은 감히 다가오지도 못하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현정은 원래 특별한 영력을 지닌 사람은 아니었지만 주 위를 둘러싼 기운이 흉악하다는 것은 눈치챘다. 손을 신속하게 놀려 검망을 펼치자 현정의 사위에 수백 개의 칼이 흔들리 고 있는 것처럼 방어막이 생겼다. 아미파의 호신 검술이었다. 현 정은 몹시 화난 상태였다. 홍녀라는 저 일본 여자가 정당한 무술 이 아닌 사술術)을 사용하여 사람을 해치려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홍녀는 사람들을 해칠 목적으로 백귀진을 친 것이 아니라 싸움이 벌어지는 사이에 백귀를 몰아넣어 싸움을 중단시킬 목적 이었지만, 현정이 그것까지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현정은 싸늘 한 눈매로 검은 휘두르면서 차분하면서도 신속하게 홍녀 쪽으로 걸음을 옮겨 갔다.

한쪽에서는 박 신부가 오라를 발해서 백귀들을 물러서게 만들 었고, 그사이 광목은 부상당한 두 동료 화상을 부축하며 뒤쪽으 로 물러서고 있었다. 다문은 도운에게 다가서려던 참이었다. 가 진 재주가 바닥이 났고 이제 무기도 가지지 않은 도운은 몇 수 공격을 해 보았으나 다문이 엄청난 힘으로 도운의 손목을 잡자 힘조차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입을 딱 벌렸다. 비명조차도 지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너 이놈, 오늘 제대로 걸린 줄 알아라!”

손목을 잡힌 도운의 팔에서 우두둑 하며 뼈가 부러지는 소리 가 났다. 도운의 눈이 고통에 질려 희게 뒤집혔다. 그러나 잠깐 사이, 도운은 자유로운 한 손을 재빨리 품에 넣어서 마지막 남은 슈리켄을 꺼내 다문의 배꼽에 박았다. 다른 곳이라면 외공을 익힌 살갗을 뚫지 못했겠지만, 그곳은 취약했다.

“으윽! 이, 이놈이!”

다문이 노호성을 지르며 도운의 팔을 잡은 채 거대한 덩치의 도운을 패대기쳤다. 팔이 완전히 부러지는 것을 느끼면서 도운 은 의식을 잃었다. 다문은 슈리켄에 찔린 배를 만져 보았다. 벌 써 독이 번졌는지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분을 참지 못한 다문은 발을 들어 도운의 목을 밟으려 하다가 멈칫했다. 아무리 화가 나 도살인을 할 수는 없었고, 또 그것보다는 해독이 중요했다. “말세다, 말세. 중이 독을 쓰고 암기를 던지는 세상이라니……… 다문은 그 와중에도 침착해지려고 애썼다. 독은 여러 종류가 있다. 닿기만 하면 즉사하는 독도 많이 있는데, 이렇게 효과가 느린 걸 보면 살해보다는 협박이나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는 독인 듯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해독약도 있을 터. 다문은 도운의 품을 뒤졌다. 독 기운이 도는지 몸이 저릿저릿해 지면서 힘이 빠지고 있었다. 도운의 품을 뒤지던 다문은 그의 몸 에서 작은 봉지 하나를 찾아냈다.

“됐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다문이 찾아낸 봉지 안에는 서로 다른 크기와 모양, 색깔을 지닌 약이 삼십여 가지나 있었다.

“아니, 이중에서 어떻게 해독약을 찾지?”


준후는 품에서 부적 두 장을 꺼내 기자 일행에게 다가가는 오 의파의 두 사람을 향해 던졌다. 부적들은 날아가면서 허공에서 저절로 불이 붙었다. 부적이 두 사람의 등에 달라붙으려 하는 찰나,

“어딜!”

하며 눈이 뒤집힌 오의파의 두 남자가 재빨리 몸을 돌리더니 언제부터 들고 있었는지 모를 일본도를 휘둘러서 부적을 허공에 서 잘라 버렸다. 준후는 깜짝 놀랐다. 놈들은 두 사람의 몸을 빌 려 살아생전에 익혔던 무예까지도 응용하고 있었다. 준후는 안 기자와 자영, 손 기자에게 피하라는 눈짓을 보내면서 계속 부적 을 날렸다. 어지럽게 날아가는 부적을 막아 내느라 오의파의 두 사람, 아니 두 명의 사무라이는 경황이 없었다. 안 기자는 비틀 거리는 손 기자를 부축하고 자영의 손을 잡아끌면서 지연보살이 있는 곳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지연보살의 손은 새까맣게 물들 어 있었고 얼굴은 반대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일단 고비를 넘겼는지 철기옹의 숨소리는 다행히 고르게 변했 다. 안 기자 일행이 당도할 때쯤, 지연보살이 이를 악물며 땅에 손을 갖다 댔다. 손에서 검은 액체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자마자 주위의 풀들이 말라죽었다. 안 기자는 망연한 중에도 땀을 흘리고 있는 자연보살의 모습을 감췄던 소형 카메라에 담았다. 준후는 기자 일행이 피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부적을 던지던 손길을 멈추고 입술을 깨물었다.

현현파의 세 사람은 스기노방을 주기 선생에게 맡기고 중독당 한윤섭을 데리고 물러서려 하고 있었다. 상준이 들고 있는 초치 검이 탐나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것 때문에 중독당한 동료 를 버려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언제 거기까지 기어 왔는지 차력사 병수가 얼굴이 새파랗게 된 채 철봉을 쥐고 헐떡 거렸다.

“초, 초치검・・・・・・ 저걸, 저걸 얻어야 해.”

“이봐요! 정신 차리시오! 당신은 치료부터 받아야 해요!”

“초, 초치검! 으흐…… 얻어야 해! 저걸 얻지 못하면!”

“왜 그리 욕심을 내는 거요?”

“고다이고 천황의 검, 난 저걸 얻지 못하면 죽어!”

현현파 사람들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는데, 그것을 아는 지 모르는지 주기 선생 상준은 여유를 찾아 스기노방을 노려보 고 있었다. 상준은 한 손에 초치검을 들고 한 손으로 등에서 붉 은 깃발을 세 개나 꺼냈다. 스기노방은 노한 얼굴로 아까 상준이 던졌던 두 깃발 중 다시 하나의 깃발을 뽑아서 꺾어 버리고 말았 다. 상준이 소리쳤다.

“허, 꽤 대단하구나! 십이지신 중 축(丑) 신과 사신의 힘을 그리 쉽게 이겨 내다니! 그럼 좀 더 가 볼까? 신(申)! 유(酉)! 술(戌)!”

상준이 세 개의 깃발을 한꺼번에 허공에 던지자 깃발에서 회 색 기류가 뿜어 나와 스기노방에게 덮쳐들었다. 스기노방은 금 강저와 카트반가를 휘두르며 뒤로 물러섰다.

“하하하! 도망가냐?”

상준이 웃고 있는데 승현이 고함을 쳤다.

“뒤로, 뒤로 물러서게 하면 안 돼요!”

스기노방의 방울이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승현 사미 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때마침 뒤로 후퇴하던 광목 화상이 그 광 경을 보고 몸을 날렸다.

“사미! 물러・・・・・・ 억!”

조그마했지만 방울에는 스기노방의 주술력이 실려 있었다. 광 목은 주술이 실린 방울을 자신의 몸으로 대신 막았다. 허나 조그 마한 방울은 커다란 광목의 몸을 뒤로 거침없이 밀어냈다. 광목 은 뒤에 질린 표정으로 서 있던 승현과 엉켜 우당탕 나뒹굴었 다. 구경만 하던 승현 사미까지 말려드는 것을 보고 뒤로 물러서 려던 현현파의 세 사람은 다시 이를 갈면서 고함을 지르며 앞으 로 달려 나왔다. 주기 선생 상준도 다시 세 개의 깃발을 꺼내 던졌다.

“오(午)! 미(未)! 해(亥)!”

십이지신 중에 세 가지의 힘이 스기노방을 덮쳤다. 현현파의 근호가 소리를 쳤다.

“주기 선생! 왜 약한 것만 쓰는 거요? 강한 수법으로 끝내 버리시오!”

지금까지 주기 선생 상준이 불러낸 힘은 십이지신 가운데 소, 뱀, 원숭이, 닭, 개, 말, 양, 돼지의 여덟 가지 힘이었다. 신력이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 테고 뭔가 나름의 이유도 있으리라 생각 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상준이 불러낸 동물들이 상징하는 힘 은 전투적인 힘보다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 통례였다. 호 랑이나 용 같은 무서운 힘을 지녔음 직한 십이지신의 힘은 왜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 경민이 근호의 말을 이었다.

“당신의 십이지신 술 중 가장 강력한 것이 자(子), 인(寅), 진 (辰)의 술법이 아니오? 왜 힘을 남겨 두는지 알 수 없군요!” 상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상준이 많은 수의 힘을 불러냈음에도 스기노방에게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다. 현현파의 세 사람은 의아해하면서도 함께 스기노방을 상대하기 위해 뛰어 들었다. 독이 퍼지기 시작한 병수는 철봉에 기대어 간신히 버티 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승현은 신음을 올리는 광목을 붙잡고 울 고 있었다. 광목은 외공으로 강철 같이 단련한 몸이어서 그런지 방울을 맞은 배에 구멍이 뚫리지는 않았으나, 타격이 심해 신음성만울리고 있었다.

홍녀는 백귀진을 가다듬는 데 온 정신을 쏟아부었다. 홍녀의 백귀진은 저번 흡혈마와의 싸움 때에 한번 질서를 잃고, 준후의 초일월광에 밀려 많은 수의 영이 흩어졌기 때문에 위력이 예전 만 못했다. 또한 사람들을 해칠 목적으로 편 것이 아니라서 박 신부의 오라와 현정이 휘두르는 청홍검의 위세에 밀려 형편없이 찌그러져 가고 있었다. 사실 홍녀는 현정을 물러서게 할 목적으 로 백귀진을 편 것이었는데 막상 보검을 지닌 현정에게는 효력 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정이 검막(劍)을 치면서 홍녀에게 거의 접근했을 때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작은 검이 제비처럼 현 정의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현정은 흠칫했다.

“어검술! 정말이네!”

“그 칼, 함부로 휘두르지 마시오! 사람이 다치잖소!”

현암이 소리쳤다. 현정은 현암을 힐끗 쳐다보더니 망설임 없 홍녀의 몸에 칼을 내리그었다.

“아아악!”

홍녀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쓰러졌다. 깊은 상처로 금세 어깨가 붉게 물들었고, 주술이 흩어지자 백귀의 기운도 삽시간에 약해져 버렸다. 청홍검의 정순한 기운 앞에 주술의 방어가 전 혀 먹혀들지 않는 것을 미처 모르고 홍녀는 주술로 방어하려 했던 것이다. 상처로 인한 고통이 심한 듯 홍녀는 몸을 떨었다. 현 정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서자 두 번째로 작은 칼이 날아들었다. 현정은 그 칼에 자기를 해칠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몸을 움직이지 않고 뻣뻣이 서서 월향이 지나가기를 기 다렸다. 현정의 눈이 현암을 향했다. 현암은 급히 달려와서 홍녀 의 앞을 막아섰고, 오른손을 뻗자 월향검이 날아와 현암의 손에 잡혔다.

“무슨 짓을!”

“죽이지는 않아요. 혼을 내 주려는 것뿐이죠.”

“아, 정말…… 잔인하네. 이제 그만두고 물러나요! 어서!”

“아니, 저 칼은 내가 가져가야겠어요. 전리품으로.”

현암은 홍녀가 아직도 쥐고 있는 구마열화검을 힐끗 내려다보 았다. 홍녀가 죽으면 죽었지 밀교의 보물인 검을 내놓을 리가 없었다.

“남의 물건을 왜 가져간다는 말입니까?”

“덕이 있는 자가 가지면 되지, 주인이 따로 있나요? 내가 세상 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바로 명검이에요!”

현암은 현정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오랜 수련을 거쳐 야 나올 수 있는 무표정한 얼굴. 아무 욕심이 없어 보였으나, 오 히려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유별난 기호에 맞는 물건을 발견 하면 더욱 탐을 내게 된다는 사실을 현암은 잘 알고 있었다. 초 치검과 구마열화검. 혹시 월향검까지 갖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현암은 으쓸해졌다. 눈을 돌려 보니 지금은 칼 하나를 갖고 아옹다옹할 때가 아니었다. 주기 선생 상준과 현현 파 사람들이 스기노방과 붙고 있었다. 스기노방은 밀리는 것처 럼 보였지만 현암은 그게 술수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때마침 백귀들을 밀어내고 다가오는 박 신부에게 현암은 홍녀를 맡긴다는 눈짓을 했다. 그리고 현정에게 소리쳤다.

“이 여자는 됐으니 제발 그냥 둬요. 여기저기 주변이 급한데, 일단은 정신나간 일본 노인네를 혼내주러 가는 게 어때요?” 

“내가 말하고 싶은 바예요.”

현정은 말을 마치자마자 의식을 잃어 가는 홍녀의 손에서 한 쌍의 구마열화검 중 한 자루를 빼앗았다. 현암은 어이가 없었으 나현정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깜찍하게 소리를 쳤다. 

“가자면서요?””

현암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현정과 함께 스기노방에게 달려갔다.

지연보살이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철기옹을 치료하느 라 기운을 많이 쓴 것 같았는데, 어디로 가는지 자영은 의아하게 여겼다.

“어딜 가세요?”

“저, 저기 다친 사람이 많아요. 가 봐야죠.”

손 기자가 얼핏 보니 지연보살의 손은 원래의 색으로 돌아와 있었으나 팔목은 아직도 검은빛 그대로였다. 독이 완전히 빠지지 않은 것이었다. 

“지연보살님!”

지연보살은 힘들어하는 얼굴에도 불구하고 희미한 웃음을 띠 더니 슬며시 손기자의 어깨를 짚었다. 놀랍게도 손 기자가 사무라이의 귀신이 씐 오의파에게 얻어맞았던 곳의 아픔이 금세 가셨다.

“아니, 이 상황에 저까지…………. 저는 별로 다치지 않았는데.” 

“아녜요. 아픈데… 아프신데……..”

힘겹게 걸음을 옮기려는 지연보살을 자영이 부축했다. 그러고 는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부상자들에게로 안내했다. 손 기자는 멍하니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안 기자에게 말했다.

“우리는 뭐지? 우리도 뭔가 도와야 할 것 아냐? 세상에 이런 일들이 있다니, 제기랄.”

안 기자는 눈을 빛내다가 입을 열었다.

“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야! 아까 말한 이야기, 단 군의 유물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지? 그 수수께끼를 풀어야 해!”

“무슨 소리야?”

“저들이 목숨 걸고 싸우는데 우리는 할 일이 없잖아! 그거라도 해야지!”

“안 기자, 한가한 소리 하고 있을 거야?”

“잘하면 상황이 바뀔 거야! 저 늙은 왜놈이 생각했다는 단군의

유물이 뭔지, 왜놈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밝혀 보자고!”

“이 상황에서?”

“그럼 뭘 하지? 할 수 있는 게 이것 말곤 없잖아!”

안 기자는 어제 샀던 일본사 책을 배낭에서 꺼내 펼쳤다. 손 기자도 힐끔힐끔 사방을 돌아보면서 들은 이야기들을 한데 짜 맞추려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승희가 눈을 떴다. 이상했다. 수상한 기운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고, 승희 안의 애염명왕이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듯했다. 

‘이, 이건!’

승희의 주변에 수십, 아니 수백이 넘는 기운이 다가오고 있었 다. 놀란 승희는 그들의 마음을 투시하려 했다. 마음, 그들의 마 음속을 읽고 승희는 자지러질 듯 놀랐다. 그리고 다른 자, 또다 른 자………… 수백에 이르는 자들의 마음에 있는 소리들을 읽자 그 것이 마치 합창처럼 승희의 귀로 밀려들었다.

모두 해치운다!

모두 해치운다!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라! 나가라! 아마테라스의 후손들이여! 

지박령이었다. 오백이 넘는 수가 매장되어 있던, 그리고 오백 년이 훨씬 넘게 이곳에서 잠들어 있던 시체들의 영혼은 승천하 지 못하고 모두 지박령이 되어 있었다. 지금 그들은 소리 높여 적의를 불태우며 이리로 다가왔다. 스기노방에 의해 지기(地)가 깨지고 봉인이 풀린 것이다. 승희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고함을 쳐서 일행을 불렀다.

주기 선생 상준의 십이지신력이 공격하고 거기에 현현파의 두 사람이 멀리서 삼재검으로 공격을 하는데도 스기노방은 모두 막 아 냈다. 승희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자 마침내 스기노방은 원하 던 것이 이제야 이루어졌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쭉 폈 다. 스기노방은 그사이 지기를 깨뜨려서 오백 지박령을 깨우는 데 반 이상의 힘을 할애하고 있었던 것이다. 봉인이 깨졌다는 것 을 알자, 스기노방은 이제까지의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를 취하 기 시작했다. 경민과 태현이 날린 삼재검을 스기노이 맨손으 로 잡았다. 그리고 이상한 주문을 흘리면서 손에 힘을 주자 삼재 검에 연결되어 있던 쇠줄이 실오라기처럼 툭툭 끊어져 버렸고, 경민과 태현도 알지 못할 힘에 타격을 입은 듯 비명을 지르며 뒤 로 넘어졌다. 현현파의 우두머리 근호가 노호성을 지르고 단봉 을 휘두르며 몸을 날리자, 주기 선생 상준의 십이지신의 기운 중 세 가닥이 함께 스기노방에게 덮쳐 갔다. 스기노방의 머리 위에 서 혼자 춤추던 카트반가가 근호에 맞서 날아가고, 스기노방은 금강저를 휘둘러 세 가닥의 기운을 차단했다. 그때, 현정이 소리 를 지르면서 스기노방에게로 달려가다가 몸을 날렸다. 현정은 들고 있던 구마열화검을 스기노방에게 날카롭게 던지고는 청홍검을 높이 치켜들며 뛰어올랐다. 스기노방은 서둘러 몸을 틀어 서 구마열화검을 피했으나, 워낙 많은 사람들에게 공격받아 현 정의 청홍검까지 방어할 겨를은 없었다. 현정이 날카로운 소리 를 내는 청홍검을 옆으로 그어 내려치려는 순간이었다.

“그만!”

현정의 옆구리로 두 가닥의 기운이 날아들었다. 예상치도 못 한 방향에서 기습을 당한 현정은 급히 허공에서 몸을 틀며 청홍 검으로 두 가닥의 기운을 막았으나, 몸은 그대로 스기노방을 향 해 날아갔다. 스기노방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 손을 쫙 펴자 현정의 몸은 벽에 부딪힌 것처럼 튕겨져 뒤로 날아갔다. 현정은 내려서면서 간신히 중심을 잡았으나 무릎을 풀썩 꺾으며 청홍검을 땅에 꽂고 몸을 기댔다.

“누, 누가 대체!”

주기 선생 상준이 음울한 얼굴로 현정을 살폈다. 현정의 얼굴 은 아직도 무표정했지만 분노의 기색이 은은히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현정이 입을 열자 입가에 가는 선혈이 흘렀다. 타격이 큰 것 같았다.

“다, 당신이 어, 어째서?”

“사람 죽이려는 걸 말려 줬잖소. 고맙다고 하쇼.”

상준이 빈정거리듯 말하는 순간 찢어질 듯한 귀곡성을 지르면 서 월향이 날아들었다. 현암이 월향을 날린 것이다. 월향검이 날아들자 그 귀곡성에 스기노방의 안색이 변했고 주기 선생 상준도 눈을 크게 떴다. 월향검은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훨씬 커다랗 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현암은 월향검이 이상하게 분노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비처럼 날아든 월향검은 허공에서 근호를 몰아붙이고 있는 카트반가에게 쏘아져 들어갔다. 챙! 하면서 불꽃이 튀자 근호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어느새 카트반가는 두 동강이 되어서 땅에 떨어져 버렸고, 월향은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어 스기노방 에게 덮쳐들었다. 놀란 근호의 입에서 더듬거리는 소리가 울려 나왔다.

“어, 어, 어검술!”

다문화상은 독한 표정을 지었다. 삼십여 종이나 되는 약들 중 에는 해독약이 분명히 있을 테지만 효과가 없거나 심지어는 독 약이 섞여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문은 자기가 찔렸던 독 묻은 슈리켄을 집어 들어 정신을 잃어 가는 도운의 팔에 살짝 그 었다. 그러고는 뺨을 때려 정신이 들게 하느라 애썼다. 자기가 중독된 것을 알고 나면 분명 해독약을 고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비틀거리는 지연보살을 안은 자영이 다가왔다.

“다치셨군요! 어서어서 상처를!”

다문이 돌아보니 저만치에서 승현 사미가 광목 화상을 잡고

울고 있었다. 그리고 병수가 거대한 몸집을 봉에 기댄 채 쓰러지는 모습도 보였다.

“아미타불. 저는 됐습니다. 나름대로 해독할 수 있으니 저 사람부터 구해 주십시오.”

다문이 무심코 손가락으로 광목을 가리키며 지연보살을 힐끗 보았다. 오히려 치료받아야 할 사람은 지연보살 같았다. “보, 보살님! 보살님이야말로!”

지연보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더니 광목에게 몸을 돌렸 다. 자영은 다문이 멍하니 손에 든 푸른빛이 나는 슈리켄과 약봉 지를 보고는 순간적인 센스로 그가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를 알아차렸다.

“보살님! 해독은 그만하고 이 사람을 구해 주세요!”

자영은 도움을 가리켰다. 도운을 치료하여 정신이 들게 하면 해독약을 고를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러나 다문이 고개를 저었다. “보살님이 치료하면 이자의 독 기운마저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고도 이자가 해독약을 골라줄까요?”

자영은 다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옳은 말이었다. 이자가 정 신을 차리면 독이 퍼져 가는 다문에게 공격을 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영은 뒤를 돌아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정신을 잃 어 가는 홍녀의 모습이 보였다. 자영에겐 그 모습이 말할 수 없 이 측은하게 보였다. 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보살님! 저 여자를 구해 주세요! 약을 쓸 줄 알지도 몰라요!”

묘책이었다. 다문이 알았다는 듯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면서 한 손으로 지연보살을 부축해 올리고, 한 손으로는 정신을 잃은 도 운의 거구를 번쩍 들더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엄청난 힘이 었다. 자영은 혀를 내두르면서 다문의 뒤를 따랐다.


준후는 협박하듯 칼을 휘두르며 점차 다가오는 오의파의 두 사람, 아니 사무라이의 혼령들을 노려보았다. 제아무리 칼을 휘 두른다고 해도 멸겁화 한 방만 적중시키면 이길 수 있겠지만, 그 런 수를 썼다가는 오의 사람들이 다치고 만다. 준후는 과거 해 동밀교의 최후의 날에 자기를 길러 준 사람이자 악의 화신이었 던 서 교주에게 뇌전을 사용한 이래, 사람에게 주술을 사용한 적 이 없었다. 지금도 도저히 사람에게 주술을 사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부적은 던져 보았자 놈들의 검술에 막혀 소용없 었고 승희가 고함을 지른 것으로 보아 그쪽에도 도움이 급히 필 요한 듯했다.

“흥! 혼(魂)은 귀(鬼)로 대적한다!’

준후가 주문을 읊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잘 쓰지 않던 술수였 으나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하늘에서 두 개의 흰 기운이 엉기기 시작해서 형체를 갖추어 갔다. 과거 해동밀교의 제사 호

법이었던 무녀 을련에게 배운 리매술이었다. 다가오던 사무라이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두 개의 흰 기운은 뚜렷하지는 않았으 나 커다란 사람의 형체가 되었다.

“흥! 저놈들을 선량한 사람의 몸에서 빼 버려라!”

준후가 손가락을 가리키며 명령을 내리자 두 리매는 고함을 지르면서 덤벼들었다. 사무라이들은 놀란 듯 칼을 휘둘러 댔으 나 물질적인 칼은 리매의 몸을 통과해 버렸다. 그러면서도 리매 의 몸은 물리력을 발하는지 오의파 사람의 몸을 잡고 흔들어 댔 다. 엄청난 힘이었다. 이를 보는 준후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비인비귀(鬼)요, 비유비명(非幽明)이라더니 정말 힘 이 좋구나! 귀신에게도 사람에게도 힘을 미칠 수 있다니, 왜 진 작 저놈들을 쓰지 않았지? 앞으로는 자주 이용해 먹어야겠다!’ 

두리매는 마치 옷을 벗겨 내듯이 오의파의 몸에서 두 사무라 이의 영을 끌어냈다. 사무라이의 영들은 반항했으나 원래 그다 지 영력이 있는 놈들이 아니어서인지 구름 덩어리 같은 리매에 게는 변변히 힘조차 써 보지 못하고 땅에 나뒹굴었다.

“잘한다. 헤헤헤. 못된 왜놈들! 묵사발을 만들어 줘라! 그리고 따라와!”

준후는 리매들이 사무라이의 영을 그야말로 묵사발이 될 때까 지 두들겨 패는 것을 기분 좋게 보면서 승희에게 달려갔다. 좋은 장난감을 얻은 기분이었다.


안 기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책을 뒤적였다. 손 기자는 이 판국에 책을 넘기고 있는 안 기자가 불만스러웠으나 달리 뭘 해 야 할지도 알 수 없어서 그냥 보고만 있었다. 갑자기 안 기자가 덜컥 책을 내려놓았다.

“그래, 그거다! 만약 그렇다면………….”

“무슨 말이야? 안기자!”

“단, 단군의 유물! 그, 그건 남조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망해가는 남조의 권위를…………….”

“남조의 권위 고다이고 천황의 남조 말이야?”

“그래, 고다이고 천황. 그는 남조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권위를 세우기 위해 단군의 신물을 노린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일본 남조의 정통성하고 단군의 유물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안 기자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잘 들어! 이건 아직 정설로 인정된 학설은 아냐. 어디까지나 가설이지. 그러나 전에 들은 적이 있어! 일본인, 왜구, 남조, 초 치검! 그래! 내 생각대로라면 모든 것이 들어맞아! 이 모든 일이”말이야!”

손 기자는 무섭게 빛나는 안 기자의 눈을 보면서 몸을 흠칫했다. 그 순간 누워 있던 철기옹의 눈이 힘겹게 열리면서 입에서 가는 신음이 흘렀다. 안 기자와 손 기자는 말을 나누다 말고 철 기옹이 정신을 차린 것을 보고 후다닥 몸을 일으켜 앉혔다. 철기 옹이 컥컥 하며 몸을 가다듬더니 소리를 쳤다.

“아, 이런! 놈들이 놈들이 온다! 내 활! 어서 내 활을!”

“어르신, 고정하세요! 우리가 이기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거의 쓰러졌어요!”

“아니야, 아니야!”

철기옹의 고집으로 단단하게 얽힌 얼굴에는 결의와 함께 놀랍게도 공포가 어려 있었다.

“활을! 빨리 활을! 놈들이 와! 단군님! 정말로, 정말로 놈들이!”

안 기자가 철기옹을 부축하고 있는 동안, 손 기자는 아까 땅에 떨어졌던 줄이 끊어진 활과 이상하게 생긴 화살을 주워 왔다.

백귀의 기운을 몰아낸 박 신부는 승희의 비명 소리를 듣고 그 쪽으로 달려갔다. 준후도 열심히 뛰어오고 있었다. 승희는 몸을 덜덜 떨면서 머리의 양쪽에 손가락을 짚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승희야!”

“왜 그래요? 승희 누나?”

박 신부와 준후가 온 것을 알고 승희는 눈을 떴다. 승희의 눈

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지박령, 지박령들이에요! 어마어마하게 많아요! 그들, 그들이!”

박 신부와 준후도 놀라서 눈을 감고 영사를 했다. 엄청나게 많 은영의 기운들! 하나같이 엄청난 결의와 표독한 심정을 가진 지 박령들!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영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빽빽 이 몰려오고 있었다. 준후가 입을 딱 벌렸고, 박 신부도 안색이 변했다.

“삼, 삼백 명은 되겠구나!”

“아녜요! 사백, 아니 오백!”

승희가 외쳤다.

“오백이에요! 군대예요! 지박령 군대! 지휘자, 장수까지 있어요! 목소리도 들려요!”

박 신부의 얼굴이 망연해졌다.

“오백………… 그러면 고분의 시체가 모두 지박령이 되었다고? 모두가?”

준후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오, 오백이나 되는 영이 군대처럼 진을 갖추어서 오 고 있어요! 완전히 포위됐어요!”

박신부가 몸을 돌려 보았다. 이쪽의 주술사들도 많았으나 대 부분 일본인과의 싸움에서 상처를 입거나 의식을 잃은 상태였고, 성한 사람은 그들 넷과 주기 선생, 현현파의 근호와 승현 사미 등 일곱뿐이었다. 그리고 무력한 세 명의 기자…………….

“오십 대 일, 아니 칠십 대 일인가!”

“신부님 어떻게 하면 좋죠?”

준후는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승희는 울음을 터뜨릴 기색이었 다. 박 신부는 침착하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이건 전쟁이었다. 그것도 일방적인 전쟁.

“준후야! 현암 군을 도와! 저 스기노방이란 늙은이가 더 이상 발악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승희는 지연보살을 도와 다친 사 람들이 빨리 회복되도록 힘쓰고! 한 사람이라도 더!”

“신부님은요?”

잠시 입가에 결의의 표정이 스쳤으나 박 신부는 곧 인자한 미 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막아보마.”

준후가 외쳤다.

“신부님 혼자서요? 안 돼요! 제가 진을 치면 시간을 벌 수 있 을 거예요! 저랑 같이 가요!”

승희도 오백이나 되는 원혼들을 향해 단신으로 나가려는 박 신부가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마침 정신을 잃었던 오의파의 두 사람이 깨어났다. 준후가 리매를 부르면서 말도 없이 앞으로 쪼르르 뛰어나갔다.

“아니, 준후야!”

“신부님도 어서 가세요!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시고! 저도 어떻게든 수습을 해 볼게요!”

박신부가 승희를 쳐다보았다. 철없이 멋만 내고 버릇없던 승 희가 이제는 어엿하게 한몫을 하는구나 생각했다. 정신을 차린 오의파의 두 사람도 영사 등으로 상황을 눈치챘는지 뒤를 따라 왔다. 박 신부는 승희에게 힘 있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준후 가가는 쪽으로 달려갔다. 구회만다라진이 파괴되어 활짝 열려 있는, 영들의 예상 침공로로 향했다.


현정은 가쁜 숨을 내쉬면서 청홍검으로 땅을 짚어 겨우 몸을 일으켰지만 입가에는 아직도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눈 깜짝할 새에 무슨 일이 일어나 타격을 입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현 정은 입술을 악물며 고개를 들었다. 현암이 먼 거리에서 조종하 는 월향검이 끈질긴 스기노방과 대결하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 어왔다. 거기에 주기 선생 상준의 십이지신의 기운이 지원을 하 듯 허공을 난무하고 있었다. 현현파의 근호는 어지러운 싸움중 에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자신의 동료들을 연 신 쳐다보고 있었다.

현정은 고개를 숙였다. 청홍검이 밑에 있는 돌멩이에 박혀 들 어가고 있어서 몸이 자꾸 아래로 쳐졌기 때문이었다. 현정은 선혈을 한 모금 뱉어 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 난 정말 죽이려 한 건 아니었어. 누가 봐도 알 수 있었을텐데. 그런데……. 에잇! 힘을 내자!’

현정이 왼손으로 땅을 짚었다. 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며 다시 생각했다.

‘주기 선생・・・・・・ 살의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왜, 왜 나를 공격했지? 초치검도 얻어 놓고…………… 저자의 속셈이 뭐지? 아니!’ 

갑자기 현정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현정은 힘껏 몸을 일으켰다. 다급해지자 알 수 없 는 힘이 몸에서 솟았다. 현정은 멀찌감치에서 태극패를 꺼내들 고 월향을 조정하고 있는 현암을 향해 비틀거리면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현정의 생각이 옳다면 정말 급한 문제였다. 그 리고 그녀의 눈으로는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 현암이 가장 강하고 믿을만해 보였다.

현암은 짜증이 났다. 월향검은 분노한 것처럼 무서운 속도로 스기노방을 덮치려 하고 있었으나, 주기 선생 상준과는 호흡이 맞지 않았다. 주기 선생이 불러낸 기운들은 그리 강한 것 같지도 않으면서도 수가 많아서 자꾸 월향의 진로를 막거나 스기노방을 헛되이 밀어붙여서 월향을 빗나가게 만들었다.

‘저놈 뭐야? 돕는 거야 방해하는 거야? 빨리 마무리를 지어야 할 텐데!’

현암이 옆을 힐끗 보니 상준은 스기노방을 공격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현암은 잠시 월향을 스기노방에게서 멀리 떨 어지게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달려가고 있는 승희가 보였다. 현 암이 월향을 조정하여 스기노방을 공격하면서 승희에게 외쳤다. 

“승희야! 힘을! 빨리 정리하자!”

승희는 현암의 목소리를 듣고 멈칫하며 그 자리에 섰다. 현암 이 고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승희는 현암 쪽 싸움을 먼저 끝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선 자세 그대로 눈을 감고 정신 을 모았다. 현암의 몸으로 엄청난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 고마워!”

현암의 기를 한 모금 들이켜면서 기운을 모았다. 스기노방의 주술도 강한 편이었으나 카트반가와 방울을 놓쳐서 금강저 하나 만 가지고 늙은 몸으로 장시간 싸우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한 방 에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 한번 받아 볼래?”

현암이 소리를 지르고는 충만한 힘으로 사자후의 장소성을 허 공에 뿜었다. 웃음소리가 어흥! 하는 울림과 더불어 사방에 가득 메아리치면서 마른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중후한 울림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주위를 가득 채웠다. 음파에 실린 강한 기운이 퍼지자 스기노방과 주기 선생 상준도 몸을 움츠렸

고, 상준이 불러낸 십이지신의 기운도 허공에서 부르르 떨었다. 

“월향!”

현암이 소리를 치며 오른손에 들고 있던 태극패를 앞으로 쫙 뻗자 허공 높이 솟구쳐 있던 월향검이 귀곡성을 내면서 스기노 방을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엄청난 기세였다. 스기노방은 돌연한 현암의 엄청난 위력에 미처 행동을 취하지도 못하고 다 만 금강저를 머리 위로 밀어 올릴 뿐이었다. 현암은 순간적으 로 자비심을 베풀기로 마음먹고는 태극패를 살짝 옆으로 비틀었 다. 막 내리꽂히던 월향이 살짝 진로를 틀어 금강저를 박살내고 는 스기노방의 오른쪽 어깨에 적중되었다. 현암이 진로를 바꾸 지 않았다면 스기노방은 정수리부터 두 동강이가 났을 것이었 다. 스기노방은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월향은 스기노방의 오른 쪽 어깨에 뼈까지 보이는 상처를 내고 제비처럼 날아 날에 묻은 피를 허공에 털고는 현암의 손으로 돌아왔다. 스기노방은 박살 이 난 금강저 자루를 잡은 자세 그대로 멍하니 서 있다가, 월향 이 현암의 손에 되돌아간 후에야 어깨에 난 상처를 보고 하얗게 질렸다. 그러고는 찢어지게 비명을 질렀다. 주기 선생 상준마저 도 현암의 신기에 가까운 엄청난 위력을 보고는 멍청하게 서 있 었다. 현암은 월향검을 왼 팔목에 매어 놓은 검집에 꽂았다. 뒤 에서 승희가 깔깔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우와! 빅토리, 현암군! 한 방이네.”

현암은 승희를 보고 얼굴을 찌푸리고는 조용히 스기노방에게 걸어갔다. 스기노방은 헐떡이며 어깨의 상처를 움켜쥐고 있다 가 현암이 다가오자 공포가 어린 눈길로 뒷걸음을 치려 했다. 현 암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스기노방의 어깨를 잡았다. 스기노 방은 모든 힘을 쏟아야 고통을 간신히 멈출 수 있는 듯, 저항조 차 하지 못하고 헐떡이며 현암을 겁먹은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현암은 멈칫하더니 자신의 윗옷을 부욱 찢어 스기노방의 어깨를 처매 주었다. 스기노방의 눈이 치켜 올라갔다. 현암이 입을 열었다.

“다치게 한 건 미안한데, 당신 너무 날뛰었어요. 이러지 않고 선・・・・・・ . “

말을 잇던 현암은 곧 스기노방이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깨를 대강 싸맨 현암은 손을 내 밀었다. 스기노방이 얼굴을 망연히 쳐다보자 현암은 근처에 쓰 러져 있는 윤섭을 눈으로 가리켰다. 해독약을 달라는 뜻이었다. 스기노방의 얼굴이 울음을 쏟을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 순간, 

“피해요!”

하고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암은 뒤를 돌아볼 새도 없 이 공중제비를 돌아 몸을 뒤로 날렸다. 활활 타오르는 한 가닥 의 불기운이 뒤에서 날아와 스기노방의 가슴에 적중했다. 현암 이 스기노방을 끌어당기려 했으나 때는 늦어 버렸다. 스기노방은 엄청난 기운에 맞아 공중으로 날아가서는 한참 뒤에 있는 소나무에 부딪혔다 떨어졌다. 그의 승복에 불길이 번져 갔다.

“누구야!”

현암이 눈을 부릅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현정은 땅에 나뒹굴 고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를 악물고 있는 주기 선생 상 준의 모습이 보였다. 상준은 어느새 등에서 새로이 커다란 붉은 기를 꺼내들고 있었다. 깃발에는 금색의 글자로 ‘辰’자가 새겨져 있었다. 십이지신들 중 아껴두었던 용신의 깃발이었다.


철기옹은 손 기자에게서 활과 화살을 넘겨받고는 몸을 일으켰 다. 그러나 그의 활줄이 끊어진 것을 보자 혀를 차면서 활을 굽 혀 활줄을 묶었다. 손 기자가 말했다.

“어르신! 줄 끊어진 활로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걸로 뭘 하시려구요!”

“아녀, 아녀! 한 번은 쏠 수 있어! 적어도 한 번은!”

철기옹은 지연보살의 치료로 독은 제거되었으나 아직 몸을 제 대로 가누지 못했다. 철기옹은 묘하게 생긴 화살을 들어 보이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이 화살! 삼천 장의 부적으로 만든 이 화살은 일단 시위에 매기기만 하면 어디까지건 따라가서 맞히고야 마는 것이네. 단 한 번이라도 말일세. 왜놈, 저놈들을………….”

그러나 철기옹은 기운이 없는지 활을 늘어뜨린 채 주저앉아 잠시 헐떡였다. 숨을 고르는 것 같았다. 그 틈을 잡아 안 기자가 눈을 빛내면서 외쳤다.

“철기 어르신! 어르신은 아시죠? 아시는 것 같은데요!”

“좀 조용히 혀!”

“어르신! 알고 계신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저들의 목적은 무엇이고, 도대체 이곳에 감춰진 비밀은 뭡니까?”

“그, 그건 하늘의 비밀이여. 단군의 비밀………….”

“초치검 말고 뭐가 또 있는 거죠? 그것보다도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그게 바로 단군의 유물 아닙니까?”

철기옹은 헐떡이는 숨결을 뿜으며 망연히 안 기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안 기자의 얼굴은 긴장으로 온통 굳어 있었으나, 눈 에는 결의가 불타올랐다.

“마, 맞네! 내가, 내가 바로 그 신물을 지키는, 이미 수백 대나 내려온 나랏자손의………….”

손 기자는 전에도 나랏자손이라는 말을 들은 것을 기억했다. 준후라는 꼬마가 자영을 보고 나랏자손이라 하지 않았던가? 

“나랏자손이 뭡니까? 어르신!”

“단군의 피가 내려오는 정통의 자손이 나랏자손이여. 무가(巫 家)에서는 이 태생을 제일로 쳐. 신과 가장 가까운 적통이라 하여…….”

안 기자가 말을 이었다.

“철기 어르신! 저 일본인들은 단군의 유물을 빼앗아 가려는 거죠?”

철기옹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기자는 화가 난 목소리로 외쳤다. 

“단군의 유물, 남조의 흥망, 초치검! 초치검은 봉인을 풀려고 가지고 온 거야! 봉인을! 철기 어르신, 여기 감춰져 있는 단군의 유물에는 엄청난 봉인이 되어 있지요? 그것을 풀려면 초치검 같 은 신물이 필요하고요.”

철기옹은 허허롭게 웃어 보였다.

“초치검? 그 따위로 봉인을 푼다고? 절대로 안 되지. 하하핫!

놈들이 왜 초치검을 가져왔는지 아나?”

“초치검을 왜구들이 가져왔던 이유는 뭐죠?”

“봉인? 그래, 그 봉인은 순수한 나랏님의 기운을 쐬어야 열 리는 것이야. 그리고 놈들이 그렇게 떠받들고 자랑하던 초치검 은…… 하하하!”

철기옹은 말을 하다 말고 하늘에 대고 커다란 웃음소리를 뿌 렸다. 안 기자는 순간적으로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옆에 있던 일본 역사서를 잡고 뒤지기 시작했다. 초치검… 천총운 검・・・・・・ 찾았다!

게이코 천황의 셋째 아들인 야마토 다케루(日本武尊)가 이즈

모(出雲)를 평정한 이후 많은 공을 세워서 본국인 야마토로 개선하였으나 쉴 사이도 없이 이번에는 동쪽을 평정하기 위하여 아내 와 동반하여 출정했다. 그는 도중에 이세신궁(宮)에 들러 백모인 왜희(姬)를 방문하였다. 왜희는 그를 무척 반기며 위로 의 말을 보내고는 소중히 간직한 천총운검(劍)과 작은 주머니 하나를 건네주며・・・・・・

“이세신궁! 이세신궁! 저 이(伊)와 권세 세(勢)! 이것이 무슨 뜻이겠어? 손 기자!”

“다른 세력, 그러니 그건・・・・・・ 아니 그렇지만 그건 허무맹랑한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이잖아!”

“그러나 천총운검, 아니 초치검은 지금 우리 눈앞에 있어! 이 세신궁, 다른 세력의 신을 섬기는 궁전! 당시 상황을 사실이라 가정해 봐! 다케루는 동쪽을 향하여 진군했고, 출정 도중에 왜희를 방문하러 이세신궁에 들렀다 했지! 그러면 이세신궁이 있던 곳은? 동쪽, 바로 우리나라의 땅이었어!”

“이봐………… 그건 너무……………”

“증거는 또 있어. 그의 백모가 어째서 왜희라는 이름으로 불렸 을까? 왜희(姬), 바로 왜국(倭國)에서 건너온 여자라는 이름이 잖아? 이세신궁이 일본에 있는 것이라면 그의 백모가 어째서 왜 인 여자라고 상징되는 이름으로 불렸지? 모르겠어? 다케루건 진무천황이건, 그들 고사기의 영웅들은 모두 이 땅에서 건너간 민족이었다는 뜻이 돼! 초치검도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이 많단 말이야!”

“그, 그건 아닐 거야. 이세는 일본의 지명에 불과………….” 

“그 지명이 왜 생겼는지 생각해 봐! 보게, 다케루는 왜희를 만 나 칼을 받은 후에 더 동쪽으로 가서 사가미국을 친 것으로 되어 있네! 그런 이름은 모르지만 혹시 사마르칸트나 그 근방이 아니었을까?”

“안 기자! 그게 말이 돼?”

안 기자는 잠시 씁쓸하게 웃다가 다시 눈을 빛냈다.

“비약이지. 증거도 없고. 허나 말이 되건 안 되건, 비약이건 아니건, 이건 중요해!”

“뭐가 중요해?”

“중요하지, 중요하고말고! 지금 모든 것은 그 한 가지로 귀착 되고 있는 거야! 단군의 유물! 자, 내 말 들어 봐! 고다이고 천황 은 남조의 권위를 세우려 삼종의 신기를 가지고 수없이 전투를 치렀어. 그러나 결국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의해 궁색하게 몰려 서 죽음을 맞았지. 그에게 천황의 정통성을 부여할 수 있었던 것 이 무엇이었겠어? 초치검, 아마테라스의 거울, 영혼의 목걸이, 이 세 가지 신기로도 다카우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고다이 고 천황을 몰아붙였어. 그는 실리주의자였거든. 그 상황에서, 물리적인 병사나 세력이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고다이고 천황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철기옹이 아무 말 없이 몸을 일으켜 활을 들고는 뚜벅뚜벅 걸 어갔다. 안 기자와 손 기자는 놀라서 입을 다물고는 철기옹을 빤 히 쳐다보았다. 철기옹의 몸에 다시 신이 내렸는지, 지친 기운은 보이지 않고 희미한 안개가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철기옹은 박신부와 준후가 달려간 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지연보살은 홍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정신을 모았다. 다문 화상은 몸에 독 기운이 많이 번져서 정신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별다른 힘이 없는 자영은 눈만 빛내면서 사태를 주시했다. 다문 이 힘이 겨웠는지 붙잡고 있던 도운의 몸에서 힘을 빼자 도운의 몸뚱이가 털썩 떨어지며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다문은 떨 리는 손으로 약봉지를 쥐더니 자영의 손에 넘겨주었다. 

“왜, 왜 그러시죠?”

다문의 얼굴은 이제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의 얼굴 전체에 고 통의 표정이 짙게 번졌으나, 애써 입가에 미소를 띠려 하고 있었다.

“허허허! 세존께서 부르시는군요. 이생에서 죄업이 너무 컸다 고. 허허…….”

“정신차리세요! 지연보살님께!”

다문이 힘겹게 손을 들어 자영을 저지했다. 큰 덩치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아, 아닙니다. 살리던 사람부터 구해야죠. 그리고 약을 차, 찾 으면 제 동료를………… 그리고 여기 이자도…….”

“악인을 뭐하러 구해 줘요?”

“악인이라도…… 저는 버틸 만합니다. 그,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드, 들으세요.”

“아무 말씀 하지 마세요!”

“아니, 이건 중요한 일이오. 저, 저희 백제암에서는 사대 천왕 을 다 파견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줄은……………. 저희로 는 안 되었어요. 그러니………… 아, 아가씨에게 부탁………..” 

“저요? 제게 무슨 힘이 있다고요?”

“아니오. 아, 아가씨는 나, 나랏자손…… 승현…… 승현 사미가 말했어요.”

“나랏자손이 뭔데요. 대체?”

다문은 가쁜 숨을 몇 번 몰아쉬더니 이를 악물고 눈을 번쩍 떴다. 최후의 힘을 모아 독 기운에 저항하려는 모양이었다.

“자, 잘 들어요……. 만약 우리가 전부 당하면 나랏님의 신물 을, 신물을 대신 전달해 주세요.”

“신물이라뇨? 초치검 말인가요?”

“아, 아니오. 그, 그건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단군님의………………”

“단군님이요?”

“이곳 강화도 마니산은 온 세상의 영기가 모이는 산…………. 이 부근에 숨겨져 있는 단군의 비기가 있어요……………. 그건 상고에서 부터 내려오는 것・・・・・・・ 몽고의 침략 때에 이리로 옮겨진…….” 

몽고의 침략. 그랬다. 고려조 때에 침략해 온 몽고는 전 국토 를 유린하기에 이르렀으나 고려 왕조는 강화도에 웅거하여 삼십 년이나 항쟁했다. 단군 때부터 내려오는 신물이라니! 만약 그런 것이 남아 고려조 때까지 전해져 내려왔다면 몽고의 항쟁기에 강화도로 왕이 피신했을 때 빼놓았을 리가 없다고 자영은 여겼다. 그런데 왜 그것을?

자영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고려는 끈질기게 저항했다. 세계 역사상 몽고의 침입에 맞서서 그렇게 오래 저항 한 나라는 없었다. 중국은 물론이고 서쪽에서는 다뉴브 강가에 서 십여만에 달하는 서양의 기사단이 괴멸되었고, 사나운 바이 킹족도 밀려서 지금의 노르웨이로 쫓겨났다.

그런데 삼십 년 동안 세계를 제패한 몽고에 대항하여 강화도 라는 작은 섬에 웅거한 채 항쟁한 나라…………. 그러나 고려도 결 국은 무릎을 꿇었다. 왕은 원 황실의 부마가 되고 수많은 다루가 치(원의 파견 관리)가 전국에 배치되었다. 만약 그런 실정을 내 다보았다면 강화도에 감춘 단군의 비기를 몽고인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그냥 놓아두었던 것이 아닐까? 자영은 그건 아닐 거라고 고개를 저었다. 안 기자가 했던 말이 맞다면 단군의 신물은 고려조 이전부터 여기에 있었어야 하니까.

다문이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일본인은 그 신물을 노리고 있는 겁니다. 단순히 초치검을 되찾자는 것이 아니에요!”

“왜 그걸 노리는 거죠? 왜?”

“여기 모인 사람들의 반은 초치검을 욕심내어, 그리고 나머지 반은 단군의 신물을 지키러 온 겁니다. 승현 사미가 말한 것이 틀리지 않다면………… 당신, 오직 당신만이…………….”

“무슨 소리예요?”

“단군의 신물을 얻을 수 있는 건 당신뿐・・・・・・ . 절대, 절대 남의 말을 듣지 말아요…… 절대로……. 아아, 내가 도왔어야 하는 데…………. 약, 해독약을 찾으면 제 동료인 지국을…..”

더 이상 버틸 기운이 없는 듯 다문은 스르르 쓰러졌다. 독이 온몸에 퍼졌는지 얼굴이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자영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랏자손? 내가 아냐, 아닐 거야. 내가 어떻게…………. 단군의 신물? 나만 얻을 수 있다고? 아냐, 아냐…………….”

지연보살은 억수같이 땀을 쏟으며 몸을 떠는 가운데, 청홍검 에 맞은 홍녀의 어깨가 기적처럼 서서히 아물어 들고 있었다. 자영은 다문의 말에 충격을 받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자영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가만! 이게 무슨 소리지?’

가누나・・・・・・・ 가누나……………

늙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자영은 망연히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늙은 여자는 하나도 없었다. 아니, 한 사람 있었다. 아까 도지라 고 철기옹이 말했던 늙은 무당이.

나랏님 권세를 잡으사 하늘 힘을 모아 모아 납시시니, 훠어이, 물렀 거라 잡것들아! 물렀거라 잡것들아!

굿거리 비슷하기도 하고 사설 비슷하기도 한 소리였다. 어디 서 들리는지도 모르는 가냘픈 소리는 자영의 귓전에 계속 울렸 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현암은 부릅뜬 눈으로 상준을 쳐다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현 암의 오른손에 들려 칼끝이 아래로 향한 월향이 우웅 소리와 함 께 검기가 석 자나 뻗더니 펑 하면서 땅에 구멍을 뚫었다. 상준 도 인상을 쓰면서 초치검을 허리에 꽂고 다시 하나의 붉은 기를 펴 들었다. 호랑이(寅]의 깃발이었다. 현암은 나직하지만 울리는 소리로 상준에게 물었다.

“너, 왜 그랬지?”

상준은 대답 대신 하늘을 보고 커다랗게 웃었다. 쓰러질락 말락 하던 현정이 대신 소리를 질렀다.

“저자! 저자는 여기 있는 실력자들이 전부 쓰러지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서 신물들을 다 차지하려고!”

상준은 묘하게 비틀린 어조로 비웃듯 말했다.

“이봐, 헛소리 그만하지?”

“저자는 초치검을 보여서 일본인과 우리를 싸움 붙여 치워 버 리고 진짜를 독차지하려고 한 거예요! 그걸 정말 얻었으면 조용 히 사라지지 왜 보란 듯이 나타났겠어요?”

현암은 생각을 정리했다. 상준은 일행과 같이 오지 않았다. 그 렇다면 따로 가서 혼자 초치검을 얻을 수는 없었을까? 단순히 생 각하면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초치검을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왜 여기에 모여 기를 쓰고 있겠는가? 그 러고 보니 자신도 정신없이 여기로 오긴 했지만, 원래 고분이 발 견된 곳은 구회만다라진이 펼쳐져 있는 이곳과는 좀 떨어져 있 었다. 현암의 일행은 강한 영기를 느끼고 여기로 왔을 뿐이고, 오백구의 왜구 시체가 발견된 고분은 만다라진의 입구 쪽에 있었던 것이다. 초치검은 오백 구의 왜구 시체들 속에 묻혀 있는 것이 상식적으로 맞을 것 같았다.

“초치검은 여기 있을 거예요! 우리가 있는 땅 밑에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생각해 봐요! 이 만다라진은 일본의 술수로 편 거예요! 금방 칠 수 있을 만큼 쉬운 것이 아니고요! 왜구들이 펴 놓았다가 세 월이 지남에 따라 흐트러진 것을, 일본 화상들이 약간 보강해 발 동했을 거에요. 일본인이 무엇을 지키기 위해 만다라진을 폈을 까요? 바로 초치검이에요! 주기 선생이 들고 있는 것은 모조품 이 틀림없어요!”

현암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져 갔다.

“정말 그렇다면…..”

“푸하하하!”

주기 선생 상준이 하늘을 보고 크게 웃었다. 그러더니 상기된 얼굴로 현암과 현정을 쏘아보며 소리를 쳤다.

“아 그래, 네 말이 맞다! 초치검・・・・・・ 초치검…………….”

상준은 말을 끊었다가 음산하게 웃으며 다시 중얼거렸다.

“전에 아주 힘겹게 얻었는데………… 가짜였어. 목숨까지 걸었는 데 말야. 그러니 난 그걸 가질 자격이 있다구.”

“하지만 그건………..?

“아, 아. 신물이라느니, 역사적인 보물이라느니 하는 소린 하 지마. 곰팡내 난다. 그냥 내가 갖고 싶은 거야. 그런데 와 보니 너무 사람이 많잖아. 초치검은 하난데 말이지. 그래서 숫자를 줄 여야만 했거든. 이해해. 안 그러면 내 것이 안 되니까 말야.” 

“못된 놈!”

“아, 욕하는 기분은 알겠는데, 듣기 싫거든? 나 그렇게 못된 놈 아니다. 아무도 죽일 생각도 없고. 방해받는 게 싫을 뿐이야. 다들 머리 식히고 입원이라도 해서 쉬란 말이지. 초치검은 내게 맡기고.”

“왜 다른 사람의 신물에 욕심을 내지?”

“묻는다고 다 말해 줄 것 같아? 너, 세상 참 편하게 살았구나. 이거나 받고 며칠 병원에서 쉬지?”

주기 선생 상준이 기를 휘두르자 스기노방을 덮쳤던 것과 같 은 불덩어리가 솟구쳐 올라와 현암을 덮쳤다. 현암은 월향검을 거두고 오른손에 기공을 모아 덮쳐 오는 불기둥을 그대로 후려 갈겼다. 불덩이는 사방으로 폭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어………… 어라………….. 맨손으로 어떻게………….”

불덩어리가 맥을 못 쓰고 튕겨져 나가자 상준의 얼굴이 해쓱 해졌다. 불덩어리가 사라지자 오른 주먹을 앞으로 내밀고 꼿꼿 이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현암의 표정 없는 얼굴이 드러났 다. 상준은 해쓱해져서 말까지 더듬었다.

“너・・・・・・ 너 누구야? 뭐 하던 놈이기에………….”

현암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너야말로 세상 참 편하게 살았구나. 이런 잔재주 갖고 허풍이나 떨고.”

“뭐, 뭐야?”

“왜 신물을 얻으려고 하지?”

상준은 얼굴이 질려서 두 개의 깃발을 한꺼번에 내저었다. 진 (辰)의 깃발을 휘두를 때마다 불덩어리가 날았고, 인(寅)의 깃발 을 휘두르자 누런 기운의 덩어리가 날아들었다. 현암이 슬쩍 몸 을 날려 피하자 그 자리에 불덩어리가 솟구치더니 바위처럼 땅 에 깊숙한 자국을 냈다.

‘상당한 녀석이군!’

현암은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경계를 늦추 지 않았다. 아까의 한 방은 준후에게 얻었던 피화부(避符) 덕 에 쉽게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월향을…… 아니, 안 돼.’

상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가장 강한 공격 중의 하나인 진 의 공격을 맨손으로 받아 넘겼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 었다. 상준은 공격을 하면서 힐기보법을 폈다. 상준의 몸이 무서 운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들 왜 저럴까? 맞아야 정신차리겠군!’

현암은 승희를 돌아보았다. 승희는 다시 현암이 싸움을 시작 하자 힘을 퍼부어 주었다. 현암의 손에서 떠난 월향은 무서운 귀 곡성을 올리면서 상준의 뒤를 따르더니 대번에 상준이 들었던 깃발 하나를 갈가리 찢어 버렸다.

“어, 아. 이봐 이봐. 자…………… 잠깐!”

상준이 소리를 쳤다. 현암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말하고 싶어졌어?”

상준이 머뭇거리는 가운데 현정은 맥이 풀린 듯 주저앉아 고 개를 숙이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고, 근호는 쓰러진 스기노방 의 품을 뒤지고 있었다. 그러나 해약은 없었고, 스기노방은 뜻 모를 소리만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광목 화상을 붙들고 울던 승현 사미가 고개를 들었다. 광목은 심한 타격을 입어서인지 가쁜 숨만 간신히 내쉬고 있었으나, 몸 을 움직여 승현의 귀에 대고 무언가 중얼거린 다음 고개를 떨구 더니 의식을 잃었다. 돌연 승현이 목의 염주를 끌렀다. 그리고 염주를 끊고는 염주 알을 하나 땅에 던졌다. 또 하나, 그리고 또 하나.

“저기다!”

승현은 맨손으로 허겁지겁 땅을 파헤쳤다. 세 번째 염주 알이 굴러가다 멈춘 자리였다. 손가락으로는 땅이 잘 파지지 않자 승 현은 광목의 허리에 있던 작은 야삽을 꺼내더니 그것으로 땅을 파헤쳤다. 어디서 힘이 솟아났는지 무서운 속도로 땅을 파헤쳐 서 어느덧 두 자가량의 구멍을 만들었다.

비슷한 때, 홍녀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런데 눈을 뜨자마자 겁에 질린 얼굴이 되었다. 자영이 홍녀가 눈을 뜬 것을 보고는 다가갔다.

“홍녀 님! 어서, 어서 해약을 골라 주세요!”

“아니, 아니 안 돼! 이건, 이건!”

“뭐요? 어서 사람들을 구하게 이 중에 해약이 어떤 건지………….”

홍녀는 자영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스기노방상! 안 돼!”

지연보살이 몸을 일으키려는 홍녀를 붙잡았다.

“왜 그러는 거예요? 왜?”

홍녀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스, 스기노방이 죽은 자의 몸을 깨우는 주문을! 그건, 그건……..”


“으아악!”

승현은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구멍 안에서 뭔가 움직였 기 때문이다. 구멍 속에서 백골이 다 된 손 하나가 튀어나와 손 목을 잡았다. 승현이 찢어질 듯 고함을 치자 책을 뒤지던 안기 자와 손 기자가 놀라서 그쪽으로 달려가려 하는데 갑자기 발밑의 땅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으앗! 이게 뭐야!”

상준의 말을 들으려 하던 현암도, 현정, 근호, 상준도, 지연보 살이나 자영, 승희까지도, 승현 사미의 비명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땅이 흔들리면서 갈라졌다. 손 기자와 안 기자는 이쪽으로 달려오려다가 겁을 먹고는 다시 뒤로 물러섰고, 승현은 계속 비명을 질렀다.

이윽고 땅이 갈라지면서 미라처럼 백골이 드러난 손들이 하나 씩 땅을 헤집으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영도 근호도 주기 선생 상준마저도 입을 벌린 채 신음 소리를 냈다.

“저, 저거…….”

승현이 뒤로 휙 나가떨어지면서 아까 팠던 구멍에서 시커멓게 썩어 해골만 남은 얼굴이 고개를 내밀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십여 구의 시체들이 서서히 땅속에서 기어 나왔다. 어떤 자는 녹 슨 칼을 들고 있었고 낫처럼 생긴 무기를 든 자도 있었다.

현암의 다리도 떨렸다. 그러나 현암은 물러서지 않고 현정의 앞을 막아선 다음 승희를 불렀다. 승희는 거의 제정신이 아닌 얼 굴로 다가왔다. 현암은 침착하려 애쓰며 승희를 뒤로 돌리고 눈 을 크게 뜬 채 일어서고 있는 시체들을 노려보았다. 안 기자와 손 기자는 자영과 홍녀, 지연보살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주기 선생 상준이 소리쳤다.

“초치검! 저것이야말로 진짜 초치검이다!”

승현이 팠던 구멍에서 머리를 내민 시체의 한쪽 팔에 얌전히 들려 있는 검. 초치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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